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독립을 목적하고 공산주의를 희망함 : 최백순 <조선공산당 평전>
# 대륙의 영혼 최재형 (1858~1920)
함경도 경원에서 노비로 태어나 9살에 부모를 따라 러시아 노우키에프스크(현재 지명 크라스키노, 한자 지명 연추煙秋)로 이주. 포시에트를 근거로 토목사업과 군수품 납품으로 부자가 되나 거기에 안주하지 않고 자신의 재산을 '조국의 독립'에 투자한다. 연해주의 한인자치구 책임자가 되어 1908년 이범윤 이위종 안중근 등과 연해주 지역 최초의 무장 조직이라 할 수 있는 동의회를 조직하고 두만강을 건너 함경도 일본 수비대를 기습 공격하여 궤멸시킨다.
최초의 임시정부인 대한광복군 정부(1914년. 정통령 이상설, 부통령 이동휘)의 뿌리가 되는 권업회(1911년)를 만드는 데 일조하고 회장이 되어 연해주 지역의 독립운동 활동가를 거의 모두 규합한다. 신문사와 학교를 세우고 음지와 양지에서 독립운동에 온 몸을 바친다. 1920년 일제의 시베리아 출병에 맞서 러시아 적군과 연합하여 무장 투쟁을 전개하다 사망했다.
9살에 떠난 조국을 위해 남은 평생을 바쳤다. 연추 한인자치구 책임자라는 지금으로 치면 기초단체장을 역임하기도 했는데, 그 월급으로 자질이 뛰어난 인재가 보이면 유학을 보냈다. 직접 무장투쟁에 나서기도 하고 음지에서 독립운동가들을 후원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란 바로 이런 것이다.
우수리스크(당시의 지명은 니콜스크)에 있는 최재형의 고택. 1920년 일본군에 잡혀 사망할 당시까지 살았던 집이다. 우수리스크에는 이상설 선생이 살았던 유허지가 있고 고려인 역사관도 있다. 그리고 소녀상. 소녀들은 어디에나 있다. 소녀가 바라보는 고택의 사진이 인상적이다.
사진 출처 :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o_ryu&logNo=220711411865
# 조선공산당 초대 책임비서 김재봉 (1890~1944)
1925년 4월 17일 오후 1시, 아서원. 평범한 점심 약속을 가장한 이날의 모임은 바로 조선공산당 창당을 위한 자리였다. 최재형이 첫발을 내딛었던 극동의 낯선 땅 지신허, 하바롭스크, 이르쿠츠크, 상해, 블라디보스토크, 그 먼 길을 돌아 독립과 사회주의를 꿈꾸는 사람들이 모인 곳은 경성의 한복판에 위치한 중국요릿집이었다. (p.257)
이 때 모인 사람은 김재봉 김찬 김약수 주종건 윤덕병 진병기 조동호 조봉암 송봉우 김상주 유진희 독고전 정운해 최원택 이봉수 김기수 신동호 홍덕유 박헌영 등 19명이었다. 당명은 조선공산당. 책임비서는 김재봉이 선출되었다.
하지만 그 해 11월 신의주의 한 청년의 집에서 조선공산당의 기밀 서한이 발견되면서 1차 조선공산당은 6개월을 짧은 생애를 마감한다. 책임비서였던 김재봉은 조선일보 국장이던 강달영에게 "조공을 지켜달라"고 부탁하고 12월에 잡힌다. 감옥을 나온 건 1934년. 그가 눈을 감은 건 1944년인데 그 동안의 행적은 거의 없다고 한다. 아마도 온전한 몸과 마음으로 감옥을 나온게 아니었을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은 모두 그렇게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다.
조선공산당의 창당은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 계열인 화요회가 주도했다. 김약수 송봉우 정운해 등의 북풍회(일본에서 열혈 사회주의자와 박열 등 아니키스트들이 모여 만든 '흑도회'가 갈라져 국내로 들어오면서 만든 모임), 이봉수 유진희 주종건 등의 상해파를 제외하면 모두 화요회 사람들이었다. 서울청년회의 김사국은 여기에 끼지 못했다. 당시 사회주의 모임의 대세였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의 목적은 같았으나 서로 대립했다.
