혁명가 주세죽 허정숙 고명자의 찬란하고도 곡진한 일대기 : 조선희 <세 여자>
우리 3인은 본래 동지로서 친구로서 단발하기로 작정하기는 이미 오랜 일이었습니다. 서로 깍기로 언약하고에 곧 머리를 풀고 긴 것만 추려서 집었습니다. 자르고 나니 머리숱이 퍽 많아 보였습니다. 3인 중에서 제일 먼저 자른 사람은 나였습니다. 머리를 잘리우는 그 자신은 쾌활한 용기를 내어가지고 아무렇지도 않았으나 손에 가위를 들고 남의 머리를 자르는 그때는 이제까지 잠재하였던 인습의 편영片影이 나타나며 몹시 참담하고 지혹至酷한 느낌을 아니 가질 수 없었습니다. 삽시간에 3인은 결발의 신여성으로부터 단발랑 송락머리가 되어버렸습니다.
다 깎은 뒤에 서로서로 변형된 동무의 얼굴을 쳐다보며 비장하고도 쾌활미가 있는 듯 웃어버렸습니다. 웬일인지 서로 아지 못한 위대한 이상과 욕망이나 이룬 듯이 무조건 기뻤습니다.
- 허정숙, '나의 단발과 단발 전후'중에서 <신여성>(1925년 10월호) (1권 p.11)
1991년 전형적인 한국 여인의 얼굴을 하고 있으나 한국말은 한마디도 못하는 러시아 사람 비비안나 박이 한국을 방문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비비안나는 어머니 주세죽의 유품에서 찾아낸 화사하고 밝은 이 사진을 내민다. 가운데가 주세죽(1901~1953)이며 오른쪽이 허정숙 (1902~1991), 왼쪽이 고명자(1904~1950) 여사다. 단발을 하고 청계천으로 보이는 곳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진이다. 조선공산당 세 여성 혁명가의 가장 찬란한 한 때다.
사진 출처 : http://www.hani.co.kr/arti/PRINT/742715.html
# 1. 1920년 상해
1920년, 그해는 누굴 만나도 상해나 모스크바 얘기였다. 볼셰비키혁명을 둘러싼 매혹적인 소문들이 흘러 다녔고 상해는 어느 결에 사람들 마음에 망명수도로 자리 잡고 있었다. 열여덟 나이에 강연을 다니며 여성계몽운동도 해봤지만 정숙의 야심은 그 이상이었다. 정숙은 세상의 모든 언어로 말하고 싶었고 이 세상 모든 항구에 정박하고 싶었다. 모든 것을 알고 싶었고 모든 것이 되고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장 맹수 이빨 사이에 끼어 있는 조선 민족을 구할 사상과 이론이 무엇인지 알아내야 했다. (1권 p.21)
허정숙이 만 18살에 혼자 고향을 떠나 상해에 도착한다. 아편과 매음이 창궐하고 인신매매와 살인사건도 비일비재하다고 만류하는 아버지를 물리치고. 상해로 간 이유가 민족을 구할 사상과 이론을 밝히기 위해서였다니. 어떤 교육을 받으면 저 나이에 저런 신념을 가지게 될까. 지금으로 치면 겨우 대학 갈 나이에.....
# 2. 1921년 상해
덥고 습한 상해의 긴 여름이 끝나갈 무렵 연구소 어른들이 프랑스 조계의 교회당 하나를 빌려 세죽과 헌영의 결혼식을 열어주었다. 세죽은 흰 공단 치마저고리를 입고 헌영은 흰 두루마기 차림이었다. 여운형 선생이 주례를 보았다.
"두 사람은 부부가 되어 서로 사랑하고 존중하며 조국의 독립과 무산자계급 해방을 위해 일생을 바칠 것을 맹세합니까?" 신랑 신부는 독일어판 <자본론>의 양피지 장정 위에 손을 얹고 대답했다. "예" (1권 p.64)
<자본론>위에 손을 올려놓고 조선의 독립과 무산자계급의 해방을 위해 일생을 바칠 것을 맹세했던 결혼식이라니..... 세죽과 현영에겐 조선의 독립과 계급 해방이 그들의 사랑과 맞먹을 만큼 크고, 이루어야 할 명제였다.
사진은 1928년 남편 박헌영과 딸 비비안나와 찍은 사진이다. 이 사진 역시 비비안나가 어머니가 살았던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에서 발견한 것이다.
