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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

우리는 왜 헤이그 특사 3인을 기억해야할까? : 김태웅, 김대호 <한국 근대사를 꿰뚫는 질문 29>

by Keaton Kim 2021. 6. 28.

 

 

1. 대원군의 쇄국정책은 진짜 망국의 원흉인가?

 

조선은 대원군이 물러나고 3년 뒤인 1876년에 문호를 개방했다(일본과 강화도조약을 맺었다). 중국이 1842년, 일본이 1854년에 개항했으니 그보다는 훨씬 늦은 것이 사실이다. 당시의 정세를 고려하면 대원군이 취했던 쇄국은 당연한 것이었다. 중국, 일본, 베트남 등 다른 나라들은 서양에 문을 열자마자 점령당하거나 불평등 조약을 맺었다.

 

그리고 개방을 한다고 해서 얻을 경제적 이익도 크지 않았다. 또한 당시 서원철폐, 경복궁 중건 등으로 양반 지배층과 백성들에게 원망의 대상이 되었다. 대내의 불만을 밖으로 돌리고자 서구 열강의 요구에 강력하게 대응하여 '서양 오랑캐'와 맞서는 것이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명분이 되었다.

 

요약하자면, 역사적으로 대원군의 쇄국은 당시의 정황상 당연한 선택이었다. 이 책에서는 그래서 쇄국이 망국의 원흉이라고 매도하는 건 옳지 않다고 말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좀 더 먼 미래를 보고 그들과 지혜롭게 협상하여 문호를 일찍 개방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진하게 남는다.

 

 

2. 1884년 갑신정변은 왜 삼일천하로 끝날 수밖에 없었나?

 

갑신정변은 개화파 청년들이 일으킨 쿠데타였다. 그 때까지 조선은 여전히 청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고, 이에 개화파 청년들이 일본 세력을 등에 업고 한판 뒤집기를 시도한 것이다. 당시 김옥균 33살, 홍영식 29살, 서광범 25살, 박영효 23살, 서재필 20살이었다.

 

일본에서 거액의 차관을 도입해 만성적인 재정 문제를 해결하고, 자신들이 개화 정책을 주도해서 나라를 한번 제대로 바꿔보겠다는 그들의 생각과 시도는 좋았다. 하지만 거기까지. 그들은 당시 힘있는 세력을 자기편으로 돌리는 데 미흡했고, 그들이 의지했던 일본 군대는 무능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개화에 호의적이지 않은 많은 일반 백성의 생각을 몰랐다.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쿠데타였다.

 

 

3. 1894년에 반봉건, 반외세를 외쳤던 농민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추구했던 세상은?

 

농민군은 자치 활동을 통해 그들이 이루고자 했던 세상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탐욕스러운 수령과 아전을 쫓아내고 무거운 조세를 낮추는 일, 부당한 고리대금을 탕감하고 대지주와 상인의 횡포를 다스리는 일, 양반층의 만행을 통제하고 하층민과 노비의 고충을 해결하는 일, 그리고 400년 넘게 여성의 삶을 옭아매고 있었던 과부의 결혼 금지법을 폐지함으로써 남녀 차별을 없애려고 했던 일 등, 지금도 쉽게 손을 대기 힘든 굵직굵직한 문제들이었다.

 

위키백과를 보면 '혁명은 계획적으로 모의되고 정권을 뒤집을 목적으로 시행되고 성공한 경우 혁명이라고 한다는 점에서도 동학난은 혁명이라고 부르는데는 문제가 있다. 동학은 고종의 무능과 양반과 탐관의 학정에 시달리던 농민의 항거였지 계획된 혁명은 아니었다.'라고 씌여있다. 나는 이 부분이 몹시 아쉽다. 동학보다 100년도 더 이전에 일어난 프랑스 혁명은 민중들이 왕과 왕비의 모가지를 잘랐는데.

 

녹두장군은 그때 세상을 뒤엎었어야 했다.

 

 

4. 1895년 일본은 왜 왕비를 노렸나?

 

한 국가의 왕비를 죽이는 일은 누가 보더라도 굉장한 리스크가 있다. 그럼에도 국제 외교에 영리한 일본이 이런 무리수를 둔 이유는, 역설적으로 명성왕후의 역할과 비중이 조선 정부 내에서 상당히 컸음을 의미한다. 당대의 조선 유학자들과 일본은 고종과 명성왕후의 관계를 대립적으로 설정해서 왕비과 왕권을 유린하며 국정을 농단했던 것으로 묘사했다. 명성왕후의 뮤지컬이 나오기 전까지는 이런 이미지가 강했다.

