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잠과 언니와 나
언니
난 언니가 살아가는 모습을 보는 게 참 좋았어
나와 다른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그 모습을
언제까지라도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내가 부끄러워하는 옷을 입고
내가 부끄러워하는 소리로 웃고
커다란 개와 커다란 차를 타고
내가 어려워하는 길을 앞서 걸으며
언니가 해주려 했을 말들이 난 궁금해
쓰려 했을 일기와 주려고 했을 다음 생일 선물이 난 궁금해
추려 했던 춤과 들으려 했던 음악
읽으려던 책과 미처 열어보지 못한 중국에서 온 택배
언니
사람들은 언니의 삶이 아깝다고들 말을 해
10년, 20년 뒤였다면 모두 고개를 끄덕였을까
언젠가 내 시간도 그리 귀하지 않은 때가 올까
그때가 되면 무엇도 아까워하지 않고 우린 잠이 들까
삶과 잠과 언니와 언니의 자랑


들이야 무슨 노래 틀까?
이랑이요.
이랑은 가사를 어떻게 이렇게 쓸까?
날것 같은 가사에요.
이 노랜 언니 추모곡 같은데?
맞아요. 언니가 죽고 만든 곡이에요.


이랑의 노래를 듣게 된 게 아마도 간디의 아이들 덕분이었을 게다. 그런데 노래가 심상찮다. '이른 아침 가난한 여인이 굶어 죽은 자식의 시체를 안고 가난한 사람들의 동네를 울며 지나간다.' 이렇게 시작하는 노래는 <늑대가 나타난다>다. <잘 듣고 있어요>라는 노래엔 용왕과 토끼와 거북이가 나온다.
<신의 놀이>라는 노래는 한국에서 태어나 산다는 게 어떤 의미를 두고 계시나요? 라고 물으며 모든 이야기는 제물로 바쳐지기 위해 만들어지는 비극이라 한다. <우리의 방>에서는 '우리의 방은 너무 작고 시끄럽고 우리에게 돈은 항상 멀리 있지' 라고 말한다. <환란의 세대>는 들이가 말하길 자살조장곡이랜다. 내가 들어봐도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리고 그가 부르는 <임진강>은 참 좋다.
위에 가사를 옮긴 노래 <삶과 잠과 언니와 나>는 들이 말대로 언니가 죽고 만든 노래다. 내 눈에 비친 언니의 삶이 있었고, 나의 삶은 언니의 영향을 받았다. 내가 언니의 자랑인 걸 봐서 언니도 내 삶의 영향을 받았다고 추측 가능하다. 이 가사에서 언니와 나누었던 사랑이 묻어난다. 그 사랑엔 슬픔이 비친다.
어떤 감수성을 가지면, 어떤 교육을 받으면, 어떤 친구가 있으면, 어떤 음식을 먹으면 이런 가사가 나올까? 머리 속의 필터를 거치지 않고 마음과 손에서 바로 나온 이런 가사 말이다. 솔직하고, 후련하고, 우울하고, 간절하고, 힘이 있다. 이 노랫말과 그의 읊조리는 보이스, 그리고 귀에 감기는 멜로디가 어우러져 묘하면서 매력적인 노래가 되었고, 나는 거기 빠져 한동안 허우적거렸더랬다.
노래는 개인적인 이야기가 담긴 거다. 그의 노래는 보편적인 것을 추구하지 않는다. 자신의 이야기, 혹은 친구나 가족의 이야기를 한다. 그게 아주 개인적인 거라 매력적이다. 봉준호 감독이 말한 "가장 개인적인 것은 가장 창의적이다."라는 말은 영화에 한정된 문구가 아니다. 이랑의 노래에도 나의 글에도 적용되는 말이다. 나는 안다. 솔직하게 쓴 개인적인 글이 가장 좋은 글이라고. 이랑의 노랫말이, 그리고 그 노래가 좋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래서 나는 이랑의 노래로 위로를 받는다.

이 책은 초록담쟁이라는 필명을 가진 작가가 아름다웠던 시절에 대한 그리움을 글과 그림에 담은 에세이다. 짧은 글이 있고 그에 딱맞는 그림이 있다. 그 그림들은 예전의 기억을 소환한다. 목욕을 하고 난 뒤 평상에서 바나나우유를 먹던, 친구 집 대문에서 함께 놀자고 친구를 부르던, 아궁이에서 군불을 지피면서 불멍을 때리던 그런 기억이다.
그림의 주인공은 양갈래로 머리를 땋은 소녀다. 풋풋함과 정겨움이 넘친다. 그림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몽골몽골해진다. 우리 공방에 선생님이 이 그림을 좋아해서 도자기에 즐겨 그렸다. 저 위의 도자기 작품이다. 예전에 자작나무를 걷는 소녀 도자기도 있었는데, 대학 후배 성식이가 놀러와서는 마음에 들어해서 강매했다.
인터넷에 초록담쟁이 공방이 있어서 들어가봤다(공방은 용인에 있단다). 그림을 볼 때마다 그리움의 그날로 돌아가 작은 쉼을 얻을 수 있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글과 함께 작가는 여전히 그림을 그렸다. 그 그림으로 여러 작품을 만들어 상품화해서 사람들과 소통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많이 좋아해줬으면 좋겠다. 언젠가 한번 들러야겠다.
초록담쟁이님의 따뜻한 그림이 나에게 위로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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