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뜨거운 어제와 만나다 : 윤태옥 <중국에서 만나는 한국 독립운동사>
# 둥창후퉁 28호
광야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때도
참아 이곧을 범하든 못하였으리라
끈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픠여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엇다
지금은 눈 나리고
매화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노아 부르게 하리라
육사 이원록 (1904~1944)
사진 출처 : http://mpva.tistory.com/4456
고등학교 시절 배운 육사의 <광야>입니다. 그때는 시험을 위한 시로 배우고 외웠습니다. 그러니까 초인이 상징하는 것에 별표 두개... 뭐 이런 식이죠. 시를 시로써 음미하지 못했습니다. 조정래 선생의 소설에서 이 시를 다시 접했습니다. 이 시가 나올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이 시를 읽었습니다. 뜨거워졌습니다. 그리고 이 책에서 육사를 다시 소환했습니다. 시인이자 독립운동가 이육사를요.
1927년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룹니다. 이때의 수인번호가 264라고 합니다. 수인번호가 아호가 되었습니다. 이후 윤세주의 의혈 투쟁에 감화를 받아 형 이원기와 동생 이원유와 함께 의열단에 가입하고 1932년 난징에서 김원봉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1기로 입학합니다. 독립운동을 직접 실행하면서 시를 썼습니다. 동시대의 윤동주가 부끄러움과 반성, 기독교적 희생을 주로 다루고 있다면 이육사의 시는 남성적이면서도 목가적인, 그리고 극한에 서서도 굴하지 않는 의지를 표출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이 시에 나오는 초인이 만주 최후의 파르티잔 허형식 장군이라고 말합니다. 허형식은 육사의 어머니 허길의 사촌동생입니다. 육사의 외가는 왕산 허위의 후손입니다. 독립운동가들이 우글거리는 가문입니다. <아직도 내겐 서간도 바람소리가>라는 자서전을 낸,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인 이상룡 선생의 손부 허은도 이 가문 출신입니다. 이육사와 허형식, 전혀 이어질 것 같지 않은 두 분이 이렇게 연결됩니다.
이육사는 40년의 짧은 생애를 살다 가셨습니다. 그 생애 동안 무려 17번의 옥살이를 합니다. 40년대 초 서정주를 비롯한 누구나가 다 변절할 때도 꿋꿋이 저항하고 시를 썼습니다. 그의 생을 다시 배웁니다. 시도 소리내어 읽습니다. 공부란 이런 것입니다.
1943년 어머니의 제사에 참석하려고 베이징에서 귀국하다 경성에서 체포되어 다시 베이징으로 압송되었고, 그 곳에서 사망했다. 그 사망 장소가 아직 남아있다. 왕푸징에 위치한 둥창후퉁 28호이다. 일본 헌병대 북경본부 부속 형무소로 사용되었다. 위의 사진은 저자가 직접 찍은 사진이고 아래는 국외 독립 사적지 홈페이지에 나와 있는 사진이다. 거의 쓰러져가는 건물인데 아직도 몇 가구가 살고 있다고 한다. 직접 가보면 어떤 감흥을 받을까?
사진 출처 : 블로그 윤태옥의 왕초일기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kimyto&logNo=220875065127)
# 만주벌 최후의 파르티잔
만주에서 일본군이 아주 거세지고 강해지자 1935년 중국 공산당은 모든 민족과 계층을 아우르는 항일연합군을 만들고자 결의합니다. 이에 다음 해 동북인민혁명군과 다른 항일조직들이 모여서 만든 군대가 동북항일연군입니다. 화북지방에서 활약하던 팔로군(국민혁명군 제8로동군)과는 친적간이며 만주의 많은 항일 군사조직 중에서 가장 큰 규모입니다. 김일성, 김책, 최용건 등 북한을 세운 핵심 인물들이 여기서 독립을 위한 무장 투쟁을 전개했습니다.
1940년 일제의 혹독한 토벌에 밀리자 중국공산당은 소련으로 넘어가 혁명 역량을 보존하라고 지시합니다. 이 지시에 따라 김일성을 비롯한 대부분이 소련으로 넘어갔으나 끝까지 북만주에 남아 유격전을 벌이며 저항한 이가 바로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총참모장 허형식 장군입니다.
1937년 김일성이 함경남도 보천보를 습격한 사건이 신문에 크게 나서 알려지게 되었는데, 이 때 김일성도 동북항일연군 1로군 소속이었다. 동북항일연군은 북만주에서 치열한 항일 투쟁으로 그 이름을 높였으나 1939년 만주군 간도특설대의 대대적인 압박으로 점차 소멸되고 남은 이들은 소련으로 피신하였다.
