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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

조국은 그에게 너무 많은 빚을 지고 있다 : 김삼웅 <약산 김원봉 평전>

by Keaton Kim 2017. 6. 6.

 

 

 

조국은 그에게 너무 많은 빚을 지고 있다 : 김삼웅 <약산 김원봉 평전> 

 

 

 

"나, 밀양 사람 김원봉이오."

 

 

 

2015년 7월에 개봉한 영화 <암살>에 나오는 조승우의 첫 대사입니다. 조승우의 분량은 몇 컷밖에 되지 않았지만, 짧은 등장만큼이나 강렬했습니다. 한국 무장독립운동의 전설, 약산 김원봉의 미디어 데뷰입니다. 그리고 한 해 뒤인 16년 9월에 개봉한 <밀정>에서는 김원봉을 모티브로 한 정채산이 의열단 단장으로 나오는데, 이병헌이 열연했습니다. 본디 미남이었지만, 잘생김을 연기하는 어마어마한 두배우가 김원봉의 연기를 했습니다. 저승에서라도 김원봉은 흐뭇할 겁니다. 그럼 책속으로 한번 들어가 보실까요~~~

 

 

 

남북 모두에게 버림받은 불세출의 전설이 사후 60년이 지난 후에야 등장한다. 그러나 그 등장은 화려했다. '나 밀양 사람 김원봉이오' 뇌리에 팍 오는 대사다.

 

사진 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146250

 

 

 

영화 암살의 내용 자체가 좀 허구적인 냄새가 나서 김원봉의 존재도 그러했다면, 밀정의 정채산은 좀 더 실제적인 존재로 나온다. 호탕하나 조심성 많은, 김원봉의 성격을 잘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사진 출처 : http://punchline.asia/archives/34440

 

 

 

청년기

 

 

1898년 밀양에서 태어났다. 17살이 되던 봄 전국으로 무전여행을 떠났다.(p.47) 이 때부터 무장투쟁에 대한 큰 그림을 그렸다. 역시 위대한 인물들은 여행을 통해서 그 뜻을 굳힌다. 만 스무살인 1918년 남경의 금릉대학에 입학하였고, 그 뒤 만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여 폭탄 제조법을 배운다. 그리고 신흥무관학교의 레전드가 된다.

 

 

 

의열단

 

 

1919년 11월 김원봉을 비롯한 조선 청년 13명이 중국 길림성의 한 곳에서 무장투쟁의 전설 '의열단'을 결성한다.(p.77) 조선총독 이하 고관, 친일파 거두, 밀정 등을 마땅히 죽여야 할 대상으로 정하고 실행에 옮겼다. 의열단의 4대 목표는 '일제와 친일파를 몰아내고, 조국을 광복하여, 계급을 타파하고, 토지소유를 평등하게 한다.' 이다. 

 

주요 의열단 단원으로는 종로경찰서에 폭탄를 던진 김상옥,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던진 김익상, 동양척식 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진 나석주, 님 웨일즈의 '아리랑' 주인공 김산(장지락), 시인 이육사 등이 있다. 

 

'아리랑'에 따르면 의열단원은 언제나 죽음을 눈 앞에 두고 있다고 생각해 살아있는 한 자유롭게 생활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언제나 옷을 멋지게 차려입고 머리를 잘 손질하였으며, 사진 찍은 것을 좋아해 언제나 이번이 죽기 전 마지막 사진이라고 생각하면서 찍었다고 한다. 또한 의열단은 잘생긴 사람들의 무력독립운동단체로도 유명하다. (참고 및 발췌 : 나무위키, 의열단)

 

 

밀정의 첫 장면에서 강렬한 인상을 심어준 박희순이 연기한 김장옥이 실제 김상옥 열사를 모티브로 해서 만든 사람이다. 실제 김상옥은 일본 군경과 1000대1 맞짱을 뜨신 분이다. 독립투쟁사의 많은 별중에서도 더욱 밝은 별이다.

 

사진 출처 : http://news1.kr/articles/?2769645

 

 

 

김산이 기억한 김원봉

 

 

김약산은 고전적인 유형의 테러리스트로 냉정하고 두려움을 모르는 개인주의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내가 상해에서 만난 다른 사람들과는 아주 달랐다. 김약산은 언제나 조용했고 육체운동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는 거의 말이 없었고 웃는 법이 없었으며 도서관에서 독서로 시간을 보냈다. 그는 투르게네프의 소설 <아버지와 아들>을 좋아했으며 톨스토이의 글을 모조리 읽었다. (1922년 상해에서 만난 김원봉을 기억하는 김산의 기록, P.111)

 

 

사진 출처 : KBS, 아래 조선의용대 성립 기념사진에서 캡쳐

 

 

 

아이덴디티

 

 

김원봉은 공산당 계열로부터 여러 차례 합류하라는 권유를 받았지만, 여기에 응하지 않았다. 오랜 동지인 오성륜과 님 웨일즈 그리고 김산 등이 전투적인 공산주의자로 변모해갔지만 그는 오로지 의열투쟁노선을 견지했다. 그렇다고 공산주의 세력과 단절한 것은 아니었다. 뒷날 공산주의 세력과 상당한 수준의 협력을 했음에 여러 자료에서 나타난다.(1932년 군관학교 하나를 운영하게 되는데, 그 학교 이름이 레닌주의정치학교다!)

