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최재형 고택 : 러시아 우수리스크
이범윤은 최재형과의 첫 대면에서 고종이 하사한 마패를 내보이며 지위로 상대를 억누르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이런 장면은 이범윤의 성품을 대략 추측케 하는데, 처음부터 조선 황실의 피가 흐르는 자신과 최재형을 동격으로 볼 수 없다고 생각한 것 같다. 불행하게도 이범윤과 최재형의 미묘한 신경전은 봉합될 기미 없이 악화일로를 겪게 된다. (75쪽)
연해주의 독립운동사에서 어딜 가나 나오는 사람이 있는데, '페치카'라 불리는 최재형이다. 페치카는 러시아어로 난로라는 말인데, 연해주의 거의 모든 한인과 독립운동 뒤에는 최재형이 있었다.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저격에 총을 구해준 이도 최재형이다. 이범윤은 러시아 공사인 이범진의 동생이며 당시 간도관리사였다. 소설 <범도>에서 최재형과 함께 연해주의 실력자로 나오는데, 이 책에서는 위와 같이 평했다. 최재형은 1920년 일본군이 옥죄어오자 살만큼 살았다며 가족들을 피신시키고 잡혀 재판없이 총살로 생을 마감했다.
2. 단지동맹 기념비 : 러시아 크라스키노 (연추)
1909년 안중근 의사를 비롯한 결사동기 김기용, 백규삼, 황병길, 조응순, 강순기, 강창두, 정원주, 박봉석, 유치홍, 김백춘, 김천화 등 12인은 이곳 크라스키노(연추하리) 마을에서 조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위하여 단지동맹하다. 이들은 태극기를 펼쳐놓고 각기 왼손 무명지를 잘라 생동하는 선혈로 대한독립이라 쓰고 대한민국 만세를 삼창하다. (85쪽)
얼마 전 개봉한 영화 <하얼빈>에서 적군의 포로를 안중근이 살려주고, 그게 부메랑이 되어 대패하고 안중근 혼자 돌아가는 장면이 있는데, 이 책에서도 그 이야기가 나온다. 이 일로 싸운 안중근과 다툰 이가 엄인섭(밀정)인데 영화에서는 이동욱이다. 엄인섭은 이 책의 15만원 탈취 의거 부분에서도 자세히 나온다. 단지동맹 기념비 일대의 사진은 책에 실린 작가의 사진이 더 나은데, 인터넷에 나오지 않아 위키백과의 사진을 실었다. 너른 들에 우뚝 솟아 있는 비의 심플함이 단지동맹의 비장함을 더욱 드러낸다.
3. 한인이주기념비 : 러시아 크라스키노 (지신허)
마치 안테나처럼 어떤 신호를 보내고 받듯 우두커니 서 있는 기념비. 그 모습은 초소 지붕에서 휴대폰 신호를 잡으려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비석이 보내는 신호는 한국 사람이라면 해석이 가능한 주파수를 가지고 있을 거다. 이는 어떤 끌림이다. 자기력 같은 그 힘은 사람을 불러 모으고 연상을 돕는다. 그래서 비석 하나를 세우는 일은 잠자던 지박령을 깨워 강력한 아우라를 발산시키는 일이다. (108쪽)
이 비석이 서있는 곳은 함경도 사람들이 두만강을 넘어 정착한 연해주 최초의 한인 마을이 있던 자리다. 마을 이름은 지신허라고 했다. 한때는 1700여 명의 한인들이 모여 살던 큰 마을이었으나 지금은 옛터만 남아있다. 놀라운 건 이 비를 가수 서태지가 자비로 세웠다는 사실이다. 2004년 블라디보스토크 공연 뒤의 일이라고 한다. 역시 한 분야의 고트는 다르다. 이 기념비는 사유지에 있는데, 작가는 기어이 찾아간다. 서태지도 멋지고 작가도 멋지다.
4. 신한촌 기념비 :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흔적이라면 서울 거리란 뜻의 '서울 스카야' 표지판 하나가 전부다. 그럼에도 카메라를 거둘 수 없던 까닭은 이 공간이 품고 있는 기억 때문이다. 좀 봐달라고 생떼를 쓸 수 있는 건 여기에 기억을 잇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그 앎은 실존에 이르는 길이 된다. 실존은 과거의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 아닌 지금의 나를 계속 깨우쳐 나가는 행위다. 그런 맥락에서 현재 신한촌을 기록하는 건 100여 년의 시간을 잇는 하나의 실존적 행위인 셈이다. (132쪽)
신한촌은 블라디보스토크의 코리아타운이었다. 1915년 무려 1만 명의 한인이 거주했다고 한다. 여기서 한인들은 독립만세를 부르고, 권업회를 만들고, 한민학교를 세우고, 노인동맹단도 만들었다. 한인들은 볼세비키 적군을 도와 일본군과 싸웠다. 신한촌에 살던 무고한 민간인이 학살 당하기도 했다. 그러던 코리아타운이 1937년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로 텅 비게 되고 결국 폐허로 변한다. 작가는 조상들의 고향에 덩그러이 서 있는 이 기념비를 보며 터분하고 애달픈 광경이지만, 그러면서도 추모할 장소가 있어 다행이라고 했다. 그렇다. 아무것도 없는 것과 이렇게 기념비가 있는 것은 천지 차이다.