사진 출처 : 나무위키 https://namu.wiki/w/%EC%A3%BC%EC%84%B8%EC%A3%BD
# 3. 1924년 경성
"쉽게 말하자면 놀고먹는 계급이 일해서 먹여 살리는 계급이 있어요. 정상이라면 일하는 계급이 노는 계급을 지배해야 할테지만 거꾸로 노는 계급이 일하는 계급을 지배하고 멸시하고 학대한다는 거지요."
명자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대대로 양반 지주인 명자네 집안사람들, 어머니와 고모들, 오빠와 사촌들 얼굴이 떠오르자 단야가 지금까지 한 어려운 말들도 한꺼번에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단야가 석가모니나 예수처럼 위대해 보였고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다 진리 같았다. (1권 p.102)
명자는 새로운 세계를 봐 버렸다. 불같이 뜨거운 세계. 이미 그 뜨거움을 맛본 명자는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었다. 단야를 알아버린 후 명자는, 엄마가 발라주는 생선을 받아먹는 이미 예비 신랑과는 평생은 커녕 잠깐 인력거도 같이 타기 싫어졌다. 그게 인생이다. 저 끝이 활활 타오르는 뜨거운 지옥길일지라도 가고야 마는.
# 4. 1925년 경성
때론 어처구니없는 실수가 역사를 그르치기도 한다. 하지만 이후 재건과 궤멸의 악순환을 반복하면서 지리멸렬해져가는 조선공산당의 불우한 역사를 보면 그 실수조차도 운명의 트랙처럼 보인다. 다만 조선공산당이 그림처럼 산뜻하게 출발해서는 불과 반년만에 파경을 맞게 됐다는 게 어이없을 뿐이다. 비록 광범한 노동자, 농민 대중의 조직 없이 한 줌 엘리트 혁명가들의 비밀결사긴 했어도 1차 조선공산당은 고난도 위장술로 창당식을 은폐한 것부터 짧은 기간에 코민테른의 예산을 따고 모스크바에 유학생을 파견한 것까지 일급활동가들의 유능함과 기민함으로 빛났다.
하지만 경성의 봄은 짧았고 혹독한 시절이 시작되었다. 여섯 남녀의 운명은 엇갈렸다. 11월 30일 새벽 종로경찰서에 들어간 정숙은 이날 오후 풀려났고 세죽은 원근, 헌영과 함께 신의주경찰서로 압송되었다. 단야는 고향 김천에서 조선공산당 일제 검거 소식을 들었고 곧장 북행길을 서둘러 압록강 건너 조선을 빠져나갔다. (1권 p.151)
1925년 4월 17일 경성 황금정의 청요릿집 아서원에서 조선공산당 창당식이 열린다. 지금의 명동 롯데호텔 자리에 있는 중국요리집이다. 경성 한복판에서 대담하게. 박헌영, 김단야, 김재봉, 조봉암, 김약수, 김찬 등 내노라하는 공산주의 활동가들이 모여 조선공산당을 정식으로 세웠다. 책임비서는 중국과 소련을 오가며 공산주의 활동을 해온 서른여섯 살의 혁명가로 안동의 유서 깊은 양반집 아들인 김재봉이 맡았다. 다음 날인 18일 박헌영의 집에서 조선공산당 청년조직인 고려공산청년회를 만들었다. 모두 열여덟 명이 모였고 세죽은 유일한 여성이었다.
조선공산당은 청년 20명을 소련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유학을 보내고, 코민테른으로부터 승인을 받고자 조봉암 조동호를 밀사로 소련에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공산당을 만들었다는 기쁨도 잠시, 그해 11월에 우연히 신의주에서 술에 취해 순사와 패싸움을 벌인 청년들 집을 수색하다 박헌영이 상해의 조봉암에게 보낸 코민테른으로 가는 기밀서한이 발견되고 만다. 1차 공산당 사건이라고도 한다. 공산당원들은 싸그리 잡혀간다. 그 시절에의 공산주의자들이란 독립투사 못지 않게 일제가 혈안이 되어 잡으려는 세력이었다.
사진은 모스크바공산대학에 함께 공부한 그 때 그 시절이다. 맨 아래 오른쪽에서 두번째부터 김단야, 박헌영, 왕명이고 가운데 제일 왼쪽이 주세죽, 맨 위 제일 오른쪽이 호치민이다.