사진 출처 : 나무위키 동북항일연군
허형식(1909~1942)는 의병장 왕산 허위의 사촌인 허필의 아들로 구미시 임은동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부모의 손을 잡고 만주로 건너가 타국 땅에서 자라며 항일 단체를 조직하고 투쟁하였다. 그리고 항일연군에서 핵심 역할을 하면서 적극적인 무장 투쟁을 전개하다 1942년 8월 만주국 토벌대와 격렬한 전투 중 총에 맞아 사망했다. 그의 나이 서른 셋이었다. 사진은 훈남 청년이다.
사진 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120482
'항련(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총참모장 허형식 희생지' 이 비는 하얼빈에서 다시 동북쪽으로 약 200Km 떨어진 쑤이화시 다뤄진에 있다. 허형식 장군이 마지막 전투를 치뤘던 바로 그 자리라고 한다. 저자의 블로그 속 사진을 보니 그저 길가에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렇게 서 있다. 누구 하나 찾아올 것 같지 않은 풍경 속에 그 풍경의 일부인 양 그렇게.....
사진 출처 : (저자 블로그) https://blog.naver.com/kimyto/220793397770
중국에서 독립운동 역사의 현장과 흔적을 찾아다딘 결정적 계기가 바로 육사의 시 '광야'에서 노래한 '초인'의 실제 모델이 허형식 장군이란 대목이라고 합니다. 그 끈 하나로 중국 북쪽 끝까지 가서 허형식 장군을 만나고 옵니다. 동북항일연군의 빛나는 별이자 만주벌판 마지막 파르티잔을 말이죠.
저자는 책에서 수많은 사람을 고통에 빠뜨린 동시대의 김일성과 박정희를 소환합니다. 한 명은 허형식과 같은 부대에서 독립 투쟁을 하였으나 동족 상잔의 비극을 만든 장본인이며 또 한 명은 이웃 마을에서 태어나 만주에서 전혀 다른 방향으로 활약하고 끝내 권력까지 잡은 사람입니다. 저자 윤태옥은 허형식의 위대한 죽음에 경의를 표하면서 그를 주연으로 세우고 김일성과 박정희를 조연으로 놓습니다. 역사는 이긴 자들의 기록이 아니라 기억하는 자들의 것으로 되돌아 오길 바라면서요.
# 남북 국립묘지에 묻힌 유일한 독립투사
1919년의 만세운동은 만주에서도 활발히 일어났고, 이는 1920년 홍범도의 봉오동 전투와 김좌진의 청산리 대첩으로 이어집니다. 이 전투는 일본의 정규군을 제대로 격파한 것입니다. 이게 너무 쪽팔린 일본군은 1920년 가을부터 그 다음해 봄까지 만주의 조선인을 거의 학살 수준으로 몰아갑니다. 이를 경신참변이라고 합니다. 이를 견디지 못한 독립군은 소련 국경을 넘었으나 거기도 거기도 10월 혁명 이후의 적백 내전과 일본군이 뒤엉킨 아수라 판이었습니다. 결국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의 갈등으로 독립군 수백 명이 러시아 적군에게 살해되는 자유시 참변을 겪습니다.
이후 잠잠했던 만주에서의 무장 투쟁은 1920년대 후반에 다시 모습을 드러냅니다. 중국 공산당과 손을 잡고 일본에 맞서는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과 국민부와 신민부로 통합된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입니다. 조선인 사회주의자들은 일국일당주의 원칙에 따라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합니다. 주로 게릴라식 유격대 투쟁입니다. 만주 곳곳의 중국 공산당 유격대들은 1933년 동북인민혁명군(동북항일연군의 전신)이라는 이름으로 다 모입니다. 이 시기에 중국에서 혁명가로 존중받는 인물이 이홍광입니다.
랴오닝성 신빈현에 항일영렬기념비라는 아주 그럴싸한 탑이 세워져 있는데, 좌우에는 흉상이 세워져 있다. 하나는 만주족 이춘윤이고 하나는 조선사람 이홍광(1910~1935)이다. 용인시 처인구 출신이며 1926년 부모를 따라 지린성으로 이주했다. 1931년 만주 사변 이후 7명의 조선 청년을 시작으로 악질 친일지주를 처단하면서 아주 날라다녔다. 이후 조직이 점점 커지면서 동북인민혁명군의 핵심 중책을 맡았고 압록강을 건너 평북 동흥읍을 기습 공격하기도 했다. 1935년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다 스물여섯의 나이로 사망했다.