5. 이범진 공사 순국비 : 러시아 샹트페테르부르크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 대한제국이 망국에 이른다. 이 재앙 앞에 이범진은 10월경 모든 재산을 정리해 연해주 한인 사회와 이범윤, 이상설, 유인석, 안중근의 부인, 민긍호의 부인 등에게 독립자금을 전달한다. 또 미국 동포들이 운영하던 신한민보사, 한인소학교 등에 자금을 보낸다. 이때 그가 내놓은 자금은 1만 2,000루블이었다. 이범진에게는 빈곤이 벗처럼 남겨진다. 그는 마지막 계획으로 자신을 파괴하고자 한다. 최후의 항거였다. (182쪽)
이 책을 읽기 전엔 이범진은 이위종의 아버지로 알고 있었다. 이 책을 읽고 난 후엔 오히려 이위종이 이범진의 아들이 되었다. 누가 더 대단한지 가름하기 어려웠다. 위대한 부자父子, 훌륭한 독립운동가였다. 이범진 선생의 재발견이다. 이범진은 러시아 초대 공사였고, 공사관이 폐쇄된 이후에도 러시아에 남아 독립운동을 물밑으로 도왔다. 헤이그 특사 뿐만 아니라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의 배후에도 있었다. 이 일로 선생의 장남 이기종(이위종의 형)이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다. 그리고 대한제국이 망하자 선생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2023년 말에 샹트페테르부르크 대한민국 총영사관 1층에 이범진 공사 기념관을 만들었다. 이범진과 이위종, 꼭 기억해야 할 위대한 독립운동가다.
6. 독립운동가 최봉설 묘소 : 카자흐스탄 쉼켄트
1920년 철혈광복단 단원 윤준희, 임국정, 최봉설, 박웅세, 한상호, 김준 등 여섯 명은 1월 4일, 중국 용정에서 일제가 세운 조선은행의 현금 호송대를 급습한다. '땅, 땅' 총소리가 울렸다. 호송대중누구는 총에맞았고 누구는 철봉에 맞아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둔다. 총소리에 놀란 말이 내달리기 시작했다. 윤준희가 재빨리 돈이 실린 말을 잡아탔다. 최봉설도 다급히 달려와 우편물이실린 말 위에 올랐다. 안전한 곳에서 말을 멈춘 이들은 주머니를 풀어헤쳤다. 지폐로 15만 원이 들어 있었다. 이들은 이 돈을 들고 무기 구입을 위해 블라디보스토로 향한다. (156쪽)
지금으로 치면 150억이 든 현금 수송차를 턴 것이다. 독립운동가들의 배짱 하나는 알아줘야 된다. 하지만 일제의 수색에 결국 잡히고 만다. 윤준희, 임국정, 한상호는 바로 잡혀 이듬해 사형당했다. 당시 서른, 스물입곱, 스물셋이었다. 최봉설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연해주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이어가다 우즈베키스탄으로 강제 이주되었다. 작가 페이스북에 최봉설 선생의 따님 사진이 있다. 1928년 생이신데 아직 살아계셨다. 고맙다.
7. 이준 열사 최초의 비석 : 네덜란드 덴하그
내게 국외독립운동사적지 촬영은 관광객처럼 왔다 셔터 몇 번 누르는 걸로는 성에 차지 않는 일이다. 해당 사적지 자료를 찾고 거기 담겨 있는 이야기를 이미지로 어떻게 녹여낼지가 항상 고민이었다. 그러나 보니 한 장소를 며칠씩 촬영하는 일이 예사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는 촬영 한 번으로 해당 장소가 품고 있는 이야기를 만족스럽게 풀어낸 경우가 거의 없다. 다행이 헤이그에서는 시간 여유가 있었다. 틈만 나면 만국평화회의가 열렸던 비넨호프를 찾았다. 그런다고 뾰족이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것도 아니었다. 할 수 있는 건 비넨호프 광장 벤치에 앉아 시시각각 바뀌는 현장 분위기 중 헤이그 특사들의 심정과 가장 비슷해 보이는 장면을 채집할 뿐. (218쪽)
나도 그랬다. 이준 열사 기념관을 방문하고 비넨호프에 들러 오래 앉아 있었다. 머리 속으로 헤이그 특사들의 안타깝고 낙담한 심정을 그리며. 사진은 이준 열사의 무덤에 처음 썼던 비석이다. 저 사진 이미지는 많은 것을 보여준다. 몇 장의 문장보다 힘이 있다. 책에 기념관 설립 과정이 나오는데, 이기항이라는 분이 사비를 털어 만들었다. 당연히 나라에서 만든 줄 알았는데. 정말 고마운 분이다. 내가 갔을 때 뵌 여성분은 사모님이었나? 고맙다고 손을 한번 잡을 걸 그랬다.
