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은 인간을 뛰어넘을 수 없나? : 에드가 스노우 <중국의 붉은 별>
문득 중국 혁명이 읽고 싶어졌다. 러시아의 10월 혁명과 조선공산당이 이루려고 했던 혁명에 관한 책들을 최근에 읽었다. 아마도 그 책들의 영향이겠지. 책장에 꽂혀있는 중국 관련 책들을 쓰윽 훑는다. 유난히 반짝이는 책이 있다. 김산의 아리랑을 쓴 님 웨일즈의 남편인 에드가 스노우의 이 책이다. 방통대 중문과 시절 읽었는지 아니면 중국에서 근무할 때 읽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언제 읽었는지 기억조차 나질 않는데 그 내용이야 말해 무엇하리. 완전히 새로운 기분으로 읽어나갔다.
얼굴이 온통 시뻘겋고 뿔리 달려 있을 지도 모르는 비적들의 소굴에 목숨을 걸고 들어간다. 진짜 죽을지도 모른다고 저자는 생각했다. 아무리 기자 정신이 투철하다고 해도 그걸로 설명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애정이다. 저자는 진짜 중국을 사랑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리고 그 안에서 자신이 보고 들은 사실을 쓴다. 당시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홍군과 그 지도자들, 그리고 농민들의 실상, 중국의 진짜 모습들. 중국 혁명이 무사히 태어나서 이제 막 걷기 시작할 모습이었다. 옮긴이가 이 책에 대한 의미를 권말에 적었는데 아래와 같다.
에드가 스노우는 1936년(당시 31세) 중국 섬서성 북쪽에 있는 소비에트 지구를 방문하여 유럽이나 미국의 신문기자로서는 처음으로 모택동을 비롯한 중국 혁명의 주요 인물들과 인터뷰를 가졌다. 그리고 홍구紅區
의 주요 현장들을 방문하여 그 현실을 눈에 보는 것처럼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신문에 연재된 이 르포르타쥬와 그것을 보충하여 펴낸 <중국의 붉은 별>을 통해 세계는 비로소 중국대륙에서 과연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그리고 그것을 이끌고 있는 혁명세력의 실체를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었다.
스노우의 이 자료가 나오기까지 서방세계는 물론 중국내에서까지 중국의 사회주의혁명은 전설이나 풍문으로만 떠돌고 있을 뿐이었다. 모택동과 주덕과 주은래를 비롯한 혁명의 지도자들이 1년에 여러 번 사망했다고 보도될 정도로 사실의 날조와 왜곡과 은폐가 되풀이되고 있었다. 그리고 혁명에 참가하고 있는 공산당원이나 홍군 지도자들은 다만 '비적'들로 알려져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스노우의 펜을 통해 이 '비적'의 지도자들이 "어디로부터 왔으며, 왜 혁명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는가,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고 또 살아남았으며, 앞으로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가 처음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스노우의 보도를 통해 중국의 혁명은 '전설'에서 '사실'로 되었던 것이다. (하권 p.289 옮긴이의 말 중에서)
모택동, 주은래, 주덕과 팽덕회를 비롯한 혁명 세력들이 우리도 제대로 혁명 함 해볼껴 라고 불을 지폈지만, 1927년 장개석이 상해에서 국공합작을 완전히 깨버리는 배반으로 혁명은 지리멸렬해지고 정강산으로 일단 피신, 거기서 다시 힘을 모아보지만, 공산당에 대한 압박은 더욱 심해진다. 1~5차 초공전으로 전멸 직전에 놓인 공산당은 끝 모를 도피를 감행한다. 9600Km의 고난의 행군, 대장정이다.
죽고 죽고 또 죽고, 그렇게 죽음의 행렬끝에 천신만고 섬서성 보안과 연안에 도착해서 한 숨 쉬려고 하니 국민당 넘들도 끈질기다. 이 때 정의의 사나이 장학량이 쨔쨘~ 하고 나타난다. 총통! 우리가 무찔러야 될 넘들은 공산당이 아니라 일본 쪽바리 시키들입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다시 공산당과 손잡고.... 이듬해인 1937년 중일 전쟁이 일어나고, 중국 인민들의 마음을 얻었던 공산당은 라이벌 장개석을 몰아내고 1949년 10월 1일 중국 혁명의 완성을 선포한다.