 

하지만 최근 연구에 따르면 명성왕후는 고종의 충실한 참모이자 유능한 외교관이었다고 한다. 명성왕후의 외교 전략은 열강의 세력균형 아래 조선의 독립을 유지한다는 것이었다. 먼 나라인 러시아를 끌어들여 가까운 나라인 청과 일본을 견제한다는 전략이었다. 오옷, 명성왕후의 재발견.

 

이사벨라 비숍 여사는 명성왕후를 이렇게 묘사했다. "눈빛은 차갑고 예리했으며 반짝이는 지성미를 풍기고 있었다. 나는 왕후의 우아하고 매력적인 예의범절과 사려 깊은 호의, 뛰어난 지성과 당당함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5. 고종은 현명한 군주인가 어리석은 군주인가?

 

우리에게 고종과 대한제국의 이미지는 어떻게 남아 있을까? 많은 한국인들이 고종에 대해서는 무능함을, 대한제국에 대해서는 무기력함을 떠올린다. 그 결정적인 이유는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기 때문일 것이다. '고종과 대한제국이 능력이 있었다면 일제가 국권을 빼앗을 수 있었겠는가'라는 의문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고조선이 멸망한 이후 한 번도 외세에 의해 나라가 망한 적이 없었던 우리 역사였기에 나름의 설득력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당시에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상황을 보면 국권을 상실하지 않은 경우가 오히려 특별한 경우였다. 아시아의 수많은 국가 중에서 식민지로 전락하지 않은 나라는 단 세 나라, 제국으로 부상한 일본, 반식민지 상태였던 중국, 그리고 영국과 프랑스의 중립지대로 독립을 유지했던 태국뿐이었다. 아시아의 모든 나라가 무지하고 무능하기에 국권을 상실한 것일까? 침략자의 야만적인 폭력은 사라지고 피해자의 무능만 강조되는 이 지점에서, 우리는 고종과 대한제국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래서 고종이 뭘 잘했는데? 라고 고쳐 물었더니 1897년 대한제국의 선포에서 1904년 러일전쟁 발발까지 6년 동안 광무개혁이라는 다양한 개혁을 추진했다고 책에 나와있다. 255페이지를 참조하면 되겠다.

 

 

7. 러일전쟁은 단순한 러시아와 일본의 전쟁이었나?

 

러일전쟁은 러시아와 일본, 두 나라만 싸운 것이 아니다. 영국과 미국은 일본 편에서 만주로 세력을 확대하려는 러시아를 저지하려 했고, 독일과 프랑스는 러시아를 지지하며 자국의 이익을 추구했다.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등의 서구 열강은 겉으로는 '중립'을 내세웠지만 뒤로는 각자의 이익을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해 전쟁에 영향을 미쳤다.러일전쟁은 유럽을 기준으로 서쪽부터 진행된 제국주의 침략이 이제 동쪽 끝 만주와 한반도에 이르러 러시아와 일본으노 나뉘어 표출된 대리전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러일전쟁은 러시아와 일본이 제대로 붙은 전쟁이다. 제물포와 뤼순 항에서 시작된 전쟁은 중국 펑톈으로 전장을 옮겼으며 마지막은 동해해전이다. 러시아 함대는 세상이 시작된 이래 어떤 군함도 시도한 적이 없던 항로, 즉 지구 둘레 4분의 3을 220일간 항해하여 동해에 다다랐다. 하지만 여기까지 오느라 너무 지쳤다. 결국 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 일본은 기고만장해졌으며 청과 조선이 자신들의 지배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8. 신민회는 왜 아직까지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을까?

 

애국계몽운동 단체 중에서 후대에 가장 주목을 받는 단체가 바로 신민회(1907~1911)이다. 안창호, 신채호, 양기탁, 이회영, 이동휘, 이승훈 등 쟁쟁한 인물들이 모두 이 단체에 가담해 가히 '독립운동 드림팀'이라고 할 만한 규모와 위상을 가졌다. 지금 우리는 신민회의 활약상을 잘 알고 있지만, 당시 사람들은 전혀 몰랐다. 철저한 비밀결사 조직이었다.