마오쩌둥이 '이홍광은 동북의 유명한 의용군 영수의 하나'라고 했다. 그 설명이 흉상 뒷편에 세겨져 있다. 저자는 이 흉상을 바라보고 스물여섯에 절명했음이 안타깝고, 스물여섯을 살았음에도 이런 평가를 받는 게 놀랍다고 했다. 나 역시 그렇다.
위의 두 사진 출처 : (저자 블로그) https://blog.naver.com/kimyto/220787035879
민족주의 계열의 국민부와 신민부는 각각 조선혁명군과 한국독립군을 조직했습니다. 이를 이끈 사람이 양세봉과 지청천입니다. 특히 양세봉의 조선혁명군은 영릉가 전투, 홍경현 전투 등 상당한 전과를 거두었습니다. 백만 동포의 생명을 두 어깨에 짊어지고 있다는 그의 결의가 아직 남아 있습니다. 당시 독립군 사이에서는 '군신軍神'으로 불리웠다고 합니다.
원래 조선족 소학교에 있던 석상을 동포들이 돈을 모아 땅을 사고 옮겼다고 책에 나와 있다. 양세봉(1896~1934)은 평안북도 철산 출신으로 조선혁명군 총사령이다. 일제와 200여 차례의 전투와 밀정 처단 등의 무력 항일 투쟁에 온 생애를 바쳤다. 최근에 '남만주 최후의 독립군 사령관 양세봉'이라는 책이 나왔다. 서른아홉에 돌아가신 장군의 흉상 치고는 좀 늙어 보인다.
김일성은 양세봉 사후에 그의 가족들을 평양에 불러 살게 했다고 한다. 국립현충원의 애국지사 묘역에 양세봉의 허묘가 있다. 북한에도 평양 애국열사릉에 그의 묘비가 있다. 보통 유명한 독립투사는 남북 양쪽 모두에게서 버림받는 운명인데 말이다. 운이 좋으신 건지..... 꼭 국립묘지에 묻혀서가 아니라 독립운동가로서 제대로 평가받고 있다는 사실이 감사하다.
사진 출처 : (저자 블로그) https://blog.naver.com/kimyto/220787037226
# 타이항산太行山의 별
의열단의 우두머리로 유명한 항일 무장 투쟁의 전설 김원봉이 우한에서 1938년 조선인 독립 무장 부대인 조선의용대를 창설합니다. 한판 붙자 이넘들아~~ 하지만 국민당의 지원을 받는 조선의용대의 역할은 전투가 목적이 아닌 첩보와 선전의 임무로 무장 투쟁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화북과 만주로 갈수록 조선인이 많았고 그들을 기반으로 세력을 키우고 일본군을 쓸어 담아 조국으로 진군할 꿈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1941년 화북지역 타이항산으로 이동하여 팔로군에 합류합니다. 이를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라 부릅니다.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충칭에 있는 김원봉과 본대의 지휘를 받는 형식을 취했지만, 이미 주도권은 사회주의 계열로 넘어갔고, 1942년 김두봉이 이끄는 조선독립연맹과 연합하여 조선의용군이 됩니다. 일제 강점기에서 내노라하는 독립 무장 단체들, 예를 들면 1920년대 홍범도 김좌진 장군이 이끌었던 만주의 민족주의 계열 독립군, 경신참변 이후 일제의 토벌을 피해서 러시아 연해주에 창설했던 대한독립군단, 양세봉 장군의 조선혁명군, 1930년대 허형식 김책 최용건 김일성 등이 이끌었던 동북항일연군, 1940년대 지청천 이범석 장군이 이끌었던 임시정부 산하의 한국 광북군 등등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명멸했던 수많은 항일 투쟁 단체 중에서 조선의용군은 가장 규모가 컸습니다. 약 8000여 명에 달하는 최정예 부대의 탄생입니다.
이들은 중국 공산당과 협력관계를 유지하며 일본군과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일제 패망 이후에는 중국 국공내전에도 참여했습니다. 해방 이후 북한을 점령한 소련의 영향으로 바로 들어오지 못하고 1949년과 1950년에 걸쳐서 북한으로 입국했습니다. 조선의용군을 이끌던 김무정 김두봉 등은 연안파라 불리며 고위직에 올랐고 조선의용군은 북한의 주력부대가 됩니다. 그리고 이들은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남한이 미군과 합세하여 그토록 처절하게 싸운 상대가 김원봉의 조선의용대 후손입니다. 이런 슬픈 역사가.....
