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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

오블리스 노블리주를 뛰어넘는 그 무엇, 아나키스트 이회영 : 이덕일 <이회영과 젊은 그들>

by Keaton Kim 2017. 12. 17.

 

 

 

오블리스 노블리주를 뛰어넘는 그 무엇, 아나키스트 이회영 : 이덕일 <이회영과 젊은 그들>

 

 

 

인간으로 세상에 태어나서 누구나 자기가 바라는 목적이 있네. 이 목적을 달성한다면 그보다 더한 행복은 없을 것이네. 그리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그 자리에서 죽는다 하더라도 이 또한 행복 아닌가. 남의 눈에는 불행일 수도 있겠지만 죽을 곳을 찾는 것은 옛날부터 행복으로 여겨왔네.

 

 

같은 운동선상의 동지로서 장래가 만리 같은 귀중한 청년 자제들이 죽음을 제 집에 돌아가는 것으로 여겨 두려움 없이 몇 번이고 사선을 넘고 사지에 뛰어드는데, 내 나이 이미 60을 넘어 70이 멀지 않았는가. 그런데 이대로 앉아 죽기를 기다린다면 청년 동지들에게 부담을 주는 방해물이 될 뿐이니 이것은 내가 가장 부끄러워하는 바요, 동지들에게 면목이 없는 일이네

 

 

- 1932년, 이회영이 만주로 떠나기 전에 동지들에게 남긴 말 (p.252)

 

 

 

 

 

 

삼한갑족, 아나키스트가 되다. 우당 이회영

 

 

 

1867년 4월 21일

 

서울시 중구 저동에서 이조판서 이유승의 네째 아들로 출생

 

 

 

1896년 (30세)

 

항일의병의 자금 조달을 위해 개성 인근 풍덕 지방에 삼포 농장을 경영

 

 

 

1905년 (39세)

 

동지 이상설, 아우 이시영(당시 외부 교섭국장)과 을사조약 파기운동을 전개했으나 실패, 나영인, 기산도 등과 을사오적 암살을 모의했으나 실패

 

 

 

1906년 (40세)

 

이상설, 여준, 장유순, 이동녕, 유완무 등과 만주의 독립운동기기 설치 계획 후 용정촌 서전서숙瑞甸書塾 설립 참여

 

 

 

1907년 (41세)

 

서울 상동교회 지하 상동학권 학감으로 취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대표 파견을 고종에게 건의. 백지위임 밀서(대한제국 황제 신임장과 친서)를 궁내부대신 조정구와 내시 안호형을 통해 받아 블라디보스토크에 망명 중인 이상설에게 전달. 이준, 이위종 등이 합류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장에 출석하려고 했으나 일본의 방해로 참석 실패. 이상설은 언론에 강제로 체결된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주장하는 성명을 냄. 이준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상동학원을 중심으로 추모하고 이준의 죽음을 할복 자결로 공표해 국민감정을 분기함. 이를 계기로 상동학원을 거점으로 이동녕, 전덕기, 양기탁, 이관직, 김진호 등이 발기해 최초의 독립운동 비밀결사체인 신민회新民會 조직.

 

 

 

1910년 (44세)

 

이동녕, 장유순, 이관직과 남만주 시찰 후 독립운동기지 건설 구상. 조국이 일본에 합병되자 서둘러 망명을 결심. 여섯 형제와 가솔과 노비를 해방했으나 수행을 자청한 일꾼까지 합해 40여 명을 거느리고 신의주 - 안동(지금의 중국 단동)을 거쳐 유하현 삼원보로 망명.

 

 

 

1911년 (45세)

 

북경에서 원세개 총통과 회담한 후 통화현 합니하에 독립군기지 설치. 이동녕, 장유순과 함께 각지의 동지를 모아 대회를 열고 경학사耕學社 조직. 안동 출신의 경상도 유림 대표 이상룡을 초대회장으로 추대.

 

 

 

1912년 (46세)

 

경학사를 기반으로 신흥강습소(후일 신흥무관학교로 개칭) 설립해 이석영을 교주로, 이철영을 교장으로 선출. 신흥무관학교는 1920년까지 지속적으로 독립군을 양성. 청산리전투, 봉오동 전투 등 무장독립투쟁을 전개토록 함. (총 배출 인원 약 3,500명)

 

 

 

1918년 (52세)

 

국내 동지들과 국권회복 협의. 사돈 조정구(고종의 매부이며 아들 이규학의 장인)의 아들 조남익과 내시 이교영과 의논해 고종 망명계획을 추진. 고종의 지시로 민영달에게서 5만원을 받아 북경에 고종의 거처를 마련했으나 고종의 서거로 좌절. (고종이 망명계획을 눈치 챈 일제와 친일파들이 고종을 독살했다는 설이 있음)

 

 

 

1919년 (53세)

 

고종의 국장을 계기로 대규모 독립선언을 계획하고 거사 직전 해외 독립운동세력 결집, 임정 수립을 위해 작업차 고종 망명계획에 가담한 조정구, 조남익 부자와 함께 북경으로 망명. 이동녕, 이시영과 함께 상해로 이동해 임정 수립에 참여. 임정 내분에 실망해 다시 북경으로 복귀한 뒤 새로운 독립운동 방략을 고민.

