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국광복군 인면전구공작대 활동지 : 인도 델리 레드 포트

델리 레드 포트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주인도 영국군 총사령부 주둔지로 사용된 곳이다.우리에겐 한국광복군 '인면전구공작대' 활동지로 의미가 크다. 인면은 인도와 버마를 뜻하고 전구는 전투 지역을 말한다. 이를 이어 붙이면 인도 버마 전투 지역에 파견된 공작대가 된다. 인도에 간 광복군, 좀 생소한 이야기이지 않나. 그들은 누구였고 어떻게 인도까지 가게 된 걸까. (30쪽)
생소한 이야기 맞다.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 1943년 8월에 공작대 대장 한지성을 포함해 9명의 광복군이 해방될 때까지 인도에서 활약했다. 이들은 영국군과 연합하여 일본군과 싸웠다. 임시정부가 광복군을 인도까지 보낸 까닭은 2차 세계대전의 참전국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였다고 한다. 연합국 편으로 전쟁에 참여하여 인정을 받으면 해방이 되었을 때 강대국에게 우리의 독립을 강력하게 어필하기가 유리하다고 임시정부는 판단했다. 음, 훌륭한 판단이다. 한지성은 조선의용대로 중국을 누볐고, 광복군의 대장으로 인도에서도 활약했다. 이후 월북했고, 숙청당했다. 이런 연유로 서훈을 받지 못했다. 저자는 이 사실을 안타까워했다.
레드 포트는 타지마할과 함께 무굴 제국의 정점을 보여주는 건축물이다. 세계문화유산이기도 하다. 찾아보니 아직도 그 웅장함을 유지하고 있다. 타지마할과 아그라포트가 있는 곳에서 차로 3시간 정도 거리에 있다. 책에 레드 포트의 빈 성터 사진이 있다. 그 성터 한 곳에 광복군 대원들의 숨결이 담긴 무언가가 있었으면 하는 작가의 바램이 그 사진 속에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 바램은 나의 바램이기도 하다.
2. 독립운동가 김익주 묘소 : 멕시코 멕시코시티 외곽 판테온 돌로레스

멕시코인 부인 사이에서 낳은 제 딸도 한국에서 연수를 받으며 한국 문화를 경험했죠. 그녀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나는 한 번도 조상들의 독립운동에 대해 잊어본 적이 없습니다. 멕시코에서 태어났지만 뿌리는 한국인이죠. 그 이유 하나만으로 지금까지 한국인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같은 핏줄이 아니면 경험할 수 없는 일들이었죠. (89쪽)
독립운동가 김익주의 손자 다빗 킴의 말이다. 사진에서 본 다빗 킴은 그냥 한국 사람이었다. 이민 3세대이니 외형은 한국일지 몰라도 속은 완전히 멕시코인일텐데, 그는 여전히 한국인의 정체성을 지키려고 노력하면서 살고 있었다. 다빗 킴도 멋지고, 다빗 킴을 만나러 그 먼 곳까지 찾아간 작가도 멋지다. 김익주는 애니깽으로 표현되는 멕시코 이민자 중 가장 먼서 성공한 한인이었다.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보냈고, 안창호를 후원했고, 한인들을 돌봤다. 위의 묘소 사진은 책에도 실려 있는데, 국화 한 송이로 묘지 분위가 바뀌었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 작가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한다.
3. 메리다 한인이민사박물관 : 멕시코 유카탄주 메리다