사진 출처 : http://blog.daum.net/gmania65/1031
# 5. 1928년 모스크바
그들이 모스크바로 돌아왔을 때 코민테른에서는 몇 달에 걸친 검토와 토론 끝에 조선 문제에 대한 새로운 결정, 즉 '12월 테제'가 나와 있었다. '조선 농민과 노동자의 임무에 관한 테제'라는 제목의 코민테른 결정은 지금까지 조선 공산주의운동의 기조를 바꿀 것을 지시하고 있었고 그 명령은 명쾌하고도 강력했다. 인텔리들의 결사체였던 조선공산당을 해체하고 공장과 농촌으로 들어가 노동자와 빈농을 조직해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주도하는 계급정당으로 재건하라는 것이다.
자본주의 시대가 제국주의 침략의 열병을 앓으면서 말기적 징후를 드러내고 전 지구적으로 혁명의 분위기가 무르익어가는 이때, 공산주의 운동도 부르주아 민족주의나 개량주의와 결별하고 본격적인 반제국주의 계급투쟁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코민테른은 혁명투쟁의 기어를 한 단계 올린 셈이다. 과연 모스크바는 전 세계 혁명운동의 기지였다.
1월에 명자와 단야는 12월 테제의 미션을 안고 모스크바를 떠났다. 단야는 블라디보스토크 코민테른 비서부에서 당 재건을 원격으로 지휘하게 되고 명자와 공산대학 동창들은 조선에서 노농계급 속으로 들어가 당 재건의 실무를 하게 된다. 단야와 명자는 함께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서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헤어졌다. (1권 p.198)
1928년 11월 세죽과 헌영은 포대기 속의 간난아이와 함께 모스크바에 도착한다. 그들을 맞이한 건 명자와 단야였다. 명자는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일명 '모스크바공산대학'에 다녔고 단야는 국제레닌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모두 코민테른에서 운영하는 대학으로 학비도 공짜고 의식주에 생활비까지 주었다. 말하자면 혁명가를 양성하는 요람이었다. 세죽과 헌영은 망가진 건강을 추스리기 위해 세바스토폴에서 요양한다.
12월 테제는 올바른 결정이었을까? 이것은 인텔리 만의 혁명으로는 한계가 있었고,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기본으로 돌아가자는 의미일 것이다. 조선공산당도 화요파, 북풍파, 서울파 등으로 나눠져 당쟁도 심했고. 이 테제로 조선공산당은 일단 해체하고 다 잡혀가서 해체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노동자와 농민 속으로 뛰어든다. 민족통일전선이었던 신간회도 해체되는 결과를 낳았다.
식민지 시대의 혁명가들의 목표는 '사회주의 혁명으로 독립된 나라를 만드는 것'이었다. 코민테른의 지시는 '사회주의 혁명'으로 보자면 보자면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지만, '독립된 나라를 만드는 것'의 관점에서는 우수한 개인의 역량를 분산시킨다는 점에서 글쎄... 라는 생각이다. 혁명과 독립을 동시에 이루기엔 너무 힘든 시기였다. 어쩌면 그 시대 사회주의 운동 전체의 한계일 수도.
# 6. 1929년 모스크바
마르크시즘의 시작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우정이었다. 또한 볼셰비키의 뿌리는 1825년 차르체제에서 귀족 중의 귀족인 근위대 청년장교 신분으로 차르에 도전했다 총살당하거나 시베리아 유형지에서 죽었던 데카브리스트들이었다. 하지만 혁명이란 처음처럼 마무리까지 정의롭고 낭만적인 것은 아니었다. 혁명은 함께하고 목숨을 던질 수도 있지만 권력은 나눠 갖지 못한다는 게 혁명세대 정치인의 아이러니였다.
학생 신분인 박헌영과 주세죽으로서는 권력투쟁을 둘러싼 은밀한 소문들에 귀를 닫는 것이 현명했다. 혁명을 배우러 사선을 넘어 학교에 왔는데 교과서는 구정물 통에 처박히고 그들의 우상들이 권력싸움으로 날 새고 있다면 그건 방금 도착한 청년혁명가들에겐 너무 잔인한 농담이었다. 혁명정부 안쪽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다만 조선혁명가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곳에서 혁명을 배워 조선을 해방시켜야 했다. 믿을 건 코민테른이고 12월 테제는 바이블이었다. (1권 p.204)
볼셰비키의 뿌리가 데카브리스트라는 말에 작가의 내공을 짐작한다. 데카브리스트는 하영식의 책 <얼음의 땅 뜨거운 기억>에서 처음 만났다. 시베리아에 남아 있는 그들의 흔적을 찾아보기도 했더랬다. 1894년 우리의 동학혁명과 비슷하지만 그보다 70년 전에 일어난 일이고, 지도층의 혁명이라는 게 다르고 놀랍다.
