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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

우리는 지금 제대로 가고 있는가 : EBS의 역사e 2,3

by 개락당 대표 2015. 11. 13.

 

 

우리는 지금 제대로 가고 있는가 : EBS의 역사 ⓔ 2, 3

 

 

 

1. 조선의 공부벌레

 

 

 

17, 18세기의 조선은 폐쇄된 나라라는 인상을 주지만 실상은 매우 달랐다. 조선은 이미 국가에서 주도적으로 외국어를 가르치고 외교관을 배출하는 시스템을 확보하고 있었다. 당시 조선에는 중국이나 일본보다 다양한 외국어를 구사하는 통역 전문가가 훨씬 많았다. 역관, 그들이야말로 당대의 코스모폴리탄이었다. 그들을 통해 조선은 세계에 눈을 떴다. - 2권 P 59

 

 

 

청담공원에 있는 홍순언과 강남녀의 비석. 홍순언이 중국의 유명한 홍등가에서 이쁜 언니를 만나, 넘 이뻐서 아주 많은 돈(더우기 공금을~~)을 주고 왔는데, 나중에 그 언니가 명나라 유력인사의 마눌이 되어서 홍순언이 졸라 도왔다는 전설적인 사건이다. 사진 출처 : 신한국문화신문

 

 

 

음... 지금으로 치면 외교관쯤 되려나..... 분명한건 지금 외교관이 되는 것보다 조선시대에 역관이 되는 게 훨씬 어려워 보인다. 오죽하면 조선의 공부벌레라 했겠는가. 뛰어난 역관을 만들기 위해 세종은 역관 후보자들에게 한국어만 쓰게하고 중국어를 쓰면 쓴 만큼 매질을 시켰다. 지금과 다를바 하나도 없다. 그래서 탄생한 대표적인 역관에는 임진란 때 명나라의 원병을 이끌어낸 홍순언과 백두산 정계비를 세워 국경을 확정한 김지남이 있다.

 

 

 

2. 당나귀를 탄 여의사

 

 

 

박에스더가 펼친 의료활동은 미신과의 싸움이기도 했다. 산간벽지의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양의사에게 몸을 보이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들은 병이 들면 무당을 찾아가 푸닥거리를 할지언정 의사를 찾지는 않았다. 박에스더는 홀대를 받으면서도 묵묵히 환자들을 돌보았다.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겠다는 신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진료를 받아본 사람들은 곧 그의 진심을 알아보았다. - 2권 P 74.

 

 

 

그 시절에 미국 유학에 올라 여의사가 되었다. 그 정도면 당시 조선에서 최상류의 삶을 살 만도 했었는데, 그러질 않았다. 그저 몸 닿는대로 힘 닿는대로 가난한 병자들을 치료했다. 사진 출처 :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

 

 

 

김.점.동. (점동이~~ 음... 예쁜 이름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의사다. 이화학당에 들어가 세례를 받고 점동이를 버리고 에스더를 얻는다. 그리고 박유산이라는 훤칠한 장부를 만나 서양식으로 결혼하고 박에스더가 된다. 그리고 남편과 무려 120년 전인 1895년에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남편은 자기의 유학바라지를 하다 폐결핵으로 미국에서 죽는다. 국내에 돌아와 헌신적으로 아픈 이들을 돌보지만, 너무 무리한 탓인지 자신도 폐결핵으로 별이 된다. 34세의 나이에. 

 

 

 

3. 조선 최고의 실용서

 

 

 

서유구는 제도적 개혁에 의미를 두지 않았다. 밥 먹고, 씨 뿌리고 거두고, 땀 흘리는 일상에서 개혁은 일어난다고 보았다. 본성이 어떻고, 이치가 어떻고 하는 고준담론할 시간에 밖으로 나가서 바지를 걷어붙이고 쟁기질을 하라고 주장한다. 그는 혼자 힘으로 밭을 갈고, 꽃을 돌보고, 옷을 지어 입고, 집을 짓고, 제사르 지내면서 살았고, 그 경험과 책의 정보를 한데 아울러 113권의 책에 담았다. 다산이 경학과 경세락에 중심을 두었을 때, 풍석은 '잡학'에 빠졌다. - 2권 P 142. 