 

신민회는 LA에서 활동 중이었던 안창호와 공립협회에서 주도하여 만들었다. 미국에서 '대한신민회'를 만들었는데, 국내에도 함 만들어보자고 의기투합하여 안창호가 당시 대한매일신보의 주필이었던 양기탁에게 창립을 제안했고, 양기탁의 주선으로 여러 지도자들과 만나 신민회를 만들었다.

 

105인 사건으로 신민회가 발각되어 본래의 기능과 역할이 마비되었을 때 이회영을 비롯한 여러 신민회 회원들은 1911년 봄부터 만주의 삼원보에서 신한민촌을 건설하고 신흥강습소를 세우는 데 열을 올렸다. 신흥강습소는 훗날 전설의 '신흥무관학교'로 바뀐다. '신흥'이라는 이름은 '신민회가 다시 나라를 부흥시킨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9. 우리는 왜 헤이그 특사 3인을 기억해야 할까?

 

법조인 이준, 정치인 이상설, 외교관 이위종은 1907년 헤이그로 갔다. 하지만 만국평화회의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이준은 그 분을 이기지 못하고 사망했다. 이상설과 이위종은 영국과 미국의 여러 도시들을 돌면서 대한제국의 독립을 호소했다.

 

이상설은 1908년 미국에서 1년 남짓 머물면서 미주 한인 단체인 국민회 탄생에 기여했고, 1909년에는 중국과 러시아의 접경지대에 최초의 독립운동 기지라 할 수 있는 한흥동을 건설했다. 1911년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와 최재형, 홍범도와 함께 권업회를 창립하고 광복군 양성을 위해 사관학교를 운영했다. 1914년 대한광복군 정부를 세우 책임자가 되었고 중국으로 이동해 신한멱명당을 결성했다. 1917년 48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살아 있었더라면 임시정부의 대통령이 되었을 것 정도로 훌륭한 정치인의 삶을 살다 가셨다.

 

아관파천의 주역이자 당시 주러 한국 공사였던 이범진(일제 강제 병합의 소식을 듣고 자결하셨다)의 아들 이위종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항일운동을 하다 권업회에서 이상설과 독립운동을 펼쳤다. 이후의 행적은 뚜렷하지 않다. 러시아 측 자료에 따르면 '이위청'이라는 붉은 군대의 사령관이 모스크바에서 열린 집회에서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는 연설을 했다고 한다. 그 '이위청'이 '이위종'이지 않을까 추측한다고.

 

 

10. 석주 선생은 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대명사로 거론될까?

 

석주 이상룡 선생은 1858년 생이시다. 1911년 임청각을 비롯한 전 재산을 정리해서 일족을 이끌고 서간도로 향했을 때 선생의 나이 쉰셋이었다. 이전에는 명성왕후 시해와 단발령에 맞서 의병 활동을 했으며 학교를 세우고 인재 양성에 힘썼다. 서구의 사상을 공부하며 계몽주의자로 변신했을 당시의 나이가 쉰이었다. 서간도에서 경학사, 신흥강습소를 세워 독립군 양성에 앞장섰고, 임시정부 수립 이후 서로군정서가 조직되자 대표를 맡아 국내 진공 작전을 비롯한 무장 투쟁의 최전선에 나섰다.

 

선생은 자신의 연륜과 경험을 토대로 독립운동 단체의 대동단결을 위해 노력했다. 이승만의 위임통치안으로 임정이 분열되었을 때 각 독립운동 계열의 의견 조정과 단합에 발 벗고 나섰다. 결국 임정이 이승만을 탄핵하고 지도 체제를 대통령에서 국무령으로 바꾸었을 때, 선생이 초대 국무령을 맡은 것도 임정 통합을 위해서였다. 선생은 임정이 항일 무장 투쟁을 선도해 주기를 바랐지만 희망을 이루지 못했고, 서간도로 돌아와 죽는 순간까지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에 모든 힘을 쏟았다.

 

언젠가는 석주 선생의 임청각 군자정에서 한번 묵어볼거다. 꼭.  

 

 

11. 러시아 연해주에서의 독립운동은 왜 외면받았을까?

