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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이야기

평범함의 매력을 연기한 배우 : 고레에다 히로카즈 <키키 키린의 말>

by 개락당 대표 2024. 11. 7.

 

이 할매를 좋아하게 된 영화는 <앙 : 단팥 인생 이야기>입니다. 팥의 장인인 할매가 도라야키 가게 알바로 일을 하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벗나무 가득한 도라야키 가게 풍경이 예전에 살던 도쿄 신밤바와 똑 닮았더랬습니다. 스토리도 좋았고, 할매의 웅얼웅얼 연기는 일품이었지요. 원래도 좋아했던 도라야키를, 영화를 보고 난 후 애써 파는 곳을 찾아 사 먹었던 기억도 있습니다. 

 

몇 해 전 할매가 암으로 세상을 뜨고, 아~ 했는데, 서점에서 이 책을 발견했습니다. 책 표지에 웃고 있는 할매의 모습이 너무 반가와서 후다닥 사버렸습니다. 

 

책은 영화 감독인 코레에다 히로카즈가 키키 키린과 나눈 대화를 엮었습니다. 두 사람은 <걸어도 걸어도>를 시작으로 <진짜로 일어날 지도 몰라 기적>,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바닷마을 다이어리>, <태풍이 지나가고>, <어느 가족> 등 총 6편의 작품을 함께 했습니다. 

 

감독이 할매를 처음 만난 건 영화 <걸어도 걸어도>의 초고가 완성되고 난 뒤인 2007년입니다. 할매가 돌아가신 2018년까지 함께 영화를 만들고 인터뷰를 했습니다. 두 사람의 인연은 할매 말년의 일부분이었고, 할매는 일반적인 기준으로 볼 때 '대배우'는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할매를 떠올리고 사랑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했습니다. 감독은 그 이유를 나름대로 찾아보려는 마음으로 이 책을 엮었다고 합니다. 

 

 

 

 

배우와 감독이 만났으니 주로 영화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땐 이랬고 저 땐 저랬고, 이 신은 이래서 우짜고저짜고.... 그래서 할매의 영화를 다시 찾았습니다. 할매가 나온 코레에다 감독의 영화 중에서 아직 안 본 <걸어도 걸어도>, 할매의 영화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앙 : 단팥 인생 이야기>, 그리고 할매의 마지막 영화인 <일일시호일>, 이 세 편을 차례대로 느긋하게 봤습니다. 

 

<걸어도 걸어도>에 나온 할매는, 할매의 역할이지만 그래도 젊습니다. 남편의 바람을 알고 있으면서 시치미를 뚝 떼고 있다가, 결정적일 때 슬그머니 찌르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단호하면서도 귀여운 전형적인 일본 여인의 모습을 연기했습니다. <앙 : 단팥 인생 이야기>에서는 한센병이 있는 팥 장인으로, 평생 해보고 싶었던 알바일을 하며 즐거워하는 할매가 나옵니다. 그리고  <일일시호일>에서는 "같은 사람들이 여러 번 차를 마셔도 같은 날은 다시 오지 않아요. 생애 단 한 번이다 생각하고 임해주세요."라고 할매는 우리들에게 작별 인사를 합니다. 

 

할매는 영화 속에서 주인공은 아니지만, 주인공 옆에서 걸어가거나, 음식을 만들거나, 말을 하거나, 주인공과 함께 같은 곳을 바라봅니다. 도드라지지 않습니다. 예를 들자면 '나이 듦'을 연기하기 위해 스스로를 작게 만듭니다. 등을 구부리고 목을 없애는 방식을 취합니다. 역할들이 숨 쉬듯 자연스럽습니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의 역할이 그저 '평범하게' 지나가는 데 그치지 않고 평범한 사람의 매력을 돋이보게 합니다. 이게 할매가 하는 연기의 특징입니다.  

 

 

할매와 감독의 첫 작품 <걸어도 걸어도>. 장남의 제사날에 모인 가족의 하루를 그렸다.

 

 

키키 키린은 고레에다 감독의 페르소나다. 감독 영화의 엄마는 언제나 키키 키린이다.

 

 

일본 어디에나 있을 법한 도라야키 가게. 할매는 이곳에서 알바를 해보는 게 평생 소원이다.

 

 

할매는 세상으로부터 상처 받았지만 그걸 딛고 다른 이들을 치유한다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알 수 없으니 매일을 좋은 날로 채우자는 뜻의 일일시호일

 

 

똑같은 날은 오지 않는다. 온몸으로 지금 이 순간을 맛보아야 한다. 할매는 이렇게 우리에게 말하고 떠난다. 위의 모든 사진 출처 : 다음 영화

 

 

예를 들어 세상에는 '첩'이라는 입장에 선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의 매력이 사라지는 건 남의 남편과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었다는 사실을 태연하게 떠벌리는 시시함을 보일 때거든. 마음의 빚을 짊어지고 있는 편이 훨씬 매력적인데 말이지. (37쪽)

 

지난번 인터뷰에서 "내 어느 면을 보고 계속 같이 하고 싶다고 느껴요?" 라는 돌직구 질문을 받았을 때는 대답이 궁했지만, 한마디로 말하자면 역시 "재밌어서"가 아닐까. 키키 키린은 재밌다. 훌륭한 것도 즐거운 것도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고, 역시 재밌다. (104쪽)

 

"이걸 배우에게 시키는 건 너무 위험해"라고 말하는 스태프에, "감독님 어머님이 정말 이렇게 튀기셨어요?" 하고 내 기억을 의심하는 사람까지 나왔다. 어찌 된 일일까? 조금 더 안전한 방법은 없을까? 하며 걱정하는 소리를 우연히 들은 키린 씨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괜찮아. 만약 얼굴에 화상을 입으면, '얼굴에 화상 자국이 있는 여자'라는 역할을 할 테니 걱정하지마." (136쪽)

 

"이제 할머니는 잊고 당신은 당신의 시간을 젊은 사람을 위해 써. 난 더 이상 안 만날 테니까." 구체적인 여명 선고를 받고 자신의 기력이 쇠퇴하는 것을 여실히 느꼈을 때, 키키 키린이 가장 먼저 한 행동은 '물러나는' 것이었다. 그것도 가장 소중한 상대일수록 단호하게 이별을 고했다. (343쪽)

 

 

키키 키린(樹木 希林)은 예명입니다. 나무와 나무가 모여 보기 드문 숲을 이룬다는 이름은, 모두 모여 무언가를 만들어내어 키우는 뜻을 가졌습니다. 키키 키린은 자신의 삶을 지혜롭고 현명하게 만들어갔고, 삶에 대한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모습이 잘 와닿았습니다. 할매의 영화로, 할매의 말로 나는 또 작은 위로를 받습니다. 

 

 

사랑해야 할 대상이 이제 여기에 존재하지 않고, 손에 닿지 않는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 '부재'를 그립게 여긴다. 이 '그리워하는' 일을 업으로 삼는 불행한 체질의 인간이 작가가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뜻에서 이 책은 나에게 이제는 수신되지 않는 '연애편지'일 것이다. (감독이 할매에게 보내는 마지막 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