1929은 레닌 이후의 권력이 스탈린으로 최종 확정된 해다. 당 기관지에서 처음으로 스탈린을 '레닌의 후계자'라 불렀다. 자, 이제부터 숙청 시작이야. 떨리지?! 스탈린이 권력을 잡고 나서 그의 목적은 오직 자신의 권력 강화였다. 전 세계의 프롤레타리아 혁명 같은 건 개나 줘버려 라고 바뀌었다. 코민테른의 위상도 예전만 같지 못했고. 혁명은 함께 하고 권력은 혼자 갖는다는 저자의 말이 새삼 차갑게 다가온다. 그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 혁명가들의 유일한 선택이 코민테른이요 12월 테제인 것도 슬픈 역사의 단편이다.
1928년 코민테른에서 만든 한국 공산주의 운동의 지침서인 12월 테제는 기존의 조선공산당을 해체하고 인텔리 중심의 조직에서 노동자 중심의 조직을 만들라는 내용이다. 공산주의자는 싸그리 다 잡혀간 우리 땅에서 어쩌면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일 수도 있겠다.
위의 사진은 1920년 7월 제2차 코민테른 대회로 박진순이 고려공산당 대표 자격으로 참석했다. 왼쪽에서 세번째 사진이며 바로 옆이 레닌이다. 박진순 인생 사진. 우리의 독립운동가들은 주로 레닌이랑 친했다. 그리고 스탈린 시대에 누명을 쓰고 총살당했다. 뻔한 공식, 망할 넘의 스탈린
# 7. 1938년 모스크바
열차는 모스크바의 익숙한 풍경 가운데로 달리기 시작했다. 세죽은 참았던 눈물이 쏟아졌다. 단야는 좋은 남자였다. 그리고 훌륭한 혁명가였다. 고작 서른일곱 해에 그는 몇 번이나 국경을 넘었던가. 압록강과 중소中蘇국경을 고무줄 넘듯 넘었다. 겁도 없이 총검도 없이 오직 공산당선언 하나로 무장한 채. 그는 평생 일본 경찰에 쫓졌으며 소련을 동경했다. 그런 그가 일본 밀정으로 찍히고 소련 정부에 의해 살해된 것이다.
문득 김단야가 레닌 1주기 때 쓴 회상기 한 구절이 생각났다.
나는 레닌이 살던 그런 나라이 그리웁다. 레닌의 죽은 그 땅이 그리웁다. 아! 언제나 과연 나의 앞에도 평탄한 길이 열릴 것인가. - 조선일보 1925년 2월 2일 자
결국 그는 레닌의 나라 소련에서 생을 마쳤다. (1권 p.354)
김단야(1899~1938), 본명은 김태연. 훤칠하게 잘 생겼고 멋쟁이 이미지였는데 이 책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김천 출신으로 대구 계성학교 재학 중에 벌써 동맹휴학으로 퇴학 당한 뒤 고향에서 3.1운동을 주도하며 독립운동을 하다 옥고를 치른 후 1921년 상해로 망명, 조선공산당의 모태가 된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에 입당한다. 세죽의 남편 박헌영과 정숙의 남편 임원근과 함께 상해 트로이카로 불리기도 했다.
단야는 어느 책에서나 신출귀몰했다. 실제의 삶도 그러하여 사진을 찾기가 쉽지 않다. 위의 사진 두 장과 저 위의 모스크바공산대학 단체 사진이 내가 찾은 단야의 사진 전부다. 사진은 위키백과 한국어판과 러시아판에서 가져왔다. 책을 통해 단야를 입체적으로 만날 수 있었다. 김단야의 재발견. 조선공산당과 혁명과 독립을 위해 그렇게 뛰어다녔건만, 그는 결국 붉은 혁명의 나라에서 생을 마감한다.
