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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

사형을 구형해 주시니 영광입니다 : 김현서 <김병곤 평전>

by 개락당 대표 2025. 2. 18.

 

영광입니다!

 

검찰관님, 재판관님. 영광입니다. 사실 저는 유신 치하에서 생명을 잃고 삶의 길을 빼앗긴 민중들에게 줄 것이 아무것도 없어 걱정하던 차에 이 젊은 목숨을 기꺼이 바칠 기회를 주시니 고마운 마음 이를 데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213쪽)

 

 

 

 

오래전에 이 책을 데리고 와서 두었는데, 읽지 못했습니다. 나는 와 안읽는데? 하고 책이 자꾸 쳐다봤습니다. 쉬이 읽을 책이 아니라서 손이 안갔을까요? 책이 보내는 눈길이 심상치 않아 책을 끼고 도서관에 갔습니다. 

 

김병곤 열사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게 없습니다. 우리 고장 출신에, 민청학련 사건으로 사형을 선고 받았다는 것, 그리고 그 법정에서 현대사에 길이 남을 최후 진술(위의 글)을 했다는 것 정도입니다. 이 사실을 안 지도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알고 지내는 동생 창영이가 김병곤 열사 이야기를 하도 해서 귀동냥으로 들었습니다. (창영이도 김병곤 열사와 같이 한림면 퇴은 마을 출신이다. 자기 동네 사람이라고 어찌나 자랑을 하던지....).

 

읽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책에 흠뻑 빠졌습니다. 당시의 시대상을 정확하게 묘사했으며 학생 운동의 역사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설명했습니다. 김병곤 열사가 가담한 단체나 활동과 그 의의, 그리고 관련된 모임과 사람들에 대한 묘사가 사실감이 넘쳤습니다. 마치 열사의 옆에서 계속 관찰한 것처럼 서술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행동이 학생 운동과 민주화 운동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으며 그 결과로 어떤 사건이 일어났는지도 정확하게 꽤뚫고 있었습니다. 책은 2017년에 나왔는데, 김병곤 열사가 세상을 떠난지 27년 되던 해입니다. 한참의 시간을 지나 책을 쓴 게 분명한데 글이 선명했습니다. 작가 '김현서'를 따로 검색해보기도 했습니다. 작가가 쓴 다른 책으로 <이화여자대학교 학생운동사>가 있네요. 학생 운동과 민주화 운동의 전문가라 짐작했는데, 역시 그렇군요.

 

문헌적이고 개괄적인 일반 평전과는 달리 문학성과 해설이 가미된 평전입니다. 

 

 

민중의 고통을 함께 하고 그 고통을 제거하는 데 생을 걸겠다.

 

1970년대 한국에서 몸을 낮추어 현장으로 들어가는 것을 운동의 시작으로 삼았던 청년들 중 일부는 자신이 갔던 그 곳에서 민중의 모습을 발견하고 자신의 삶을 그들과 함께 하기도 했다. 그들 중에는 가난한 집안 출신들도 많았고, 사회의 최하층을 이루는 극빈층인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가난하다는 것은 당시의 학생들에게 큰 변별력의 기준이 되지 않았으니 개천에서 난 용이 다시 개천으로 돌아간 셈이다. 계급의 구조와 사다리가 지금처럼 강고하지 않고 비교적 유동적이었던 당시에 학벌이 열어 주는 계급의 사다리를 올라가기 않고 스스로 거두어들이거나 걸어 내려온 사람들은 어쨌거나 평범한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 평범하지 않음이 꼭 평생을 노동자와 함께 하는 삶이 아니라 할지라도 대부분의 청년들과는 다른 그들의 선택은 선택 이후의 삶이 더더욱 지난했다는 점에서 삶의 한 전범이 될 만했다. (152쪽)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는 그의 저서 <시민의 불복종>에서 '불의한 시대에 의로운 이가 갈 곳은 감옥뿐'이라고 했지만 서른셋의 나이에 다섯 번째로감옥을 살게 된 김병곤의 경험은 한국 민주화의 지난함을, 그리고 그 고난에 꺽이지 않는 저항의 험난함을 말해 주었다. 그러나 감옥체질이라는 말처럼 그는 다섯 번째의 수감생활에 잘 적응해 나갔다. 아내 박문숙의 말을 빌리면, "김병곤 씨 면회 가면 하루 종일 감방에 앉아서 그것만 조사하고 있는지 면회할 때마다 누구는 러닝, 팬티가 없고 누구는 영치금이 없으니 넣어 주라."고 했다. 당시 민주화운동을 하던 학생들이나 인사들이 구속되면 면회가 어려운 사람들은 서로 명단을 공유해 면회를 가주기도 했는데, 민주화가족이라는 대의와 연대감이 이들을 하나로 묶어주었다. (392쪽)

