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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

한 조선혁명가의 고뇌에 찬 생애의 기록 : 김산, 님 웨일즈 <아리랑>

by 개락당 대표 2018. 1. 1.

 

 

 

한 조선혁명가의 고뇌에 찬 생애의 기록 : 김산, 님 웨일즈 <아리랑>

 

 

 

그는 내가 7년 동안 동방에 있으면서 만났던 가장 매력적인 사람 중의 하나였다. 그는 중국과 조선의 현대사를 주조해낸 저 수많은 대비극의 타오르는 불덩이 속에서 단련되고 형성된 사나이였다. 또한 단련된 의지와 결의의 강철 같은 도구로서, 뿐만 아니라 감각과 지각을 갖춘 정적情的인 존재로서 시련 속에서 나타난 사나이였다. (p.34)

 

 

 

님 웨일즈는 미국의 칼럼니스트입니다. 기자로 1931년에 중국 땅을 처음으로 밟았고, 중국의 최대 격동기인 이 시기에 공산 혁명에 매료되어 함께 혁명군에 가담하기도 하고 급변하는 중국에 관한 글을 씁니다. 1936년에는 조선을 알고 싶다는 열망으로 이 땅에 와서 지냈으며 금강산에도 오릅니다. 

 

 

 

1937년 연안(옌안延安)의 노신(루쉰魯迅)도서관에서 자신이 읽으려고 하는 영문 책을 누군가 한 사람이 계속 빌려갑니다. 영어로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던 님 웨일즈는 그 사람을 수소문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이 찾던 그 사람이 찾아옵니다. 비가 억수같이 오는 날이었는데, 순간적으로 유럽인이 아닌가 생각할 정도로 윤곽이 뚜렷한 사람이었고, 태도가 당당하고 기품이 있었습니다. 그는 조선인이었습니다.

 

 

 

몇 번의 만남으로 이 혁명가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된 님 웨일즈는 이 조선혁명운동의 지도자에 대한 책을 써 보고 싶다고 제안합니다. 처음에는 망설였지만, 책이 조선의 혁명을 알리는 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하고 자신의 혁명사를 이야기합니다. 이 구술을 받아 적어 노트 7권의 분량의 일대기를 확보한 뒤 1941년에 책으로 만들어냅니다. '현대의 정신을 소유한 실천적 지성'이라고 격찬해 마지않았던 혁명가 김산의 일대기, 바로 이 책 <아리랑>입니다.

 

 

 

 

님 웨일즈(본명 : 헬렌 포스터 스노우 Helen Foster Snow 1907~1997)의 첫인상은 아리따운 외모였다. 책의 표지 사진은 1932년 에드가 스노우(마오와 함께 하며 그의 대장정을 글로 쓴 냥반. 그 책의 제목은 <중국의 붉은 별>)와의 결혼식 전날에 찍은 것인데, 아름다우면서도 뭔지 모를 슬픔에 잠긴 모습이다. 김산과 님 웨일즈가 처음 만났을 때 두 사람의 눈에서 하트 뿅뿅은 아니더라도 그 비슷한 무언가가 나왔음이 분명하다. 그렇게 읽혔다. 잘 좀 사귀어 보시던가. 사진은 중국이 선물한, 그녀의 고향인 미국 유타주의 시더시티(Cedar City)에 있는 님 웨일즈의 동상이다. 동상조차 예쁘시다.

 

사진 출처 : https://www.gousa.or.kr/destination/sideo-siti

 

 

 

# 김산 (1905 ~ 1938, 본명 장지락) Profile

 

 

1905. 03. 10

 

평양 교외에 있는 차산리라는 조그마한 마을에서 세째 아들로 태어나서 자람

 

 

1916년 11살

 

11살 때 가출함. 조숙도 하시어라. 아는 친척집을 전전긍긍하다 작은 형네 집에 얹혀 삶. 기독교 학교에 들어가 공부함

 

 

1919년 14살

 

3.1운동에 참여함. 조선독립만세를 외침. 얼마 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제대 응시를 준비함. 신문배달, 헌책 수거해서 팔기, 인력거 끌기 등으로 생활

 

 

1920년 15살

 

모스크바가 '새로운 사상'의 원천임을 깨달아 러시아로 가기로 맘 먹음. 중국을 거쳐 가던 중 합니하의 신흥학교로 방향을 틈. 어리다고 안된다는 걸 막 울고 땡깡을 부려 입학함. 3개월 과정을 수료하고 상해로 감. 안창호, 이광수, 김원봉, 오성륜 등을 만나 교류함

