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바로 마초 만화의 본좌다 : 이케가미 료이치 <생추어리>
그게 언제였는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는다. 어두침침한 분위기에 담배 연기도 여기저기서 피어 오르고 테이블 위엔 컵라면 껍데기들이 널려 있다. 한쪽 귀퉁에선 험상궂게 생긴 아저씨들이 기계에 돈을 넣고 777을 하고 있다. 계산을 마치고 사람 눈에 잘 띄지 않는 구석의 자리로 간다. 그리고 조심스레 한장 한장 넘겨가며 책 속으로 빠져든다.
내가 기억하는 만화방의 추억이다. 그 속에서 나는 꿈을 키웠다. 김철호 화백의 공포의 수퍼스타, 이재학, 박봉성, 고행석의 만화들, 요코야마 미쓰테루의 바벨 2세, 데즈카 오사무의 불새.... 열거하자만 이루 말 할 수도 없다. 그러다 몸과 마음이 모두 폭발해 버리는 만화를 발견했다. '대룡' '대남' '대벌' '남대공' 등의 일본 해적판 만화다. 주인공 남자는 거울에서 튀어나올 것 같은 비주얼이었다. 여자는 말 할 것도 없고. 그렇게 잘 생기고 예쁜 주인공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사실감 넘치는 하드보일드 액션, 그리고 지금 봐도 꼴리는 19금의 장면들까지. 전혀 새로운 엄청난 만화였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하는 걸 보면, 10대의 소년에게 얼마나 큰 충격으로 다가왔을지는.....
그 만화를 본 소년은 10년 뒤 일본으로 가 도쿄의 구석을 뒤져 자신이 본 해적판의 원작을 사고야 만다. 대남이라는 제목의 책은 키즈오이비토(상처를 쫓는 자)이고, 대룡은 그 유명한 크라잉 프리맨이다. 작가는 이케가미 료이치. 그 방면에서는 이미 경지에 올라선 작가였다. 소년은 일본에서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물 만난 것처럼 일본 만화를 파고 판다.
크라잉 프리맨의 주인공은 잘 생긴 건 기본이고 칼과 총의 달인이며 암살의 명인이다. 허공답보 같은 웬만한 경공술과 만독지침의 아이템도 획득했다. 그보다 더 주특기가 있는데, 그건 바로 옷을 벗는 것이다. 벗은 몸을 한번 본 여인은 꿈에 그가 나타난다. 심지어 강력한 적도 여자인 한 그를 사랑하게 된다. 킬러인 히노무라 요우와 타겟 히노 에무가 처음 만나는 장면이다. 먼 발치에서 프리맨을 본 여인은 자신을 죽이러 온 킬러와의 대면에서도 별로 놀라지 않는다. 이미 사랑에 빠졌다.
크라잉 프리맨의 트레이드 마크는 바로 저 용문신. 소년은 이 만화 덕택에 어른이 되면 꼭 문신을 하리라 결심하게 된다. 그리고 실천한다. 망했어요.ㅠㅠ 타겟이 된 아름다운 여인이 말한다. 죽기 전에 소원이 있어요. 저를 한번 안아 주세요..... 망설이던 프리맨은 이런 모습도 괜찮다면.... 이라면서 옷을 벗는다. 기승전벗는다. 그리고 둘은 사랑에 빠지고 여인은 백팔룡 조직의 안주인이 된다.
키즈오이비토의 주인공 백발귀와 그의 여인들. 저 데생과 펜터치를 보라. 예전엔 없었다. 저런 식으로 그린 만화는. 저렇게 잘 생기고 아름다운 주인공들이 아주 사실적으로 사랑을 나눈다. 아, 그건 더 이상 만화가 아니었다.
두 작품 다 하드보일드한 잔혹함과 25금도 될 만한 선정적 장면의 대명사지만, 단순히 비교해도 이 작품은 크라잉 프리맨보다 훨씬 더하다. 그래서 더 재미있다. 백발귀의 여인들도 훨씬 다양하게 나온다. 이 정도의 장면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미안하다. 차마 그 장면들을 올릴 수는 없다. 남대공, 남조, 마이 등 이케가미 아저씨의 만화는 그 시절 소년에게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꿈을 심어준다. 그의 작품 중에 폭력성과 선정성으로 이 만화 키즈오이비토(상처를 쫓는 자)가 갑 중의 갑이다.
소장하고 있는 작가의 만화 중에서 그나마 가장 최근의 것인 히트. 신주쿠 뒷골목의 깡패 형님으로 나온다. 잘생긴 주인공은 더욱 잘생겨졌고 카리스마는 더 업 되었다. 고독하지만 강한 남자가 자신만의 세계관으로 폭력을 극복한다그리고 여자는 덤이다다는 기본 줄거리에 충실하다. 사진처럼 대상을 정교하게 묘사하는 사실적인 그림체의 이케가미 화풍은 한층 업그레이드 되어 보는 이를 작품에 빠지게 한다.
이케가미 료이치의 많은 작품중에서 본좌라고 말 할 수 있는 작품은 바로 이 만화 <생추어리>이다. 캄보디아 내전의 지옥을 뚫고 탈출한 두 남자가 일본으로 돌아와 한명은 야쿠자로, 또 한명은 정치계로 각각 어둠과 빛의 세계에서 썩은 일본을 바꿔 나간다는 스토리다. 1990년대의 일본 정치와 야쿠자의 세계, 국제 정세러시아 마피아는 기본이고 클린턴과 르윈스키도 등장한다가 상세히 묘사되어 있고, 형제보다 진한 나이의 우정을 다룬, 요즘 말하는 브로맨스의 정점에 있는 만화이기도 하다.
이게 해적판으로 나왔을 때의 제목이 <빛과 그림자>였는데, 누가 붙였는지 아주 센스가 만점이시다.
역시 잘생긴 두 사나이가 나오고, 뜨거운 피를 가진 이들은 가위바위보로 한 사람은 빛, 한 사람은 그림자로 자신들의 운명을 정한다. 한번 잡으면 결코 놓을 수 없는 탄탄한 구성과 흡입력 만땅인 사실감, 그리고 진정한 우정을 보여주는, 마초 만화의 본좌다. Sanctuary는 성역이라는 말로 누구도 침범하지 못하는 자신들만의 세계를 구축한다는 의미다.
가장 썩은 집단이라고 하면 1위가 정치계, 2위가 조폭계, 3위가 군대가 아닐까 하는 개인적인 생각이다. 그런 정치계와 야쿠자들의 세계를 상세라게 묘사한 작품이라 온갖 폭력과 배신이 난무한다. 이 모든 시련을 남자만의 열정과 우정으로 극복한다. 그리고 역시 이 정도의 컷은 기본적으로 깔아준다.
"한번 더 할까? 가위바위보?"
"이제 됐어, 가위바위보는..."
"이제 그만 잠들어도 될까?"
"아아, 그래"
그들의 여정의 마지막 장면이다. 캄보디아의 석양이 더 없이 아름답다.
소년은 이제 중년이 되고 해적판의 만화를 찾으러 서점을 방랑하지 않아도 원하는 만화는 집에서 인터넷으로 찾아 볼 수 있는 세상이다. 소년의 시대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엄청난 양의 만화도 손 안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담배 연기 자욱한 만화방 한 구석에서 이케가미 아저씨의 남자의 로망을 보며 무한한 상상으로 꿈을 키우던 그 기억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추억의 한 편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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