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 아내, 엄마가 들려주는 전쟁 이야기 :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무슨 제목이 이래? 그럼 어떤 얼굴을 하고 있다는 거지? 제목만 보고는 무슨 책인지 감이 안 옵니다. 예전에 함께 공부하던 지인이 꼭 읽어보라고 추천해줬지만 책을 펴기 전엔 이렇게 잔인하고 슬프고 무겁고 아름다운 이야기인 줄 몰랐습니다. 이 책은 물론 전쟁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여자들의 전쟁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고보니 책에 나오는 수많은 주인공들은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과 싸웠던 러시아 여성입니다.
전쟁에서 흔히 등장하는 작전이 어떻고, 승리가 어떻고, 영웅이 어떻고, 무기가 어떻다는 얘기는 하나도 안나옵니다.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놓인 여자들이 보고 느낀 건 내가 여태 상상한 전쟁과는 완전 딴판이었습니다. 무어라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저 일상이 있었고, 사람이 있었고, 꿈이 있었고, 사랑이 있었습니다.
김훈의 <자전거 여행>에 설요의 시가 나옵니다. 설요는 신라 시대의 젊은 여승입니다. 소녀의 나이에 속세를 떠나 중이 되겠다고 절에 들어간거죠. 지금으로 치면 여고생쯤 되었겠지요. 하루는 봄 산에 허드러지게 핀 꽃을 보고 그동안 갈고 닦았던 마음이 허물어집니다. 시 하나 남겨 놓고 속세로 내려옵니다.
꽃 피어 봄 마음 이리 설레니
아, 이 젊음을 어찌할거나
김훈은 이를 대책 없는 생의 충동이라 했습니다. 스무 살 소녀가 꽃 피는 걸 보고 느끼는 생의 충동은 대책이 없고 감당할 수 없는 그 무엇이겠지요.
전쟁에 간 열여덟, 열아홉 꽃다운 나이의 소녀들의 글을 읽으면서 저 설요의 시가 떠올랐습니다. 지금 딸의 나이가 열여덟이니 들이가 전쟁에 나갔다고 감정이입을 해보니 그네들의 말이 더 실감나게 전달되었습니다. 전쟁이라는 시궁창 속에서 피어나는 소녀들의 감성, 생의 충동은 아름답고 싱싱했으며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캠프로 돌아왔어. 지휘관이 우리를 모두 정렬시키더니 나를 앞으로 불렀어. 앞으로 나갔지..... 그런데 그만 내 총부리에 제비꽃이 매달려 있다는 걸 깜빡했지 뭐야. 지휘관이 나를 힐난했어. "군인은 반드시 군인다워야 한다. 군인은 꽃이나 따서 모으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지금이 어느 때인데 꽃이나 꺾고 다니는지, 지휘관으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안됐던 거지. 그래, 남자들로선 이해가 안 되는 일이지.....
하지만 나는 제비꽃을 버리지 않았어. 가만히 제비꽃을 풀어서 주머니에 넣었지. 그 일로 나는 징계를 받고 세 번 더 추가 임무를 수행해야 했어..... (p.135)
대위는 아주 미남이었어. 우리, 소녀병사들은 사실 다 조금씩은 대위를 좋아하는 마음이 있었거든. 하지만 대위는 우리에게 전쟁터에서 필요한 건, 군인, 오로지 군인이라고 했지. 군인만 필요하다고..... 아직은 더 예쁘고 싶었는데.....