메리다 한인이민사박물관. 이곳은 메리다 지방회 설립 이후 네 번째 회관으로 사용되던 의미 있는 장소다. 1935년 1월 한인 여덟 명이 공동명의로 토지를 구입해 건물을 올리고 지금까지 한인 관련 시설로 사용되고 있다. 이곳에는 조상들의 이민 관련 사진, 서류, 책자 등이 전시돼 있었다. 하지만 한인들이 멕시코에서 맨손으로 일군 업적에 비하면 초라한 수준이었다. 그 모습이 마치 역사를 대하는 우리의 평소 자세와 태도 같아 보여 나도 몰래 입술을 씹게 됐다. (101쪽)
그럼에도 기억하려는 시도는 굽히지 않고 계속되고 있는 점은 희망적이다. 위의 사진은 박물관의 관장님이다. 한인들의 후손이 모두 그렇듯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을 하고 있었다. 작가와 함께 아리랑을 함께 부르는 장면이 책에 나온다. 사진 위쪽에 안창호 사진이 있다. 멕시코에서 가장 사랑받는 독립운동가라고 했다. 그렇다. 안창호는 멕시코 뿐만 아니라 당시 차별과 멸시를 받고 있던 해외 모든 나라 한인들에게 삶의 방향을 제시하고 그들을 돌보려 했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안창호 선생이 드러난다.
4. 독립운동가 호근덕 묘소 : 쿠바 마탄사스 산카를로스 공동묘지

빅토로(호근덕의 아들, 위의 사진 인물)의 까사에 머물 동안 마탄사스 이곳저곳을 촬영했다. 그리고 헤어질 시간이 왔다. 방값과 식사비를 합해 100달러가 넘었다. 달러를 챙겨 그를 찾았다. 빅토르는 알아들을 수 없는 스페인어를 내뱉고는 그냥 자리를 떠버렸다. 잠시 뒤 그의 아들이 왔다. 그는 아버지가 돈을 받지 말라고 하셨다고 했다. 손사래를 쳤다. 이 돈이면 쿠바에서 적은 액수가 아니다. 덩달아 빅토르의 아들도 손사래를 쳤다. 그러면서 그가 말했다. "내가 독립운동 사진을 찍겠다고 네 한국 집에 머물면 넌 어떻게 할거니? 우리 아버지가 너에겐 돈을 받지 않으시겠대...." (199쪽)
호근덕은 쿠바 한인 1세대의 대표 인물이다. 마탄사스 지방회 구제원으로 활동했고, 한인 후세들의 민족교육과 독립운동을 위해 만든 민성국어학교의 교장을 역임했다. 그러면서 대한인국민회를 통해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지원했다. 조선에서 호근덕으로 태어나 쿠바에서 페르난도 호로 생을 마감한 조선의 독립운동가이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생각보다 자료가 많다. 2017년에 <꼬레아노의 꿈 - 쿠바 한인 후손의 이야기>라는 KBS에서 만든 다큐멘터리가 있는데 거기에 상세하게 호근덕을 포함한 쿠바 이민자들 이야기가 상세하게 나와 있다. 그리고 호근덕의 떡대 좋은 손자들 사진도 있다. 흐뭇했다.
5. 쿠바 한인 이민 80주년 기념탑 : 쿠바 마나티 항

마나티 항에서 망향의 한을 달랠 수 있는 곳은 지난 2001년 3월 25일 세워진 '한인 이민 80주년 기념탑'이 유일했다. 대한민국이 있는 서쪽을 향해 서 있는 기념탑엔 띄어쓰기도 맞춤법도 틀린 삐뚤삐뚤한 한인 후예의 손글씨가 음각돼 있다. 넋두리 같기도 하고 애원 같기도 한 한 글자 한 글자를 마음으로 읽어본다.
1921년 3월 25일 이곳 마니띠 항국에 멕시코에서 300여명의 한인동포가 기선 '따마을리빠스'편으로 큐바에 이민으로 왔습니다. 그 후예들은 큐바 각치에 흘 어 쳐 잘 적응하여 살 고있으며, 조상의얼을 기리고 그뿌리를 영원히 기억하 기위해 80년 이되는 오늘 이곳에 기념탑을 세읍니다. 2001년 3월 25일. 큐바 한인회 (254쪽)
임천택은 쿠바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이다. 어릴 때 멕시코로 넘어온 그는 18살에 쿠바로 들어와 애니깽 농장의 노동자로 일하면서 한인 학교를 세워 민족교육에 앞장섰다. 무엇보다 한인 사회의 정체성을 이어나가고자 쿠바 한인들의 이민 기록을 정리한 책인 <큐바이민사>를 썼다. 그의 딸 마르따는 아버지의 책을 근거로 <쿠바의 한국인들>이라는 책을 냈고, 이 책은 2000년에 쿠바 최고 학술 출판상을 수상했다.
임천택의 아들 헤르니모 임의 이야기가 꽤 길게 책에 소개되었다. 그는 카스트로와 함께 아바나 대학 법대를 다녔고, 체 게바라와 함께 쿠바 혁명에 참가했다. 그의 다큐멘터리도 나와 있었다. 이후 쿠바의 한인 사회의 정신적 지주였고, 오랜 기간 한인들을 위해 활동했다. 그런 노력으로 2021년 한인후손문화회관도 생겼다고 한다. 위 사진의 저 기념비도 헤르니모 임이 직접 연필로 디자인했다. 한국을 상징하는 기와 지붕 모양을 넣었다.
6. 애국지사 김종림 기념비 : 미국 캘리포니아 리들리