1946년 11월 연안에서. 주은래 모택동 주덕
사진 출처 : http://dongbeier.tistory.com/724
# 정강산井岡山과 홍군
1927년 장개석이 때려잡자 공산당의 구호로 대대적인 무력 탄합을 개시하자 공산당은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였고, 코민테른은 중국공산당에게 무장봉기를 통한 근거지를 확보할 것을 통보했다. 남창 봉기를 시작으로 추수 봉기, 김산이 참여했던 광주 봉기가 일어나지만 완전히 실패한다. 코민테른의 지시가 결과적으로 잘못된 노선임을 깨달은 모택동은 농촌을 먼저 장악하여 도시를 포위한다는 전략으로 남은 인원을 이끌고 정강산으로 들어가 홍군을 만든다.
중국에서 초등학교 교과서로 중국어 공부를 했더랬다. 정강산, 주덕, 모택동 등 전설들이 교과서에 나왔다. 우리나라 초등학생 국어 교과서에 세종대왕과 이순신이 나오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강서성 서남부에 있으며 서쪽으로는 호남성과 경계다. 오늘날의 정강산은 당연히 혁명유적지로 유명하다.
사진 출처 : https://twitter.com/chinakorea1/status/746283001693143040
# 대장정
1934년부터 1936년에 걸쳐 중국공산당이 국민당의 공격을 피해 중국 대륙 동남부에 서북부로 근거지를 옮기려고 감행한 행군. 2만 5천리에 달하는 엄청난 거리를 도보와 우마로만 이동하였고 10만에 육박했던 출발 인원 중 산시성에 도착했을 때 살아남은 인원은 6000명에 불과했다. 중국공산당은 자신들의 정통성이 여기에서 나온다고 자부하고 있다. 조선의용군 사령관 김무정도 대장정에 참가했다.
홍군이 장장 때 넘었던 쓰촨 아바자진산
1936년 10월 홍군 3대 주력인 1,2,4군단이 간쑤 후이닝 근거지에서 집결했다. 고된 행군을 견디어 대장정이 마침내 승리했다.
위의 사진 출처 : http://www.chinacorea.com/krsw/201702/t20170213_800087126_1.html
쇠사슬에 의지해 강 위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스촨성의 노정교(루딩차오). 1935년 5월 장정 중이던 홍군은 이곳에서 국민당과 전투를 벌여 홍군의 도하를 막으려던 국민당을 제압했다. 책에서는 '대도하의 영웅들'이란 챕터로 비교적 상세하게 전투를 묘사했다.
사진 출처 :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touchchina&logNo=220844010478
짐보따리를 이고 지고 산 넘고 물 건너 초원을 지나며 온갖 어려움을 겪는 이 대장정의 여로에 대해 자세하게 기술했다. 그리고 그 의미에 대해서는 이렇게 썼다.
어떤 의미에서 이 대이동은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큰 무장 선전여행이었다. 홍군은 2억이 넘는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는 여러 개의 성들을 통과했다. 전투나 소규모 접전이 끝날 때마다 그리고 마을을 점령할 때마다 그들은 대중집회를 열었고, 연극을 상연했고, 유산계급에게 중과세를 부과했으며, 다수의 노예들을 해방시켰고(이들 중 일부는 홍군에 가담했다), '자유와 평등과 민주주의'를 설파했고, '민족 반역자들'(관리, 대지주, 세금징수원)의 재산을 몰수하여 그것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다 수백만 명의 가난한 사람들이 홍군을 직접 보았고, 그들이 말하는 것을 직접 들었으며 이제는 더 이상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홍군은 농업혁명의 목적과 자신들의 항일정책을 설명했다. 그들은 수천의 농민들을 무장시켰으며, 간부들을 뒤에 남겨두어 홍군 유격대를 훈련시키도록 했다. 이 유격대 때문에 남경정부군은 늘 골치를 앓았다. 행군이 장기화 되고 점점 더 고통스러워지면서 수천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대열을 이탈했지만, 수천 명의 다른 사람들 - 농민, 도제, 노예, 국민당군의 탈주병, 노동자 등, 모두가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들 - 이 합세하여 빈 대오를 채워주었다. (상권 p.236)
# 서안 사건
1936년 12월 동북군 총사령관 장학량이 국민당 정권의 총통 장개석을 산시성의 성도 서안 화청지에서 납치하여 구금하고 공산당과의 내전을 중지하고 일본의 침략에 맞서 함께 싸울 것을 요구한 사건. 이를 계기로 국민당군과 홍군은 국공 내전을 중지하고 제2차 국공 합작이 이루어져 함께 대 일본 전쟁을 수행하게 되었다. 공산당의 구세주.