창당 후의 가장 큰 소임은 공산주의 활동과 조선공산당의 정식 인정이었다. 이를 위해 조동호와 조봉암을 코민테른이 있는 모스크바로 보냈다. 코민테른은 당 강령이 없다며 공식적으로는 승인을 연기했지만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를 통일당의 기지로 삼아야 한다고 결정함으로서 실질적인 파트너로 인정한다고 결정한다. 한인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인 이동휘의 한인사회당이 생긴 이후 7년 만의 성과였다.
사진 출처 : http://www.redian.org/archive/11274
경북 안동 풍산읍에 있는 김재봉 생가. 지금은 '학암고택'으로 문화재에 등록되어 있다. 이 동네는 풍산 트로이카로 불릴 정도로 일명 '빨갱이'들을 많이 배출했다. 이준태 권오설 등의 인물들이 풍산 출신이다.
고택앞에 있는 비석에는 '조선 독립을 목적하고'라고 쓰여있다. 이 글은 김재봉이 조선노동대회 대표자로 이르쿠츠크로 가는 코민테른 위임장에 자필로 적은 글인데 '조선 독립을 목적하고 공산주의를 희망함'이라고 썼다. 독립과 혁명의 완수는 당시 모든 공산주의자들의 바램이었다. 이 원문을 모두 적지 못하고 앞부분만 새겨 넣었다. '공산주의를 희망함'이라는 그의 뒷 문장이 비석에 새겨질 날은 언제쯤이 될까. 그게 머시라고.
사진 출처 : http://www.poongsankim.com/php75/board.php?board=pungkim24&command=body&no=4
# 6.10 만세 운동의 기획자 권오설 (1897~1930)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을 빌미로 일본은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34세의 순종을 왕위에 앉힌다. 허수아비 왕으로 존재감 없이 지낸 창덕궁에 기거하던 순종은 1926년 죽는다. 일제의 독살설이 유력하다. 조선공산당과 독립운동가들은 그 장례식이었던 6월 10일을 기해 3.1 운동과 같은 대규모 반일 운동을 기획한다. 2차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였던 권오설은 천도교 및 학생들과 연대하여 조직을 구성하고 격문 및 전단을 준비하여 이 운동을 추진지만 사소한 실수로 발각되어 거사 3일 전에 권오설은 일본 경찰에 연행되고 만다.
그러나 만세 운동은 일제의 경계를 뚫고 전국적으로 시위가 일어났다. 일제 제국주의 타도와 8시간 노동, 토지제도의 개혁등을 외쳤다. 이 투쟁으로 전국에서 5천여 명의 시위대가 연행되고 조선공산당 관련자 백여 명이 검거되었다. 무엇보다 이념을 초월하여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가 연합하여 일제에 저항하려 했다는 점에 그 의의가 있다. '3.1 운동'과 3년 뒤에 일어난 1929년의 '광주학생 독립운동'과 더불어 일제 강점기하의 3대 독립운동으로 부르기도 한다.
그가 태어난 안동의 가일마을은 전통적인 양반마을이나 일제 시대에 여러 독립운동가와 사회주의 운동가를 배출하여 '안동의 모스크바'라는 별칭이 붙기도 했다. 광주에서 3.1 만세 운동에 운동에 참가하여 옥고를 치루고 고향으로 돌아와 원흥강습소를 만들고, 농민조합과 청년회를 조직하여 계몽운동과 농민, 노동운동을 전개하였다. 조선공산당 주역들이 대거 검거되자 조직을 다시 세우는 과정에서 핵심 역할을 하고 사회주의 계열과 민족주의 계열의 운동가를 통합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6.10 만세 운동으로 서대문형무서에 수감되었으나 1930년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얼마나 심한 고문을 했길래 서른 살의 청년이 버티지 못하고 죽을 정도였을까.
일제 당국은 권오설의 시신을 철제관에 담아 매장했다. 고문으로 참혹하게 훼손된 그의 시신을 숨기려고 관을 열 수 없도록 한 것이다. 심지어 무덤도 만들지 말며 조문객도 받지 말라고 강요했다. 시골 선비였던 그의 아버지 권술조는 아들의 참담한 죽음을 두고 이렇게 썼다.
