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짝반짝 빛나는 모국어의 향연 : 김훈의 자전거 여행
그러므로 자전거를 타고 오르막을 오를 때, 길이 몸 안으로 흘러들어올 뿐 아니라 기어의 톱니까지도 몸 안으로 흘러들어온다. 내 몸이 나의 기어인 것이다. 오르막에서, 땀에 젖은 등판과 터질 듯한 심장과 허파는 바퀴와 길로부터 소외되지 않는다. 땅에 들어붙어서, 그것들은 함께 가거나, 함께 쓰러진다.
'신비'라는 말은 머뭇거려지지만, 기진한 삶 속에서도 신비는 있다. 오르막길 체인의 끊어질 듯한 마디마디에서, 기어의 톱니에서, 뒷바퀴 구동축 베어링에서, 생의 신비는 반짝이면서 부서지고 새롭게 태어나서 흐르고 구른다. 땅 위의 모든 길을 다 갈 수 없고 땅 위의 모든 산맥을 다 넘을 수 없다 해도, 살아서 몸으로 바퀴를 굴려 나아가는 일은 복되다. (자전거 여행 1권 프롤로그 중에서)
김훈의 산문입니다. 한마디로 언어의 유희밭입니다. 내가 암만 울나라 곳곳을 열심히 다니고 살펴보고 해도 이런 문장은 죽을 때까지 안나올겁니다. 본 것에 대해 얼만큼의 생각의 진전이 있어야 이런 표현이 나올까요? 구본준 기자는 "건축물이 나에게 말을 건다"라고 표현했는데, 이 책에 나온 김훈의 글은, 그가 본 모든 것이 그에게 말을 건 듯 합니다. 국토에 대한 사랑과 애정이 없이는 이런 문장들이 나올 수가 없고, 또한 그런 사랑과 애정만으로도 나올 수가 없는 문장들입니다.
'숲'이라고 모국어로 발음하면 입안에서 맑고 서늘한 바람이 인다. 자음 'ㅅ'의 날카로움과 'ㅍ'의 서늘함이 목젖의 안쪽을 통과해나오는 'ㅜ'모음의 깊이와 부딪쳐서 일어나는 마음의 바람이다. 'ㅅ'과 'ㅍ'은 바람의 잠재태이다. 이것이 모음에 실리면 숲 속에서는 바람이 일어나는데, 이때 'ㅅ'의 날카로움은 부드러워지고 'ㅍ'의 서늘함은 'ㅜ'모음 쪽으로 끌리면서 깊은 울림을 울린다.
그래서 '숲'은 늘 맑고 깊다. 숲 속에서 이는 바람은 모국어 'ㅜ'모음의 바람이다. 그 바람은 'ㅜ'모음의 울림처럼, 사람 몸과 마음의 깊은 안쪽을 깨우고 또 재운다. '숲'은 글자 모양도 숲처럼 생겨서, 글자만 들여다 보아도 숲속에 온 것 같다. (자전거 여행 1권 p.59)
풍경은 사물로서 무의미하다. 그렇게 말하는 편이 덜 틀린다. 풍경은 인문이 아니라 자연이다. 풍경은 본래 스스로 그러하다. 풍경은 아름답거나 추하지 않다. 풍경은 쓸쓸하거나 화사하지 않다. 풍경은 자유도 아니고 억압도 아니다. 풍경은 인간을 향해 아무런 말도 걸어오지 않는다. 풍경은 언어와 사소한 관련도 없는 시간과 공간속으로 펼쳐져 있다.
무위자연無爲自然이라는 말은 광막해서 나는 그 권역의 넓이과 가장자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자연은 쉴새없이 작용해서 바쁘고, 풍경은 그 바쁜 자연의 외양으로 드러나 있다. 무위자연의 '무위'는 그 바쁜 것들에 손댈 수 없고 거기에 개입할 수 없는 인간의 속수무책을 말하는 것으로, 나는 겨우 이해하고 있다. (자전거 여행 1권 p.143)
쑥은, 그야말로 '겨우 존재하는 것들'이다. 그것들은 여리고 애달프다. 이 여린 것들이 언 땅을 뚫고 가장 먼저 이 세상에 엽록소를 내민다. 쑥은 낯선 시간의 최전선을 이끌어간다. 쑥들은 보이지 않게 겨우 존재함으로써, 이 강고한 시간과 세월의 틈새를 비집고 나올 수가 있는 모양이다. 그것들에게는 이 세상 먹이 피라미드 맨 밑바닥의 슬픔과 평화가 있다.
