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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이야기

유머 감각은 키우는 것이 아니라 회복하는 것이다 : 김찬호 <유머니즘>

by Keaton Kim 2021. 7. 7.

 

어제 고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건축 강의가 있었습니다. 어찌어찌 마쳤습니다만, 밤에 누워 가만히 강의를 돌이켜보니 이불킥이 절로 나옵니다. 내가 알고 있는 지식과 감동을 학생들에게 잘 전달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저 건축물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았는데, 그 감동을 학생들한테 온전하게 전달하기가 참 힘듭니다. 말로는 더욱 그렇습니다. 학생들 표정을 봐도 멀뚱멀뚱했습니다. 전혀 몰입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고민이고 숙제입니다. 그런 걸 고민하니 강의가 점점 더 어려워집니다.

 

그런데 자기의 경험을 아주 재미있게 이야기하는 강사가 참 많습니다. 말을 참 재미있게 잘 합니다. 듣다가 자지러지게 웃기도 하고 감동을 받기도 합니다. '세바시'에 나오는 대부분의 강사가 그렇습니다. 그런 건 타고 나는 걸까요, 아니면 부단한 노력일까요? 웃기는 강사, 말을 잘 하는 강사, 웃기게 말 잘하는 강사를 보면 부럽습니다.

 

말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내 감정을 드러내는 것도 익숙하지 않습니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불편할 때가 많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그렇지 않아 보입니다. 말주변도 뛰어나고 유쾌해 보입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도 그래 보일 뿐, 실제는 저랑 비슷한 사람들이 많은가 봅니다. 미국의 갤럽사가 세계의 감정에 관한 조사를 했는데, '긍정의 감정을 경험하는' 나라의 순위를 보면 울나라가 121등을 했다고 책에 나와 있습니다. 상위권은 중남미의 나라들이 석권했다는군요. 그 나라 사람들이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긴 하죠.

 

어떻게 조사했냐 하면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댑니다.

 

- 어제 느긋하게 쉬었습니까?

- 당신은 어제 주변 사람들에게 존중받았습니까?

- 어제 뭔가 재미있는 것을 배웠거나 경험했습니까?

- 어제 미소를 지었거나 크게 웃었습니까? (p.48)

 

음, 질문을 보니 울나라 사람들이 쉽게 "예'라고 답하기 어렵겠군요. 여유가 없고, 항상 바쁘고, 다른 사람과 어울려 즐기는 것을 잘 배우지 못했고, 그래서 혼자인 게 편한 요즘 사람들이니까요. 질문을 유심히 보니 인생을 제대로 사는 사람들의 공통점인 것 같습니다.  

 

 

 

 

유머 감각은 키우는 것이 아니다. 회복하는 것이다.

 

우리 아이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자식과 대화를 나누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겠냐마는, 저는 특히나 그렇습니다. 일단 재미있습니다. 아이들의 유머 감각은 저보다 훨씬 뛰어납니다. 그리고 말에 앞과 뒤가 없습니다. 비꼬거나 나쁜 비유를 하지 않습니다. 결정적으로 아이들은 밝습니다. 사물을 보는 시선이 긍정적입니다. 그런 아이들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집니다. 책에서도 그런 대목이 나옵니다.

 

여고생들이 한꺼번에 까르르 웃을 때, 어느 한 아이가 예쁜 것이 아니라 그들 집단 전체가 예쁘다. 언젠가 설악산에 갔을 때 수학여행 온 여고생들의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여고생들은 숲속으로 흩어져 끼리끼리 둘러앉아서 점심을 먹거나 놀이를 하고 있었다. 한 아이가 웃으면 일제히 다들 따라 웃어댄다. 나는 그 아이들이 예뻐서 등산길도 잊어버린 채 한동안 주저앉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p.51 김훈의 수필 <밥벌이의 지겨움>중의 한 대목을 인용)

 

저자인 김찬호 교수가 몇몇 대학생들과 대화를 나누는 자리에서 농담을 던졌습니다. 근데 분위기가 갑분싸해졌습니다. 저자는 당황했습니다. 이게 뭔가? 재미있는 농담인데 왜 웃기지 않는가? 유머의 본질? 유머의 사회적 연관성은 무엇인가? 뭐, 이런 연구가 해보고 싶어져서 연구를 열심히 하셨고, 그래서 나온 결과물이 바로 이 책입니다. 그래서 유머에 관한 책이지만 어쩐지 연구 논문 같이 읽혔습니다. 심지어 김찬호 교수가 책에 인용한 유머도 뭔가 교수님 유머 같았습니다. 유머에 관한 전문가지만 교수님도 유머 감각은 그리 있어보지 않습니다ㅋㅋ.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구절을 위에 적었습니다. 네, 유머 감각은 키우는 것이 아니라 회복하는 것이라는 저자의 말에 격하게 동의합니다. 어린 시절 우리는 모두 천부적인 유머리스트였습니다. 김훈의 수필에 나온 소녀들처럼, 우리 아이들처럼, 그 시절 우리는 아주 조그만 바람에도 반응하고 공감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웃기고 웃었습니다. 우리가 어릴 때 가졌던 그 동심을 조금만이라도 회복한다면, 타인의 반응에 공감한다면, 유머는 자연스럽게 따라올 겁니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서두의 저 질문들에 대해 자신있게 "예'라고 답할 수 있겠지요.

 

그렇게 되길 희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