"아, 원통하고 슬프다. 내가 너와 인간 세상에서 부자라는 이름으로 정해진 것이 겨우 33년인데, 이 33년 사이에 부자의 정을 나눈 것이 그 삼분의 일이라도 되었겠느냐. 네가 과연 죽었느냐. 죽었다면 병으로 죽었느냐. 병은 함부로 사람을 죽이지 못할 것이니 충직 때문에 죽었느냐. 사람의 삶은 올바름에 있는 것이니 네가 만약 죽을 자리에서 죽었다면 어찌하겠는가. 하늘이여, 하늘이여, 어찌 도리라 하겠으며 어찌 허물이라 하겠습니까."
오랫동안 독립운동 유공자 포상에서 제외되었던 권오설은 이웃마을 김재봉과 함께 2005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다. 위 사진의 종이 한장이 그 사람들의 옹이를 완전히 없앨 수는 없지만 그나마 돌아가신 분의 넋이라도 위로가 되었으면 한다.
글 인용 및 사진 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709503
# 1930년대 조선공산당과 독립운동의 슈퍼스타 이재유 (1905~1944)
1926년 신문지상에는 연일 조선공산당 사건이 큼지막하게 실리고 있었고 체포되는 사람을 계속 늘어갔다. 조선인들은 충격과 동시에 마음으로 그들의 안위를 응원하고 있었다. 송도고보 학생들은 동맹 휴학으로 맞섰고 이 학교 학생이었던 이재유는 주도적으로 가담했고 그 대가로 퇴학을 당했다.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당시 일월회가 주도하는 조선공산당 일본총국 당원으로, 고려공산청년회 일본총국 위원으로 활동했다. 1차 조선공산당의 고려공청 책임비서였던 박헌영의 아내 주세죽은 이재유의 이종사촌 누이였다.
노동조합 운동으로 일제에 저항하던 이재유는 1930년 체포되어 경성으로 압송되어 3년 6개월의 수감을 마치고 1933년 겨울 석방된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알게된 이현상과 김삼룡과 함께 '경성 트로이카'를 결성하고 인텔리가 아니라 노동자 중심으로 당을 건설하려는 토대를 마련한다. 그는 공장 노동자와 부두 노동자, 학생운동, 농민 조합과 연대하여 파업과 동맹 휴업 등을 주도했다. 잡히고 탈옥하고 변장하고 숨고를 반복했다. 경성제대 미야케 교수의 관사 다다미 아래에 토굴을 만들어 숨어 지낸 이야기는 거의 전설이 되었다.
일제는 국내 사회주의자들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잡아들였다. 혹독한 고문으로 감옥에서 죽든가 후유증으로 죽을 때가 되어 감옥에서 나왔다. 조선의용군 같은 무장 투쟁과 의열단으로 대표되는 암살과 게릴라 작전이 활발했던 해외에서의 독립운동 형태와는 다르게 국내에서는 일본에 대한 저항은 조선공산당으로 대표되는 공산주의자들의 일제에 대한 저항이 독립운동의 주류였다. 일제가 조선공산당이라면 그토록 눈에 불을 켜고 색출했던 이유다.
'집요하고 흉악한 조선공산당을 괴멸하다. 추격 개시 이래 4년 여 마침내 원흉 이재유의 발목을 채우다.' 1936년 12월 당시 이재유의 체포 기사를 다룬 경성일보 기사이다. 당시 식민지 조선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재유는 조선공산당 재건운동과 국내 독립운동의 마지막 희망 같은 존재였다. 실제 조선총독부에서도 이재유의 체포 후에 '조선에서의 독립운동을 끝났다.'고 선전했다.
글 인용 및 사진 출처 : 나무위키 이재유
이재유는 일제 중기 사회주의 독립운동을 실제적으로 이끈 지도자였다. 그는 중국과 러시아 등과 연계하지 않고 오로지 국내에서만 활약했다. 무엇보다 아래에서 노동자와 농민을 조직하고 연대하는데 주력했다. 현장과 현실을 중시한 사회주의자였다.
6년 형을 받아 1942년 형기가 다 채워졌음에도 전향을 거부하고 끝내 해방되기 10개월 전 1944년 죽음 직전에 풀려나지만 자유의 공기를 제대로 마셔보지도 못하고 숨을 거둔다. 그의 임종을 지킨 이는 후계자 이관술의 누이이자 옛 연인이며 동지인 이금순이었다.
