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 동무는 꼭 살아서 돌아가주세요.
그리고 역사의 수레바뀌에 깔려 죽어간 우리들의 삶을 기록해주세요.
작가는 1950년 6월 29일 조선중앙통신사의 기자로 전주 지사에 내려갑니다. 9월에 조선노동당 전북 도당의 명령으로 엽운산 골짜기에 들어가 '조선노동당 전북도당 유격사령부' 대원, 즉 빨치산이 됩니다. 그의 나이 28살이었습니다. 이 때부터 산 속 생활이 시작되어 1952년 3월 지리산 기슭 덕선에서 체포될 때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는 빨치산의 체험을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꼈으나 정상적인 사회 생활의 어려움, 그리고 그 악몽같았던 기억에서 멀어지고자 하는 잠재적인 본능으로 쉽게 시작하지 못합니다. 그러다 20여 년의 시간이 흘러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합니다. 죽음의 고비를 넘긴 그는 '내가 입을 다물면 지리산 빨치산은 영영 잊혀진다.'는 절박함이 싹틉니다. 퇴원하는 즉시 남부군을 쓰기 시작해 완성합니다. 하지만 그 원고는 군부 독재의 시대라 세상에 나오지 못합니다. 그리고 10년이 더 흐른 1988년에 드디어 빛을 봅니다. 산을 내려온지 36년만입니다.
그날 밤 피아골에서는 춤의 축제가 벌어졌다. 풀밭에 모닥불을 피워 놓고 그 둘레를 돌며 '카투사의 노래'와 박수에 맞춰, 남녀 대원들이 러시아식 포크 댄스를 추며 흥을 돋우었다. 피어오르는 불빛을 받아 더욱 괴이하게 보이는 몰골들의 남녀가 발을 굴러가며 춤을 추는 광경은 소름이 끼치도록 야성적이면서 흥겨웠다. (400쪽)
정지아 작가의 <빨치산의 딸>을 읽고, 빨치산의 그 로맨티시즘에 이끌려 남부군을 찾았습니다. 아주 오래 전 읽었습니다만 그 기억은 다 날아가고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처음 읽는 것처럼 책에 빨려 들어갔습니다. 이럴 땐 망각이 오히려 도움이 되네요.
남부군의 정식 호칭은 조민인민유격대 독립 제4지대입니다. 1948년 10월의 여수 순천 사건 이후 반란군들이 이현상의 지휘하에 지리산에 은거한 것을 시작으로, 6.25 전쟁이 일어나고 남한 출신의 좌익 활동가들과 일부 북한의 낙오병들이 합류하여 덕유산과 지리산 일대에서 국군에 맞서 게릴라 작전을 펼쳤습니다.
그들은 북한군으로 국군에 맞서 싸웠습니다. 하지만 북에서도 철저히 버림받은 조직이었습니다. 책에서도 남한 땅에서 의미 없이 죽도록 내버려둔 북한 체제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손으로 좋은 세상을 만들어보자고 흔쾌히 빨치산이 되었지만, 남쪽에서도 북쪽에서도 모두 외면하였고, 결국 대부분의 빨치산들은 역사의 수레바퀴 아래에 깔려 죽었습니다.
영화도 찾아보았습니다. 유튜브의 한국고전영화 채널에 올라와 있었습니다. 영화 <태백산맥>을 보고 난 후 <남부군>을 보았다고 기억하는데, 남부군은 1990년에, 태백산맥은 1994년에 나왔네요. 책이 나온지 2년만에 영화가 개봉했으니, 이 책의 파급력을 알 수 있습니다. 영화에서는 젊은 시절 안성기와 그보더 훨씬 더 젊은 최민수, 22살 리즈 시절의 최진실, 전성기의 이혜영과 코흘리개 임창정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영화의 전반부에서는 빨치산들의 로망을 보여줍니다. 춥고 배고프고 힘들지만 희망이 있었고 사랑이 있어서 살아갈 수 있었던 그들의 모습이 아름다웠습니다. 특히나 남녀 빨치산들이 지리산의 여름 계곡에서 목욕하는 모습은 유토피아를 연상케 했습니다. 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영화는 빨치산의 괴멸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먹을 것도 숨을 곳도 없는 눈보라 치는 지리산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모습은 보기가 힘들 정도였습니다.
그대는 나와 운명을 달리하는 까닭에
아직 내 마음은 불타오르나 다만
그대 가슴엔 평화만이 있으라
- 눈 내리는 날, 섬진강가에서 민자를 보내며 - 태가 (153쪽)
위의 글은 작가가 간호병인 민자와 애틋한 만남 후 헤어질 때 민자에게 써준 글입니다. 바이런의 시라고 합니다. 작가는 1952년에 잡혔고 빨치산은 거의 궤멸되고 있었습니다. 1년 후인 1953년 9월 지리산 화개동천 빗점골에서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은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하지만 몇몇이 살아남아 명맥을 유지하였고, 그로부터 10년 후 마지막 빨치산이라 불리는 정순덕이 생포되고, 빨치산은 사라졌습니다.
빨치산은 세 번 죽는다고 했습니다. 맞아 죽고, 굶어 죽고, 얼어 죽는 세 가지 죽음입니다. 빨치산이 살아남기 힘듦을 작가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이념이 다른 사람들이 총부리를 겨누고 서로 죽이는 전쟁 이야기이지만, 책과 영화 모두 인간의 잔혹함은 보이지 않습니다. 복수를 위해 상대를 무자비하게 죽인다거나 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습니다. 서로 죽이는 전투가 나오지만, 마치 감정이 배제된 흑백의 그림을 보는 것 같습니다. 영화에서 국군과 빨치산이 대치하며 서로 욕을 해대는 장면은 장터에서 오랜만에 만난 친한 친구들처럼 정겨웠습니다.
작가의 이 기록 문학은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합니다. 이 책이 없었더라면 빨치산은 어쩌면 공비토벌작전의 그 '공비'로만 남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더없이 인간적인 그들의 모습을 이 책을 통해 볼 수 있었습니다. 빨치산을 재조명하고, 그들도 우리 역사에서 평가받아야할 사람들이라는 걸 보여주었습니다. 그 덕에 이후에 쏟아지는 빨치산에 관한 글들이 제대로 대중 속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 그들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 지 여전히 어렵습니다. 이태 작가의 눈으로 보았던 빨치산이나 정지영 감독이 그려낸 빨치산은 좀 더 나은 세상을 바라는 순수한 인간 군상 그 자체였습니다. 작가나 감독은 모두 여기에 촛점을 맞췄습니다. 빨치산이 가졌던 신념, 그들이 나누었던 대화, 그들이 품었던 사랑, 그들의 모든 죽음이 한낱 덧없슴으로 결론지어지는 것 같아 슬펐습니다.
어떻게 살아도 비극이 되는 시대에, 자신의 신념을 위해 최선을 다했던 빨치산의 모습은 오직 아름다웠노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저의 눈에는 그렇게 비춰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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