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침思沈이어야 사무사思無邪할 수 있다 : 신영복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 1
오늘날의 문학, 예술인에게 필요한 것은 과감한 쿠데타이다. 그들의 '스폰서'(물주)로부터의 미련 없는 결별이다. 그들이 자기의 물주를 생산의 비호인으로서 갖고 있던, 소비의 고객으로서 갖고 있든, 어쨌든 그들 개개인의 결별이 아니라 집단적인 결별이라면 좋다. 그리하여 대중의 정의와 양심의 역사적 대하大河 속에 혼연히 뛰어들 때 비로소 문학, 예술은 고래古來의 그 환락의 수단이라는 오명을 씻을 수 있는 것이다. (p.25, 1969년 혹은 1970년 남한산성 육군교도소에서 쓴 글)
# 2
저는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결코 많은 책을 읽으려 하지 않습니다. 일체의 실천이 배제된 조건하에서는 책을 읽는 시간보다 차라리 책을 덮고 읽은 바를 되새기듯 생각하는 시간을 더 많이 가질 필요가 있다 싶습니다. 지식을 넓히기보다 생각을 높이려 함은 사침思沈이어야 사무사思無邪할 수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p.85, 1974년 4월 3일 아버님께 쓴 편지 중에서)
# 3
이곳의 저희들은 호연한 등반과는 대조적으로, 열리지 않는 방형方形의 작은 공간 속에서 내밀한 사색과 성찰의 깊은 계곡에 침좌沈座하고 있는 투입니다. '1년은 짧고 하루는 긴 생활', 그렇게 힘들게 살아온 나날도 돌이켜보면 몇 년 전이 바로 엊그제같이 허전할 뿐, 무엇하나 담긴 것이 없는 생활, 손아귀에 쥐면 한 줌도 안되는 솜사탕 부푼 구름같이, 생각하면 약소하기 짝이 없는 생활입니다.
그러나 비록 한 줌이 안된다 해도 그 속에 귀한 경험의 정수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끝내 '약소'할 수만은 없는 생활이기도 합니다. 그 속엔 우선 '타인에 대한 이해'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거개가 타인의 실수에 대해서는 냉정한 반면 자신의 실수에 대하여는 무척 관대한 것이 사실입니다. 자기 자신의 실수에 있어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처지, 우여곡절, 불가피했던 여러 사정을 잘 알고 있음에 반하여, 타인의 그것에 대하여는 그 처지나 실수가 있기까지의 과정 전부에 대해 무지하거나 설령 알더라도 극히 일부밖에 이해하지 못하므로 자연 너그럽지 못하게 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징역 속의 동거는 타인을 이해하게 해줍니다. (p.115, 1977년 9월 7일 아버님께 쓴 편지 중에서)
# 4
그래서 책에서 얻은 지식이 흔히 실천과 유리된 관념의 그림자이기 쉽습니다. 그것은 실천에 의해 검증되지 않고, 실천과 함께 발전하지도 않는 허약한 가설, 낡은 교조敎條에 불과할 뿐 미래의 실천을 위해서도 아무런 도움이 못되는 것입니다. 진시황의 분서焚書를 욕할 수만도 없습니다.