임시정부와 안창호는 비밀리에 공군 양성을 위한 물밑 작업을 진행해나간다. 이런 상황에 백미의 왕 김종림이 구세주처럼 등장한다. 그는 1920년 2월 새크라멘토 북쪽 윌로우스에 한인 비행사를 키울 땅과 자금을 아낌없이 내놓는다. 우선 비행기 구입과 관련 시설 구축을 위해 2만 달러를 기부한다. 또 매달 운영자금 3천 달러를 후원한다. 당시 훈련기 한 대 가격이 3천 달러 안팎이었던 걸 감안하면 매달 비행기 한 대 값을 운영비로 지원했단 얘기다. 이 일로 임시정부 재무총장 이시영은 김종림에게 감사장을 보낸다. (336쪽)
일제강점기 당시 미국에서 공군 양성을 위한 비행학교를 운영했다. 기획은 안창호, 실무는 노백린(임시정부 군무총장)과 김종림이었다. 윌로우스에는 비행학교 교육장 건물이 아직 남아 있었다. 작가는 국가보훈부 정책자문위원 자격으로 윤석열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한국 공군의 시작점인 이 터와 건물을 매입하여 후손들이 기릴 만한 공간으로 만들어줄 것을 부탁했다. 윤석열은 "너무 비싸면 못사고." 라고 했다. 경향신문 인터뷰에 이 기사가 실렸는데, 그 일로 정부에 찍혔다는 이야기가 페이스북에 실려 있었다. 작가에게 참 장하다고 칭찬을 못해줄 망정, 이런 식으로 실망감과 허탈감을 주다니, 못난 정부다. 화가 난다.
7. 장인환 전명운 의거지 : 미국 샌프란시스코 페리 부두

그런데 사건 발생부터 일단락까지 과정 중 궁금증이 하나 생긴다. 장인환과 전명운, 그들은 과연 서로를 모르는 사이였을까. 서로를 알지 못했던 청년 둘이 똑같은 시간에 총을 들고 스티븐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너무 드라마틱하지 않나. 사건 직후 샌프란시스코 경찰은 두 사람이 공모했는지를 놓고 수사한다. 하지만 장인환과 전명운은 모두 사전 모의가 없었음을 강력히 주장한다. 경찰은 공모 혐의에 대해선 증거불충분으로 무혐의 결론을 내린다. (367쪽)
1908년 3월 23일, 33살의 장인환과 25살의 전명운은 샌프란시스코 페리 부두에서 친일파 스티븐슨을 사살했다. 미국 한인 독립운동 역사의 맨 위에 오를 정도의 쾌거였다. 책은 의거 이후 두 사람의 여생에 대해서도 비교적 상세히 기술했다. 거의 모든 독립운동가가 그랬던 비극으로 끝난다. 저기 보이는 건물 한켠에 두 사람을 기리는 작은 동판이라도 있었으면 참 좋으련만.
8. 독립운동가 양주은 묘소 : 미국 샌프란시스코 Cypress Lawn Cemetery

