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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

오늘 나의 발자국은 뒷 사람들의 길이 되리니 : 김삼웅의 백범 김구 평전

by 개락당 대표 2015. 9. 7.

 

 

오늘 나의 발자국은 뒷 사람들의 길이 되리니 : 김삼웅의 백범 김구 평전

 

 

 

몇해전인가

체氏의 평전을 읽은 적이 있다.

이제서야 金九선생의 평전을 읽는다.

부끄러울 따름이다.

2005년 4월

 

 

 

암살이라는 영화를 봤습니다. 의열단의 활약을 그린 영화입니다. 약산 김원봉 선생도 나오고 김구 선생도 나옵니다. 아픈 시대를 그린 영화는 언제봐도 뭉클합니다. 책꽂이에 꽂혀 있던 김구 평전을 다시 펴 봅니다. 책 뒷표지에 간략한 메모가 있었습니다. 책의 줄거리도 당최 기억이 안나고 위의 저 메모를 쓴 기억도 없습니다. 늙어면 죽어야 되능겨??? 독후감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백범 김구 (1976 ~ 1949)

 

 

 

 

출생

 

1976년 황해도 해주에서 아버지 김순영 (당시 24세)와 어머니 곽낙원 (당시 17세)의 외아들로 태어난다. 조선의 대표 상민이다. 현대판 엄마들 못지 않은 어머니의 높은 교육열로 어려서 부터 열공했다. 17살에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한다. 과거라는 시궁창을 본 뒤로 벼슬길을 단념한다.

 

 

 

 

동학 농민운동 참가

 

1893년에 동학에 입교하게 되고 1년만에 수백명의 쫄을 거느리는 팔봉접주가 된다. 1894년 본격적으로 동학 농민운동이 일어나자 해주 팔봉에서 거병하여 지도자 최시형의 지시를 받고 해주성을 공격하였으나 총소리만 들어도 깜놀하는 무지렁이 농민이 태반이라 맥없이 지고 만다.

 

 

 

 

치하포 사건

 

1895년 명성황후가 살해당하는 일이 발생한다. 그 다음해 김구가 21세 때 황해도 치하포에서 무장한 일본 민간인 스치다를 죽여버린다. 명성황후를 죽인 미우라 고로 일당이거나 그 비슷한 넘이라고 생각했다. 죽이고 도망가거나 숨거나 하지 않고 떳떳하게 체포를 당했다. 처음으로 옥살이를 하게 된다. 모진 고문을 받고 자살 시도까지 하게 된다.

 

 

 

 

탈옥, 스님, 환속 그리고 선생님

 

1898년 3월 탈옥에 성공한다.(감옥생활 1년 8개월) 역시 재주도 많으시다. 공주 마곡사에서 숨어 있다가 머리를 깍는다. 동학에도 입교했고, 중도 되고, 나중에는 기독교인도 된다. 두루 섭렵하신다. 중 생활은 그리 오래 지속하지 못하고 환속한다. 그 후 황해도에 학교를 세우고 선생님 역할을 열심히 한다. 나라를 바로 세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사람을 올바르게 가르치는 일이다.

 

 

 

 

안명근과 105인 사건

 

안명근은 안중근 의사의 사촌 동생이다. 북간도로 망명하여 군자금을 모집하다 1910년 12월 평양에서 잡힌다. 일제는 이것을 신민회 황해도 지부의 지시에 따른 것으로 날조하고 총독 데라우치 암살 기도로 모략하여  1911년 9월 전국적으로 애국지사 900명을 잡아 가두고 105명을 기소한다. 김구 선생도 이 때 서대문 형무에 수감된다.

 

105인 사건 관련자들 체포 장면. 출처 : 위키백과

 

 

 

 

고문 현장

 

살가죽이 벗겨지는 고문을 당하고도 배고픔만은 어찌하기 어려웠다. "그런 때 다른 사람들이 문전에서 사식을 먹으면, 고깃국과 김치 냄새가 코로 들어와서 미칠 듯이 먹고 싶어진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음식 냄새가 코에 들어올 때마다, 나도 남에게 해가 될 말이라도 하고서 가져오는 밥이나 다 받아먹을까, 또 아내가 나이 젊으니 몸이라도 팔아서 좋은 음식이나 늘 하여다 주면 좋겠다 하는 더러운 생각이 난다." [백범일지]

 

김구 선생님도 평범한 인간이시닷!

 

 

 

 

서대문 형무소

 

감옥이란 묘한 곳이어서 약한 자는 바스라져 나오고 강한자는 더욱 단련되어 나온다. 내가 아는 위인들은 모두 그러하다. 신영복 교수, 김대중 전 대통령, 김근태 의장 등. 임시정부의 문지기로도 좋다는 백범 정신, 아래로 향하는 지도자의 자질은 이렇게 감옥에서 싹트고 만들어졌다.