한편 충칭에 남아있던 조선의용대 본대와 김원봉은 임시정부에 합류하여 광복군 1지지대로 편입되고 해방된 조국에 합류하나 빨갱이로 몰려 묻히거나 북으로 갔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한 이들은 해방 이후 남과 북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신세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남쪽은 남쪽대로 북쪽은 북쪽대로 독립운동가들이 설 자리가 없는 그런 시대였습니다.
조선의용대 창립 기념 사진이다. 가운데 머리가 훤칠하신 양반이 김산의 아리랑에서 나온 붉은 승려 김충창(김성숙)이고 조선의용대 Korean Volunteers 기 중앙이 김원봉이다. 유자명, 최창익 등이 고위직을 맡았다. 저 단체 사진을 찍을 때의 그 기분은 어땠을까 상상해본다. 주체하지 못할 혈기와 기백으로 충만했을까?
사진 출처 및 위의 글 인용 : 나무위키
조선의용대는 중국이 인정한 최초의 조선 무장 단체였다. 중국어와 일본어도 잘해서 선전과 첩보 수집에 중점을 두었다. 이후 타이항산으로 옮겨가며 본격적인 무장 투쟁을 하게 된다. 중국과 한국이 손을 잡고 일본군을 몰아내자 라는 구호를 쓰는 조선의용군.
사진 출처 : http://news.joins.com/article/3972102
조선의용군이 치열하게 일본군과 싸운 근거지가 우공이산의 주인공 타이항산이다. 산시성과 허베이성의 경계를 이루며 산시성山西省과 산둥성山東省의 지명도 타이항산의 서쪽과 동쪽에서 유래되었다. 중국에 있을 때 허난성 정저우 인근에 있는 소림사로 여행을 가던 중 타이항산 근처에 친구가 있어 들렀다. 타이항산 대협곡의 멋드러진 경치와 친구의 환대에 소림사고 나발이고 그냥 머물렀던 적이 있다. 토끼 고기가 맛났다. 요즘은 트래킹 코스로 유명해져서 울나라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고 한다. 산시성 쭤취안현의 윈터우디촌이란 곳이 있는데, 조선의용군 화북지대가 머물렀던 곳으로 한국과 중국이 공동으로 항일투쟁사를 기념하고 있다. 사진 푯말에 조선의용군 구지라고 되어 있다.
사진 출처 : (저자 블로그) https://blog.naver.com/kimyto/220626753509
1942년 5월 일본은 주력군 3만여 명을 동원하여 중국공산당의 타이항산 근거지를 공격했다. 팔로군과 조선의용군은 이에 대항하여 치열하게 싸웠으나 질적 양적으로 상대가 되지 못했다. 조선의용군은 탈출로 확보에 사활을 걸었고 마침내 탈출로를 확보했으나 많은 이들이 희생당했다. 진광화와 윤세주가 숨을 거두었고 중국공산당의 주요 인물인 쭤취안左權 장군도 역시 이 타이항산 전투에서 사망했다. 얼마나 주요 인물인가 하면 이 동네 이름이 쭤취안이다. 사진은 그 동네 있는 조선의용군 열사 기념관이다. 저자의 블로그에서 퍼왔다.
윤세주(1901~1942)는 김원봉과 같은 밀양 출신으로 한 동네에서 자랐다. 이회영의 신흥무관학교 출신이며 의열단에서 핵심적인 일을 하고 조선의용대의 브레인이기도 하다. 스무살의 나이에 중국인으로부터 폭탄을 반입하다 걸려서 7년 동안 감옥살이를 한 후 난징으로 건너가 1932년 이육사와 함께 김원봉의 조선혁명군사학교 1기로 교육을 받고 독립운동에 매진한다. 1941년 평생의 동지인 김원봉과 헤어져 박효삼 등과 함께 화북지방으로 북상하여 팔로군과 공동으로 일본군과의 전투에 참여했다. 그리고 바로 이 타이항산 전투에서 사망했다. '조선의용대의 영혼'이라 불리기도. 사진은 윤세주와 독립운동가 진광화의 무덤이다. 돌 비석과 석관으로 이루어진 묘지가 아련하고 슬프다.
