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아우라가 사라진 시대를 여행하는 방법 : 이희인의 여행자의 독서
책을 읽기 위해 떠나는 여행도 있다.
여행과 독서. 세계 일주 여행을 떠나는 게 인생 최대의 과제이고, 일주일에 한권 이상의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는 것이 지금 일상의 과제인 저에게 이 두가지가 합쳐진 주제의 책이라면 끌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서점에서 제목을 보고 끌려서 그저 몇페이지만 스르륵 훑고는 바로 샀습니다.
근데 여행에서 책이라니요, 그것도 울 나라가 아니라 남의 나라에 가서.... 이해가 잘 안됩니다. 그 나라의 자연경관을 봐야 하고, 건축물과 사람 사는 모습도 봐야 하고, 그 나라 음식도 먹어야 되고, 현지의 친구도 사귀어야 되고, 무엇보다 비슷한 여행자들끼리 수다도 떨어야 되는데...... 책 읽을 시간이 있을라구요??
근데, 책을 읽으면서 곰곰히 생각해보니........ 시너지 효과란 이럴 때 쓰는 단어입니다. 여행지와 관련된 책을, 책의 주제가 되는, 혹은 배경이 되는 곳에서 읽는다면, 책의 사실감과 감동은 서울의 어느 지하철 속에서 읽는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겁니다. 그렇게 해서 스토리가 생긴 여행지는 다시 보일 것이고, 당연히 여행의 감동은 더하겠지요.
책의 서평 따윈 별루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금이라도 책이 말하는 여행지를, 책이 소개하는 책을 들고 떠나는 것이야 말로 이 책에 대한 최고의 찬사일 것입니다. 거두절미하고 가지죠!
# 1 잃어버린 지평선 <제임스 힐턴, 첫번째 이야기 중에서>
티베트와 윈난을 여행할 땐 제임스 힐턴의 <잃어버린 지평선>을 들고 간다. 책 속에는, 히말라야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는 영국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만들어진 샹그릴라가 있다. 엉겹결에 샹그릴라 라는 이름을 부여받은 중국 윈난의 중띠엔. 그래서 그 도시는 정말 샹그릴라가 되었을까?
# 2 박사가 사랑한 수식 <오가와 요코, 첫번째 이야기 중에서>
앙코르왓, 보로부두르와 함께 동남아 3대 불교 유적지를 꼽히는 탑의 도시 미얀마의 바간에 갈 땐 오가와 요코의 <박사가 사랑한 수식>이다. 책에 담긴 위대하고 아름다운 수의 세계만큼, 보석 같은 아름다움을 가득 숨기고 있는 땅이다.
# 3 끝없는 벌판 <응웬 옥뜨, 첫번째 이야기 중에서>
베트남에 간다고 하면 사이공이나 하노이나 훼 같은 유명 도시에 앞서 반드시 가야하는 곳이 있는데, 중국과 국경지대에 있는 산악 마을 '사파'다. 이 곳에서 읽을 책은 베트남 여성 작가 응웬 옥뜨의 소설 <끝없는 벌판>이다. 메마른 몬순의 건조함과 답답하고 무더운 바람, 퀴퀴한 강의 썩은 냄새가 책장마다 진동한다.
# 4 천개의 찬란한 태양 <할레드 호세이니, 첫번째 이야기 중에서>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시리아의 다마스쿠스와 실크로드의 거점 팔미라, 중세의 성 '크락 데 슈발리에'에서는 할레드 호세이니의 <천개의 찬란한 태양>을 읽자. 아프가니스탄엔 못 가보지만, 아프가니스탄 출신 작가가 쓴 아프가니스탄 여인들의 운명을 따라가보자. 시리아도 아프가니스탄 못지 않게 슬픈 땅이니 시리아에서 아프가니스탄을 읽으며 위로를 받자.
# 5 내 이름은 빨강 <오르한 파묵, 첫번째 이야기 중에서>
터키의 색은 소피아 성당과 블루모스크의 파랑이나 잿빛이다. 그리고 을씨년스러움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이 나라 작가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을 읽어 보자. 한때는 빛나는 인류의 문화유산을 구축해 놓은 이 땅이 이제는 변두리 문명으로 전락해 간다. 오르한 파묵에서 변방의 문명들은 희망을 볼 수 있을까?
# 6 둔황 <이노우에 야스시, 두번째 이야기 중에서>
돈황에서 우루무치, 타클라마칸 사막과 실크로드의 진주 카슈가르를 거쳐, 파미르 고원에 숨겨진 카라쿨 호수와 마지막 국경마을 타쉬쿠르칸. 그리고 저 너머의 K2와 낭가파르바트와 같은 가장 아름다운 파키스탄 히말라야....... 여기에 어울리는 건 이노우에 야스시의 <둔황>이다. 책은 요긴하고 여행은 풍부해진다.