나는 전쟁 내내 다리를 다칠까봐 겁이 났어. 나는 다리가 예뻤거든. 남자들이야 다리가 어찌되든 무슨 상관이겠어? 남자들이 설사 다리를 잃는다 해도 그렇게 무서운 일이 아니었지. 어쨌든 영웅이 될 테니까. 결혼도 문제없고! 하지만 여자가 다리병신이 되면, 그걸로 인생은 끝난 거야. 여자의 운명이지..... (p.340)
전쟁이라는 무지막지한 상황에서도 여자들은 병사라기 보다는 한 명의 소녀이고 여자이고 어머니였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자신이 보고 경험한 것에 자신들의 감정을 실었고, 그 감정에 충실했습니다. 그 소녀 병사들은 이젠 할머니가 되어 당시의 상황을 회고합니다. 전쟁이라는 무시무시하고 처참한 상황을 이야기하면서도 그 속에는 어딘가 낭만이 느껴졌습니다.
날마다..... 눈앞에서 보면서도..... 받아들일 수가 없었어. 젋고 잘생긴 남자가 죽어간다는 현실을..... 죽어가는 이에게..... 입맞춤을 해주고 싶었지. 죽어가는 이를 위해 의사로서 아무것도 해줄 게 없다면 여자로서라도 뭔가 해주고 싶었어. 웃어주고,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손이라도 잡아주고 싶었어.....
전쟁이 끝나고 숱한 해가 지났을 땐데 어떤 남자가 나한테 당신의 환한 미소를 기억하고 있다고 고백하더군. 나야 당연히 그 사람이 기억나지 않았지. 수많은 부상병들 중 한 명이었으니까. 그런데 그 사람은 나한테 그러는 거야. 내 미소가 자기를 이른바 저 세상에서 이 세상의 삶으로 돌아오게 했다고..... 여인의 미소가..... (p.409)
마침내 승리의 날! 친구들이 나보고 뭐가 되고 싶으냐고 물었어. 전쟁 내내 우리는 배가 고팠거든..... 이러다 죽겠다 싶을 정도로.....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배불리 먹는 게 소원이었지. 나는 꿈이 하나 있었어. 전쟁이 끝나고 첫 월급을 받으면 쿠키 한 상자를 사는 것.
또 친구들이 결혼은 언제 할 거냐 물으면 이렇게 대답했어. "되도록 빨리....." 키스를 해보는 것도 내 꿈이었거든. 정말 죽도록 키스가 하고 싶은 거야..... 그리고 노래도 하고 싶었지. 노래하기! 그래, 그랬어..... (p.529)
저자는 벨라루스라는 나라의 작가입니다. 조금 검색을 해보니 2015년에 노벨 문학상까지 받은 아주 저명한 분입니다. 전쟁을 경험한 러시아 여성 200여명의 목소리를 담은 게 이 책이고, 체르노빌 사태 때 재난을 당한 벨라루스 사람들의 이야기인 <체르노빌의 목소리>라는 책도 썼습니다. 내용이 무척 궁금해집니다.
사진은 저자의 홈페이지(http://alexievich.info/en/)에서 가져왔습니다.
여자의 관점에서 본 전쟁 이야기는 첨 읽었습니다. 근데 어떤 전쟁이야기보다 전쟁을 더 잘 보여주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녀들의 본 전쟁은 더 현실적이었고 더 잔혹하고 더 시궁창입니다. 위에 낭만적이고 희망적인 이야기를 옮겨서 그렇지 책의 대부분은 참담한 전쟁의 실상을 증언하고 있었습니다. 전쟁에 대한 어떤 글보다 생생히 와닿았습니다. 전쟁의 진짜 알맹이를 들여다 본 듯 합니다.
이들의 증언을 읽으며 자연스레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이 생각납니다. 그 절절하고도 생생한 목소리들요. 근데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같은 사건은 꽤 오래 전의 이야기입니다. 그럼에도 이런 책들이 계속 소개되고 읽히는 이유는 그걸 기억하려는 사람들의 의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직도 지구 저편에서는 총성과 테러가 일어나고 있구요. 전쟁의 댓가로 우리가 무얼 치렀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걸 쉽게 잊어버리고 생각도 하지 않으려는 내 의지를 다시 벼리는 좋은 글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전쟁 속에서 보여준 소녀들의 생의 충동은 참 아름다웠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이 책은 읽을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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