된장 국물 속에서 끓여질 때, 쑥은 냉이보다 훨씬 더 많이 된장쪽으로 끌려간다. 국물 속의 쑥 건더기는 다만 몇오라기의 앙상한 섬유질만으로 남는다. 쑥이 국물에게 바친 내용물은 거의 전부가 냄새이다. 그 국물은 쓰고 또 아리다. 먹이 피라미드 맨 밑바닥의 아린 냄새가 된장의 비논리속에 펴져 있다. 그 냄새는 향기가 아니라, 고통이나 비애에 가깝니다. (자전거 여행 1권 p.30)
책에도 나오는 경주의 감은사지 3층석탑입니다. 해가 뜨기전에 갔더랬습니다. 야트막한 산 밑에 자리잡은 탑은 넓은 들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탑은 당당했습니다. 너희가 무어라 하던 나는 여기 서 있을테야!! 라고 외치고 있는 듯 했습니다. 혹시나 탑이 나에게 말을 걸까 싶어 탑 옆에 앉아 있기도 하고, 만져보기도 하고, 한동안 주위를 서성였지만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자전거 여행>은 일종의 기행문이긴 하지만, 기행문이라기 보단 개인의 에세이에 가깝습니다. 인간의 삶과 죽음, 사랑과 슬픔과 아픔, 희노애락의 인간사에 대한 저자의 생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설요薛瑤는 한국 한문학사의 첫 장에 나온다. 7세기 신라의 젊은 여승이다. 그 여자의 몸의 아름다움과 시 한 줄만이 후세에 전해진다. 그 시 한줄은 봄마다 새롭다. 이 젊은 여승의 몸은 꽃 피는 봄 산의 관능을 견딜 수 없었다. 그 여자는 시 한 줄을 써놓고 절을 떠나 속세로 내려왔다.
꽃 피어 봄 마음 이리 설레니
아, 이 젊음을 어찌할거나
이것은 대책이 없는 생의 충동이다. 그 충동은 위태롭고 무질서하다. 한문학자 손중섭은 이 시에 대해서 "아, 한 젊음을 늙히기에 저리도 힘듦이여!"라고 썼다. 이 노래의 제목은 '세상으로 돌아가는 노래返俗謠'이다. 절을 떠날 때 그 여자는 스물한 살이었다. 속세로 내려와서 그 여자는 시 쓰는 사내의 첩이 되었고, 당나라를 떠돌다가 통천通泉에서 객사했다.
7세기의 봄과 13세기의 봄이 다르지 않다, 올봄이 또한 다르지 않다. 그 꽃들은 해마다 새롭게 피었다 지고, 지금은 지천으로 피었다. (자전거 여행 1권 p.19)
원효는 살아 있는 여자의 몸에서 아들을 낳았고 의상은 죽은 여자의 넋 위에 절을 지었다. 살아 있는 여자의 몸에서 아들도 낳고 절도 지을 수는 없는 모양이다. 높은 스님들도 이 두 가지 사업을 한꺼번에 해내지는 못했다.
선묘의 꿈은 살아서 솥단지를 들여앉히고 밥상을 차리고 아들은 낳는 것이었다. 가엾은 선묘는 죽어서 용이 되었고, 지금도 아득히 높은 애인의 절을 지키고 있다. 이것이 부처님 나라의 사랑법이라고 해도 선묘의 넋은 여전히 가엾다. 용이 되었기로, 밥상을 차리고 싶었던 젊은 날의 꿈을 버릴 수가 있었을까. 부석사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 생각해보니, 아마 그럴 수는 없을 것이었다. 불법의 바다는 넓고, 슬픔의 바다도 넓다. (자전거 여행 2권 p.135)
대중가수 이태원은 <솔개>라는 노래에서 "우리는 말 안하고 살 수가 없나, 날으는 솔개처럼"이라고 노래했다. 그 노랫말은 한동안 나를 괴롭혔다. 오랜 마음고생 끝에 내가 도달한 결론은 이렇다. 우리는 말 안하고 살 수가 없다. 우리는 날으는 솔개가 아니다. 공자도 흐르는 물가를 말 안하고 지나치지는 못했다. 그러나 "저러하구나"라는 한마디로 사태를 정리하고 수다를 떨지 않는 성인의 압축능력은 얼마나 복된 것인가. 나에게는 그런 복이 없다. (자전거 여행 1권 p.147)