 

 

1922년 17살

 

북경 국립 의과대학 입학 (1925년 광동 혁명이 부를 때까지 다님.) 그리고 '금강산에서 온 붉은 승려' 김충창(본명 김성숙)을 만나 마르크스 레닌 주의에 빠짐. 제대로 된 공산주의를 배움. 무정부주의자에서 공산주의자로 변함. 17살에!! 그럼 15살에 아나키스트였다능! 톨스토이에 심취. 다음해 공산청년동맹에 가입하여 공산주의 잡지 <혁명>을 간행

 

 

1925년 20살

 

광저우로 달려가 중국 대혁명[북벌이 시도된 1925년부터 장개석의 배신으로 혁명이 좌절되었던 1927년까지의 시기를 공산주의자들이 일컫는 말. 1924년 공산주의자와 민족주의자가 힘을 합하여 군벌 및 항일 투쟁에 나섬(1차 국공합작). 그러나 1927년 4월 장개석의 해안부대가 상해에서 공산주의자를 대거 학살하고 난징 정부를 세운다. 이런 배신자 같으니라구!!]에 참가

 

 

1927년 22살

 

12월 광동 코뮨(광저우 봉기)의 주역이 됨. 그러나 3일 천하로 끝나버리고..... ㅈㄹ 쫓기는 신세가 됨 

 

 

1928년 23살

 

해륙풍 소비에트로 들어가 백군과 치열하게 싸움. 그 전투에서 죽는다고 생각하고 유서를 씀. 내용은 이러함. '나는 이곳에서 행복하게 죽어갑니다. 노예의 땅에서 죽는 것과는 다릅니다. 하지만 여기가 우리의 빛나는 혁명투쟁과 같이 그렇게 자유로운 조선땅이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p.173) 

 

 

1930년 25살

 

11월에 북경에서 체포됨. 체포 이전 거의 2년 가까이 북경의 공산당 서기로서 지하활동의 임무를 수행함. 일본 영사관에 넘겨져 조선에서 심문 받음. 물고문 당함. 고문 후유증으로 이후 오랫동안 폐에서 피가 나오는 고통을 받음. 이듬해 4월에 석방됨. 이후 교사 생활을 하면서 학생, 청년, 농민들을 조직함.

 

 

1933년 28살

 

다시 잡혀 남의사(국민당 산하 파시즘 비밀조직) 요원들에게 전향 및 변절할 것을 강요당함. 갖은 고문과 회유를 겪으며서 한층 더 성숙해지고 의지가 굳어짐. 위인은 역시 시련으로 단단해지는가! 변절과 음모로 살아남으려고 애쓰는 것보다는, 설사 우리의 사업이 달성되지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정직하게 죽는 편이 더 낫다. 나는 내 자신의 용기와 지조에 완전히 자신감을 얻었다. (p.271)

 

 

1934년 29살

 

함께 투옥되었던 중국 여인 조아평과 결혼.

 

당시의 정세는 국민당과의 합작이 깨어지고 이 해 10월 장정이 시작된다. 이 대장정을 통해 공산당은 간신히 옌안에 자리 잡았으나 국민당은 그곳까지 토벌군을 보낸다. 당시 산시성에 주둔한 홍군은 3만 명에 통치지역도 4개 현에 불과했다. 공산당은 '일본에 저항하여 나라를 구하자' 는 구호로 중국 인민의 애국심에 호소했다. 장제스는 콧방귀도 안뀌었지만, 이 구호는 장쉐량에게 통했고 그 결과 장쉐량이 장제스를 사로잡아 국공합작을 요구하는 시안 사태로 이어진다.  

 

 

1936년 31살

 

상해에서 공산주의자들을 골격으로 하고 무정부주의자와 민족주의자들을 참여시켜 <조선민족해방동맹>을 창설하고 핵심 역할을 수행함. 중국 혁명을 일본으로부터 해방이라는 것과 맞물리게 할 수 있을지를 고민함. 8월 조선해방동맹과 조선공산주의자들은 조선혁명가 대표로 김산을 선발함. 옌안으로 옮김

 

 

1937년 32살

 

조아평이 아들 고영광을 낳음. 항일군정대학에서 물리학, 수학, 일본어, 한국어 등의 과목을 가르침. 이 시기에 님 웨일즈를 만남.

