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도마의 <소녀와 화분>이라는 노래를 듣고 있습니다. 강이가 혼자 기타를 치며 부르고 있길래 물어보니 이 노래라고 합니다. 노래가 경쾌하고 특히 아들 녀석이 맛깔나게 부르니 더 멋져 보입니다. 듣다보니 좋은 건 멜로디 뿐만이 아닙니다.
슬픔은 저어기 골목 끝까지 갔다가 내가 부르면 다시 달려오고
슬픔은 저어기 시장통에 구경 갔다가 밥 짓는 냄새에 돌아오지
밥 짓는 냄새에 돌아오는 슬픔이라, 어쩜 이리 감성적인 가사를 쉬이 만들었을까요? 나이도 엣되어 보이는데요. 그런데, 벌써 오래 전에 고인이 되었다네요. 헐, 이 피지 못한 청춘을 어찌 할까요. CTR사운드에 가면 도마의 서약서가 있댑니다.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 2집을 마무리할 것이라는 내용으로요. 그런데 이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고 합니다. 남은 절친이 그의 노래를 모아 2집 음반을 내었다고요. 강이가 이야기 해줬습니다. 그런 스토리를 듣고 나니 노래가 더욱 가까이 다가옵니다.
사실 사카모토 류이치의 음악을 찾아 들어본 적은 없습니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요. 우연히 이 책을 접하게 되었는데, 흠뻑 빠졌습니다. 책 모서리를 꽤나 많이 접었습니다. 응, 이런 아저씨였어? 하는 마음에 내용도 다채로왔습니다. 자신이 만든 여러 곡들에 담긴 사연, 그리고 사회활동가로서의 역할과 행동, 시한부 인생을 선고 받고 난 후의 심경과, 그럼에도 마지막까지 음악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이 아저씨가 소개한 음악, 혹은 자신이 만든 음악을 들어보았습니다.
1. Merry Chrismas Mr. Lawrence (1983)
영화 <전장의 크리스마스> 메인 테마곡. 사실상 출세곡이다. 영국 아카데미에서 상을 받았다. 백화점 여자 화장실에 가면 들을 수 있는 곡이라고 지인이 말했다.
2. 12 (2023)
이 아저씨의 마지막 정규앨범. 죽기 전에 이 음악을 만드는 과정이 책에 나와있다. 이우환 선생이 앨범 커버를 그렸다. 초등학생 항칠 같았다.
3. The Last Emperor OST (1987)
베르나르도 베르툴루치 감독의 영화 사운드트랙. 이 감독과 꽤 친했다고 한다. 책에 여러 에피소드가 나오는데 재미있다.
4. Yesterday, When I was Young
로이 클라크의 노래. 이 곡을 듣고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졌다고 책에 나온다.
5. 고토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 (2010)
아저씨 어머니를 위한 레퀴엠. 40년 친구 무라카미 류가 사카모토 류이치의 최고의 걸작이라 평했다. 고토는 가야금과 비슷한 일본의 현악기다.
6. Yellow Magic Orchestra, YMO (1978년 결성)
아저씨가 젊었을 때 만든 3인조 밴드. 일본 대중음악사에 길이 남을 슈퍼밴드라고 한다. 대부분 전자음악이다.
일부러 찾아 들었지만 사실 귀에 딱 감기지는 않습니다. 뭔가 음악이라기 보다는 음향이라는 것에 가까운 것들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아무런 기대나 긴장감 없이 들을 수 있어서 좋다고 하는 지인도 있었습니다. 이런 음악도 있구나 하는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사회활동가로서의 활동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아베의 안보법안 반대, 위안부에 대해서 사과해야 한다는 입장 표명, 원전 재가동에 대한 반대 시위, 해노코 미군 기지 반대 운동, 동일본 지진 피해 지역을 위한 자선 콘서트와 재해 지역 학교에 대한 악기 지원 등 민주주의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유희열이 아저씨 노래를 표절했다는 의혹에 내 음악을 가져다 써줘서 고맙다고 했습니다. 그저 대인배였습니다.