경북 예천에 있는 초간정입니다. 제가 가본 정자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자입니다. 무릇 정자라 함은 경치 좋은 곳에 자리잡아 높으신 양반들이 예쁜 언니들과 함께 풍악과 술을 즐기며 호연지기를 더 높이는 장소입니다만, 초간정은 초간 권문해 라는 양반이 오로지 공부하기 위해서 지은 정자입니다. 책 읽고 글쓰기 위해 지은 정자입니다. 그럼에도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저기서 공부하려면 대단한 인내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아침마다 마암분교 아이들은 6학년, 5학년을 앞세우고 재잘거리면서 산길을 걸어서 학교로 온다. 학교로 오는 아이들의 손에는 커다란 양동이가 하나씩 들려 있다. 아이들은 점심때 밥 먹고 남은 찌꺼기를 이 양동에 담아서 집으로 가져간다. 집집마다 돼지와 개들이 이 아이들이 가져오는 밥을 기다리고 있다. 등교하는 아이들의 손에서, 노란 양동이들이 아침 햇살에 빛난다. 그 양동이에서 빛나는 아침 햇살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아이들은 책에서 배우기보다는 삶으로부터 직접 배운다. (자전거 여행 1권 p.188)
선암사 화장실은 변소의 칸막이 담이 높지 않다. 쭈그리고 앉는 사람의 머리통이 밖에서 보인다. 똥을 누는 일은 드러내놓고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파트 변소처럼 감옥 같은 공간에 갇혀서 해야 할 일도 아닐 성싶다. 똥을 누는 것은, 배설물을 밖으로 내보내는, 자유와 해방의 행위다. 거기에는 서늘함과 홀가분함이 있어야 한다. 선암사 화장실은 이 자유의 낙원인 것이다. 이 화장실에 앉으면 창살 사이로 꽃 핀 매화나무며 눈 덮인 겨울 숲이 보인다. 화장실 위치는 높아서 변소에 앉은 사람은 밖을 내다볼 수 있지만, 밖에 있는 사람은 안을 들여다볼 수 없다. (자전거 여행 2권 p.218)
내가 사는 마을에, 그리고 전국의 모든 신도시와 휴양지, 명승지마다 러브호텔이 창궐해서 성업중인 사태의 문명사적 배경은 이 시대의 도덕이 특별히 타락했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공자나 예수도 자신들 시대의 타락을 개탄했다. 아마도 러브호텔이 창궐하게 되는 배경은 인간이 일부일처제에 승복할 수 없는 마음의 바탕을 지니고 오랜 세월 동안을 일부일처제의 억압 밑에서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일부일처제의 역사는 오래지 않지만, 일부일처제의 세월은 신석기나 구석기보다 더 길게 느껴지고, 계급적 억압보다도 더 무거운 하중으로 인간을 짓누른다. (자전거 여행 2권 p.62)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건축물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인간이 만든 제도에 대해 이야기를 합니다. 때론 풀이나 새, 강과 바다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의 글을 따라가기에는 호흡이 벅찹니다. 그래서 한달음에 읽기 보단 조금씩 조금씩 읽는 편이 낫습니다. 한단락 한단락의 문장을 음미해가며서 말이죠.
주말에 사무실에 나왔다가 갈 곳이 사무실밖에 없는 자신의 신세가 처량하여 근처 덕수궁을 찾았습니다. 쌍쌍이 와서 서로에게 교태를 부리는 사람들 덕분에 더 처량해졌습니다. ㅠㅠ 시대의 아픔을 견디고 현재까지도 유유히 그 자태를 뽐내는 건축물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나는 위로를 받았습니다.
책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과거의 사건이나 인물에 대한 평가와 감상입니다. 그만의 독특한 시각에서 우리가 보지 못한 것들을 들추어 냅니다. 그리고 그 시대의 삶과 지금의 삶이 결코 다르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그의 글을 읽고 우리는 우리의 삶을 다시 반추해 봅니다.
유배 시절에 그의 마음속에서 1801년의 일들은 어떠한 모습으로 자리잡고 있었을까? 신앙인으로서 순교의 길을 끝까지 걸어간 약종형님과 매부 이승훈의 죽음은 그의 마음속에서 어떠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일까? 오랜 유배에서 돌아와 다시 그 물가마을의 옛집에 이르러, 강 건너쪽 천진암의 산봉우리를 바라보면서 그의 마음속에서 1801년의 일들은 어떤 풍경을 이루고 있었던 것일까? 이런 후인의 의문에 대해 다산을 끝끝내 침묵한다.