 

 

 

같은 시대를 살았던 다산 정약용과는 생애의 라이벌이다. 다산이 과학자이며 실학자이자 유학자로서, 또 철학자로서 아주 중요한 평가를 받는 반면에, 풍석 서유구는 듣보잡이다. 그렇지만 그가 쓴 임원경제지 하나만으로 전혀 꿀리지 않는다. 사진 출처 : 풍석문화재단

 

 

 

임원경제지. 풍석 서유구가 만든 조선판 브리태니커다. 조선에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이 들어있다. 위에서 언급했던 농업에서부터 의학, 무술, 방직, 건축, 풍수지리, 악기, 제사, 요리 등등 별의별 지식이 다 들어가있다. (요리편에는 1070가지의 요리법이 수록되어 있다. 그 중에는 카스테라 만드는 법도 들어있다고....)  번역이 난해라고 오랜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라 나라에서 포기했다. 임원경제연구서라는 민간에서 2003년부터 번역작업을 하고 있고, 지금도 진행중이다.

 

 

 

4. 503번의 승리

 

 

 

너희들이 정말로 책을 읽으려 하지 않는다면, 나의 저서들은 쓸모없어진다. 결국 나는 할 일이 없는 사람이 되고 만다. 그렇다면 앞으로 마음의 눈을 닫고 흙으로 빚은 사람처럼 될 뿐 아니라 열흘이 못가서 병이 날 것이다. 이런 병은 고칠 약고 없을 것이다. 즉, 너희들이 독서하는 것은 내 목숨을 살려주는 것이다. - 2권 P 287  정약용이 두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중에서

 

 

 

공무원의 마음가짐에 대해서 쓴 목민심서. 사진 출처 : 위키백과

 

 

 

국가를 운영하는데 필요한 제도와 법규에 대해서 쓴 경세유표. 사진 출처 : 위키백과

 

 

 

판사 검사 변호사가 판결을 할 때 어떠어떠하게 해야 된다, 혹은 징역을 살게 하면 어떤 식으로 해야 된다... 에 대해서 쓴 흠흠신서. 사진 출처 : 위키백과

 

 

 

정약용은, 현실에서는 죄인이지만 다음생에서는 제대로 평가받기 위해서 쓰고 또 썼다. 18년 동안 그렇게 완성한 책이 503권이다. 아버지가 그토록 고독하고 위대한 길을 걸었지만, 위의 편지에서 보듯, 자식들은 그렇지 않았나 보다. 저렇게 자식에게 비굴한? 협박 편지까지 보내다니..... 우리 애들도 책 읽으면 돈 준다. 그래도 잘 안 읽는다.

 

 

 

5. 유생의 반란

 

 

 

항일 민족주의 교육자 이만규는 저서 <조선교육사>에서 우리나라 교육의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점을 꼽으라면 "봉건 제도 아래에서 성균관 유생들에게 정당한 학원의 자유를 보장한 것" 이라고 설명했다. 대한민국 현대사를 수놓은 정의와 자유를 나침반으로 삼았던 학생운동의 정신과 성균관 유생들이 행했던 권당과 공관의 정신은 결국 하나의 맥으로 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 - 3권 P 79

 

 

 

"집현전 학사들이 나를 버리고 갔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을꼬?" 동맹휴업에 대한 세종이 탄식이다. 황희 정승이 일일이 유생들을 만나 대화로 풀어나갔다. 또한 영조는 동맹휴업한 유생들에게 "당연한 처사"라고 했다는 말이 조선왕조실록에 있다. 심지어 유생들은 영조를 독대하여 잘못을 지적하기도 했다고. 지금은 왕과 백성 사이에 물대포도 있고, 차벽도 있고, 다가가기에는 너무 멀다. 사진 출처 : 지식 채널 e 동영상 캡쳐

 

 

 

권당 : 권은 거두다라는 뜻으로 밥을 거두는 것. 단식농성이다.

공재 : 기숙사에서 물러나는 것, 즉 수업거부

공관 : 학교를 비우고 밖으로 나가는 시위. 즉 동맹휴학이다.

