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보다 지혜가 필요한 시기 : 서동욱 외 <한평생의 지식>
과거 원시인들은 우리보다 더 지혜로웠다. 그들은 자신의 삶에 대해 우리보다 더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자신의 삶은 사냥하는 시간과 향유하는 시간으로 양분된다는 사실을. 당연히 그들은 사냥하는 시간은 향유하는 시간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향유하는 시간은 사냥하는 시간이 아니라 사랑하는 시간, 공유하는 시간, 그리고 창조하는 시간이다. 물론 그들은 사냥하는 시간을 무시하지 않았다. 사냥을 하지 않는다면, 향유도 사랑도 창조도 불가능할 테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사냥하는 시간을 통해 아무리 많은 사냥감을 확보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일정 정도이 사냥감만을 가지고 부족과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왔다. 이 정도면 충분하니까. 그들은 생각보다 빨리 사냥감을 확보하는 것에 대해 자기가 믿고 있는 신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렇지만 신에게 고마워하는 이유는 그만큼 자신들에게 향유하는 시간이 많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p.144 강신주의 글 중에서)
호소다 마모루의 애니메이션 <시간을 달리는 소녀>에서 주인공 마코토는 우연히 타임 리프, 그러니까 과거로 갈 수 있는 능력을 얻는다. 요런 거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무지 잘 써먹을 텐데. 암튼, 자신이 타임 리프를 할 수 있다는 걸 알고는, 그걸 이용해 흉악한 범죄를 막고, 엄청 비극적인 사고를 미리 예방하고, 침몰 직전의 일본 경제를 구한다.....는 건 전혀 아니고, 마코토는 어제 못먹었던 푸딩을 먹고, 노래방 시간을 늘리는 데 사용하면서 키득키득 즐거워 한다. 이런~~ 야, 고작 그런 데 쓸 거면 나한테 넘기라구~~
잘 다니던 회사를 때려치운지 꼭 1년이 되었다. 건축을 전공하고 만 20년을 회사에 다녔더랬다. 회사에서 뭔가 문제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냥 새롭게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돛단배에 내 한 몸 의지해서 망망대해로 가보고 싶어 사표를 냈다. 이후의 그 해방감이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았다. 바람은 시원했고, 태양은 따스했으며, 세상이 온통 아름다워 보였다. 이제 내 맘대로 세상을 살아보리라.....
는 개뿔, 딱 3개월이었다. 유럽 여행을 다녀올 때까지. 느긋하게 일어나 창 밖에 흔들리는 나무를 보며 커피 한 잔도 하루 이틀이지, 갑자기 엄청나게 많은 시간이 주어지니 감당이 안되었다. 허둥지둥, 작심삼일, 차일피일..... 무엇보다 아내와 함께 살아본 경험이 없다. 노가다 회사에 다닐 때, 본사와 전국 각지, 심지어 해외 근무까지 그렇게 떨어져 살았다. 그러다 스물네 시간 붙어 있으려니, 이게 삐걱거리지 않으면 더 이상하지.
나는 될 수 있으면 아내와 붙어 있으려 하는데, 아내는 이게 무지 부담스런 시츄에이션이다. 여태 떨어져 살았는데, 이 나이에 무슨! 혼자 노소! 그리고 아내와 나는 B형의 끝판왕과 A형의 끝판왕이다. 떨어져 살 땐 이게 좋은 쪽으로 작용했는데, 붙어 있어니 상극이 된다. 게다가 나는 미니멀리즘을 지향하고 아내는 퍼주는 걸 좋아하고 할 건 해야하는 성격이니..... 하아~~ 다투고, 삐지고, 말 안하고, 화해하고, 또 다투고, 상처를 주고 받는 시간의 연속이었다.
호모 루덴스던가? 노는 것도 기술이 필요하다고 했던게. 사랑도 놀이도 배워야 한다고 했는데, 내게 주어진 많은 시간을 어떻게 뭘 하고 놀지 나는 배우지 못했다. 회사에서는 시간마다 할 일이 딱딱 정해져 있는데. 아내와 사이좋게 함께 사는 법도 마찬가지다. 그런 걸 익히지 못했다. 회사를 관두고 맞닥뜨릴 가장 시급한 문제들에 대해 인식하거나 배우지 못했으니 생활이 잘 될리가 있나. 그렇게 1년이 흘렀다.
마코토처럼 타임 리프의 능력을 가지게 된다면 1년 전으로 돌아갈까? 그러면 직장 생활을 벗어나는 해방감도 다시 맛보고, 아내와도 잘 지내고, 나한테 주어진 시간도 잘 활용해서 쓸 수 있을까? 당연한 말을. 그럼 그 동안 좌충우돌하며 혼자 굴을 파던 1년의 시간을 아낄 수 있잖아. 1년 전이 아니라 아얘 아내와 연해하던 시절로 돌아가련다ㅋㅋㅋ. 아휴, 생각만 해도 근사하네. 이 능력.
타임 리프의 능력이 있으면 1년의 시간을 아낄 수 있었겠지만, 그 시간은 내 문제를 정확히 알아내는 시간이었다. 이제 문제가 뭐고 왜 이런 문제가 발생했는지 알겠다. 그리고 해결 방법도 어렴풋이 다가온다. 백수 생활의 틀도 조금 잡혔다ㅋㅋ. 앞에 인용한 강신주 박사의 글에서 원시인들의 지혜를 인용했듯이, 내 생활에도 그런 시간이 필요하다. 바쁘게 부지런히 살며 결과물을 내는 삶도 좋지만, 그렇게 하지 않아도 스스로 만족하는 지혜가 필요한 시점이다.
이제는 지식보다 지혜가 필요한 시기다. 향유하는 시간을 늘이고, 사랑하고 공유하고 창조하는 걸 즐기는 지혜. 그리고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런 지혜는 책을 무지 읽는 나보다 책과는 완전 담을 쌓은 아내가 더 많다. 아내한테 배우면 된다. 되는데, 그 배우는 게 어렵다.
그래서 또 책을 든다. 지혜를 글로 배우니 연애를 책으로 배우는 격이지만 그래도 이 방법이 나에겐 가장 익숙하다. 혹시 아나, 이런 지식이 가득한 책을 읽으면 나도 모를 지혜가 생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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