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빛나던 청춘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 서명숙 <영초언니>
표지 그림이 유난히 시선을 붙잡는다. 저기 서 있는 여인은 분명 이 책의 주인공 '영초 언니'일텐데, 왜 사진이 아니고 그림일까? 학교 교정의 어디쯤일까? 언뜻 멈춰선 모습이 나에게 무슨 말을 하려는 것 같기도 한데.....
'크지도 작지도 않은 중키에 날씬한 몸매, 단아한 이목구비, 창백할 정도로 새하얀 피부, 첫눈에 봐도 단아한 도시형 미인' 이라고 저자는 처음 영초 언니를 만났을 때의 인상을 책에 썼다. 표지 그림의 '영초 언니'를 만나고 싶어 검색을 했다. 찾고 또 찾았으나 단아한 자태의 영초 언니는 찾을 수 없었다. 빛나던 청춘의 영초 언니는 활자로만 존재했다.
열심히 구글링을 해보니 영초 언니의 사진 몇 커트를 찾을 수 있었지만, 그건 빛나던 청춘, 단아한 미인과는 좀 거리가 있어 보였다. 가장 최근의 천영초 선생은 작가의 스토리펀딩 연재글에서 만날 수 있다. 2017년 <6월 민주항쟁 30년 맞이 감사의 해> 행사에 이젠 할머니가 되어버린, 그리고 사고로 앞을 보지 못하게 된 영초 언니가 노래를 부른 동영상이 있다. 아, 세월의 무상함이여.... (https://storyfunding.daum.net/episode/25313 여기로 들어가면 볼 수 있다.)
위의 사진은 역시 작가의 스토리펀딩 연재글에 실려 있는 영초 언니의 결혼 사진이다. 남편은 정문화. 서울대 정치외교학과 출신으로 운동권 사람들 사이에서 '서울대 3대 천재'로 꼽히던 수재였고, 1974년 민청학련 사건 때 이철 등과 함께 구속되어 푸르른 젊은 날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던 민주투사였다고 한다. 1988년,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정문화의 마지막 장면이 책에 자세히 나온다. 빛나던 청춘의 마지막은 다들 어찌 이리 슬플까.
사진 출처 (작가의 펀딩글) : https://storyfunding.daum.net/episode/24546
이 책은 내가 가장 존경하고 사랑했던 한 여성에게 바치는 사랑노래입니다. 이 노래를 듣고 그녀가 조각난 기억의 파편을 온전히 맞추어내는 기적이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프롤로그 중에서)
올레는 '집 대문에서 마을 길까지 이어주는 좁은 골목'을 뜻하는 제주 방언이다. 제주도 가면 다들 한 번쯤 걸어보는 올레길. '산티아고 길보다 더 아름답고 평화로운 길을 만들겠다.'는 결심으로 제주도에 걷기 여행의 열풍을 불러온 이가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이라고 한다. 바로 이 책의 저자다.
저자는 제주에서 나고 자랐다. 국민교육헌장을 암기하던 박정희 키드였다. 공부도 잘해서 집안의 기대 역시 컸다. 그리고 서울로 올라와 대학 생활을 시작한다. 당시(저자는 76학번이다)는 대학에 사복 경찰이 뻔질나게 다니고 학생들의 움직임을 감시하고 통제하던 소위 '긴급조치'의 시대였다. 세상은 이전에 그가 알던 세상이 아니었다. 그런 시기에 대학 선배 '천영초'를 만난다. 영초 언니를 만나 저자는 담배를 배웠고, 사회의 모순에 눈을 떴고,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지식인의 모델을 보았다. 천영초는 당시 운동권의 상징적인 인물이었고, 저자 뿐 아니라 주위 사람들에게 깊은 영향을 준 사람이라고 저자는 술회했다.
서명숙과 천영초의 청춘은 빛났다. 시대가 그들을 불렀고 그들은 뜨거운 열정으로 응답했다. 시대를 비판하는 죄로 잡혀가서 고문을 당할 때 서명숙의 나이 겨우 스물 둘, 영초언니는 스물 여섯이었다. 박정희의 유신과 암살, 518 광주민주화운동, 6월 항쟁 등의 현대사에 굵직한 사건들을 온몸으로 감당했다. 그리고 영초 언니의 절절한 인생 후반부가 나온다. 결혼, 경제적 궁핍, 다단계 판매원, 캐나다 이민, 남편 정문화의 영양실조로 인한 죽음, 그리고 교통사고, 실명과 뇌 기능 저하.....
저자 서명숙의 자서전이기도 한 이 책의 주인공은 영초 언니 '천영초'를 비롯하여 암울했던 시대에 치열하게 고민하고 부딪쳤던 푸르던 청춘들이다.
영초 언니가 가장 아낀 후배이자 책의 또다른 청춘인 이혜자는 1978년 9월에 열린 고려대 9.14시위를 주도하여 학교 내의 '짭새들의 아지트'로 쓰인 목조 건물을 온몸으로 부순 전설적인 여학생이라고 소개했다.