200년 후에 태어나 단지 책을 읽을 뿐인 후인이 그 침묵의 부당성을 공박할 수 있을까. 아마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삶 속에서 벌어진 일들 중에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다 말할 수 없는 것들이 있는 법이다. 다산의 치욕은 침묵속에 잠겨 있다. 나를 두렵게 하는 것은 치욕이 아니라, 그가 한평생 간직했던 침묵이다. 치욕은 생애의 중요한 부분이고, 침묵은 역사의 일부다. (자전거 여행 1권 p.171)
남한산성의 서문은 처연하다. 산성 내의 수많은 문루와 옹성과 전각들 중에서 서문은 가장 비통하고 무참하다. 남한산성 서문의 치욕과 고통을 성찰하는 일은, 죽을 수도 없고 살 수도 없는 세상에서 그러나 죽을 수 없는 삶의 고통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아마도 받아들일 수 없는 고통과 치욕이란 없는 모양이다. 모든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은 결국 받아들여진다. 삶으로부터 치욕을 제거할 수는 없다. 삶과 죽음이 서로를 겨누며 목통을 조일 때 삶이 치욕이고 죽음이 광휘인 것도 아니고 그 반대도 아니다. 이 세상에는 말하여질 수 있는 것보다도 말하여질 수 없는 것들이 훨씬 많은 모양이다. (자전거 여행 2권 p.141)
이순신의 내면은 무겁게 짓눌려 있고 삼엄하게 통제되어 있다. 그는 이 통제된 내면의 힘으로 무수한 아수라는 돌파한다. <난중일기>와 그가 조정으로 보낸 전황 보고서들은 무인다운 글쓰기의 전범이라고 할 만하다. 그는 정치적 불운에 목숨을 저당 잡힌 상태에서 전쟁을 수행했다.
그러나 <난중일기>는 의주 피난 정부에서 벌어지는 이전투구의 정치 상황을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는다. 그는 바다의 사실에만 입각해 있었다. 매일매일 바다 날씨의 미세한 변화를 그는 기록했다. 그는 늘 병고에 신음했고, 슬픔과 기쁨에 몸을 적시는 정한의 인간이었다. 그러나 그의 슬픔은 "나는 오늘 슬펐다"라고까지만 기록하는, 통제된 슬픔이었다. 그의 슬픔과 기쁨에는 수사적 장치가 없다. 이 통제된 슬픔의 힘이 "저녁 무렵에 동풍이 잠들고 날이 흐렸다. 부하 아무개가 거듭 군율을 범하였기로 베었다" 같은 식의 놀라운 문장들을 쓰게 한다. 바람이 잠든 것과 부하를 죽인 일이 동등한 자격의 사실일 뿐이다. (자전거 여행 2권 p.183)
수원 화성의 이념적 지향성을 지상의 구조물로 이룩해내는 그 실무적 꼼꼼함은 <화성성역의궤> 안에 모조리 적혀 있다. <화성성역의궤>는 수원 화성의 기획과 시공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사항을 총망라한다. 이 의궤는 조선 왕조가 편찬한 책들 중에서 가장 완벽한 기록문서이다. 화성 축조를 기획하고 지시하는 임금은 실무적인 치밀함을 끝까지 유지한다.
화성 축조에 있어서 임금의 지휘 방침은 서두르지 말 것, 기초를 튼튼히 할 것, 시치스런 치장을 하지 말 것, 일을 합리적이고 능률적으로 조직하고 관리할 것, 첨단 과학기술을 총동원할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백성을 괴롭히지 말라는 것이었다. (자전거 여행 2권 p.235)
우리 막내이와 둘이서 자주 자전거 산책을 다니는 집 앞 김해평야입니다. 탁 트인 논 사이의 길을 자전거로 거닐면 기분이 저절로 상쾌해 집니다. 가끔 농약 냄새가 온 사방을 진동할 때도 있긴 하지만요....ㅎㅎ 얼마전에 큰 녀석이랑 자전거를 타다가 "산아, 아빠랑 자전거로 세계 여행 안갈래?" 라고 물었더니 흔쾌이 오케이를 합니다. 언제 갈지도 정했습니다. 실제로 갈 수 있을지는 차치하고서라도 이런 대화와 상상만으로도 즐겁습니다.
주말이면 어김없이 아이들을 끌고 자전거를 타러 나갑니다. "자전거를 타고 저어갈 때, 세상의 길들은 몸속으로 흘러들어온다." 고 작가는 말했지만, 길이 내가 되고, 내가 길이 되는 합일의 경지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자전거를 타고 곳곳을 다니는 것은 복.된. 일입니다.
김훈의 문장은 아름답고, 김훈이 보는 풍경도 아름답고, 내가 자전거를 타면서 보는 내 고향의 풍경도 아름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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