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여년 전에도 살아 간다는 건 똑 같더라 : 황석영의 여울물 소리
때는 바야흐로 1789년,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원으로 옮기려 할 그 무렵 쯤 되는 모양이다. 바다 건너 지구 반대쪽의 어느 나라에서 졸라 큰 가뭄과 흉년이 들었댄다. 안그래도, 나라에서, 지주가, 이것 저것 핑계로 다 떼가고, 왕과 귀족들은 저거만 잘 처묵고 잘 처살고.... 심지어 밀 이삭 줍는 거에도 세금을 메기고..... 띠발름들아!! 이래가지곤 몬 산다. 차라리 지기라!!! 하면서 농민들이 들고 일어났다. 그 나라의 큰 감옥을 때려 부쉈는데, 이걸 계기로 전 시민이 다 혁명을 외쳤다. 지주와 귀족을 죽이고 급기야 왕과 왕비도 접수한다.
이 시민들의 봉기는 단지 억울함을 토해내는 죽고 죽이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살고 싶다!! 라는 것을 적어서 만인들에게 선언한다. 바로 현대 민주주의의 가장 근간이 되는 <시민과 인간의 권리 선언> 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접수한 왕의 처리를 투표에 부쳐, 결국 왕의 모가지도 싹둑 베 버린다. 덤으로 그 이름도 예쁜 마리 앙투와네트라는 왕비도 싹둑!!! 바로 프랑스 혁명 이야기다.
그로부터 약 백년후 동쪽 끝 은둔의 나라 조선에서도 이것과 똑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수백년 동안 높은 넘은 계속 높은 넘, 쌍넘은 대를 이어 쌍넘인 신분사회를 때려부수자!! 사람은 곧 하늘이다!!! 농민들은 봉기했고, 백여년 전의 프랑스에서처럼 의금부와 서린옥을 때려 부숩니다. 혁명은 들불처럼 번집니다.
나라의 힘으로는 이것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왕과 그 주변의 나쁜 넘들은 청나라와 일본을 끌여들여 소탕합니다. 이것을 계기로 청과 일본은 남의 나라에서 저거끼리 또 한판 붙습니다. 소탕을 했지만 그 불씨는 쉬 사그러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라는 조그만 불씨까지 싸그리 밟습니다. 바로 1894년 동학 농민 혁명이야기입니다.
큰 줄거리는 동학혁명이지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은 혁명을 위해 집을 나간 임을 향한 한 여인의 사랑입니다. 책은 그래서, 더 흡입력이 있습니다.
어찌 그와 함께 살았던 날을 하루씩 쪼개어 낱낱이 이야기할 수 있으랴. 나중에 그가 곁에 없게 되었을 때, 가뭄의 고로쇠나무가 제 몸에 담았던 물기를 한방울씩 내어 저 먼 가지 끝의 작은 잎새까지 적시는 것처럼, 기억을 아끼면서 오래도록 돌이키게 될 줄은 그때는 알지 못했다. - P 76
서일수가 나간 뒤에 신통과 나는 가만히 마주 앉아 있었다. 희미한 관솔불 빛이 춤출 때마다 우리 그림자도 벽 위에서 끊임없이 흔들렸다. 신통은 시렁 위에서 이부자리를 내려 정돈하더니 자기가 먼저 누웠다. 이리 오우, 잡시다. 관솔불을 끄고 곁에 누운 나는 어느 결에 뻗은 남편의 팔베개를 베었다. 까마득하게 잊은 언젠가의 밤처럼 먼 데서 부엉이가 울었다. - P 377
아~~~ 칠순도 넘은 작가 할배가 어찌 이런 표현이 가능할까요??? 또한 책에서는 동학이 가진 기본적인 생각도 엿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겁니다.
아까 제사를 나에게 차리는 것이 옳다고 하신 것은 무슨 뜻일까요? 그랬더니 신통은 웃으면서 내게 말해주었다. 향아설위 向我設位 라고 내가 적어두었지. 벽과 나 사이에 큰 틈이 있다는 말씀이 벼락 치듯 하였소. 그 벽에 귀신이 어른거린다고 밥을 밀어놓고 나는 절하라고 누가 시킨 것일까? 그러한 법식은 무엇 때문에 만들었을까. 그리고 아녀자들은 하루 종일 뒷전에서 일하고 음식 차려서 갖다바치고 제사 참례는 얼씬도 못하게 하는 제도를 누가 만들었을까. 땀 흘려 농사지어 거둔 곡식을 차려놓고 나 아닌 벽에다 바치게 무엇이 만들었을까. 그것을 만든 것들이 세상의 법식과 제도를 짓고 덫을 쳐서 공으로 빼앗아 먹으려고 틈을 벌려놓았다는 우레 같은 말씀이라오. - P 380
동학 혁명에 관해서는 여러 책도 읽어보고, 정읍에 있는 동학 농민 혁명 기념관에도 가 보고 했습니다만, 그보다도 더 가슴에 와 닿고, 사실적으로 묘사된 것이 이 책입니다. 소설을 가장한 역사입니다. 역시나 황석영 선생님입니다.