책에서,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느끼자 세죽이 단야에게 어디로든 도망치라고 한다. "소련을 떠나면 어디로 가겠소? 상해로 가겠소, 경성으로 가겠소?" 단야의 대답이다. 그 땅이 그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그러나 스탈린 집권 아래의 소련은 더 이상 혁명가들의 희망이기를 거부하고 배반했다.
세죽은 단야의 아내라는 이유로 5년의 카자흐스탄 유배형을 받았다. 유배형의 기차 속에서 세죽은 단야와의 갓 태어난 아기와 함께였다. 수용소에 도착하자 아이 비탈리는 숨을 거둔다. 아이의 운명이 거기까지였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고 저자는 적었다. 열혈 혁명가의 죽음, 세죽의 인생, 참 아프다.
# 8. 1939년 중국 연안
의용대원 하나가 작년까지 이곳 항일군정대학에서 강의했다는 장지락이라는 사람 얘길 꺼냈다. 만주에서 신흥군관학교를 같이 다녔던 동기생인데 몇 해 전 북경의 감옥에서 만났다 했다. 그는 열혈 공산주의자이자 거침없는 테러리스트였는데 동서양 역사와 철학뿐 아니라 자연과학에도 두루 해박한 백과사전적 지식인이었다 한다. 그는 연안에 들어와 항일군정대학에서 일본경제와 물리 화학을 가르쳤다는데 최창익이 그를 알고 있었다.
"내가 가르치는 일본 경제사, 그가 빠지면서 내가 맡게 된 거요. 그가 남겨 놓은 교안을 봤는데 식견이 풍부하고 통찰력이 탁월한 데가 있소."
"장지락이라... 나도 본 적이 있는 것 같아요. 20년 전 상해에서."
정숙이 이동휘 선생 댁에 있을 때 그곳을 드나들던 청년이었다. (1권 p.393)
정숙이 남편 최창익을 따라 무한으로 와 조선의용대 출범(1938년)에 합류했다. 대장은 김원봉, 최창익은 지도위원이었다. 그리고 이듬해 최창익은 본대와 헤어져 연안으로 가서 중국 홍군과 함께 항전했다.
연안이면 김산이 항일군정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님 웨일즈를 만난 그 시공간이 아닌가. 어쩌면 이라는 기대를 가졌는데 이렇게 나왔다. 다만 그 시기가 이미 김산은 동료 교수 강생에 의해 누명을 쓰고 처형된 후라 실제로는 만나지 못했다. 아마 위의 저 장면도 작가의 상상력에서 나온 대목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하간 이 책에서 김산을 만나게 되니 반가움이 와락 덥쳤다.
사진은 1937년 중국 연안 시절의 김산이다.
사진 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45737
# 9. 1939년 경성
그녀 인생이 고독과 비참에 갇혀버렸다는 생각이 들 때 명자는 어머니를 거역하고 나온 것을 후회했다. 모스크바공산대학 다닐 때는 마르크스의 역사과학이 승리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때는 시야가 그토록 투명했는데 지금은 한 치 앞조차 흐릿하다. 한 때는 골방에 틀어박혀 자수나 놓는 처지라 해도 역사를 바라보는 삶이란 그렇지 않은 삶보다 하나의 차원을 더 가지고 있다고, 그것이 정신적 노예 상태에서 자신을 구원한다고 생각했다. (2권 p.23)
고명자의 전성기는 단야와 함께한 모스크바 유학 시절일 것이다. 희망과 믿음이 있을 때 시야는 투명하고 눈에는 광채가 난다. 명자도 그랬다. 개인의 처지가 힘들지언정 역사를 품에 안고 사는 삶은 하나의 차원을 더 가진다는 말이 아름답다. 그러나 희망과 믿음이 사라진 지금은 한 치 앞조차 흐릿하다. 지금 나의 상태이기도 하다.