사진 출처 : http://www.kdemo.or.kr/photo/406/00741102
굴곡과 부침이 많았던 영초 언니와는 달리 이혜자는 노동운동을 하는 문성현과 결혼하고 정당 활동을 하는 등 꿋꿋하게 외길을 걸었다고 책에 나와 있다. 현재는 경남 거창에 내려가 폐교를 빌려서 지역문화 살리기에 팔을 걷어붙이고 있다고 한다. 최근의 근황은 인터넷에서 찾기 어려웠으나 사진은 몇 장 있었다. 위의 사진은 남편인 문성현 민주노동당 대표가 2007년 한미 FTA를 반대하여 단식농성을 하고 있을 때 이혜자 선생과 그의 딸이 문대표의 생일을 축하하는 장면이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의 사망 이후 전두환은 그해 12월 쿠데타로 군부를 장악하고 집권을 위한 시나리오를 짜기 시작한다. 박정희의 죽음으로 긴긴 독재는 막을 내리고, 삭막한 대한민국에도 '어쩌면'이라는 기대감이 퍼졌다. 1980년 전국의 주요 대학에서는 민주화 추진에 대한 열망이 들불처럼 번져 나갔고 '서울의 봄'을 탄생시킨다. 대학생과 시민이 합세하여 5월 15일 최절정의 집회를 열게 된다. 사진은 당일 서울역의 모습이다.
여기에 참가했던 학생 지도부에는 심재철, 신계륜, 이해찬, 이수성, 유시민 등이 있었고, 당시 서울대 총학생회장이던 심재철(책에서 작가 서명숙의 야학 동료 교사로 출현했다. 지금 자유한국당 국회의원 그 심재철이 맞다)은 유혈 사태를 우려해 해산을 결정을 발표했다. 이 사건을 두고 위화도 회군을 빗대어 '서울역 회군'이라 부른다. 그리고 사흘 뒤 광주에서 518이 일어난다.
이 해산 결정에 유시민(책에 잠깐 까메오로 등장한다)은 "여기서 물러나면 모든게 끝난다. 이 많은 인원이 현재 여기서 복귀한다면 신군부는 어떤 보복행위를 할 지 모른다. 결단코 지금 이자리에서 모든 걸 끝내야 한다."며 격렬하게 반대했다. 그 때의 결정이 옳다 그르다고 판단하긴 어렵다. 다만, 그 때의 심재철은 지금의 심재철이 되었고, 그 유시민은 지금의 유시민이 되었다.
이 책을 시작으로 묻혀 있던 이야기들이, 수 많은 영초 언니들이 발견되면 좋겠어요.
민주화 운동의 상징이었던 영초 언니의 일생과 저자의 일생을 함께 봤다. 뜨겁고 빛나던 시절을 지나 애처롭고도 슬픈 영초 언니의 말년을 보며 책에 등장한 다른 청춘들, 엄주웅, 이혜자, 심재철, 최순영, 박종원, 유시민의 지금을 생각해본다. 그 시절의 열정을 그대로 간직한 채 새로운 삶을 일구는 이도 있고, 꿋꿋이 그 길을 가는 이도 있다. 전혀 거꾸로 가는 이도 물론 있지만.
이 땅의 민주주의는 수 많은 사람들의 고통과 목숨을 담보로 단단해져왔다. 우리는 화염병이 아닌 촛불로 독재자를 끌어내리는 시대를 만들었다. 다른 나라가 몇 백년 걸린 민주화를 우리는 몇 십년만에 쟁취했지만, 그 과정에서 생긴 생채기는 아직 우리 주위에 많이 남아있다. 쉽게 아물지도 않을 것이다. 그 상처를 잘 아물게 하는 것이 지금을 사는 우리들이 안고 갈 과제가 아닐까. 그리고 그 첫걸음은 저자가 당부하듯,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영초 언니들을 기억하는 것에서 출발이다.
지금은 고등학생인 우리 아이들이 이런 말도 쉽게 할 수 있을 정도로 자유로운 사회가 되었다. 영초 언니와 같은 이름 모를 많은 이들의 희생이 없었더라면,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야 지금 우리가 누리는 것들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사진은 아들 녀석이 다니는 간디학교 학생들이 광화문에서 한 학생 축제의 한 장면이다.
나는 이런 책을 읽으면 참 아프다. 90년대에 학교를 다녔지만, 학교에 매캐한 최루탄 냄새가 남아 있던 시절이었다. 대학 첫해 강경대가 백골단의 쇠파이프에 맞아 죽고, 그 외에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 많은 이들의 분신 사건들이 있었다. 자주대오 사건으로 선배들이 경찰서에 끌려가기도 했었다. 이런 시대에 적극적이지 못했던 나는 알게 모르게 그들에게 부채 의식이 남아 있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이 책 <영초언니>는 더 아프다.
기록하지 않았다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을 실존 인물들의 이름과 행적을 알게 되었다. 영초 언니와 서명숙, 이혜자, 엄주웅, 정문화.... 참 다행이다. 애써 이 이름들을 꺼집어 낸 서명숙 작가가 고맙다. 비단 이들 뿐일까, 시대에 묻힌 이름 없는 열사들이. 그들의 이름은 자꾸 세상으로 나와야 하고 우리가 불러주어야 한다. 저자의 바램처럼 수 많은 영초 언니들이 발견되고 기억될 수 있다면 역사의 생채기는 더 빨리 아물겠지.
책을 덮고 눈을 감으니 책 표지에 풀숲으로 걸어가면서 나를 바라보는 영초 언니와 저자의 스토리펀드 동영상에 나왔던 늙은 할머니 영초 언니가 애잔하게 겹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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