백이십여년 전 이야기지만,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와 그네들이 살아가는 것은 별 다를 바가 없어 보입니다. 내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들의 삶인데도 말이죠. 지금도 살아간다는 건 여전히 팍팍하고 억울하고 쉽지가 않습니다. 언젠가는 좋은 세상이 올거라는 믿음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데 말입니다.
앞서 얘기한 프랑스 혁명은 이제 이백여년이 지났습니다. 프랑스 사람들이 사는 세상은 많이 변했을까요? 프랑스 혁명 뒤에 또 얼마나 많은 혁명들이 있어 지금의 프랑스를 만들었을까요? 동학 혁명 뒤에 우리는 많이 변했나요? 그 시절과 지금이 별로 다르지 않다면, 얼마나 많은 혁명들을 더 거쳐야 더 나은 세상으로 변할까요?
갑오년에 시작된 혁명이 이제 다 끝났지요. 그러나 아주 끝나버린 것은 아니외다. 물이 말라 애를 태우던 가뭄이 지나면 어느새 골짜기와 바위틈에 숨었던 작은 물길이 모여들고, 천둥 번개가 치면서 비가 오고 강물은 다시 흐르겠지요. 백성들이 저렇게 버젓이 살아 있는데 어찌 죽은 이들의 노고가 잊히겠습니까? 세상은 반드시 변할 것입니다. - P 396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조선 3대 도적이라고 있습니다. 감이 잡히신다구요? 네~~ 맞습니다. 꺽정이와 길동이, 그리고 길산이입니다. 임꺽정은 전기 조선이 망해가던 명종때의 도적이고, 백정출신입니다. 벽초 선생의 소설에서, 처녀시절의 취미가 호랑이 때려잡기인 마누라와 한판 붙은 장면이 압권입니다. 도적중에 젤루다 잘 나갔습니다.
너무 유명한 도적인 홍길동이는 연산군 시절의 도적입니다. 관군과의 싸움에서 패해 차라리 이민을 가련다!! 라고 해서 홍가와라 라는 이름으로 오키나와에 가서 왕이 되었다.... 라는 카더라 통신이 있습니다. 그 율도국이 오키나완지, 아님 일본의 어느 이름없는 섬인지는 아직 아무도 모릅니다. 그리고 마지막이 숙종 시절의 광대 출신 도적, 장길산입니다.
주인공이 남사당패 출신이다 보니 주로 예능쪽에 출중한 인물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러나 그 시절엔 아쉽게도 케이팝스타라는 프로가 없었습니다. 다 인간 취급 못받는 사람들이지요.... 재능은 있으나, 그 재능을 인정받지 못하는 사회에 사는 사람들 이야기입니다. 19금 장면도 가감없이 나옵니다. 서양의 그 유명한 '응응' 소설인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보다도 더 야합니다. 그 유명한 소설 태백산맥도 제가 볼 땐, 상당히 야한 소설입니다만....ㅋㅋㅋ
장길산은 물론 '도둑놈'이지만, 소설에는 대동세계를 꿈꾸다 간 실패한 영웅으로 나옵니다. 그 시대를 힘겹게, 그렇지만 흥이 나게 살고자 하는 민초들의 이야기입니다. 칠팔십년대의 대표적인 민중소설입니다. 80년대부터 90년대 초까지 대학 새내기들에게 꼭 읽으라고 선배들이 권하는 소설이랩니다. 나도 91학번인데 나한테 권하는 선배넘들은 아무도 없더라....ㅋㅋㅋ 그래서 그 시절에 대학 도서관에서 가장 대출이 많은 소설 양대산맥이 태백산맥과 장길산이라고...... 요즘은 퇴마록과 묵향으로 바뀌었대나 어쨌대나.....
열두권짜리라고 걱정하지 마셔요. 황석영 선생의 책 중에 젤루다 잘 넘어가는 책이여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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