장개석 석방 기념 사진. 왼쪽이 장학량. 중국 역사의 가장 위대한 반역자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그야말로 '구국의 결단'이었다. 쿠데타 이후 그는 자진해서 장개석을 따라 남경으로 와서 응당한 처벌을 받길 원했다. 그후 가택연금에 처했고 대만으로 끌려가 1991년에서야 석방되었다.
사진 출처 : https://www.alphawiki.org/w/%EC%84%9C%EC%95%88%20%EC%82%AC%EA%B1%B4
서안 사건이 일어나고 공산당 대표로서 장개석을 만난 주은래. 장개석은 홍군의 포로가 될 것이라 불안했는데, 주은래와 장학량이 그를 총사령관으로 인정하고 국가의 위기에 대하여 입장을 설명하자 그제서야 장개석은 공산당의 말에 귀를 귀울였다. 장개석은 그들에게 설득당했다기 보다는 자신이 없는 남경정부가 배반할 가능성이 커서 국공합작에 응했다고 볼 수 있다. 사진은 서안 사변 시기의 주은래 모습이다.
저자의 직업은 기자다. 그래서 자신이 본 것과 들었던 것을 아주 객관적으로 썼다.... 는 개뿔, 전혀 객관적이지 않아 보인다. 주관이 담뿍 들어갔다. 콕 찝자면 애정이다. 서두에서 말했다시피 애정이 없었다면 아무리 취재라 할지라도 목을 내놓고 어쩐 존재인지도 모를 비적들의 소굴로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목숨을 걸고 공산당의 핵심지역으로 들어가서 쓴 문장은, 그야말로 사랑이 넘치고 애정이 뚝뚝 떨어진다.
'소귀小鬼들'은 어떻게 보아도 크게 잘못된 점을 찾기 어려운 붉은 중국의 자랑거리 중의 하나였다. 그들의 기백은 충천했다. 나이든 사람이 그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자신의 비관주의를 떨쳐버릴 수 있을 것이고, 자신이 이러한 소년들의 장래을 위해 싸우고 있다는 생각에 용기가 새로워질 것이 아닌가 하고 나는 생각해 보았다. 그들은 예외없이 명랑하고 낙관적이었으며, 하루의 행군 끝에 몸이 피곤할 때도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안녕하십니까' 하고 인사했다. 그들은 참을성이 강했고, 열심히 일했고, 영리했고, 학습의욕이 강렬했다. 그들을 보면 중국이 결코 희망없는 나라가 아니며, 어떤 나라도 이런 젊은이들이 있으면 결코 절망적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느끼게 했다. 바로 이들 소년선봉대원에게 중국의 장래가 걸려 있었다. (하권 p.66)
1936년 스노우와 모택동이 처음 만나 인터뷰 할 당시의 모습
사진 출처 :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yzlee1941&logNo=220907714534
그리고 1970년 중국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서 열렸던 중화인민공화국 창건 21주년 기념일 행사에 나타난 에드가 스노우와 모택동
사진 출처 :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yzlee1941&logNo=220907714534
역사 이래로 무수히 많은 혁명이 일어났다. 혁명은 엄청난 댓가를 요구한다. 동학 혁명은 수많은 농민지도자와 곡괭이를 든 농민들의 피를 앗아갔고, 러시아의 데카브리스트 혁명 또한 많은 사람이 죽고 시베리아로 유배되었다. 중국 혁명도 그렇다. 백군으로 대표되는 국민당군의 학살과 일본과의 전쟁. 하지만 그들의 뒤에는 농민을 비롯한 중국 보통 사람들의 열렬한 지지가 있었다. 어떠한 어려움도 헤쳐나갈 수 있다는 의지와 희망으로 결국 인류 역사상 가장 빛나는 혁명이 되었다.