 

20세기 초 러시아 연해주 지역은 연인원 10만 명이 넘는 한국인이 의병 활동에 직간접적으로 참가했고 일본군과 무려 1700여 회 전투를 벌일 정도로 국외 독립운동의 핵심 기지였다. 안중근과 이범윤의 의병 부대가 연해주에 근거지를 투고 있었고, 헤이그 특사로 파견된 이상설과 이위종, 연해주의 자치 조직인 권업회를 이끌며 독립운동 자금 조달에 힘쓴 재력가 최재형, 이용익의 손자로 권업회와 한흥동 설립에 앞장섰던 이종호, 서전서숙과 신흥학교를 설립하고 대한광복군정부에서 활약했던 이동녕,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의 영웅이었던 홍범도, 북간도와 연해주를 오가며 민족 교육과 무장투쟁에 헌신했던 혁명가 이동휘, <권업신문>과 <근업신문>을 통해 민족 독립을 역설했던 언론인이자 역사학자였던 신채호와 장도빈, 일본 육사 출신으로 연해주에 망명해 '백마 탄 김장군'으로 불리며 항일 유격대를 이끈 김경천, 지금도 하바롭스크 거리에 자신의 이름을 남긴 한국인 항일 유격대의 영웅 김유천, 러시아 반혁명군과 일본군에 맞서 한국인 유격대로 큰 승리를 거둔 한창걸, 그리고 한국인 최초의 볼셰비키 당원이자 여성 혁명가였던 김알렉산드라 등 무수한 독립운동가와 혁명가들이 우리 근대사에 오래도록 간직될 업적을 연해주에서 남겼다.

 

그러나 그들이 활동했던 지역이 좌우 이념 대결의 적대 세력이었던 러시아였고, 그들 중 상당수가 사회주의자나 무정부주의자였기 때문에 그 놀라운 활약에 비해서 우리에게 알려진 바는 터무니없이 부족하다. 맞다. 쒸바. 그래서 저 사람들에 대한 공부를 더 할 작정이다.

 

 

12. 대한민국은 1919년에 건국되었다. 맞나?

 

당연하다. 대한민국이 임시정부의 수립과 함께 건국된 사실은 누구나 다 안다. 그래서 1948년 8월 15일에 새 정부를 수립해서 선포식을 열었을 때, 현수막에 '대한민국 건국'이라고 하지 않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라고 적었다. 그런데 이 당연하고 전혀 논란이 되지 않았던 상식이 2008년에 문제가 된다. 맹바기 아자씨가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일'로 정한 것이다. 그들의 주장은 임시정부가 국가를 구성하는 세 가지 요소인 영토, 국민, 주권을 갖추지 못했으며, 국민국가 여부를 판정 받을 수 있는 국제사회의 승인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건국의 시점을 1919년에서 1948년으로 굳이 옮기려는 세력의 의도는, 일제강점기의 역사를 부정해서 임시정부와 독립운동의 역사도 부정하고, 민족 통일을 끊어내려는 것, 그리고 이승만과 남한 단독 정부와 그 수혜자들을 높이려는 것이다. 그 수혜자들은 아직도 우리나라의 지배 계급으로 군림하고 있고, 나라를 똑바로 굴러가게 만들려고 하는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다.

 

 

 

 

위의 사진은 2년 전 유럽 여행 중에 헤이그(현재는 덴하그)에 있는 이준열사기념관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덴하그는 이 기념관에 가려고 방문했습니다. 기념관은 시내 한 중심에서 걸어서 갈 수 있는데요, 차이나타운 한쪽 주택가에 아무렇지도 않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들어서면 관장님이 반겨줍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는 가장 잘 보이는 데 걸려 있는 이준열사 유훈을 큰 소리를 낭독하게 합니다. 제가 갔을 때 꼬마 소녀가 읽었더랬는데, 낭랑한 목소리가 지금도 생생합니다. 

 

맨 아래의 건물 사진은 이준 열사가 그토록 들어가려고 했던 당시 만국평화회의장을 사용되었던 비넨호프 드 리더잘입니다. 문이 닫겨 있어 내부는 들어가보지 못했습니다만, 광장에서 꽤 오랫동안 저 건물을 바라보며 특사들의 안타까운 마음을 상상해보았습니다. 

 

당시에는 헤이그에 갈 일정이 안나와서 고민고민했더랬는데, 지나고 보니 가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헤이그에 간 덕분에 이준, 이상설, 이위종, 비넨호프 드 리더잘, 그리고 기념관과 유훈을 읽던 소녀, 이런 것들이 평생 기억에 남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