# 7 타인의 고통 <수전 손택, 두번째 이야기 중에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사라예보와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 수백년간 별다른 갈등없이 어울려 살았지만, 하루아침에 핍박받는 도시 사라예보와 가해자의 도시 베오그라드가 되었다. 전쟁과 슬픔의 유적인 이곳에서 수전 손택 여사의 <타인의 고통>을 읽는다.
# 8 파이 이야기 <얀 마텔, 두번째 이야기 중에서>
까무러칠 만큼 재미있는 소설인 캐나다 작가 얀 마텔의 <파이 이야기>. 이 책 앞부분 배경도시가 남인도 타밀나두 주의 폰디체리다. 주인공 소년 파이의 고향이자 파이가 어린 시절을 보낸 바닷가 도시다. 끝이 안 보이는 긴 여행길에 절대로 끝나지 않을 책 한 권을 갖는 것, 그것은 여행자가 가지고 다닐 수 있는 최고의 보물이다.
# 9 적절한 균형 <로힌턴 미스트리, 두번째 이야기 중에서>
누군가 지금 인도로 떠나는 사람이 있다면 <슬럼독 밀리네어>도 좋고, <작은 것들의 신>도 좋지만, 무엇보다 로힌턴 미스트리의 <적절한 균형>을 가져가기를 권한다. 진짜 여행은 인도에 있고 진짜 소설도 인도에 있다.
# 10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 두번째 이야기 중에서>
탄자니아의 수도 다르에스살람은 어둡고 퀴퀴하고 음습하다. 배로 단 두시간이면 가는 휴양도시 잔지바르는 다르에스살람과 너무다 다르다. 아프리카 최고 휴양도시라 불리우는 것이 아깝지 않을 만큼 아름답다. 책 속의 진실과 우리 눈으로 본 바깥 세상의 진실의 이질감과 동질감. 장 지글러의 <왜 세계의 절반을 굶주리는가>를 읽어야 하는 까닭이다.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정보와 이미지로 여행의 '아우라'가 없어진 시대라고 합니다. 시간과 돈만 있으면 누구든, 어디든지 갈 수 있는 시대입니다. 그렇지만 그 땅에서 느끼는 재미와 감동의 깊이는 사람마다 같은 수 없습니다. 그 땅에 어울리는 책을 가지고 가는 것, 여행의 깊이와 책의 감동을 더할 수 있는 매력적인 방법입니다.
PS.
왕위앙에서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완벽한 여행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마음에 켕기는 것이 없는 그런 곳이라 했던가. 하지만 그곳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자신 있게 말하긴 어렵다.
나는 방갈로와 해먹, 벤치를 옮겨다니며 눕거나 앉거나 맥주를 마시며 종일 책을 읽었다. 책 읽기가 따분해질 양이면 숙소 밖으로 나가 동네 꼬마 녀석들과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장난을 치며 놀았다.
책을 읽거나 아이들과 노는 일이 아무것도 아닌 일이라면 정말이지 나는 왕위앙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게 정말 아무걷도 하지 않은 것일까? - 여행자의 독서 1권 - P 138 라오스편에서
라오스의 왕위앙과 제일 비슷한 공간이 저에게는 집인 듯 싶습니다. 이방 저방을 굴러다니며 과자나 간식거리를 먹으며 하루종일 책을 읽고, 책 읽기가 따분해지면 아이들과 밖에 나가 논두렁 사이길을 걷거나 캐치볼을 하며 놀고..... 어쩌면 집이 완벽한 여행지가 되고, 완벽한 여행지는 바로 집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마음이 켕기게 하는 아내의 잔소리만 없다면.... 아~~ 위대한 발견입니다!!!
'여행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도심속의 여유, 도심속의 불교 : 임연태의 행복을 찾아가는 절집 기행 (0) | 2016.01.23 |
---|---|
한양의 지리와 건축과 역사를 한방에!! : 유영호의 한양도성 걸어서 한바퀴 (0) | 2016.01.03 |
내 마음의 속의 위로 : 유재현의 메콩의 슬픈 그림자, 인도차이나 (2) | 2015.07.17 |
극락에 이르는 길, 옴마니반메훔 : 후지와라 신야의 티베트 방랑 (0) | 2015.06.30 |
떠나는 열정, 떠나지 않는 인내 : 이지상의 낯선 여행길에서 우연히 만난다면 (0) | 2015.06.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