 

 

 

 

어머니와 아내

 

김구의 어머니는 늘 아내편이었다. 아내와 조금이라도 다툴라 치면 "니가 감옥에 있을 때 니 아내가 어떻게 했는 줄 아느냐. 그걸 알면 니 처를 결코 박대해선 안된다." 라고 호통쳤다.

선생 왈 : "울 마눌과의 싸움에서 나는 백전 백패다."

 

어머니 곽낙원 여사의 기백은 대단했다. 서대문 형무소에 처음 면회와서는 "이야! 나는 니가 경기감사나 한 것보담 더 기쁘게 생각한다." 고 했다.

 

출옥 후 친구들이 위로연을 해 주었다. 몇몇 기생도 부르고 해서 술을 따르기도 하고 권주가를 부르기도 했다. 열혈 어머니, 그 꼬라지 몬본다. "내가 여러 해 동안 고생을 한 것이 오늘 네가 기생을 데리고 술 먹는 것을 보려고 한 것이냐?" 선생은 바로 꼬랑지를 내렸다.

 

 

 

 

망명길의 시작

 

1919년 3.1 운동 직후 단둥에서 이륭양행 (울 나라 독립운동을 정말 열심히 도왔던 조지 쇼가 운영하는 무역회사. 아일랜드 출신으로 일본넘들을 영국넘 만큼 미워했다.) 소속 배를 타고 상해로 가서 임시정부일을 하게 된다. 이 때가 선생의 나이 44세였다. 그 망명생활이 해방이 될 때까지 이어질 줄 누가 알았으랴. 지금 생각해보면 상당한 나이이다. 우리가 지금은 늦었다 라고 생각하는 건 그저 생각이다. 그 때 시작하면 된다. 그러니까 늦었다고 생각 될 뿐 늦었다 라는 건 없는 것이다.

 

 

 

 

한인애국단

 

이봉창 : 제 나이가 이제 서른 한 살입니다. 앞으로 서른 한해를 더 산다 하여도 지금까지보다 더 나은 재미는 없을 것입니다. 늙겠으니까요.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지난 31년 동안에 인생의 쾌락이란 것은 대강 맛을 보았습니다. 이제부터는 영원한 쾌락을 위해서 독립 사업에 몸을 바칠 목적으로 상해에 왔습니다.

 

영원한 쾌락을 얻으러 가는 길이니 우리 기쁜 낯으로 사진을 찍읍시다..... 이봉창 의사가 했던 말이다. 웃는 얼굴이나 오래 보고 있자니 처연한 기운이 돈다. 출처 : 위키백과

 

 

 

윤봉길 의사가 두 아들에게 남긴 유서 (이 때가 겨우 25살...... 대단하다.) :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해서 용맹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이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한잔 술을 부어 놓아라

 

중국의 장제스는 홍커우 공원에서 윤봉길이 폭탄 투척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중국의 100만 대군이 해내지 못한 일을 조선의 청년이 해내다니 정말 대단하다." 라고 감탄하였고, 그 동안 별 무관심 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전폭적으로 지원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출처 : 위키백과

 

 

 

 

주애보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 이후로 김구에게는 현상금이 붙고 일제의 대대적인 검거작전이 시작된다. 약 5년동안 도피생활을 하게 되는데 이 때 그를 도와준 이가 주애보(주아이빠오)라는 처녀 뱃사공이다. 최준례 여사의 죽음 이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가까이 했던 여자다. 거의 부부와 다름없이 생활했고 유사시엔 그녀가 선생을 도피시키기도 했다. 1937년 중일 전쟁으로 일본이 남경을 폭격하자 그녀의 고향인 가흥으로 잠깐 돌려보냈는데 이것이 생이별이 되었다.

 

"근 오년 동안 한갓 광동인으로만 알고 나를 위하였고, 모르는 사이 우리는 부부같이 되었다. 나에 대한 공로가 없지 않은데, 내가 뒷날에 기약할 수 있을 줄 알고 돈도 넉넉히 돕지 못한 것이 유감천만이다." [백범일지]

 

 

 

 

김원봉과 의열단 활동

 

백범이 개인적으로 김원봉과 의열단의 활동을 인정하면서도 의열단을 배척하는 데는 까닭이 있었다. 당시 장개석이 계속하여 일제에 밀리는 상태에서 모택동이 이끄는 공산당이 점차 세력을 확장해나가자 중국 정부는 공산 세력을 탄압하는 반공 정책을 펴고 있었다. 이러한 때 좌파 세력이 주도하는 명목상의 통합운동에 참여하기가 어려웠다. 윤봉길 의거 후 모처럼 신뢰와 지원관계가 유지된 장개석 국민당 정부와 척을 질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영화 암살에서는 되게 친하게 나오던데.... 이 책에서 김구 선생과 김원봉 선생의 관계에 대해서 직접적인 표현은 요정도였다. 암살 이후 단지 북으로 갔다는 이유만으로 무지 저평가 되어왔던 약산에 대한 다시보기가 여러 미디어에서 일어나고 있던데.... 공부 좀 해볼 일이다.