이렇듯 그에게 독립운동은 기쁨이었고 어려움에 처한 동포와 유학생을 보살피는 일은 사명이었다. 양주은은 '의인'이란 단어에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그의 묘석은 주변에서 가장 키가 작았다. 거기엔 생몰 연대와 이름 그리고 작은 얼굴만이 새겨져 있었다. 더없이 소박하고 수수한 모습이었다. 앞에 나서길 꺼렸고 뒤에서 돕기를 반겼던 의인, 항상 낮은 데로 임했던, 그는 그런 사람이었고 그의 죽음도 그런 모습이었다. 작은 묘비가 그의 삶을 고스란히 정의하는 것만 같다. (377쪽)
양주은은 1913년 안창호가 흥사단을 창립할 때 단원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단우 번호는 6번이었고, 평생 흥사단원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도산 안창호는 그의 벗이자 스승이었다. 그는 독립운동과 함께 샌프란시스코 다운타운에서 40년간 레스토랑을 운영하면서 독립자금을 보냈고 동포들을 도왔다. 당시 어려움에 있는 한인들 중 그의 신세를 지지 않은 이가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런 분들이야말로 알려지지 않은, 그러나 널리 알려야 하는 진정한 독립운동가가 아닌가. 나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 작가의 책이 값진 이유 중의 하나다.
9. 독립운동가 황기환 묘소 : 미국 뉴욕 퀸스 Mount Olivet Cemetery

그러다 정말 '대한인 황긔환지묘 민국오년사월십팔일영면'이라고 두 줄로 쓰여 있는 50센티미터도 안 돼 보이는 작은 비석을 발견했다. 황기환이 남몰래 한 세기 가까이 잠들어 있던 장소였다. "아이고! 선생님. 여기 계셨군요?" 나도 몰래 낮은 목소리로 되뇌었다. 절을 두 번 올렸다. 긴 외로움과 사투하던 한 영웅과의 만남이었다. 설움이 올라와 목 안 여기저기에 엉겨 붙기 시작했다. 왈칵 감정이 쏟아져 나올 것 같이 꿀떡꿀떡 침을 삼켰다. (417쪽)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주인공 유진 초이가 황기환의 일생을 모티브로 해서 우리에게 알려졌다. 10대 후반에 하와이 이민 길에 올라 1차 세계대전에 미군으로 참전했다. 임시정부 파리위원부 서기장으로도 활약했고, 파리 강화회의에 한국 독립을 청원하기 위한 대표단으로 김규식, 조소앙 등과 함께 참석했다. 무르만스크의 철도 공사 노동자들이 프랑스에 정착하도록 한 인물도 황기환이다. 2023년 4월 한국으로 봉환되어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책에 나오는 많은 인물과 이야기가 처음 보는 내용이었다. 헐, 이런 사실이 있었단 말이야? 하면서 관련 내용들을 인터넷으로 찾아보기도 하고, 그래서 그들의 이야기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클릭을 해댔다. 작가의 페이스북을 넘겼으며 브런치스토리와 네이버블로그도 넘나들었다. 정부에게 찍힌 계기가 된 경향신문의 인터뷰도 읽었고, 작가의 다른 기사들도 들여다봤다. 울컥했고, 화도 냈고, 공감했다.
책 날개의 최태성 선생의 말처럼 역사는 기억하지 않으면 더 이상 역사가 아니다. 기억하려면 기록해야 한다. 그리고 그 기록의 맨 앞에 작가가 있다. 독립운동가의 자취가 모두 사라지고 없는 공간에서 그는 기억을 붙잡는다. 그리고 그 기억을 한 장의 사진에 꾸역꾸역 집어넣는다. 힘들고 어렵지만 그는 끈질기게 매달린다.
좋은 책을 만든 작가에게 존경과 고마움을 전한다. 작가의 이런 노력과 활동을 진심으로 응원한다. 부디 냉담해지지 말고 지치지 말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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