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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이야기

왕 니만 잘하면 된다 : 김태완 <책문 시대의 물음에 답하라>

by 개락당 대표 2020. 5. 9.

 

 

 

왕 니만 잘하면 된다 : 김태완 <책문 시대의 물음에 답하라> 

 

 

 

 

 

광해군 : 지금 가장 시급한 나랏일은 무엇인가?

임숙영 : 나라의 병은 왕 바로 당신입니다. 니만 잘하면 됩니다.

 

 

 

파주 헤이리 이안수 촌장이 추천한 책입니다. 프랑스 대입 시험인 바칼로레아 철학 논술 시험 문제를 읽고는 우리 대입 시험이 그렇게 초라해 보였답니다. 그러다 조선시대 과거 시험의 논술 문제와 선비들의 답인 이 책을 읽고는 한 없이 자랑스러워졌다고 합니다.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진 나라의 가장 시급한 문제를 물었는데 임숙영이라는 분이 실제로 위와 같이 답을 했으니 당시 선비들의 똥배짱도 알만 합니다. (자신의 실정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해답을 보고 광해군이 졸라 화를 내며 "탈락시켜!!" 했는데, 영의정 이덕형, 좌의정 이항복 등이 막 말려서 무마되었다는 후일담이 책에 나온다.)

 

 

 

과거시험에는 문과, 무과, 잡과가 있다고 합니다. 문과는 다시 하급관리를 뽑는 소과와 고급관리를 뽑는 대과로 나누고, 이 대과에서는 33명을 뽑는다고 합니다. 이 33명을 대상으로 등수를 결정하는 최종 시험을 보는데, 문제는 왕이 내고 선비들이 답을 합니다. 물론 주관식 논술 시험입니다. 이를 책문이라고 합니다. 이 책은 조선 왕들의 출제한 12개의 문제와 선비의 답, 그리고 책문에 대한 저자의 풀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럼 과거 시험의 최종 논술 문제들을 한번 볼까요?

 

 

 

중종 : 술의 폐해를 논하라.

김구 : 마음이 아니라 법으로만 금지해서 그렇습니다.

 

 

명종 : 나라를 망치지 않으려면 왕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김구 : 진리를 탐구하고 소인을 가려내야 합니다.

 

 

중종 : 그대가 공자라면 어떻게 정치를 하겠는가.

조광조 : 옛날이나 지금이나 도가 다르지 않습니다.

 

 

광해군 : 지금 이 나라가 처한 위기를 구제하려면.

조위한 : 겉만 번지르르한 10가지 시책들을 개혁해야 합니다.

 

 

선조 : 정벌이냐 화친이냐.

박광전 : 정벌은 힘, 화친은 형세에 달려 있습니다.

 

 

중종 : 외교관은 어떤 자질을 갖추어야 하는가.

김의정 : 재능보다 덕을 우선해야 합니다.

 

 

명종 : 교육이 가야할 길은 무엇인가.

조종도 : 학문의 진리가 마음을 즐겁게 해야만 합니다.

 

 

세종 : 인재를 어떻게 구할 것인가?

강희맹 : 장점을 취하고 단점을 보완해 쓰소서.

 

 

중종 : 처음부터 끝까지 잘하는 정치란.

권벌 : 쉬울 때 어려움을, 시작할 때 끝을 생각해야 합니다.

 

 

광해군 : 섣달 그믐날의 서글픔, 그 까닭은 무엇인가.

이명한 : 인생은 부싯돌의 불처럼 짧습니다.

 

 

 

 

 

 

위의 물음에서 알 수 있듯이 질문의 주제는 당시의 정치와 경제, 군사, 문화, 사회 등의 전반적인 문제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마지막에 있는 광해군의 질문인데요, 사람의 본성에 관해서도 물었군요. 저도 좀 궁금했습니다. 광해군의 인간미가 엿보입니다. (이명한은 인생이 짧기 때문에 그렇다고 답하며 지금을 열심히 살면 마음에 유감이 없어진다고 해결 방법을 제시했다. 장원급제급 대답이다.) 

 

 

 

왕의 질문과 신하의 대답도 읽을 거리지만 그 책문에 대한 저자의 풀이가 날카롭습니다. 외교관의 자질을 묻는 왕에게 재능보다 덕이라고 대답하는 부분을 풀이하면서 조선과 중국의 관계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저자는 오늘날 대미관계를 대비하는데 조선과 중국의 관계보다 더 종속적이라고 비판합니다. 동맹관계가 아니라 종속관계요. 어쩌면 그렇지 않을까 라고 짐작했는데, 조선 전문가가 그렇다고 하니 더 설득력이 있습니다.

 

 

 

과거 시험의 폐단에 대해서 적은 글도 인상적입니다. 조선은 오로지 과거로만 인재를 뽑았습니다. 그래서 즐거움이나 자기 수양, 혹은 지식의 습득이 목적인 학문이 과거 시험 즉, 자기 출세를 위한 것으로 전락했다는 것입니다. 하여 진정 뜻이 있는 선비는 과거를 보지 않고 시골에서 오로지 글공부만 했을 것입니다. 조선시대에 유독 재야에 실력있는 인재들이 많은 이유도 다 이유가 있습니다. 그래서 조광조나 이이가 시험을 거치지 않고 유능한 인재를 천거하는 방식으로 채용하자고 주장했다고 합니다.

 

 

 

저자는 지금의 고시도 전혀 다르지 않다고 날을 세웁니다. 그렇습니다. 과거도 고시도 나라일을 하는 사람을 뽑는 시험인데 그 사람의 윤리의식이나 역사의식은 전혀 측정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나라의 움직이는 방향키를 잡았을때 어떻게 잘못되는지는 역사를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거창하게 역사까지 들먹이지 않더라도 지금 일부 높으신 분들이 하는 멍청한 짓을 보면 그렇습니다. 

 

 

 

다만 선비들이 대답할 때 열거한 예시들이 거의 다 중국의 일들이라 좀 아쉬웠고(과거 시험에서의 성문종합영어 혹은 수학의 정석이 사서오경인 것을 감안하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거의 모든 질문에 대해 임금이 잘하면 된다는 대답의 나오는 게 좀 우습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이전 임금이 개망나니라서 그랬을듯.) 

 

 

 

자신의 삶에 대한 걱정이 아니라 세상의 잘못된 일을 걱정하는 것이 지식인의 책임이다. 과거에 응시하여 책문을 낸 사람들은 모두 세상을 근심하고 걱정한 지식인들이었다. 사회에 나가면서 책문으로 자신의 포부를 발표한 선비들은, 이 세상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 앞으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나라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가, 사회의 폐단과 부조리를 어떻게 고쳐야 하는가, 하는 이런 물음에 답한 것이다. (p.461)

 

 

 

목숨을 걸고 대답했다는 선비들의 기개를 느낄 수 있습니다. 시대의 지식인임에 분명합니다. 시대를 떠나 지식인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오늘날의 사람들에게도 적용되는 물음입니다. 그리고 문제에 대한 해답은 사서오경이나 기출문제를 달달 외워서 쓸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문제의식을 가지고 깊게 생각하며 다른 사람과 토론하고 직접 글을 써봄으로서 정답에 다가갈 수 있습니다. 제대로 된 시험입니다.

 

 

 

지금의 고위 공무원 시험이 이렇게 바뀌면 참 재미있겠다 싶습니다. 검찰 개혁과 언론 개혁이 시급한 이유에 대해 서술하시오.... 뭐 이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