이는 일본도 마찬가지인데 저는 10대 무렵부터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는데도 일본의 뿌리는 절대 하나일 리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인들이 자국을 '야마토 민족'이라는 단일민족에 뿌리를 둔 국가라고 주장하는 신화에 대해서는 거의 본능에 가까운 혐오감마저 있었죠. (78쪽)
실제로 후쿠시마 사고 이후 16만 명이나 되는 주민이 불가피하게 피난을 해야 했습니다. 건강에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까 두려워하며 살아가야 하는 사람의 수는 그보다 훨씬 많습니다. 다른 선택지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가장 리스크가 높은 방법으로 발전을 계속해야 할 필요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기후 변화가 가속화되고 있는 만큼 태양광을 비롯한 재생 가능 에너지 쪽으로 방향을 틀어야 한다는 것이 당시 저의 주장이었으며,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을뿐더러 점점 강해지고 있습니다. (126쪽)
분명, 이 풍경은 더 이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비재非在'의 감각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것이겠죠. 블루스는 19세기 후반, 강제적으로 미국에 끌려갔던 흑인 노예들이 만들어낸 음악 장르인데, 신기하게도 그들의 출신지인 아프리카 국가에는 정작 블루스 같은 음악이 없습니다. 이미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노스탤지어가 새로운 문화를 탄생시킨 것이죠. 그래서 저는 향수의 감각이야말로, 예술에 가장 큰 영감을 주는 것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207쪽)
바닥이 유리로 되어 있는 배를 타고 매립이 예정된 해역에 다가가자 헤노코의 푸르른 바다와 선명한 산호초들이 눈앞에 펼쳐져 무척이나 아름다웠습니다. 이런 아름다운 자연을 훼손해 기지를 만들겠다니, 제정신이 아니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더군요. 먼바다에서 광활한 미군기지 건설 예정지를 보며 미국과 일본 사이에 주종관계가 존재하듯 일본 내에서도 본토와 오키나와 사이에 주종관계가 성립하고 있다는, 그 차별적 비대칭성을 통감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후쿠시마 원전이 그랬듯, 중앙이 필요로 하는 위험한 시설을 멀리 떨어진 지역들에게만 강요하는 것이 오늘날 일본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294쪽)
일본에서는 아직도 예술가 등이 정치적 발언을 하는 것에 대한 세간의 거부감이 존재합니다. 저는 그날 이후 '만약 내가 정말 유명해 팔 수 있는 이름이 있다면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이용해야 한다'는 쪽으로 마음을 바꿨습니다. 설령 위선자라는 비판을 받는다 해도, 그로 인해 사회가 조금이라도 나아질 수 있다면 좋은 일이 아닌가 싶어서요. 환경에 관한 운동도, 지진 재해 후 활동도 이런 신념의 힘으로 실천하고 있습니다. (330쪽)
인간은 자신의 죽음을 예측하지 못하고, 인생을 마르지 않는 샘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세상 모든 일은 고작 몇 차례 일어날까 말까다. 자신의 삶을 좌우했다고 생각할 정도로 소중한 어린 시절의 기억조차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떠올릴 수 있을지 모른다. 많아야 네다섯 번 정도겠지.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보름달을 바라볼 수 있을까? 기껏해야 스무 번 정도아닐까. 그러나 사람들은 기회가 무한하다고 느낀다. (11쪽)
위의 글은 영화 <마지막 사랑>(1990)에 나온 대사입니다. 영화 마지막에 원작자 폴 볼스가 나와 읊는다고 하네요. 시한부 통보를 받은 아저씨가 달을 보면서 했던 생각이고 그게 이 책의 제목이 되었습니다. 아저씨는 가셨지만, 늦게라도 아저씨의 일생을 알게 되어 다행입니다. 올바르게 생각하고, 생각한 바를 실행하는 지식인의 삶을 사셨습니다. 책은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고 끝맺습니다. 아저씨의 신념이 남아 있고, 작품은 계속해서 사랑받겠지요. 도마의 노래가 그런 것처럼요.
'수필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클랩함 정션으로 가는 길 : 림태주 <관계의 물리학> (0) | 2024.10.03 |
---|---|
늙기의 즐거움, 늙기의 자연스러움, 늙기의 두려움 : 김훈 <허송세월> (0) | 2024.09.21 |
이러다 곧 온다 : 실버 센류 <사랑인 줄 알았는데 부정맥> (2) | 2024.09.03 |
형편없이 살고 있는 나에게 : 이병률 <내 옆에 있는 사람> (0) | 2021.07.17 |
시가 쉬워졌어요 : 이문재 <혼자의 넓이> (0) | 2021.06.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