8. 이상설 선생 유허비 : 러시아 우수리스크 쑤이펀 강가
기억은 희미해진 과거를 물질로 받쳐주는 현장에서 더욱 또렷해진다. 어떤 사건이 있던 곳에 세워진 기념비, 추모비, 비석 등은 망각에 갇혀 보이지 않던 역사를 무대 위로 안내하는 장치다. 무대에 오른 기억은 망각의 외투를 벗어던지고 사람들 눈에 들게 된다. 사적지에 세워진 조형물은 그래서 아무것도 아니었던 공간을 강력한 회상의 장소를 탈바꿈시킨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자기력으로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사람들은 거기서 흘러간 어떤 시간의 한 토막을 확인한다. (252쪽)
이상설 선생은 안중근이 가장 존경했던 인물이라고 작가는 소개했다. 헤이그 특사 이후로 연해주, 상해 등에서 독립운동을 이어가다 1917년 우수리스크에서 눈을 감았다. 유허비 사진을 찾느라 여러 기사를 봤다. 선생의 비는 쑤이펀 강가에 있었다. 강은 슬퍼보였다. 유허비가 없었다면 그 강은 그저 강일 뿐이었지만, 유허비로 말미암아 그 강은 선생의 불멸이 담긴 강이 되었다. 위의 작가의 말은 날카롭고 정확하다.
9. 4월 참변의 현장 : 러시아 우수리스크 소비에트스카야 언덕
역사는 보는 눈이 아닌, 몸과 마음으로 느껴야 할 대상이다. 그래서 답사와 예술이 중요하다. 이것들이 가치를 인정받으려면 무엇보다 기록되어야 한다. 과거 없는 지금이 없듯, 기록 없는 역사가 없다. 역사는 무엇인가를 남겨놓고자 한 투쟁의 결과다. 그 투쟁은 과거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닌, 지속적 기록 위에 있어야 한다. (264쪽)
1919년 9월, 3대 조선 총독인 사이토 마코토가 서울에 왔을 때 한 노인이 수류탄을 던졌다. 사이토는 가까스로 살았다. 이 노인은 왈우 강우규 선생이었다. 선생은 사형 집행 당시 '단두대 위에 서니 오히려 봄바람이 이는구나. 몸은 있으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상이 없겠는가.'라는 대인배의 시를 남겼다. 선생은 당시 노인 동맹 단원이었고, 블라디보스토크에 근거를 둔 단체였다. 사이토는 빡쳐서 연해주의 항일 세력의 씨를 말리려고 했다. 이듬해 4월 신한촌을 비롯한 한인 마을을 불태우고 한인들을 죽였다. 이를 4월 참변이라 부른다. 최재형, 김이직, 엄주필, 황경섭 등 연해주의 저명한 한인 지도자들도 비극을 피하지 못했다. 작가는 아무것도 없는 현장을 기어이 찾아갔다. 그리고 뭔가를 남기려고 몸부림쳤다. 작가의 그런 모습들이 보였다. 이 책은 그래서 더 값지다.
10. 자유시 참변 추모비 : 러시아 스보보드니
긴 시간을 지나오며 국외독립운동사적지의 현지 모습은 계속 바뀌어 왔다. 때론 과거와 지형이 완전히 달라져 여기가 맞나 한는 곳도 있고, 때론 자료가 없어 정확한 위치를 찾을 길 없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럼에도 희망적인 건 늦었지만 무엇인가가 하나둘 세워지고 있다는 점이다. (302쪽)
'다시는 우리끼리 싸우는 일이 없기를. 서력 1921. 06. 28. 흑강 자유시 사건 독립군순절지. 1921년 이 땅에서 희생된 한인 빨치산 잠들다.' 비문에 적힌 글이다. 이 추모비는 2017년에 세워졌다. 작가의 말처럼 지금도 기록되고 세워지고 있다. 더 많이 세워져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기억할 수 있다.
독립운동가의 희미한 흔적, 그마저도 사라져가고 있는 장소와 인물, 그리고 이야기를 작가의 숨결로 다시 살려낸다. 작가의 사진은 단순히 독립운동의 흔적 그 이상이다. 기록하고 기억하고자 하는 작가의 혼이 담겼기 때문이다. 사진 뿐만 아니라 글도 쉽고 아름답다. 이 역시 작가의 열정때문이다.
이런 책을 만들어줘서 고맙고 또 고맙다. 나의 여행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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