 

 

1938년 33살

캉셩(강생)에 의해 '트로츠키주의자' 혹은 '일본 스파이'라는 죄명으로 처형당함

 

 

1978년

아들 고영광이 중국공산당 중앙정부 조직부에 김산의 명예회복 조사 요청

 

 

1983년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조직국은 공식적으로 다음과 같이 결의함. "김산의 처형은 특수한 역사 상황 아래서 발생한 잘못된 조치였다. 본 결의에 의해 그에게 덮어씌워졌던 불명예가 제거되며 그가 지녔던 명예를 모두 그에게 되돌린다. 또한 이로서 그의 당원자격은 회복된다" (p.337)

 

 

자료 인용 : 이 책 및 위키백과, 나무위키, 그리고 아리랑 홈페이지 http://arirangnara.com/

 

 

 

나는 내 과거의 경험을 분석하고 가혹한 자기성찰을 철저히 하였다. 1919년에서 1924년까지는 지식과 방법과 수단을 더듬더듬 찾아헤매는 학생이었다. 그 첫 단계에서는 하나의 이론이 다른 이론으로 옮겨다녔던 것이다. 1919년에서 1920년 사이에는 민족주의자였다. 1920년에서 1922년 사이에는 이상주의자요 무정부주의자로, 앞으로 전진하기 위한 확고한 발판을 찾아다녔다. 이 발판을 나는 1922년에서 1924년 사이에 마르크스주의를 연구하는 가운데 발견하였던 것이다. 그 때 나는 공산당에 들어갔다.

 

 

 

내 인생의 두번째 단계는 1925년부터 1928년까지로, 이때는 중국혁명에 뛰어들었던 혁명적이고 낭만주의적인 행동시대였다. 광동코뮨 해륙풍 소비에트 이 경험들로 건강은 파괴되었지만 정신은 더욱 튼튼해졌다. 그후 나는 충분한 준비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지도부의 지위에 앉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급속도로 발전하였다. 비밀활동을 지도한 북경과 만주에서의 지하생활은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감옥 생활은 수많은 거친 모서리들을 단단한 형태로 다듬어 주였다. 살인 자살 절망의 시대는 나를 인간답게 만들어 주었으며, 인간의 본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관용을 가져다 주었다. (p,255) 

 

 

 

 

 

유심히 보니 아주 조선 사람처럼 생기셨다. 헬렌이 말한 것처럼 눈 코 입의 윤곽이 뚜렷하다. 책에 나오는 많은 여인들이 반할 만 하다.

 

책에 나오는 첫 여인은 15살에 삼원보에서 머무를 때 그를 돌봐주던 안동희 목사의 딸이다. 김산이 떠난 후 이 가족은 아주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다. 다음은 '위대한 첫사랑' 이라는 챕터에 나오는 동지인 유령이다. 그녀가 김산을 꼬시는 장면은 아주 자세하게 나오는데, 여자에게 쑥맥인 혁명가의 모습이 꽤 재미있다. 출옥 후 몸이 많이 상한 그를 위해 헌신하는 조아평이 있고, 김충창이 김산과 세기의 대사랑으로 점찍어 둔 미스 리도 나온다. 그리고 책의 저자인 님 웨일즈도. 

 

사진 출처 : 나무위키

 

 

 

 

운암 스님 김성숙 (1898 ~ 1969)

 

김산이 가장 영향을 많이 받았던 인물이라고 소개했던 금강산의 붉은 승려 김충창이 운암 김성숙이다. 승려로 생활하다 3.1 만세 운동에 주도적으로 가담했고, 시위 주도자로 서대문 형무소에 2년간 복역한다. 중국으로 건너가 김산과 함께 항일운동을 하며 의열단에 가입하여 활동도 하였다. 광동코뮨에 참가하였으며 김원봉이 조선의용대를 설립하자 거기서도 간부 역할을 맡았다. 광복 후에는 이승만의 장기 집권에 반대하여 옥고를 치루기도 했다. 뜨겁고 치열한 아나키스트이자 독립운동가였지만 말년은 가난했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죽음으로 끝났다. 고은 시인의 만인보 1권에도 등장하고, 그의 생애를 조명한 <조선에서 온 붉은 승려> 라는 소설도 있다.