사진 출처 : (저자 블로그) https://blog.naver.com/kimyto/220626730786
조선의용대는 김원봉이 창설하였으나 본대와 주력인 화북지대로 갈라지면서 사실상 주도권은 최창익으로 넘어간다. 그리고 이후에는 김두봉과 함께 조선독립동맹을 만들었던 김무정이 조선의용군 사령관이 된다. 윤세주가 전사한 타이항산 전투 이후 팔로군 포병 사령관이었던 무정이 조선의용군으로 오게 된 것이다. 김무정의 조선의용군은 국공내전에도 참여하는 등 최고의 정예부대였다. 물론 이 부대가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의 주력부대가 된다. 김무정은 중국공산당 대장정에 참여한 조선인 중에서 유일한 생존자이다. 그 의미는 중국공산당의 정통성을 그대로 계승한 인물이라는 말이다. 김일성에게는 엄청난 라이벌이 아닐 수 없다. 당근 숙청 대상이었고 한국전쟁 중 패배의 책임을 물어 숙청된다. 독립운동의 영웅들은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1948년 소련의 후원하래 수립한 북한 정권은 김일성의 만주빨치산파, 박헌영의 남로당파, 김두봉 김무정의 연안파, 국내파, 소련파 등이 결합한 일종의 좌익 연립 정권이었다. 김일성이 라이벌들을 모조리 숙청한 것은 50년대 말이고 70년대에 들어와서 확고한 김씨 세습 왕조체제를 구축하게 된다. (글 인용 : 나무위키)
사진 출처 : http://kr.chinajilin.com.cn/society/content/2015-12/21/content_166900.htm
뤄자핑의 조선혁명군정학교 표지 이후 몇 가지 질문들이 내 머리속에 맴돌기 시작했다. 충칭에 있다가 일제 패망 후에 귀국한 임시정부 요인들이 모두 850여 명이었는데 연안파는 그보다 많은 1천 여명이었다니, 이게 사실일까?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했는데 그 '우리'에는 소련군을 따라 귀국했다는 김일성도 포함되는 것일까? 대한민국에서 동맹이라면 당연히 미국인데, 나라를 통째로 잃어버리고 민족이 개나 돼지로 핍박받던 36년간의 독립투쟁 시기에는 동맹이 있었을까? 있었다면 누구일까? (p.14)
님 웨일즈의 '아리랑'을 읽고 김산이 참여했던 광저우 봉기와 해륙풍 소비에트를 공부하면서 아주 알기 쉽고 해박하게 쓴 블로그를 발견했습니다. 호기심이 생겨 그 블로그에 담긴 글들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양과 질 모두 범인이 쓸 수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어마어마한 블로그를 봐버린 겁니다. 블로그의 주인장 윤태옥 선생은 <길 위에서 읽는 중국현대사 대장정>을 비롯하여 중국의 여러 분야에 대해 이미 몇 권을 책을 내었습니다. 이번에 그의 새로운 책이 나온다길래 한달음에 달려가 샀습니다.
저자는 중국 섬서성 옌안延安 지역의 전통 민가를 찾아다니던 중 뤄자핑이라는 오래된 시골 마을에서 조선의용군의 군정학교 자취를 만나게 됩니다. 그러고는 그들이 거주했다는 동굴을 하나하나 들여다봅니다. 그것이 시작입니다. 넓디 넓은 중국 대륙에 남아있는 독립운동가의 흔적을 찾아다니는 여행을 떠납니다. 베이징 골목길의 쓰러져가는 집, 길가에 아무렇지도 않게 서 있는 허름한 비석, 서낭당을 연상시키는 오래된 마을, 시장 혹은 다른 건물로 바뀌어버려 이젠 흔적을 찾기 힘든 옛 터 등,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닌 곳들을 기어이 가고야 맙니다. 그리고 그것을 모두 기록하고 자신의 감정을 불어넣어 생기 넘치는 읽을 거리로 만듭니다. 그 갈무리가 이 책입니다.
책은 너댓 시간만에 다 읽었습니다만 여러 공부거리를 주었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떠오르는 질문과 먼 곳에서 스러져간 독립운동가들에 대해 더 알고 싶은 욕구로 인터넷의 바다를 떠돌았습니다. 내가 배우고 느낀 것을 정리하는 데는 책을 읽는 시간의 몇 배가 필요했습니다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재미있었습니다.
거칠은 역사의 한 토막에 반짝하고 사라져간 독립운동가들이 어디 이 책에 나오는 이들 뿐이겠습니까만, 사실 이들을 모르고도 살아가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알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과 그냥 모르고 있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곰곰히 생각해 봅니다. 딱 꼬집어 말할 수 없지만, 그 시대의 역사 속 인물들이 가진 느낌과 감정을 곱씹어보고 그들과 감응하는 것으로도 분명히 나의 삶이 풍부해지고 있다는 걸 느낍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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