 

 

책에는 7,80년대 민주화 운동에 온몸을 던졌던 많은 투사들이 나옵니다. 같은 김해 한림면 출신인 장기표 선생은 고향에 내려올 때마다 김병곤 열사의 집에 들렀다고 합니다. 1978년 긴급조치 위반으로 광주교도소에서 함께 수감 생활을 한 리영희 선생도 나옵니다. 선생은 김병곤 열사에 대해 인격적으로 훌륭했다고 평했습니다. 1971년 광주대단지 사건도 자세하게 나옵니다. 대학생의 신분으로 그 사건을 직접 목격하고 민중에게 쓸모 있는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김병곤 열사가 사형 선고를 받은 민청학련 사건입니다. 박정희 정권 최대의 조작 사건이며 180명이 구속되었고, 그 중 김병곤 열사를 비롯하여 이철, 유인태, 김현배, 김지하, 여정남(인혁당재건위 사건으로 사형 집행) 등 6명이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김병곤은 사형 선고를 받은 이들 중 가장 어렸습니다. 민청학련의 배후로 인민혁명당 세력이 있었다고 조작해서 8명을 사형으로 구형했습니다. 이들은 이듬해 바로 형장의 이슬로 떠났습니다. 그리고 민청학련의 변호사인 강신옥 선생이 재판 중에 구속되기도 했습니다. 

 

1980년 서울역 회군에 자세하게 나옵니다. 이때 보여준 학생운동의 한계는 시대적 한계라고 저자는 말했습니다. 87년 6월 항쟁이 민주화에 대한 시민들의 열망이 구체적이었고, 그것을 추진할 운동 주체들의 결집된 힘이 있었기에 성공했고, 80년 봄의 민주화 운동은 그만한 조직이 갖추어지지 못했기에 한계가 있었다고 설명했습니다. 회사 생활을 하던 김병곤에게 손을 내미는 김근태 민청련 의장도 나오구요, 민청련 활동으로 함께 구속되어 극심한 고문을 받아 평생 후유증을 앓았던 이을호 선생도 나옵니다. 

 

다섯 번째 수감인 춘천교도소에서 심한 고문을 받아 몸이 상합니다. 출옥을 했지만 몸을 추스리지도 않고 다시 민주화 운동에 뛰어듭니다. 1987년 민주화 바람이 드세게 부니 몸을 사리지 않습니다. 다시 감옥에 갑니다. 이제 그의 몸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이르렀습니다. 조금만 자신의 몸을 돌봤다면 한창인 나이에 세상을 떠나는 비극을 겪지 않아도 되었고, 그랬다면 이 땅의 민중들을 위해 더 많은 일들을 했을텐데요. 참 아쉽습니다.

 

책을 다 읽고 해반천에 있는 김병곤 열사 추모 조형물을 보러 갔습니다. 자주 지나다녔는데, 책을 읽고 난 후에 다시 보니 역시 새롭습니다.

 

 

 

 

 

 

 

 

 

 

 

 

당시 민주화 운동에 몸을 바친 이들은 작가의 말처럼 스스로 계급의 사다리를 걸어 내려온 사람들입니다. 내 한 몸 편히 살 수 있는 길을 버리고 역사에 몸을 맡겼습니다. 그들에게 진심으로 존경의 마음을 드립니다. 하지만 당시 민주화 운동에 몸을 담은 사람들 중에는 이해할 수 없는 선택으로 지금의 모습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김문수, 원희룡 같은 인물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심지어 지금의 행태로 과거의 훌륭했던 모습이 바래졌습니다. 인간의 이상은 인간의 본능을 이길 수 없는 걸까요? 씁쓸함이 계속 입안을 맴돕니다.

 

한 인물이 태어나서부터 사망할 때까지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의 인격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삶의 고비에서 어떤 선택을 했는지, 어떤 고민을 하고 어떻게 성숙해갔는지를 보았습니다. 그와 함께 불의의 저항한 인물들을 만났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김산의 <아리랑>이 떠올랐습니다. 인간의 내면이 단단해지고 성숙해지는 과정이 생생하게 나와서 더욱 인물에 몰입했습니다. 김병곤 열사와 같은 크고 명확하고 아름다운 신념이 아니더라도 지금의 시대를 사는 시민이 가져야 할 올바른 정신에 대해서도 곱씹습니다.

 

책은 70년대와 80년대 민주화 운동의 교과서라 해도 손색이 전혀 없습니다. 좋은 책을 읽었습니다. 특히 김현서 작가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