 

 

 

성균관 유생들이 했던 시위방식이다. 화염병은 던지지 않았군. 백골단이 없을 때니.... 조선시대에도 대학생의 시위의 자유를 보장했다. 그리고 학생들은 그런 시위를 통해 왕권의 부당 사용을 견제하고 왕도 그들과 소통하려 했다. 선순환 구조다. 그런 시대가 되어야 한다.

 

 

 

6. 돌아오지 못한 황태자

 

 

 

원자폭탄이 투하된 그 날 오후, 이우는 히로시마의 어느 다리 아래에서 흙투성이로 발견되었고, 다음날 새벽 세상을 떠났다. 고종과 순종의 유지를 어어받은 왕조의 후계자로, 고뇌하는 청년으로, 대중을 사랑했던 지식인으로, 자주독립을 위해 투쟁하며 살았던 이우, 그는 서른세 해를 살다가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3권 P 142

 

 

 

 

오우!!! 잘생기셨다. 얼짱 황족 이우 공 되시겠다. 사진 출처 : 위키 백과

 

 

 

'나는 조선의 평민이 될 지언정 일본의 황족이 되기를 원치 않는다.'

 

유약하고 일본에 순종했던 형 이건에 비해 이우는 똑똑하고 반항적이었다. 그래서 더 황실의 총애를 받았다. 당시 조선 총독부는 조선 황실의 자녀를 일본인과 결혼시켰다. 영친왕, 이건, 덕혜옹주가 그러했다. 이우는 먼저 선수를 쳤다. 박영효의 손녀 박찬주와 결혼 발표를 하고 이를 실행했다. 친일파의 손녀라 좀 거시기 했지만, 그런 걸 따질 게재가 아니었다. 일본에게 박힌 미운 털이 이를 계기로 완전히 쑥 박혔다. 사진 출처 : 위키백과

 

 

 

의친왕 이강은 '잘생기고 호방한 비운의 왕자'였다 원래대로라면 장남인 순종이 세상을 떠난 후에 차남이 이강이 왕위를 물려받아야 하지만, 황제의 자리는 스무살 어린 영친왕에게 허락되었다. 그 의친왕 이강의 가장 영특하고 당당한 자식이 둘째 아들 이우다. 조선의 왕위는 고종 - 순종 - 이강 - 이우로 이어지는 게 가장 바람직했다. 똑똑한 이가 왕이 되는 걸 일본넘들이 가만이 보고만 있을 리가..... 제대로 된 이는 하나같이 다 이렇게 비극적인 결말이다. 왜? 왜?

 

 

 

참고로 이우는 박찬주와의 사이에서 아들 둘을 두었다. 큰 아들 이청은 미국에서 토목기사 생활을 했고, 둘째 아들 이종은 미국 브라운대 유학 중 1966년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떠거럴 미쿡. 역시 사람 살 동네가 못된다. 이청은 현재 석파학술연구원을 설립하여 흥선대원군에 대한 연구 작업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7. 조선의 영어교육

 

 

 

영어만 할 줄 알면 빠르게 출세할 수 있었던 개화기 시절, 한문이 지배하고 있던 세계는 저무는 황혼과 다름없었다. 1886년 6월 정식학교로 개교한 배재학당에 몰려든 학생들이 가장 큰 기대를 걸었던 건 영어공부였다. 배재학당 교장 아펜젤러는 회고록에서 "조선 사람에게 '왜 영어공부를 하느냐?'고 물으면 하나같이 '출세하기 위해서'라고 대답한다."고 당시의 분위기를 전했다. 그의 말대로 조선에서 영어는 신분상승의 지름길이요 그 자체로 권력이었다.  - 2권 P 159.