# 10. 1939년 경성
그 중에서도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박영희였다. 명자네 그룹이 조선공산당을 만들던 바로 그때 박영희의 문단 패거리들은 카프를 만들었다. 당시 그는 청년 문사로 이름을 날렸고 좌파문예운동 10년을 청산하는 전향의 글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 게 몇 해 전이었다. 전향선언의 유명한 문구는 명자처럼 사회와 담쌓고 살아온 사람도 알 정도였다.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요, 잃은 것은 예술이다!" (2권 p.37)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 통칭 카프(KAPF)라 불리우는 사회주의 문학단체다. 사회주의 물결이 한창 불 붙었을 무렵, 행동가들은 조선공산당을 만들었고 문학가들은 카프를 만들었다. 박영희와 김기진이 주도했다. 20~30년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문학 단체이며 프롤레타리아 문학고 계급혁명 운동을 목적으로 삼았다. 그래서 당연히 당대 노동자나 농민의 현실을 그렸다. 저 멋진 문구를 남긴 박영희는 중일전쟁 이후 철저한 친일파로 변신한다. (글 인용 : 위키백과 및 나무위키)
# 11. 1942년 태항산
그럼에도 운두저촌雲頭底村의 조선인은 나날이 숫자가 불어났다. 이들은 황토 벼랑에 토굴을 짓기도 하고 주인이 피난 가고 없는 빈집을 쓰기도 했다. 마을 입구에 서 있는 커다란 당집 벽면에는 하얀 페인트로 한글 표어가 쓰여 있었다. "왜놈 상관을 쏴 죽이고 총을 메고 조선의용군으로 찾아오시오." "조선말을 자유대로 쓰도록 요구하자." "모든 것을 우리 손으로 꾸려나가자." (2권 p.59)
저기 보이시는가? 벽에 하얀색으로 쓴 '조선말을 자유대로 쓰도록 요구하자.'는 문구가. 이 사진은 윤태옥의 <중국에서 만나는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처음 만났다. 저자인 윤태옥은 조선의용군의 마지막 주둔지인 태항산 깊숙한 저 곳까지 굳이 가서 그 흔적을 찾아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 책의 저자인 조선희 선생도 아마 가보지 않았을까? 혹은 이 사진으로 위의 저 인용한 문장을 만들었을지도.
이 책과 저 책이 역사의 시공간을 씨줄과 날줄로 엮여 하나의 사실을 여러 각도에서 보여주었다. 역사책을 읽는 재미다. 특히 이 책은 소설의 형식을 빌어 내가 다른 책에서 읽은 여러 사건을 입체적으로 그려 상상할 여지를 남겨 준다. 재미있고 유익한 역사 교과서다.
사진 출처 : https://jmagazine.joins.com/monthly/view/317663
# 12. 1942년 태항산
평양 사람 진광화와 밀양 사람 윤세주가 중국 대륙 깊숙이 태항산 골짜기에 묻혔다. 해 질 무렵이었다. 정숙은 간밤에 비 뿌리고 진한 핏빛으로 젖어가는 노을을 바라보았다. 몸이 땅에 묻히면 영혼은 노을에 묻히는가. 이곳에서 세주의 고향은 너무 멀구나. 그의 노모는 이 시각에 무엇을 하고 있을까. 밭에서 호미질하다가 잠시 허리를 펴고 서쪽으로 지는 해를 보고 있으려나. (2권 p.76)
이 역시 윤태옥 선생의 블로그에 있는 사진이다. '조선의용대의 영혼'이라 불리는 윤세주의 묘지다. 저자는 윤태옥과 진광화의 마지막 전투 장면이 생생히 그렸다. 그의 상상일지도 모르지만 너무나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마치 옆에 있는 듯 했다. 이 마전의 전투에서 팔로군은 격전을 치렀고 팽덕회와 등소평 등 지휘부는 무사히 탈출했지만 부참모장 좌권(쭤취안)이 전사했다. 동네 이름도 쭤취안이라고 윤태옥 선생의 블로그에 나와있다.
허정숙은 윤세주와 진광화를 묻고 저렇게 묘사했다. 그 심정이 나의 심정이다.
이 해 늦은 가을에 홍군의 포병사령관인 무정이 팔로군 생활을 접고 조선의용군에 합류한다고 나온다. 그리고 허정숙은 무정과 함께 조선혁명군사학교를 연다. 윤태옥의 <중국에서 만나는 한국 독립운동사>의 첫 페이지가 옌안 뤄자핑 마을의 이 학교 흔적을 찾아가면서 시작된다.