 

사진 출처 : http://blog.ohmynews.com/yby99/306436

고은 시인의 만인보 시 참조 : https://namu.wiki/w/%EA%B9%80%EC%82%B0

 

 

 

# 광동코뮨 (광저우봉기 1927년 12월)

 

 

 

"마오쩌뚱 주석이 이끈 대장정에도 조선 청년이 함께 했습니다. 그는 한국의 항일군사학교였던 신흥무관학교 출신으로 광주봉기(광저우봉기, 광동코뮨)에도 참여한 김산입니다. 그는 연안에서 항일군정대학의 교수를 지낸 중국공산당의 동지입니다. 저는 엊그제 13일, 그의 손자 고우원(까오위엔) 씨를 만났습니다. 그 분은 중국인이지만 조선인 할아버지를 존경하며 중국과 한국 사이의 깊은 우정으로 살고 계셨습니다."

 

 

 

지난 12월 15일 중국의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이 베이징 대학교 연설에서 김산을 언급했습니다. 아, 대통령이 80년 간 잠들어 있던 혁명가를 깨웁니다. 역시나 문재인입니다. 뜨거운 박수를 보냅니다. 위의 문장은 연설문 일부를 그대로 발췌하였습니다. 김산을 중국공산당의 동지이며 주요 행적으로 광동코뮨에 참가했다고 말했습니다. 이 책에서도 김산은 오성륜 박진 김충창 등과 함께 참여한 광동코뮨의 그 급박했던 상황에 대해 아주 자세하게 썼습니다.

 

 

 

광동코뮨은 국민당의 배신에 화가 난 공산당이 1927년에 광저우에서 대대적으로 한판 붙은 사건입니다. 나와 이 국민당 나쁜 시키들아. 1910년 쑨원의 신해혁명으로 청조를 무너뜨리고 중화민국을 세웠으나 여전히 군벌의 힘은 막강했습니다. 그는 중국의 통합을 위해서라면 국민당 공산당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1924년 1차 국공합작을 성사시키고 중국을 좀먹는 군벌을 무찌릅니다. 북벌이 시작된 거죠. 황푸군관학교도 이 때 세웁니다. 이 학교 교장이 장제스입니다. 근데 아차차, 1925년에 쑨원은 그만 돌아가십니다. 그리고 1927년 4월 장제스는 배신의 끈을 제대로 당기고 상하이에서부터 공산당을 무작정 학살하기 시작합니다.

 

 

 

책에서도 4월 15일 광동의 공산주의자들이 숙청되는 모습을 자세히 그렸습니다. 이에 분개한 공산주의자들이 참다참다 "야, 국민당 나쁜 노무 시키들아 한판 붙자~~" 해서 제대로 붙었습니다. 그 결과는 딱 3일 천하로 끝납니다. 국민당의 반격으로 광저우의 공산주의자 7000명이 희생되었고 그 중 한국인도 200명이 있었다는 군요. 무자비하게 피의 복수를 한 거죠. 책에서 김산은 코뮨 전기간 동안에 혁명군에게 살해된 사람은 100명도 채 안된다고 했습니다. 모두 악질적인 국민당 간부였지요. 상인이나 부자들도 안 죽였습니다. 그런 혁명군에 대한 국민당의 이 야수 같은 대학살에 분개하는 김산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습니다.

 

 

 

김산도 광동코뮨 실패 후 겨우 해륙풍 소비에트로 피신합니다. 해륙풍은 동네 이름입니다. 처음엔 웬 바람인가 했습니다. 광동성 산웨이시의 해풍(하이펑海豊)현과 육풍(陆豊루펑)현을 합친 말입니다. 광저우에서 동쪽으로 220Km 떨어진 곳입니다. 책에서는 12월 14일에 광저우를 떠나 1월 7일에 도착했다고 나옵니다. 차로 세시간 거리인 곳을 무려 24일 걸린거죠. 소비에트는 러시아어로 평의회라는 뜻인데, 민주적 자치지구를 일컫는 말입니다. 광동코뮨 이후 해륙풍(하이루펑)에서 국민당 군대의 복수로 삶과 죽음을 오가는 경지에 이르게 되고 결국 위의 연보에 적은 나는 행복하게 죽어간다. 여기가 조선땅이었으면 좋겠다 라는 유서까지 씁니다. 

