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슈비츠의 생생하고도 담담한 기록 : 프리모 레비 <이것이 인간인가>
...... 언제까지? 이런 질문을 하면 고참들은 웃는다.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이 수용소에 갓 들어왔음을 알아차린다. 그들은 웃기만 할 뿐 대답을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미래의 문제는 몇 달 전부터, 몇 년 전부터 빛을 잃었다. 눈앞의 급박하고 구체적인 문제 앞에서 먼 미래의 중요성은 모두 사라져버렸다. 눈이 오지 않을까? 부려놔야 할 석탄이 있을까? 오늘은 얼마나 먹을 수 있을까 하는 문제들 앞에서. (p.49)
그렇게 밤새도록 자다 깨고 악몽이 교차하는 가운데, 기상 시간을 가늠하거나 그것을 두려워하느라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다. '기상.' 따뜻한 담요가 만들어내는 몽환적인 경계, 잠이라는 튼튼한 갑옷, 고통스럽기도 한 밤으로의 탈출, 이 모든 것이 산산조각난다. 우리는 무자비하게 잠에서 깨어나 벌거벗고 연약한 상태에서 잔인하게 모욕에 노출된다. 이성적으로는 그 끝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긴, 다른 날과 똑같은 하루가 계속된다. 너무나 춥고 너무나 배고프고 너무나 힘이 들어 그 끝은 우리와 더 멀어진다. (p.94)
'이해하려 애쓰지 마라, 미래를 상상하지 마라, 모든 게 어떻게 언제 끝나게 될지 생각하며 괴로워하지 마라'는 게 우리의 지혜였다. '다른 사람에게 질문하지도, 스스로 자문하지도 말라'는 것이다. (p.179)
오늘은 바람이 불지 않는 게 그나마 다행이다. 이상하게도 인간은 어떻게 해서든 자신이 운이 좋다고 생각한다. 어떤 상황이, 어쩌면 아주 보잘것 없을 수도 있는 상황이 우리로 하여금 절망의 문턱을 넘지 않도록 해주고 계속 살아가게 해준다. 비가 오지만 바람이 불지 않는다. 혹은 비가 오고 바람이 분다. 하지만 오늘 저녁 내가 추가로 죽을 배급받을 차례라는 것을 안다. 혹은 상황이 더 안 좋아서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보통 때와 다름없이 배가 고프다. 그러면 정말로 바닥에 누워 있는 것 같을 때마다 종종 그렇듯 정말로 마음속에 고통과 지루함밖에 느껴지지 않는데,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좋다, 나는 내가 원한다면 언제라도 전류가 흐르는 철조망을 건드리거나 달리는 기차에 뛰어들 수 있다. 그러면 비는 끝이 날 것이다. (p201)
이탈리아 유대인 프레모 레비가 파시스트 민병대에게 체포된 것은 1943년 12월이다. 그의 나이 스물네 살이었다. 낯선 기차를 타고 대수롭지 않은 곳으로 이동한다. 종착지는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책은 이렇게 시작하고 그 첫 챕터의 제목은 바로 '여행'이다. 아우슈비츠의 수용소가 어떠한 곳이지 이미 알았음에도 그는 '여행'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는 수용소로 이송되던 1943년 12월부터 풀려난 1945년 1월까지 작가가 수용소 내에서의 경험이 담겨있는 책이다. 충격적인 증언과 끔찍한 사실에 비해 그의 문체는 침착하고 절제되고 밋밋하기까지 하다. 24살의 젊은 청년이 쓴 글이라고는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 예를 들자면 이렇다. '나와 같은 객차에 탔던 45명 중 다시 집으로 돌아간 사람은 네 명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 객차가 가장 운이 좋은 경우였다.' '우연히 객차의 이쪽 문으로 내린 사람은 수용소로 들어갔고 다른 쪽 문으로 내린 사람은 가스실로 향했다.'
