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호의 노름마치들에게 바치는 사무친 살풀이춤 : 진옥섭 <노름마치>
밀양 영남루. 평양의 부벽루, 진주의 촉석루와 함께 이 땅의 3대 명루. 누마루에 난간을 돌리고 사방을 훤히 터두어 밀양 산천이 배경막이 된 무대였다. 대청마루에 올라선 그의 춤은 벌써 침묵 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무심한 지경에 이르러버린 멈춤에서 춤을 찍어내야 했다. 움직인다 해도 형제가 만들어지지 않고 그저 흐를 뿐인 춤, 포진한 카메라에 제대로 포착되지 않았다. 누가 저 정적을 춤이라 할까마는, 분명코 춤 중의 춤이었다.
동작 없는 춤, 실없는 소리로 일축할지 몰라 비유해보자면, 쌈꾼이 하이킥을 차지 않는 이치다. 도장에서야 폼 나지만 실전에서는 에너지 절약과 허점 노출 방지 원칙에 저촉되기 때문이다. 동작보다 음악에 따른 흐름을 중시하는 하용부의 춤, 말하자면 '실전무술'인 것이다. 우악스런 말이기에 우아한 말로 표현하자면, 유연한 '흐름'이다. 여태껏 두서없이 중언부언해온 그 '흐름'인데, 전통춤꾼들은 "물 흐르듯", "바람결에 버드나무 흔들리듯", 자연스런 흐름을 춤으로 말해왔다. 그 흐름에 내맡겨 무의식으로 흐를 때 관객이 따라 흐른다. 그의 말대로 "자빠지는" 것이다.
"장강의 뒷 물이 앞 물을 밀어낸다長江後浪推前浪"는 무협지 구절처럼 무舞도 무武와 같아 옛 명인은 가고 지금 새꾼이 나 대청마루에 서 있었다. 하성옥, 하보경, 하병호를 대물림한 밀양강변 춤의 종손 하용부, 영남제일루에서 강신무降神巫 신들리듯, '세습무世襲舞' 춤 들리고 있었다. (p.140)
이 구절에서 책을 덮었다. 그리고 유선생을 통해 '하용부'를 검색했다. 하용부의 '밀양북춤'을 틀었다. 13분짜리였다. 집중을 해서 끝까지 봤다. 좀 허탈했다. 그냥 북을 들고 추는 춤이었다. 고수의 경지는 느낄 수 없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저런 걸 접해본 적이 없으니. '그렇지, 저 정도의 춤을 알려면 춤을 보는 눈도 조금 있어야 하는 건가. 유선생이 아니라 실제로 보면 좀 다르겠지.' 라고 위로했다.
하용부의 <북춤>
첫 박에 빵빵한 소리를 올려놓고 잔향이 가시기 전에 딱딱! 거리며 춤에 뛰어드니 '북춤'이다. 추는 게 아니라 치는 것. '침'에서 '춤'이 나는 거다. 가문 대대로 되물림한 심금을 울리는 비결이다. (p.136)
사진 출처 : https://news.v.daum.net/v/20150929121609696
장금도. 1928년 군산 출인. 12살에 권번(오늘날로 치면 연예 기획사)에 들어가 먹고 살라고 판소리와 춤을 배워 호남 제일의 춤꾼이 되었다. 김제 만경에서 소문난 잔치가 열릴 때면 모두들 장금도에게 인력거를 보냈다. 열 살배기 아들이 친구에게 "니기 엄마 우리 집서 춤췄다."고 놀림을 받자 1956년 스물 아홉에 춤을 접었다. 며느리를 맞을 땐 장롱 깊이 간직했던 사진첩을 꺼내 모두 불을 지폈다. 철저히 과거를 지웠다.
여든이 되어 다시 춤을 춘다. 그래도 조심스럽다. 며느리에겐 "계원들과 온천간다."고 둘러대고 서울에서 공연을 했다. 공연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자 "온천 간다더니 어떻게 얼굴이 더 까칠해졌소" 하는 며느리한테 "물 뜨거워서 낯바닥 딜 뻔봤다."고 얼버무리며 '종기네 할머니'로 돌아갔다. 호남 제일의 춤 고수는 그렇게 한평생을 살았다.