사진 출처 : (윤태옥 선생의 블로그) https://blog.naver.com/kimyto/220626730786
# 13. 1945년 중국 안동(현 단동)
께름칙하고 뒤숭숭하게 안개 뒤에 가려져 있던 조국의 현실이 냉엄한 실체로 이들을 맞이한 것은 압록강 너머로 조선 땅이 건너다보이는 안동현에 도착했을 때였다. 소련군정의 신의주 보안대가 의용군 행렬을 막아섰다. 보안대는 의용군의 무장해제를 요구했다. 지금 조선 땅 38선 이북에서는 소련군만이 무장할 수 있으며 다른 군대는 인정하지 않는다 했다. 독립동맹 간부들 역시 개인 자격으로 입국심사를 거쳐 조선으로 들어갈 수 있다 했다. 해지고 빛바랜 낡은 군복을 걸치고 오랜 행군에 지친 늙은 군인들 대오에서 고함과 탄식이 터져 나왔다. 모두 짧게는 10년 길게는 30년 망명생활을 해온 항일투사들이었다. (2권 p.103)
조선의용군이 해방 후 연안에서 장가구를 거쳐 승덕까지 50여 일을 도보 행군으로 왔다. 그리고 봉천을 거쳐 안동(지금의 단동)에 도착한 그들이다. 해방된 그 날까지 피 터지게 일본군과 싸운 조선의용군이었다. 그런데 막상 해방된 조국에 도착하니 웬 로스케들이 그들을 막는다. 해방 이후의 정국은 남쪽만 시궁창인 줄 았았더만, 북쪽 역시 이 부분에서는 제대로 단추를 꿰지 못했다. 조선의용군 총사령관 무정과 한발 먼저 북에 들어온 만주 빨치산 투쟁의 소련 극동군 대위 김일성의 첫 만남도 흥미롭다.
연안을 떠나기 전 조선혁명군정학교 교관과 학생들이 함께 찍은 사진이다.
사진 출처 : https://jmagazine.joins.com/monthly/view/317663
# 14. 1945년 크질오르다
단야와 재혼하지만 않았더라면 딸을 잃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유형도 오지 않았을 텐데. 단야하고 단 3년 살고서 그 죗값 치르기를 몇 년인가. 그녀는 인생이 온통 후회로 가득 차 있었다. 지금까지의 후회로도 허리가 끊어질 것 같은데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후회를 쌓아서 짊어지고 가야 하나. (2권 p.113)
세죽이 정말 단야와의 결혼을 후회했을까? 아님 거의 남이 되어 버린 딸과 희망이라고는 없는 크질오르다의 유형 생활에 지친 심정을 작가가 저리 표현을 했을까? 다른 자료에는 박헌영이 죽은 줄로 알고 단야와 재혼했다고 나오는데, 책에서는 헌영이 감옥에 있다는 걸 알고서도 단야와 결혼 생활을 한다. 모스크바에서의 생활은 너무나 외롭고 고달파서 혼자서 버티기는 힘들었다. 남편 현영이 있는 세죽도 애인 명자가 있는 단야도. 그건 분명히 사랑이었다. 누구도 비난할 수 없고 해서도 안되는. 나는 세죽이 단야와 나누었던 그 사랑을 후회하지 않았다고 믿고 싶다.
"일생을 공산주의 운동에 바쳤던 부모님이 북한과 소련에서 숙청된 것은 우리 가족의 비극일 뿐 아니라 역사의 아이러니입니다."
주세죽의 딸 비비안나 박의 말이다. 사진은 러시아 모스크바 시내 다닐로프 공동묘지에 있는 주세죽(묘비명 한베라)의 묘지에 헌화한 비비안나의 사진이다. 세죽은 옛 소련 정부에 의해 1989년 복권되었다.
사진 출처 : http://news.donga.com/Inter/more29/3/all/20040229/8034791/1
# 15. 1948년 평양
연안파 동지들은 김일성을 자꾸 모택동과 비교하려 드는데 모의 권위는 투쟁경력과 팸플릿에서 나왔고 끊임없이 팸플릿을 써서 이론과 원칙으로 당을 지도하고 투쟁을 이끌었다. 레닌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혁명지도자가 조선에선 박헌영이다. 그는 공산주의 진영에서 단연 최고의 이론가다. 반면 김일성은 마르크스 서적을 한 권이라도 차분히 읽었을까 싶다.
정숙은 김일성과 박헌영을 겹쳐놓아 보았다. 늘 정확하게 원리원칙을 이야기하고 할 말만 하는 박헌영이 예민한 지식인 혁명가의 전형이라면 무관 특유의 무데뽀 스타일에다 허풍기도 있고 실없는 소리도 하면서 사람 어르고 뺨 치는 김일성은 타고난 정치인이다. 두 사람 모두 배짱과 강단만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만 정치인 재목으로는 누구일까. 어쨌건 소련은 김일성을 낙점했다. (2권 p.154)
북한의 정부 기반은 무정, 김두봉, 최창익 등의 연안파, 박헌영의 남로당 계열, 소련파, 만주 빨치산 계열, 그리고 항일무장투쟁의 전설 조선의용대 김원봉 등 공산주의 여러 계파들의 연합이었다.