 

 

 

울나라 최초의 영어 전문학교 육영공원. 여기서는 영어를 제대로 가르쳤다. 강사도 미국 최고의 대학을 나온 원어민들이었고, 심지어 모든 수업을 영어로 진행하기도 했었다. 일본과 중국에 비해 조선사람들은 영어를 배우려는 열의도 높았고, 영어의 수준도 뛰어났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부터 영어 교육은 점점 엉터리가 되어갔고, 해방 후에도 성문종합영어 식의 교육은 계속 되었다. 나도 맨투맨으로 영어공부했다. 한마디로 벙어리 영어다. 사진 출처 : 역사 채널 e 동영상 캡쳐

 

 

 

120년 전의 영어 열풍은 아직도 사그러지지 않고 있다. 선망의 대상이었던 그 시절의 영어가 지금은 공포의 대상이 되었고, 이제는 계급을 나누는 중요한 잣대가 되었다. 누가 이렇게 만들었나? 김제동의 말을 잠깐 빌려본다.

 

 

 

"이 땅에서 태어나 영어를 잘하는 것이 자랑이 될 수는 있지만,

못하는 것이 수치가 될 수는 없다."

 

 

 

8. 독립운동가 죠지 쇼

 

 

 

안둥 회사의 지배인은 아일랜드인 테러리스트였는데, 우리 한국인들은 그를 '샤오'라고 불렀다. 그는 일본인을 거의 영국인만큼이나 싫어하였다. 그래서 커다란 위험을 무릅쓰고 한국 독립운동을 열렬하게 지원해주었다. 샤오 자신이 상하이로 가서 '죽음의 화물' 선적을 감독하였다. 그는 돈은 한 푼도 받지 않고 오로지 동정심에 스스로 한국을 도와주었다. 한국인 테러리스트들은 몇 년 동안 그의 배로 돌아다녔으며, 위험할 때는 안둥에 있는 그의 집에 숨었다. - 2권 P 299 님 웨일즈가 독립운동가 김산의 일대기를 쓴 책 <아리랑>에서 김산이 죠지 쇼에 대해 회고하는 구절 중에서

 

 

  

아일랜드계 영국인인 조지 쇼. 그의 어머니는 일본인이었고 그의 마누라도 일본인이었다. 근데 왜 감옥에 가면서까지 조선의 독립운동을 도왔을까? 일본에게 핍박받는 조선을 보면서, 영국의 지배를 받는 아일랜드와 동병상련의 감정을 가졌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라고 한다. 그것보다 더 큰 이유는 약자를 도와주는 대인배 정신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진 출처 : 국가보훈처 공식블로그

 

 

 

1963년 한국 정부가 조지 쇼의 공로를 인정하여 건국공로훈장이 수여되었다. 그러나 그 훈장을 받을 이는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나 KBS 역사스페샬 팀의 끈질긴 추적끝에 조지 쇼의 친손녀를 찾아냈다. 그리고 2012년 광복절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드렸다. 조지 쇼의 손녀 마조리 허칭스도 이미 할머니였다. 사진 출처 : 국가보훈처 공식블로그

 

 

 

쇼는 1943년 중국 푸저우에서 생을 마감했다. 현재 푸저우의 쇼가 태어났던 집은 공원으로 바뀌었고, 외국인 공동묘지에 묻혔던 무덤은 중국 문화혁명 때 파헤쳐저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쇼를 기억할 만한 물질적인 것은 이제 다 소멸되었지만, 그 정신은 기리 남을 것이다. 그랬으면 좋겠다.

 

 

 

 

 

 

 

후세에 자신들이 어떻게 평가되든 간에, 우리 선조들은 자신들의 방식대로 인생의 소용돌이에 대처하고 삶의 굴곡을 수없이 넘나들었다. 명징한 신분제도 속에서 그 시절의 제도나 시스템에 동승하기도 하고, 항거하기도 하고, 중도에 포기하기도 하는 그들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의 그림자와도 겹쳐 보인다.

 

 

 

역사는, 지금 내가 저지르고 있는 어리석음과 오류와 과오를 돌아보게 한다. 이에 대한 따끔한 지침을 주고 제대로 된 방향을 제시한다. <역사채널 e>의 타이틀인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역사뿐이다.' 라는 연산군의 말은 손바닥으로 해를 가릴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말이자, 역사가 우리에게 전하는 말이다. 우리는 지금 제대로 가고 있는가.  - 역사 e 3권 프롤로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