아무르 강을 거슬러 올라가던 그 마지막 배는 중간에서 백군에게 나포되었다. 백군을 그녀(김 알렉산드리아)를 즉결 처형했다. 그녀는 소원으로 열세걸음을 뒤로 걸은 후 죽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열세걸음은 조선의 13도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러시아 첫 한인 볼셰비키의 불꽃같은 짧은 삶은 그 여름에 끝을 맺었다. (p.86)
책은 구한말 러시아 항구도시 포시에트의 10살 소년 최재형의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이범윤, 헤이그 특사 이위종, 이동휘와 김립, 러시아 태생의 최고려와 오하묵, 러시아 볼세비키의 하바롭스크 시당 비서였던 김알렉산드라, 코민테른 극동서기국 남만춘, 김재봉 김찬 김약수 박헌영 강달영 이준태 권오설 김철수 안광천 차금봉까지 1~4차 조선공산당 핵심 인물들, 이재유 김삼룡 이현상의 경성 트로이카 등, 이 책에는 주요 핵심 인물만도 손가락으로 꼽기가 힘들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모두 제 수명을 살지 못했습니다. 항일 무장투쟁으로 전쟁터에서 죽거나 일제에 잡혀서 감옥에서 고문으로 죽거나 암살당하거나 스파이로 몰려 숙청되었습니다. 당시 일제는 왜 그리도 사회주의자들에게 가혹했을까요? 책을 읽고 조금만 생각하니 그 답을 쉽게 알게 되었습니다. 강점기 시절의 사회주의자들은 모두 독립운동가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위험 인물로 찍혔고 일제는 모조리 잡아들였습니다. 일제 시대의 사회주의 운동가들은 곧 독립투사라는 등식이 성립합니다. (일본 식민지 시대가 아니었다면 그들의 사회주의 혁명은 성공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시대였습니다. 그랬다면 우리는 통일된 사회주의 국가에서 살고 있겠죠.)
하지만 독립운동에서도 여러 파벌로 분열되어 힘이 모아지지 않았듯이 같은 사회주의 운동가라도 여러 파벌로 나뉘어 싸우고 또 갈라지기를 거듭했습니다. 그 가장 큰 원인은 물론 1국 1당의 원칙이라는 코민테른에서 기인합니다. 오직 하나의 단체만을 인정하고 거기에 자금을 지원해주는 코민테른의 방침으로 인해 안그래도 모래알 같은 여러 조직들은 더 반목하고 싸웠습니다. 1921년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해 극한 대립에서 비롯된 자유시 참변이나 코민테른에서 지원한 자금 때문에 '공금 횡령자'로 찍혀 김구에 의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독립운동가 김립 사건 등도 모두 우리끼리의 갈등에서 비롯된 아픈 역사입니다. 두 사건 모두 책에서는 비교적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었습니다.
2005년 3.1절을 계기로 몽양 여운형 선생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상이 수여되었습니다. 권오설, 조동호, 김철수, 김단야 등의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에게도 건국훈장이 추서되었습니다. 묻혀졌던 이름들이 다시 소환되었습니다. 남과 북 어느 쪽에서도 입에 올리는 것초차 금기시되었던 이름들, 그렇기에 더욱 우리가 들어보지 못한 이름들입니다. 이제서야 겨우 세상 밖으로 나온 것입니다.
알려지지 않은 별, 역사가 된 사람들. 이 책의 부제입니다. 그 알려지지 않은 별들은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열정으로 사회주의가가 되었고 그 신념이 곧 조선의 독립을 가져올 것이라고 굳게 믿었고 그래서 열정적으로 세상과 부딛혔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신념으로 경제적으로 어려워졌고, 집안이 몰락하고, 모진 고문을 당하고, 반 병신이 되거나 젊은 나이에 옥중에서 죽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이름을 다시 꺼내고, 불러주고, 기억해야 합니다. 그게 일제에 굴하지 않고 신념과와 정의를 쫓아갔던 인물에에 대한 우리 후손들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합니다. 당신들이 걸었던 길이 옳았다고, 진정 수고했다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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