비록 여름이 아니더라도 저는 책에서 무슨 대단한 것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설령 책에서 무슨 지식을 얻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사태를 옳게 판단하거나 일머리를 알아 순서 있게 처리하는 능력과는 무관한 경우가 태반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지식인 특유의 지적 사유욕을 만족시켜 크고 복잡한 머리를 만들어, 사물을 보기 전에 먼저 자기의 머리 속을 뒤져 비슷한 지식을 발견하기라도 하면 그만 그것으로 외계의 사물에 대치해버리는 습관을 길러놓거나, 기껏 '촌놈 겁주는' 권위의 전시물로나 사용하면서도 그것이 그런 것인 줄을 모르는 경우마저 없지 않는 것입니다. (p.139, 1979년 6월 20일 아버님께 쓴 편지 중에서)
# 5
우리는 먼저 금산의 칠백의총을 찾았습니다. 조중봉 선생과 영규대사 등 7백 의병이 무기와 병력이 압도적인 왜병과 대적하여 살이 다하고 창이 꺾이고 칼이 부러져 맨주먹이 되도록, 최후의 1인까지 장렬히 선혈을 뿌렸던 격전지 - 지금은 날 듯한 청와靑瓦의 사당과 말끔히 전정剪定한 향목들의 들러리, 그리고 잘 다듬어진 잔디와 잔디 사이의 깨끗한 석계를 울리는 안내원의 정확한 하이힐 굽소리, 연못 속을 부침하는 붕어들의 한가로운 유영遊泳..... 이 한적한 성역聖域의 정취는 그다지 멀지 않은 임란 당시가 아득한 고대사의 일부가 된 듯 격세의 감회를 안겨주는 것이었습니다.
오후에는 먼지가 일고 자갈이 튀는 신작로를 한참 달려서 신동엽의 금강 상류까지 나갔습니다. 실로 오랜만에 흐르는 물에 바을 담가보았습니다. 저는 까칠한 차돌멩이로 발때를 밀어 송사리 새끼를 잔뜩 불러모아 사귀다가, 저만치서 고무신짝에 송사리, 새우, 모래무치 들을 담고 물가을 따라 이쪽으로 내려오는 새까만 시골 아이들 - 30여 년 전 남천강가의 저를 만났습니다. 저는 저의 전재산인 사탕 14알, 빵 1개, 껌 1개를 털어놓았습니다. "우리도 크면 농부가 되겠지."라던 이오덕 선생의 아이들이기도 합니다. (p.141, 1979년 7월 16일 아버님께 쓴 편지 중에서)
# 6
가을날 새벽이 잘라고 있는 창 밑에서 저희는 이따금 책장을 덮고 추상秋霜같이 엄정한 사색으로 자신을 다듬어가고자 합니다. 영위하는 일상사와 지닌 생각이 한결같지 못하면 자연 생각이 공허해지게 마련이며 공허한 생각은 또한 일을 당함에 소요에 닿지 못하여 한낱 사변일 뿐이라 믿습니다. (p.190, 1981년 10월 21일 아버님께 쓴 편지 중에서)
# 7
모래와 자갈로 이루어졌다는 잠실아파트의 여름이 어머님께 혹독한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보중保重하시기 바랍니다. 저도 가뭄과 더위 속에서도 항상 '정신의 서늘함'을 잃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p.212, 1982년 7월 5일 아버님께 쓴 편지 중에서)
# 8
유배지의 정다산丁茶山을 쓴 글을 읽었습니다. 이조를 통틀어 대부분의 유배자들이 배소配所에서 망경대望京臺나 연북정戀北亭 따위를 지어 임금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과 연모를 표시했음에 비하여 다산은 그런 정자를 짓지도 않았거니와 조정이 다시 자기를 불러줄 것을 기대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해배解配만을 기다리는 삶의 피동성과 그 피동성이 결과하는 무서운 노쇠老衰를 일찍부터 경계하였습니다. 그는 오히려 농민의 참담한 현실을 자신의 삶으로 안아들이는 애정돠 능동성을 통하여 자신의 삶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을 뿐 아니라, 나아가 이조의 묵은 사변思辨에 신신新新한 목민의 실학을 심을 수 있었다 하겠습니다.