1948년 9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성립 후 정부 각료들의 사진이다. 1열 좌측부터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 정준택, 부수상 겸 산업상 김책, 부수상 홍명희, 수상 김일성, 부수상 겸 외무상 박헌영, 민족보위상 최용건, 문화선전상 허정숙, 제2열 보건상 리영남, 국가검열상 김원봉, 교육상 백남운, 교통상 주녕하, 상업상 장시후, 재정상 최창익, 내무상 박일후, 제3열 농업상 박문규, 무임소상 리극로, 도시행정상 리용, 체신상 김정주, 사법상 리승엽, 로동상 최성택이다. 공산주의 정파들의 내노라 하는 수장들의 집합니다. 국가의 시작은 제대로다. 이 정도면 바르샤와 레알과 뮌헨과 맨시티의 별들을 모두 모은 듯한 스쿼드.
위의 인용문은 박헌영과 김일성을 가장 가까이에서 본 허정숙의 평가다. 김일성의 최대 라이벌은 박헌영과 무정이라고 나오는데, 만주 빨치산 계열의 김일성은 혁명 투쟁의 경력으로나 출신으로나 박헌영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박헌영은 모스크바 레닌대학 출신이닷! 지금의 하버드 급이라구. 군인으로서의 명망도 팔로군 포병사령관 출신인 무정에 비하면 소련 극동군 대위인 김일성은 거의 발가락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쟁쟁한 라이벌을 모두 숙청하고 1인 독재의 권력을 휘어잡았다. 물론 소련의 비호도 어느 정도 있었겠지만.
책에서는 김일성도 아주 입체적으로 그렸다. 여태 읽은 책들 중에서 김일성에 대한 묘사는 단연 압권이다. 김일성의 재발견. 그가 한국 전쟁을 일으킨 사유에 대해서도 자세히 나온다. 이런 건 정말 제대로 배운 적이 없다.
# 16. 1951년 평양
"아버지, 혹시 후회하고 계신 건 아닌지요?"
"뭘?"
"38선 넘어오신 거."
"그럴 리 있겠냐."
"혹시 저 때문에."
"물론 너가 아니었더라면 내가 과연 이리로 왔을지 알 수 없는 일이지. 하지만 북행은 어디까지나 내 선택이었다. 남조선은 희망이 안 보였어. 이승만은 미국에서 독립운동 했다고는 하지만 자기 잇속부터 차리는 사람이야. 김일성은 어쨌든 목숨 걸고 싸운 사람이고. 나라 만들기는 혈기방장한 청년보다 교활한 노인이 나을지 모르지. 하지만 나는 청년쪽을 택한 거다. 이승만보다는 김일성이 질이 낫다고 생각했으니까." (2권 p.176)
허헌과 딸 허정숙의 대화다. 당시의 남한과 북한. 이승만과 김일성을 단적으로 묘사한 부분이다. 공감 백배다.
위 사진 허헌(1885~1951)은 독립운동가이며 민족 변호사이다. 김병로 이인과 함께 3대 변호사로 불리기도. 3.1운동에 참여한 민족지도자들을 무료로 변호했고, 코민테른에 조선공산당의 승인을 얻으러 간 조동호, 조봉암을 위해 변호하기도 했다. 해방 이후 여운형이 주도하던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가담하였으며 이듬해 민전의 수석의장, 남조선로동당의 위원장을 역임했다. 북에서는 김일성종합대학의 총장이 되기도 했다.
1927년 딸과 함께 세계일주를 하였다. 그의 여행기와 당시 한류스타 최승희, 여성해방론자 나혜석, 의학도 정석태 등의 유람기를 담은 <경성 엘리트의 만국 유람기>라는 책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내용이 궁금하다.
책에 나오는 여러 인물 중에서 가장 합리적이고 이성적이고 민족적인 인물로 다가왔다. 자신의 양심과 이성에 따라 행동한 지식인인 그가 북한을 택한 이유를 묘사한 것이 위의 인용구다. 정부 출범 당시 지식인의 희망은 역시 남쪽보단 북쪽이었다.
사진 출처 : 나무위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