장금도의 <민살풀이춤>
무심한 침묵 속에서 소매의 포물선이 깊다. 살짝 돌아설 때 간결하게 비치는, 저 허공에 그린 세월. 오늘날 춤은 일자 소매로 제 몸을 스스로 들추긴 하지만 <민살풀이춤>은 관능의 가장 먼 쪽에서 시선을 당긴다. 춤은 '드러냄'이 아니라 '드러남'인 것이다. (p.54)
사진 출처 : https://news.v.daum.net/v/20051010165817184
** 살풀이춤 : 살풀이는 무속의식에서 액(재앙)厄을 풀어낸다는 뜻인 곧 살煞을 푸는 춤으로, 무당이 나쁜 기운을 풀기 위해 추는 즉흥적인 춤을 말한다. 민살풀이춤은 전북 지역에서 수건 없이 추는 살풀이춤으로 예기들을 통해 전승됐다. (출처 : 위키백과)
책의 제목을 <노름마치>라 했다. 노름마치는 '놀다'의 놀음(노름)과 '마치다'의 마침(마치)이 결합된 말로 최고의 잽이(연주자)를 뜻하는 남사당패의 은어다. 곧 그가 나와 한판 놀면 뒤에 누가 나서는 것이 무의미해 결국 판을 맺어야 했다. 이렇게 놀음을 마치게 하는 고수중의 고수를 노름마치라 한다. 이 책에 출연하는 분들에게 가장 합당한 말이었다. (p.15)
이 책에 등장하는 '노름마치'들은 강호의 고수 중에 고수다. 천재중의 천재였고 피나는 노력으로 득도의 경지에 오른 사람들이다. 허공답보, 파천신공, 소요유, 수라기공, 천라지망을 자유자재로 구사한다. 하지만 진정한 무림의 고수가 그렇듯 은둔하며 살았다. 자신의 기재를 드러내기 꺼렸다. 이 책의 저자이자 전통 예술 기획자인 진옥섭이 노름마치들을 찾는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무공을 보기 위해, 그리고 그 무공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얼마전에 읽은 <지식인의 서재>에서 진옥섭을 처음 알았다. 책에 등장하는 노름마치들은 나같은 범인이 봐서는 그 경지의 끝을 알아차릴 수도 없는 분들이었지만, 진옥섭의 글은 몇 문장 읽지 않아 고수임을 단박에 알았다. 문장 하나하나가 날이 잘 선 명검이다. 글을 쓰고 그 글을 벼리기 위해 5년의 시간을 들였다고 한다. 내공이 자연스레 베여나오는 문장이다. 인생도처 유상수다.
김운태의 <자반뒤집기>
돌고 도는 순회 속에서 돌고 도는 회전이 생활이었다. 하루 세끼를 위해 하루 천 바퀴를 돌았다. 착지보다 체공이 더 안전한 순간이 될 때, 진정한 춤이 이뤄졌다. 보라 저 허공중천! 그만이 운행하는 항로다. (p.242)
사진 출처 : http://www.hani.co.kr/arti/PRINT/208945.html
문장원 <마지막 동래 한량>
춤동래민속관의 놀이마당을 걷다가 지팡이를 들어올리니 저절로 춤이다. 옛 동래의 풍류와 흥을 복원하는 것이 일생과업이었던 사람, '마지막 동래 한량'이란 수식어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부여받은 명무다. (p.118)
사진 출처 : http://m.ohmynews.com/NWS_Web/Mobile/img_pg.aspx?CNTN_CD=IA000620424&atcd=A0000408923
김수악의 <교방굿거리춤>
걷는 것은 두렵지만, 춤추는 것은 두렵지 않다. 오장육부의 감각이 음악으로 움직이는지라, '춤 들린 시간'이 된다. 혹은 춤이 사람을 빙의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p.396)
사진 출처 : http://www.thetimes.kr/mobile/article.html?no=38776
김유감의 <상산거리>
최영, 조선의 걸림돌이 조선 최고의 신이 되었다. 무장한 무녀 김유감이 나서는데, 한 걸음 한 걸음이 천근이다. 최영과 휘하의 천군만마가 함께 강림한 것 같은 묵직함. 후로 누구도 그리 못 출 전무후무한 춤. (p.302)
사진 출처 : http://m.blog.daum.net/jyc1379/6960639
심화영 <진작 좀 오지>
다 늦은 이제 와서 소리하고 춤추라고 한다. 머리 손질하는 것도 버겁다. 비녀를 찔러주는 외손녀 뒤에서 젊은 그가 묻는다. 여태 무얼 하고 이제야 찾느냐고. (p.86)
사진 출처 : http://m.ohmynews.com/NWS_Web/Mobile/img_pg.aspx?CNTN_CD=IA000620424&atcd=A0000408923
예기藝妓 : 장금도, 유금선, 심화영
남무男舞 : 문장원, 하용부, 김덕명
득음得音 : 정광수, 한승호, 한애순
유랑流浪 : 김운태, 공옥진, 강준섭
강신降神 : 김유감, 이상순, 김금화
풍류風流 : 이윤석, 정영만, 김수악
책에 실린 열여덟 분의 노름마치다. 이분들의 노래와 춤, 신명의 소리를 다 찾아볼 순 없어도, 책을 읽고 나면 곧 기억에서도 사라지겠지만, 이름만이라도 이렇게 적어보고 싶었다. 잊혀져 가는 저 분들을 일일이 만나 사라질뻔 했던 무공을 우리에게 들려준 저자 진옥섭에게도 고맙다.
** 하용부에 대해 검색을 하다 성폭행 의혹으로 무형문화재 자격이 박탈되었다는 기사를 읽었다. 고은도 이윤택도 다들 그 분야에서 공헌한 부분이 엄청난 인물들인데, 참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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