 

 

 

여태까지 중국 공산당은 코민테른 즉, 국제공산당의 지도를 받고 있었습니다. 광저우 뿐만 아니라 여러 곳에서 봉기를 일으켰죠. 코민테른의 지시루요. 그 결과는 대망했으여ㅠㅠ 였습니다. 마오가 주더과 함께 징강산으로 들어간 것도 이 시기였습니다. 이 때부터 중국공산당의 주도권도 공산혁명이 아니라 농민이 주도하는 중국혁명을 이끄는 마오저뚱으로 넘어갑니다. 광동코뮨을 공부하면서 저는 태백산맥의 서두를 연 여수 순천 반란사건이 계속 연상되었습니다. 아주 비슷한 성격을 가진 무장 봉기입니다.

 

 

 

주기의열사능원(광동코뮨을 廣州起義라고 하는가 보다. 그러니까 광저우 봉기에서 죽은 혁명자들의 무덤 정도가 되겠다.)안의 광저우 봉기 기념탑. 광저우에도 10번을 넘게 왔다갔다 했는데..... 몰랐으니 저런게 보일리가 없다. 역사 역시 아는 만큼 보인다.

 

사진 출처 : http://korean.cri.cn/1620/2016/03/11/1s234304.htm

 

글 참조 : 위키백과 및 아래 블로그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mhdv&logNo=60011215563&proxyReferer=http%3A%2F%2Fwww.google.co.kr%2Furl%3Fsa%3Di%26rct%3Dj%26q%3D%26esrc%3Ds%26source%3Dimages%26cd%3D%26ved%3D0ahUKEwjatKWyusLYAhWJxIMKHcFUBtwQjhwIBQ%26url%3Dhttp%253A%252F%252Fm.blog.naver.com%252Fmhdv%252F60011215563%26psig%3DAOvVaw2vBnBCMN8qpubKAQOask0f%26ust%3D1515297590182406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kimyto&logNo=220579211474&parentCategoryNo=&categoryNo=&viewDate=&isShowPopularPosts=false&from=postView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romaroo&logNo=220475921934

 

 

 

# 김산은 왜 중국혁명을 택했나?

 

 

 

중국에서 오랫동안 충실한 세월을 보낸 지금, 나는 계급적 단결과 제 계급을 지도하기 때문에, 소련을 나는 어머니처럼 사랑한다. 중국혁명은 그 삶과 운명이 나 자신의 것이기 때문에 피를 나눈 형제와 같이 사랑하였다. 조선혁명은 어리고 불안정한 어린아이로서 애정이 갔다. 나는 조선혁명의 발걸음이 그전에 러시아와 중국이 걸어간 길을 따라가도록 도와주어야 하리라고 생각하였다. (p.210)

 

 

 

나라를 잃은 시대에 태어난 지식인의 최종 목표는 조선의 독립입니다. 하지만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백범 선생는 무엇보다 우리 민족을 가장 앞에 두었으며, 약산은 일본에 대한 직접적인 투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위대한 테러리스트가 됩니다. 이동휘 선생도 만주에 있는 조선인들의 의병으로 무장 투쟁으로 독립을 얻으려 했습니다. 우당 선생은 아나키스트로서 독립 운동을 하였으며 이승만은 외교 즉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우리를 독립시킬거라 믿었습니다. 완전 개뻥

 

 

 

그 시기의 지식인들은 대부분 1917년 러시아에서 일어난 인류 최대의 혁명에 대해서 들었거나 공부했을 겁니다. 그 바람은 중국에도 강력하게 전해져서 곳곳에 중국혁명을 들불이 거세어지고 있던 시기였기도 했습니다. 만국의 프롤레타리아가 주인이 되는 세상! 듣기만 해도 가슴이 뛰지 않습니까? 조선의 사회주의 혁명이 곧 독립을 가져다 줄 것이라 대부분의 독립운동가들은 여겼습니다. 김산은 그 연장선에서 중국혁명의 성공이 곧 조선의 혁명으로 이어질 것이라 믿고 공산주의자로 중국혁명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저라도 혁명을 선택할 겁니다. 마오저뚱과 김일성의 선택을 옳았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광복 후 남과 북으로 나누어 졌을 때 오히려 북쪽이 훨씬 제대로 된 나라였습니다. 많은 독립투사들이 북으로 갔습니다. - 사실 그래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독립운동가들이 많이 있습니다. - 토지의 무상몰수 무상분배가 이루어지고 독립운동가들의 처우도 남쪽보다 훨씬 나았다고 합니다. 그들은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세상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중국도 북한도 그 후가 문제였지만.