 

 

약산 김원봉. 한국 무장독립투쟁의 전설. 그러나 남과 북 모두에서 버림받은 비운의 독립운동가이다. 김구의 현상금 60만원 (현재 화폐가치로는 200억원), 김원봉의 현상금 100만원 (현재 화폐가치로 320억원) 이었단다. 오사마 빈라덴 등장 이전까지 세계 최고의 현상금이었대나 어쩠대나.....

 

 

 

 

일본의 항복

 

이 소식은 내게 희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이었다. 수년 동안 애를 써서 참전을 준비한 것도 모두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 서안 훈련소와 부양 훈련소에서 훈련받은 우리 청년들을 조직적, 계획적으로 각종 비밀 무기와 전기를 휴대시켜 산동반도에서 미국 잠수함에 태워 본국으로 침입하게 하여 국내 요소에서 각종 공작을 개시할 것을 미국 육군성과 긴밀히 합작하였다. 그런데 그러한 계획을 한 번 실시해 보지도 못하고 왜적이 항복하였으니, 지금까지 들인 정성이 아깝고 다가올 일이 걱정되었다. [백범일지]

 

 

 

 

환국

 

해방이 되고 대한민국은 이미 미군정이 자리잡았다. 당연히 임시정부의 국가 수반 자격으로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귀국해야 될 것을, 개인자격으로 돌아오고 오로지 산천만 그의 귀국을 반겼다. 이런 뜨거럴.... 미쿡노무 시키

 

 

 

 

김일성을 만나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 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않겠다.

 

선생이 줄기차게 주장하고 노력한 신념이다. 그래서 북으로 간다. 김구, 김규식, 김두봉, 김일성 이 네명이서 4김 회담을 한다. 남한의 이승만처럼 북에서 확고한 자리를 잡은 김일성이 통일하자는 소리를 깐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가치가 있는 건 과정이다. 선생이 북에 어떤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갔던 간에, 통일 조국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는 점에서 그 가치는 인정받아야 할 것이다.

 

 

 

 

서거

 

1949년, 사저였던 경교장에서 국군 장교 안두희에 의해 암살당하여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친다. 향년 74세. 암살배후에 여럿 거론되지만,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다. 아마도 미국과 이승만이 마지막에 있을 거라는 짐작만 할 뿐. 책에서는 이승만의 의중을 짐작한 꼴통 부하들이 자기네들끼리 쑥떡쑥떡해서 그랬을 가능성이 크다고.....

 

해방 이후 최대의 인파가 몰렸다는 선생의 장례식이다. 노통의 장례식이 생각난다. 사진출처 : http://jb21.tistory.com/1956

 

 

 

 

가족

 

슬하에 세딸이 있었는데 다 일찍 죽었다. 그 후로 김인, 김신 두 아들이 태어난다. 모두 40대에 늦게 본 아들이다. 사람이 마땅히 가져야 할 덕목으로 어짐仁과 믿음信, 이 두가지를 꼽았고 또 아들 이름도 그렇게 지었다. 첫째 아들은 중경에서 호흡기 병으로 1945년에 죽었다. 김신은 현재까지 살아있고 그의 큰 아들 김진은 대한 주택공사 사장을, 둘째 아들 김양은 국가 보훈처장을 역임했다.

 

 

 

 

의 소원

 

인류가 현재에 불행한 이유는 인의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 이 마음만 발달하면 현재의 물질력으로 20억이 다 편안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인류의 이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로 말미암아서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

 

 

 

 

 

 

 

김구 선생의 가장 훌륭한 업적을 꼽으라면, 임시정부의 정통성과 연속성을 계속 이어왔다는 점 입니다. 이국땅에서 재정난으로, 중국의 압박으로, 혹은 내부갈등으로, 그렇게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한번도 단절됨 없이 임시정부를 계속 끌고 왔습니다. 해방이 될 때까지. 책을 읽으면서 드는 생각이었습니다.

 

 

이승만과 김구. 최대의 동지이자 라이벌이었는데, 한명은 영생을 얻었고 또 한명은 대대로 욕을 처 드시고 있습니다. 이봉창 선생의 말씀이 자꾸 생각납니다. 사지로 들어가면서, "영원한 쾌락을 얻으러 가는데 어찌 기쁘지 아니하겠소." 그 분은 영원한 쾌락을 얻었는데 성공했습니다.

 

 

서울에 가면 아이들 데리고 경교장에나 함 가봐야겠습니다. 요즘 새로 싹 단장해서 볼거리도 많다고 합니다. 선생의 묘소가 있는 효창공원도 한번도 가보지 못했습니다. 이 가을에 하늘도 보고 소풍도 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