저자는, 언어가 객관적일수록, 흥분하지 않을수록 읽는 사람들에게 신뢰를 준다고 믿었다. 그래서 수용소안에서 벌어졌던 만행들에 대해서도 결코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고 그저 담담하게 기술했다. 이 책의 챕터들도 여행, 입문, 우리의 밤, 노동, 맑은 날,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열흘간의 이야기 등이다. 마치 아무도 모르는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난 듯 한 제목들이다. 그의 의도?는 다분히 성공하여,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읽혔다.
프리모 레비의 최후는 자살이다.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라는 아우슈비츠의 경험에 대한 그의 사유와 성찰을 집대성한 역작을 출간한 지 1년 후의 일이다. 그 책에는 자신보다 더 관대하고, 더 섬세하고, 더 현명하고, 더 쓸모 있고, 더 자격 있는 사람 대신에 살아남았기에 부끄럽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고 했다. 수용소 이후의 삶이 어떠했는지 이 한 구절로 어렴풋하게나마 짐작이 가능하다. 꼭 살아남아 자신이 목격하고 참아낸 일들을 정확하게 이야기해야 한다는 의지로 힘든 삶을 잠시 유예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베를린에 있는 유대인 박물관이다. 사진은 비어있는 보이드로 비어있는 것 자체가 사라진 유대인을 상징한다. 쇠로 만든 사람 얼굴 형상의 오브제 1만여 개를 깔고 그 위를 걸을 때의 소리를 듣도록 유도했다. 그 소리가 무엇을 암시하는 것일까. 빈 공간을 채우는 그 소리에서 사람들은 무언가를 느낀다. (사진 출처 : ingrum.org)
PS 1.
인간의 존재 자체를 무시하거나 부정하는, 극한의 폭력을 가한 자들도 그저 평범한 인간이었다. 받은 명령을 충실하게 수행한 평범한 인간.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유죄가 '아무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런 인간을 히틀러는 양성했다. 아무 생각없이 명령만을 수행하는 인간은 여전히 세계 도처에서 활약중이며, 아우슈비츠의 참극에 버금가는 만행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자행되고 있다. 인간은 전혀 발전, 진화하지 않는 종족인가?
PS 2.
프리모 레비는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하는 이른바 '증언 문학'의 가장 중요한 작가라고 한다. 같은 전쟁을 치렀지만, 바다 건너 그들은 증언하고, 기록하고, 보존한다. 가해자도 피해자도 그렇다. 꼭 가보고 싶은 건축물 중의 하나인 베를린 유대인 박물관도 증언과 기록과 참회의 장소이다. 비유하자면 일본에 조선인 박물관이 있는 셈이다. 바다 이쪽은 그런 것이 없다. 위안부 할머니들부터 시작해서 수많은 피해자들이 많은 증언을 했지만, 묻혀지기 일쑤다.
PS 3.
책 표지 그림은 케테 콜비츠의 <죽은 아이를 안고 있는 어머니>다. 이 그림을 그리고 11년 뒤 그림의 모델인 아들이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전사했다. 자신의 다가올 운명을 그림으로 그렸던 것이다. "아무리 비참한 장면을 묘사해도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사랑을 잃지 않는다."고 서경석의 책에서 콜비츠가 말했다.
PS 4.
마음에 와닿는 구절을 서두에 적었다. 그 구절들이 절절히 나의 가슴을 비집고 들어오는 이유는, 나의 상황이 그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아우슈비츠랑 비교하는게 우습긴 하지만,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지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그 끝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길고 똑같은 하루가 계속된다고 했다. 나의 이 일상도 또한 지나가기는 하겠지만 그게 언제인지 알 수 없어 고통스럽다. 그는 그가 겪은 일들을 빠짐없이 글로 써서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야겠다는 의지로 버텼는데, 나도 그럴 수 있을까? 나는 어떤 의지를 버팀대로 삼아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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