 

김원봉의 주지主旨는 항일투쟁을 위해서는 어떤 단체나 국가와도 연대한다는 지극히 유연한 인식이었다. 다만 자신의 이념 체계만은 분명하게 가지고 있었는데 허무주의적 아나키즘 성향의 민족주의 노선을 견지했다. (p.120)

 

 

 

의열단의 변화

 

 

김원봉은 그동안의 의열투쟁 성과를 분석하고 향후 과제에 대한 여러 가능성을 검토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해왔던 의열투쟁방식보다는 군대 양성에 의한 조직적인 무장투쟁과 대중운동을 통한 항일투쟁이 보다 효과적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p.194)

 

그래서 김원봉은 1930년 조선민족혁명당을 조직한다. 제대로 된 군대를 만들어보려고 갖은 애를 써다 결국 1938년 조선의용대를 조직한다.

 

 

 

조선의용대

 

 

1938년 중국 한커우에서 조선민족혁명당을 근거로 창설한 부대로 중국국민당으로부터 최초로 공인받은 조선인 독립 무장부대다. 이후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라는 명칭으로 활동하면서 일본군과 여러 차례 교전하였고, 1942년 7월 10일에 김두봉이 이끄는 조선독립연맹과 연합하여 조선 의용군으로 개편하였다. 팔로군 산하에서 활동할 당시 이들의 병력은 최대 800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동안 존재했던 수많은 조선인 무장부태들 중에서 가장 큰 규모이다.

 

조선의용군은 중국공산당과 협력 관계를 유지하면서 중일전쟁에서 싸웠고(대표적인 전투는 태항상 전투), 상당수는 일제 패망 이후 벌어진 2차 국공내전에도 참여하였다. 이들은 1948년 북한 정권이 수립하자, 귀국하여 조선인민군의 근간이 되었고 최창익, 김두봉, 김무정 등은 고위직에 올라서 연안파라는 독자적인 정치세력을 형성하였다. 나중에는 모두 숙청.ㅠㅠ

 

한편 대다수가 화북으로 이동하면서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의용대 본대에는 대략 300여명 정도가 잔류하였다. 이들은 중국국민당과 협력관계를 유지하면서 1942년 김구가 이끌던 충칭의 임시정부에 합류, 한국 광복군 제1지대로 편제었고, 이 광복군의 제대로 된 실질적인 군인은 조선의용대였다.  (글 출처 : 나무위키 조선의용대)

 

조선의용대의 대장인 김원봉은 화북으로 가지 못했다. 김원봉이 가면 화북지역 조선의용대를 직접 통제하기 어렵다고 판단해서 오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p.451) 김원봉은 국민당의 영향 아래에 있었던 본대의 소극적인 전투에 분개했다. 조선의용군이 이렇게 갈라지게 된 것은 항일 독립운동사에 있어서 큰 비극이다.

 

 

조선의용대 성립 기념사진 (출처 : 나무위키, 조선의용대)

 

 

 

해방 이후

 

 

해방 이후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12월 2진으로 귀국했다. 임정 요인들과 함게 뭘 한번 해볼라고 했으나 좌익이라고 자꾸 왕따를 놓자 임시정부를 탈퇴하고 민주주의민족전선(좌파계열의 연합 단체. 약칭 민전. 의장단 구성 : 여운형, 박헌영, 허헌, 김원봉, 백남원)에 합류한다.

 

1947년 7월 좌익세력의 구심점이었던 여운형이 암살되고, 남한에는 설 자리도 없어지고, 우익단체들의 테러도 심심찮고, 미군정도 자신을 잡으러 오고, 북한에는 연안파 친구들도 있고, 일제 앞잡이 넘들 안봐도 되고, 만악의 근원 이승만. 해서 월북을 결심한다. (글 참조 : p.576 월북 동기와 배경)

 

독립운동을 했던 많은 이들이 북으로 북으로 갔다. 나였어도 북으로. 그들 대부분은 나중에 결국 숙청을 당했지만, 이승만과 그 일당들이 있는 남쪽보다는 훨씬 사정이 나았을 것이다. 그들이 설 자리를 마련해 주지 못한 것, 역사적으로 아주 통탄할 일이다.