 

 

 

김산과 그의 동지들이 중국에서 광동코뮨을 비롯한 중국혁명에 그토록 목숨을 건 까닭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단순한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이 아닌 조선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억압과 신분과 계급으로부터 해방되는 조선혁명, 이 혁명이야말로 그들이 완수해야 할 최종 임무였습니다.

 

 

 

글 참고 자료 : 윤태옥 선생의 블로그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kimyto&logNo=220579380807&parentCategoryNo=&categoryNo=&viewDate=&isShowPopularPosts=false&from=postView

 

 

 

김산의 영화 제작을 하던 영화사의 포스터

사진 출처 :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blueways&logNo=220755026957&parentCategoryNo=&categoryNo=30&viewDate=&isShowPopularPosts=true&from=search

 

 

 

내 청년 시절의 친구나 동지들은 거의 모두가 죽어버렸다. 민족주의자, 기독교신자, 무정부주의자, 테러리스트, 공산주의자, - 수백 명에 이른다. 그러나 내게는 그들이 지금도 살아 있다. 그들의 무덤을 어디로 정해야 하는지 따위는 전혀 마음에 두지 않았다. 전장에서, 사형장에서, 도시와 마을의 거리거리에서, 그들의 뜨거운 혁명적 선혈은 조선, 만주, 시베리아, 일본 및 중국의 대지 속으로 자랑스럽게 흘러들어갔다. 그들은 눈앞의 승리를 보는 데는 실패했지만 역사는 그들을 승리자로 만든다. (p.301)

 

 

 

당신도 내게는 살아있습니다. 마음 속 너무 깊은 곳에 있어 평소에는 느끼지 못하지만, 어떤 무언가의 계기로 불쑥불쑥 올라오곤 합니다. 당신의 삶을 기억하겠습니다. 아마도 또 읽을 것 같습니다.

 

 

 

 

 

 

이 나라를 무겁게 내리누르고 있던 지난 30년의 지적 사상적 암흑 속에서 가끔 <아리랑>을 펼치는 것은 나에게 큰 위안이었다. 모색하다 지치고 좌절 때문에 실의했을 때 나는 '김산金山'을 찾았다. 그는 내가 감히 미칠 수 없는 높은 곳에서 나에게 빛이 되어 주고 힘이 되어 주곤 했다. - 리영희 선생의 추천의 글 중에서 (p.5)

 

 

 

김산의 생애에 푹 빠져서 며칠을 살았습니다. 그와 함께 한 많은 동지들을 만났고, 직접 말하는 김원봉과 의열단에 대해서도 들었습니다. 생사를 넘나드는 해륙풍에서의 전투도 조마조마하게 보았습니다. 고문과 배신이 난무하는 칠흑같은 시기에 그가 겪었던 정신적 시련이 어떻게 그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습니다. 전선을 누비며 직접 행동으로 보여주었던 혁명의 모습도 좋았지만, 단전 아래의 깊은 곳에서부터 혁명가를 뛰어넘는 성숙한 인간으로 변해가는 부분이 아프면서도 더 눈길이 갔습니다. 그리고 그가 살았던 시대의 중국과 그 땅에서 일어났던 여러 사건들에 대해서도 공부하였습니다.

 

 

 

이 책은 대학교에 들어가자마자 읽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대학에 입학해서 누군지 모를 선배가 읽어라고 준 <껍데기를 벗고서> 라는 책도 같은 동녘 출판사에서 나왔군요. 그 시절에도 김산의 인상은 강렬했던 것 같습니다. 나중에 내 아이의 이름을 김산으로 지으면 어떨까 라는 생각을 했으니까요. 한참 세월이 지나 첫 아이를 낳고 이 책을 다시 읽었습니다. 아이의 이름을 김산이라 짓고서 말이죠. 그리고 십 수년이 흘렀습니다. 나는 다시 이 책을 들었습니다. 한 인간의 순수하고 열정적이며 따뜻한 그리고 고뇌하는 삶을 보았습니다. 

 

 

 

이 아름다운 기록과 문장을 남긴 님 웨일즈 여사에게 새삼 감사를 드립니다. 역사 속에 흔적도 없이 묻힐 뻔한 뜨거운 혁명가를 우리에게 돌려주셔서 진심으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