 

 

 

1922년 (56세)

 

북경에서 이을규, 이정규, 유자명 등과 함께 러시아의 맹인 시인이자 사상가이며 아나키스트인 예로센코가 북경에 온 것을 틈타 러시아 혁명 과정에서 벌어진 공산주의의 모순을 지적하고 '행동하는 자유주의' 아나키스트 운동을 개시. 여기에 신채호, 김창숙도 참여.

 

 

 

1924년 (58세)

 

김창숙, 신채호, 유자명, 김원봉과 적극적 항일운동을 위해 행동조직인 의열단을 후원하는 한편, 이을규, 이정규, 정화암, 백정기 등과 아나키스트 운동의 중심이 될 '재중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하고 <정의공보> 발간.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을 모아 '신흥학우단' 조직.

 

 

 

1925년 (59세)

 

조카 이규준과 아들 이규학, 이성춘 등 신흥학우단이 중심이 된 행동조직 다물단多勿團을 조직하고 지도. 이 조직이 북경 중국유림에 침투한 일본 고등밀정 김달하를 암살해 위난을 겪음.

 

 

 

1929년 (63세)

 

아나키스트 동지인 이을규, 정화암, 백정기, 김종진, 오면직(일명 양여주), 이달, 엄순봉 등을 북만에 파견해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비밀리에 결성하는 한편 김좌진 장군이 추진하는 '재만한족연합회' 조직에 대거 가담해 시로운 독립운동기지 건설 시도

 

 

 

1931년 (65세)

 

만보산 사건과 만주사변으로 독립운동이 심대한 타격을 받고 상해로 철수한 동지들을 규합해 '남화한인연맹'을 결성하고 의장으로 추대됐으나 고사하고 연부역강한 유자명을 회장으로 선임. 기관지로 <남화통신>을 발간. 정화암, 백정기, 김성수, 중국인 왕아초, 화균실, 일본 아나키스트 사노, 이토 등과 상해에 모여 항일구국연맹을 결성하고 기획, 선전, 연락, 행동 등 부서를 두는 비밀행동조직 흑색공포단을 조직

 

 

 

1932년 (66세)

 

흑색공포단은 천진 부두에 일본 군수물자를 적재한 일본 기선을 폭파했고, 천진 일본 영사관에 폭탄을 투척해 그 일부를 파괴함. 중국 국민당 요인 이석증, 오치휘, 호한민 등의 지워을 받아 중국 북동부에 새로운 거점 확보와 동시에 관동군사령관 무토 대장을 암살해 독립운동의 새로운 전기로 마련코자(윤봉길 의사의 상해 시라카와 대장 폭사와 같은 의거) 북행 결심

 

 

 

1932년 11월 17일

 

침체된 무장독립운동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만주에 항일의용군의 결성과 독립운동기시를 건설하는 계획을 비밀리에 동지들과 수립한 후 대련으로 이동. 상해 밀정에게 정보가 누설되어 대련에 도착하자마자 일경과 중국 수상서원에게 검거되어 모진 고문을 당한 끝에 순국.

 

 

- 이 책의 부록 이회영 연보에서 인용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전설 우당 이회영과 그의 형제들.

 

일제 치하에 들어간 조선에서 구차하게 귀족 생활을 누리는 것을 단호히 거부하고 집안의 재산을 정리해 만주로 떠난다. 부랴부랴 처분한 재산이 지금의 돈으로 600억이다. 그 재산 모두를 독립운동에 써고 선생과 형제들은 혹독한 고초를 겪고 이국땅에서 서거하셨다. 노블리스 우블리주의 상징인 칼레의 시민보다 훨씬 대단한 상징이다.

 

위에 간추린 이회영 선생의 연보를 써 놓은 이유는, 내가 알고 있던 선생의 행적보다 훨씬 많은 일을 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고자 함이다.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운동가를 키우고 항일무장투쟁에 적극적이었다는 상식에 더하여 고종의 망명 계획, 무련 결성, 다물단 조직, 아나키스트 조직을 만들고 운영하고, 나아가 독립을 위해 큰 방향성을 그리고 실천하였다. 새로운 무장 투쟁 조직을 만들겠다고 무려 66세에 다시 북만주로 떠난 분이다. 그리고 그의 사상적 종착역이 아나키스트라니!

 

사진 출처 : http://contents.nahf.or.kr/item/item.do?levelId=isgi.d_0029

 

 

 

 

중국 따롄(대련)에 있는 그 유명한 뤼순 감옥이다. 안중근 의사가 돌아가신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우당 선생도 따롄 수상경찰서에서 체포 당해 여기에서 눈을 감으셨다. 단재 신채호 선생이 아나키스트 인 것, 그리고 뤼순 감옥에서 옥사하신 것도 이 책을 읽고 알게 된 사실이다. 대련에 갈 구실이 생겼다.