 

 

 

그리고 퇴장...

 

 

북에서 그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가검열상(서열 7위)에 오르는 등 북한 정권 수립에 참여했다. 최후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현재 북한에 그의 무덤도 없는 걸 봐서는 숙청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이다. 박헌영도 연안파도 숙청이 되는 마당에..... 숙청의 죄명은 국민당 장개석의 첩자였다나.....

 

북쪽에서는 김일성에 의해 간첩으로 몰려 숙청되었고 남쪽에서는 빨갱이라 독립운동의 경력마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리는 현실이다. 일제강점기 무장투쟁의 전설이 교과서에도 안 나온다. 참 쓸쓸하여라.

 

 

 

박차정 (1910~1944)

 

 

독립운동가이자, 초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김두봉의 조카딸. 김원봉의 둘째 부인. 부친은 일제에 항거하여 자결, 숙부와 오빠들이 항일 운동에 뛰어든 집안에서 자랐다. 동래여고 전신인 일신여학교 시절부터 학생운동의 대장이셨다. 베이징에서 공산당 재건운동을 벌이다 안광천의 소개로 김원봉과 결혼했다. 김원봉의 아내이기 전에 독립투사였다. 독립을 위해서라면 당신도 내어드리리. 1939년 곤륜산 전투 중 총상의 후휴증으로 1944년 충칭에서 병사했다. 부산에 생가를 복원해 놓았고, 동상도 있다. 

 

 

박차정의 집안은 모두가 독립운동가였다. 큰 오빠 박문의는 신간회 활동을 하였고 김원봉의 친구였고 작은 오빠 박문호는 의열단의 일원이었으며 서대문 형우소에 투옥되어 옥사했다. 그러나 빨갱이 집안으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다.

 

박차정의 묘지는 여기서도 가까운 밀양에 있다. 해방 이후 김원봉이 손수 밀양에 돌아와 묻어주었다고 한다. 사진을 찾아보니 꽤 초라하다. 제대로 돌보지도 않는 듯 하다. 김원봉의 무덤은 가고 싶어도 있지가 않아 갈 수 없으니 대신 박차정의 묘소에라도 가 봐야 하지 않겠나.

 

사진 출처 : http://blog.naver.com/hsd256/120121238426

 

 

 

못다한 이야기들

 

 

일제 강점기를 통틀어 최고의 현상금이 붙은 인물이다. 지금 돈으로 약 320억인데... 잡으면 현상금 줄 돈이나 있나? 이거는 오사마 빈라덴 이전의 최고 현상금이었대나 어쩠대나.... 이 시절 김구 선생의 현상금이 200억 정도라고 하니.... 뭐, 이래저래 김구 선생과 더불어 독립운동의 양대 산맥임이 분명하다.

 

일제의 대표적인 악질 경찰관인 노덕술에게 체포되어 갖은 굴욕을 당한 후, '내가 조국 해방을 위해 중국에서 일본놈과 싸울 때도 이런 수모를 당하지 않았는데, 해방된 조국에서 악질 친일파 경참놈한테.....' 라며 3일 동안 꺼이꺼이 울었다는 이야기는 이미 신화가 되었다. 이승만은 진짜 만악의 근원이다.

 

님 웨일즈의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이 만난 주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김원봉이다 라고 나무위키에 쓰여 있다. 아들래미 이름을 김산으로 지을 만큼 강렬했던 책인데, 그런 기억이 없다. 다시 한번 읽어보리.....

 

김원봉 월북 후 가족은 풍지박산이 났다. 9남 2녀의 형제 중 친동생 4명과 사촌동생 5명이 보도연맹 사건으로 죽음을 당했고 아버지 김주익은 외딴 곳에 유폐되었다가 굶어 죽었다. (p.584) 여동생 학봉(1932년~ )씨는여전히 밀양에 생존해 있다. 구체적인 것은 학봉씨의 자제 김태영씨의 인터뷰 기사가 맨위 조승우 사진 밑에 있는 링크를 클릭하면 나온다. 참조하시길....

 

 

 

 

 

 

조국은 그에게 너무 많은 빚을 졌다

 

 

일제강점기에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일제와 싸웠지만 해방된 조국, 남쪽과 북쪽에서 모두 홀대받았던 김원봉. "조국이 날 이해하기를" 바랐던 그가 저승에서라도 "조국을 외면하지 않도록", 조국은 그에게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조국은 그에게 너무 많은 빚을 지고 있다. (p.6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