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석헌 하면 우선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한다'가 떠오릅니다. 좁게는 자유당 독재를 비판한 글이지만, 실은 동족상잔의 한국전쟁을 겪고도 반성하지 않는 한국인 모두를 향한 외침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전쟁의 참화를 겪고서도 평화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이 있는 한, 이 외침은 언제까지나 유효하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철학사 p.769)
얼마 전에 전호근 선생이 쓴 <한국 철학사>를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삼국시대부터 현대까지 31분의 철학자들이 나오는데, 현대 편의 함석헌 선생에 대해 쓴 글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저도 위의 경구를 참 좋아합니다. 도자기에 적어 작품을 만들어서 공방에 전시해 두기도 했습니다.
함석헌 선생이 본 우리 역사는 책장을 찢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수난의 연속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역사 선생님이 된 걸 후회했다고 하죠. 사실 그대로의 역사를 가르치려니 학생들이 비참해 할 것 같고, 그렇다고 과장을 하자니 양심에 찔리고. 그럼에도 선생은 이런 우리 역사에 좌절하지 않고 당당하게 민족의 이상을 이야기했습니다. 이 부분이 특히 함석헌 선생의 탁월한 점이라고 전호근 선생이 말했습니다.
호기심에 책장에 있던 이 책을 슬그머니 꺼내들었습니다. 아쉽게도 내가 가지고 있는 선생의 책은 달랑 이거 하나 뿐입니다. 선생이 바라본 고난의 역사에 슬그머니 발을 담갔습니다.
우리는 큰 민족이 아니다. 중국이나 로마나 터키나 페르시아가 세웠던 것 같은 그런 큰 나라는 세워본 적이 없다. 또 여태껏 국제 무대에서 주역이 되어본 일도 없다. 애급이나 바빌론이나 인도나 그리스 같이 세계문화사에서 뛰어난 자랑거리를 가진 것도 없다. 피라미드 같은, 만리장성 같은, 굉장한 유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세계에 크게 공헌을 한 큰 발명도 없다. 인물이 있기는 하나 그 사람으로 인하여 세계 역사에 큰 변화가 생겼다고 할 만한 이도 없고, 사상이 없지 않으나 그것이 세계사조의 한 큰 주류가 되었다 할 만한 것은 없다.
그보다 있는 것은 압박이요, 부끄러움이요, 찢어지고 갈리짐이요, 잃고 떨어짐의 역사뿐이다. 공정한 눈으로 볼 때 더욱 그렇다. 그것은 참으로 견딜 수 없는 슬픔이다. (p.95)
이 민족이야말로 큰길가에 앉은 거지 처녀다. 수난의 여왕이다. 선물의 꽃바구니는 다 빼앗겨버리고, 분수 없는 왕후를 꿈꾼다고 비웃음을 당하고, 쓸데없는 고대에 애끓어 지친 역사다. 그래도 신랑 임금은 오고야 말 것이다. (p.110)
아니, 아무리 우리 역사가 고난의 역사라지만 '거지 처녀'라니, 거 너무한 거 아뇨? 선생님, 너무 막 빗대신 거 아닌가요?선생은 우리가 고난의 역사를 걷게 된 건 크게 두 가지 이유라고 합니다. 하나는 지리적으로 강대국 사이에 끼어 있어서 그렇고, 다른 하나는 자존감이 없고 심각성도 모르는 평화로운 민족의 기질 때문이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이라면 아니라고 맞대꾸라도 할텐데, 선생이 그렇다고 하니 반박할 수도 없고. 이거 참.....
책을 읽다 보니 여태 안 망하고 여기까지 온 게 신기할 정도입니다. 참 신랄하게 비판하십니다. 지금까지 버틴 건 그래도 민중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평소엔 병신처럼 살아도 나라의 어려움이 있으면 똘똘 뭉쳐 큰 힘을 만들어내는 백성의 힘요. 고난은 인생을 위대하게 만든다고 선생은 말씀하십니다. 고난을 겪음으로서 관대함이 생기고, 자유와 고귀를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인류의 역사는 모두 고난의 역사이며 고난에는 고난에는 그 뜻이 있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결국 이 고난을 극복할 운명이라는 거죠. 그냥은 안됩니다. 우리가 자각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백성이 스스로 생각해서 깨달아야 하고, 제대로 된 지성인의 활동이 필요하다고 강조하십니다.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경구는 우리가 고난을 이겨내기 위한 선생의 큰 가르침입니다.
선생은 1901년에 태어났고, 1919년 3.1 운동에 앞장섰고, 총독부 정책에 항거하다 서대문 형무소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해방 이후에는 이승만의 독재에 항거했고, 516 군사 쿠데타 세력에 맞서 끊임없이 싸웠습니다. 전두환 신군부와 투쟁했고 1987년 6월 항쟁에도 참여했습니다. 이토록 오랜 시간 동안, 이토록 일관되게, 지성인의 참 모습을 보여주신 분은 거의 유일하다시피 합니다. 고난의 우리 근현대사에 온 힘을 다해 몸과 마음을 부딪히며 사셨습니다. 선생의 삶은 울림 그 자체입니다.
호모 사피엔스 아닌가. 앞으로의 역사는 점점 더 지성의 역사가 될 것이다. 칼을 꺽고 생각을 깊이 하자.
책의 마지막 문장을 옮겼습니다. 일상의 아무리 비루해도 생각하며 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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