다산의 이러한 애정과 의지는 1800년 그가 39세로 유배되던 때부터 1818년 59세의 고령으로 해배될 때까지의 18년이란 긴 세월 동안 한시도 흐트러진 적이 없었으며 마침내 <목민심서> 등 500권의 저술을 비롯하여 실학의 근간을 이룬 사색의 온축蘊蓄을 이룩하였습니다. (p.260, 1983년 9월 22일 아버님께 쓴 편지 중에서)
# 9
이처럼 낮고 어두운 밑바닥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여기에 걸맞는 '철학'을 정립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믿습니다. 이것은 비단 징역살이에 한한 문제만은 아니라 생각됩니다만 특히 징역살이에는 무엇보다 먼저 자기 자신을 가장 낮은 밑바닥에 세우는 냉정한 시선과 용기가 요구됩니다. 이러한 시선과 자기에 대한 용기만이 자기가 선 자리를 사회의 모순구조 속에서 위치규정할 수 있게끔 대자적對自的 인식을 정립해주는 동시에 징역 세월동안 무엇을 배우고 무엇에 물들지 말아야 하는가를 가릴 수 있게끔 해주리라 생각합니다. (p.368, 1987년 3월 21일 계수님께 쓴 편지 중에서)
감옥에서 20년을 보낸 이가 부모님, 형수님. 계수님, 형제들에게 한땀한땀 적어 보낸 편지를 읽었습니다. 억울한 옥살이를 20년이 넘게 하였지만, 편지속의 내용은 누구를 탓하거나, 자신을 책망하거나, 힘든 감옥생활로 좌절하는 내용은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작은 창으로 들어오는 신문지만한 햇빛 한 줌, 담벼락 외진 곳에 핀 펜지꽃으로 삶을 위로하고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시련은 사람을 바스러뜨리기도 하고, 혹은 아주 단단하게 만든다고 합니다. 하지만 감옥이라는 곳이 신영복 선생을 단단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선생은 본디 단단한 분이라는 것을 책을 읽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 긴 속박의 시간을 ‘서늘한 정신’을 유지하려고 애썼고 그렇게 하셨습니다.
무기수의 생활은 어떨까요? 징역 만기날짜를 기다리는 게 생활의 전부인 일반수들에 비해 무기수들은 하루가 빨리 간다고 좋은 게 아니라고 합니다. 선생은 오늘 하루가 보람 있는 날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인간에 대한 성찰과 세계에 대한 깨달음으로 스스로가 아주 새롭게 변한다는 걸 경험했다고 합니다.
어머님께 보내는 편지가 그리 많지는 않은데, 병환에 걸린 어머니와 만날 수가 있을까 읽으면서 내내 조바심을 내었습니다. 부디 선생이 출옥하실 때까지 어머님이 잘 견뎌셔서 잠실의 그 호숫가를 같이 걷기를 진심으로 빌었습니다. 마지막 편지에도 어머님이 돌아가셨다는 이야기가 없는 걸 보면 아마도 그리 되었으리가 짐작합니다.
청구회의 이야기도 인상적입니다. 아이들과 어울릴 줄 알고 그 아이들을 모아서 함께 공부하며 삶에 의미를 부여하기도 합니다. 일부반처제 이야기에서도 선생의 따스한 기품, 타인에 대한 연민과 배려가 깊게 담겨져 있습니다.
선생은 사색의 힘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깊게 사유해야 바르게 생각할 수 있다고 하십니다. 앎을 실천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오히려 많은 독서는 자신을 속박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채우려 하기보단 덜어내고, 명상으로 삶을 반추하며, 자신이 속한 환경에서 실천할 수 있는 바를 찾아 정진했습니다. 진정한 우리 시대의 지식인이십니다.
신영복 선생은 갇혀 있으면서도 고매하고 자유로왔고, 저는 일상에 있으면서도 속박당하고 비루합니다. 내가 있는 곳이 가장 밑바닥이라는 마음 가짐이 부족한 것일까요? 원래 단단하지 않은 인간이어서 일까요? 이젠 돌아가신 선생의 글이 따끔한 회초리가 되어 다가옵니다.
사진 출처 : http://kchanej83.tistory.com/15
밥벌이가 뭣이라고 빈소에도 가보지 못했습니다.
선생님의 말씀 오래 오래 새기고 실천하며 살겠습니다.
선생님이 꾸셨던 꿈, 저희들이 이어가겠습니다.
이제 감옥 없는 곳에서 마음 편히 잠드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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