하지만, 혁명 이후에 그들은 어떻게 되었나? 저자가 중국의 미래라고까지 극찬한 '소귀' 소년선봉대원들은 혁명 후에 사람답게 살게 되었을까? 70년 전에 세상 거의 모든 혁명가들이 이루고자 했던 그 혁명을 성공한 중국은 가장 위대하고 훌륭한 나라가 되었을까? 혁명 이후 모택동은 중국 인민들을 위해 남은 인생을 다바쳤나? 그런게 전혀 아니라면 그 혁명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혁명은 성공하였지만, 혁명 후엔 완전히 실패해버린 홍군, 모택동, 중국을 바라보며 쓰인지 80년이나 지난 지금에 이 책을 읽는 의미에 대해 나에게 물어본다. 문화대혁명, 개혁개방과 천안문 사대, 혈연 이외에는 의지할 곳이 없는 사회안전망, 돈이 모든 가치를 우선하는 문화 등 처음의 혁명 정신과 전혀 동떨어진 중국을 생각하며 나는 완전히 딜레마에 빠져버렸다. 북한도 마찬가지 아닌가. 지금은 비록 저런 모습이지만 출발은 우리보다 훨씬 제대로였다. 도대체 무엇이, 어디쯤에서 잘못되었나?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옮긴이가 해주었다. 그도 나랑 같은 질문을 했나보다. 그 어떤 위대하고 아름다운 혁명도 인간의 이기심을 뛰어 넘기는 어렵단 말인가.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은 이처럼 스노우가 기록한 1930년대의 중국과 오늘의 중국 현실을 함께 보면서 날카로운 대조를 느낄 것이다. 모택동을 비롯한 이 책의 주인공들이 60여년 전에 2만 5천리 장정과 온갖 신산고초를 겪으면서 꿈꾸었던 사회는 어떤 사회였을까? 오늘의 중국 사회와 같은 것이었을까? 그들이 이제껏 살아 오늘의 중국을 본다면 어떻게 생각하고 무어라 말할 것인가?
모택동이 스노우에게 말한 바에 따르면 장개석의 '반혁명'이 시작될 당시만 해도 약 5만 명의 공산당원이 있었는데, '대살륙' 이후에는 1만 명이 살아남았으며 1960년까지의 전기간에 걸쳐 살아남은 사람은 약 800명 밖에 안 된다고 한다. 국민당 정부측의 희생자와 그 밖에 희생된 민간인까지 합친다면 상상키 어려울 정도로 수많은 사람들이 이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파묻혀 사라졌음을 말해 준다. 그리고 형언키 어려울 만큼 비참한 죽음들이 이 책에도 기록되어 있다. 그들은 무엇때문에 죽어갔나? 오늘의 중국 현실을 볼 때 그들의 죽음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케 하고 많은 감회를 느끼게 해 줄 것이다. 어떤 사회적 이념이나 사상은 그 시대의 특별한 산물이기 때문에 시간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그만큼 짧은 생명밖에 갖지 못하는 것일까? 사회주의 사상을 포함한 어떤 사회사상도 인간의 이기심 앞에서는 너무나 무력한 것인가? 수많은 사회사상가들이 자본의 운동법칙, 사회의 운동법칙, 역사의 운동법칙은 열심히 탐구하여 그것을 정식화했으되 정작 그 역사를 움직이는 주체인 '인간을 움직이는 운동법칙'에 대해서는 탐구를 너무나도 소홀이 했던 것은 아닐까? 인간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복잡하며 결함많고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을, 선한 것 못지 않게 악한 존재라는 것을 간과한 채 너무나도 쉽게 사회와 인간을 개조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인간의 모든 악과 사회적 모순은 사회환경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환경을 변화시키고 사람들을 '학습'시키면 인간은 쉽게 개조될 수 있다고 너무 간단히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집단주의'를 너무 쉽게 맹신한 나머지 '개체'의 소중함을 망각하여 인간의 자유로운 정신과 창의성, 자발성을 말살했던 것은 아닐까? 언론의 자유와 자유로운 토론, 반대할 수 있는 자유, 그리고 열려진 눈 없이도 인간은 진실을 볼 수 있는 것일까? 사물은 끊임없이 변화하며 움직인다는 변증법을 그토록 내세웠으면서도 정작 체제와 조직을 움직인 이른바 '지도자들' 내부에서는 변증법이 죽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중국은 어디로 가고 있으며,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변해갈까? 그리고 앞으로 인류가 지향해야 할 바람직한 또다른 이념은 나타날 것인가? 그것은 어떤 모습과 내용을 갖게 될 것인가? 하는 등등의 무질서한 감상들을 독자들은 이 책을 읽으면서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이 책을 읽는다면 이 책이 씌어진 60여 년전의 시대와 오늘을 통시적으로 함께 대조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하권 p.297 옮긴이의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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