 

사진 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239421

 

 

 

 

 

 

이 책의 제목이 아나키스트가 된 조선 명문가, 이회영과 젊은 그들입니다. 물론 이회영 선생의 일대기이긴 하지만, 이회영과 뜻을 같이 한 많은 '젊은 그들'이 나옵니다. 선생의 세 형 이건영, 이석영, 이철영과 두 동생 이시영, 이호영을 비롯하여 헤이그 밀사이자 평생 동지인 이상설, 임청각의 주인공 이상룡, 함께 신흥강습소를 세운 만주벌 호랑이 김동삼, 의열단의 지주 유자명, 역사가이자 아나키스트 신채호, 독립과 민주 투쟁의 참선비 심산 김창숙, 독립운동가를 역사에 기록한 독립운동가 정화암, 서로 먼저 죽겠다고 제비뽑기를 하는 백정기, 이강훈, 원심창 등등.

 

 

 

이회영 선생이 식구들을 이끌고 만주로 떠난 게 마흔 네살 때의 일입니다. 삭주 이상룡 선생은 무려 쉰 세살에 임청각을 떠나 만주로 향합니다. 저자가 굳이 '젊은 그들'이라고 지칭한 까닭은 그들의 젊은 기개이겠지요. 꺼져가는 촛불과 같은 나라의 운명 앞에, 자신의 안녕만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독립과 이상사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장대하고 활기찬 기개를 젊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민중은 신인神人이나 성인이나 어떤 영웅호걸이 있어 '민중을 각오'하도록 지도하는 데서 각오하는 것도 아니요, '민중아, 각오하자', '민중이여, 각오하여라' 그런 열렬한 부르짖음의 소리에서 각오하는 것도 아니다. 오직 민중이 민중을 위하여 일체 불평, 부자연, 불합리한 민중향상의 장애부터 먼저 타파함이 곧 '민중을 각오케' 하는 유일한 방법이니, 다시 말하자면 곧 먼저 깨달은 민중이 민중의 전체를 위하여 혁명적 선구가 됨이 민중 각오의 첫째 길이다. (p.176,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 중에서)

 

역사학자로만 알고 있었던 단재 신채호 선생은 사실 열렬한 아나키스트였다. 유자명의 요청으로 무장독립투쟁의 전설 의열단의 항일선언문인 그 유명한 <조선혁명선언>을 만든다. 위의 인용 구절은 아나키즘적인 혁명 사관이 잘 담겨 있다.

 

사진 출처 및 조선혁명선언 전문 : http://www.amn.kr/sub_read.html?uid=15568&section=sc7

 

 

 

 

구파 백정기 (1896~1934) 독립운동 3의사 중의 한 분이시다. 동학혁명의 진원지인 정읍에서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3.1운동을 거치며 무장투쟁의 길로 들어선다. 그리고 특급 테러리스트가 된다. 이회영, 신채호와 가깝게? 지내다가 아나키스트가 된다. 일본 공사 암살 작전에 서로 하려고 제비뽑기 하는 장면(게다가 계획적으로 자기가 뽑히게 함)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공의에 목숨을 걸면서도 한없이 이타적이고 남을 결코 억압하지 않았다고 한다. 사진의 저 눈빛, 카리스마가 후덜덜하시다.

 

전북 정읍에 기념관이 있고 효창 공원에 윤봉길 이봉창 의사와 나란히 누워계신다.

 

사진 출처 : http://blog.ohmynews.com/yby99/322535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나라를 팔아먹는 데 앞장선 지배층이 있었던 반면 자신과 가족의 모든 것을 던진 지배층도 있었습니다. 그것도 많이 있습니다. 단순한 오블리스 노블리주를 뛰어넘는 그 무엇이 있습니다. 당시 그들에게 나라라는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요? 그토록 확고한 신념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요? 무엇이 그들을 자갈 투성이의 길로 가게 하였을까요? 책을 읽는 내내 머리 속에 맴도는 질문입니다.

 

 

 

이회영과 젊은 그들에게 던진 질문을 나에게도 해봅니다. 나에게 가장 으뜸이 되는 신념은 무엇인가? 나는 이회영 선생이 보여주었던 오블리스 노블리주를 얼마나 따라가고 있는가? 나에게 이 나라와 민족이라는 건 어떤 가치가 있는가? 아, 어렵습니다. 쉽게 답을 할 수 없습니다. 선생이 살던 시대와 지금은 아주 많이 달라져 있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선생은 지금의 저의 나이에 식솔들을 모두 데리고 삭풍이 부는 만주벌로 떠났는데 말이죠.

 

 

 

선생을 기억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일입니다. 잊지 않고 기억하는 일부터 시작입니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에게도 알려줘야 하겠지요. 우리 아이들도 잊지 않고 기억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 아이들이 또 그 아이들에게 알리고 기억하게 하겠지요. 그렇게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