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사실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 곧 역사다 : 유시민 <역사의 역사>
2000년대 초반인가, 일본의 역사 교과서 문제로 떠들썩했던 적이 있다. 마침 일본에 살고 있을 시절이라 직접 문제의 후소샤扶桑社 교과서를 사서 읽어보았다. 내가 가진 짧은 일본어로 무엇이 문제인지 알아차리기는 힘들었다. 고대의 한반도 남부 일부가 일본의 땅이었고, 위안부 문제를 다루지 않았고, 임진왜란은 침략이 아니라 진출로 표기했고, 식민 지배가 울나라의 근대화에 기여했다, 뭐 이런 게 논쟁의 대상이 된 부분이라고 한다. 문제 맞네.
똑같은 역사적 사실을 두고 그네들과 우리가 해석한 결과는 이렇게 국제 문제로 이어질 만큼 다르다. 굳이 일본을 들먹일 필요 없이 우리 역사 속의 인물 해석도 그렇다. 연개소문, 김춘추와 김유신, 광해군, 흥선대원군, 그리고 최근의 박정희까지. 이들의 평가는 시대에 따라, 또는 평가자에 따라 거의 180도 달라지기도 한다.
연개소문은 쿠데타를 일으켜 당시 왕이었던 영류왕을 죽이고 왕의 조카를 데려다 허수아비 왕으로 앉혔는데 그가 고구려 마지막 왕인 보장왕이다. 연개소문은 스스로 막리지라는 직책을 가졌는데 총리 겸 군통수권자였다. 그렇게 독재의 권력을 휘두르며 고구려의 멸망을 당겼다..... 는 당시 연개소문과 적대적 관계에 있던 중국의 '춘추필법'과 신라의 기록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실제로는 당 태종과의 안시성 전투 때, 정예병 3만을 이끌고 열하 근처를 지나 직접 북경으로 쳐들어 갔으며 당 태종이 이 소식을 듣고 군사를 돌이키려 할 때 안시성의 고구려 군사들이 공격을 퍼부어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역사적으로 출중한 인물이었다.
이 책의 6장에서 신채호가 연개소문을 평하기를, 봉건 세습 호족 정치를 타파하여 정치권력을 집중시킨 혁명가이며 재능과 지략을 갖춘 인물이라 했다. 그리고 사대주의 노예의 좁쌀만한 시선으로 연개소문을 혹평한 것에 대해 크게 원통히 여긴다고 썼다.
참고로 연개소문의 큰 아들 이름은 연남생이다. 연개가 성, 소문이 이름이 아니라 연이 성이고 개소문이 이름 맞다.
사진 출처 : http://press.cnumedia.com/news/articleView.html?idxno=13205
이렇듯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은 역사가들이 어떻게 역사를 기록하고 평가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역사가들의 태도는 어떠할까? 두 개의 큰 줄기가 있다고 한다. 책의 구절을 살펴보면 이렇다.
사실을 다루는 역사가의 태도에는 두 극단이 있다. 하나는 역사의 교훈을 전하기 위해 깍을 것은 깍고 보탤 것은 보탠 공자의 '춘추필법'이고, 다른 하나는 사실 그 자체가 말하게 함으로써 과거를 '있었던 그대로' 보여준다는 '랑케필법'이다. 춘추필법은 역사가에게 해석이라는 칼로 사실을 난도질 할 권리를 주었다. 반면 랑케필법은 사실 앞에서 역사가를 무장 해제했다. (p.232)
랑케필법으로 다루어진 있었던 그대로의 사실을 읽고 각자가 나름대로 판단하여 자기만의 해석을 하면 가장 훌륭하겠지만, 누구나 그 정도의 능력을 갖춘다는 건 아주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역사가들이 평가한 것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기도 하고, 혹은 이건 아닌거 같은데 라며 고개를 흔들기도 한다. 저자는 그 역사를 쓰는 사람을 다음과 같이 나누기도 했다.
성실한 역사가는 사실을 수집해 검증하고 평가하며 중요한 역사의 사실을 정확하게 기록한다. 뛰어난 역사가는 사실들 사이의 관계를 탐색해 역사적 사건의 인과관계를 밝혀내며 사회 변화를 일으키는 동력과 역사 변화의 패턴 또는 역사법칙을 찾아낸다. 위대한 역사가는 의미 있는 역사적 사실로 엮은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독자의 내면과 인간과 사회와 자신의 삶에 대한 생각과 감정의 물결을 일으킨다. (p.16)
유시민의 <역사의 역사>는 인간이 역사에 대해 기록하기 시작해서 최근에 이르는 2500년의 시간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거나 역사 서술 방식에 큰 영향을 끼친 역사가와 그가 지은 역사서의 내용을 간략하게 보여주고 거기에 작가의 해석을 담았다. 그러면서 '역사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고자 했다. 저자가 이 책에서 다룬 역사가는 다음과 같다.
그리스와 페르시아 전쟁을 다룬 <역사>를 쓴 헤로도토스와 아테네와 페르시아와의 전쟁사인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쓴 투키디데스, 인류 역사를 통틀어 최고 역사서를 불리는 <사기>를 쓴 사마천, 최초의 인류사인 <역사서설>을 쓴 이븐 할둔, 과거를 평가하여 현재 사람들을 일깨우는 그런 역사서는 개나 줘버리고 나는 오직 과거를 있었던 그대로 보여주겠다고 말한 랑케, 지금까지의 모든 역사는 계급 투쟁의 역사라고 선언한 <마르크스>, 그리고 식민지 시대에 우리의 역사를 바로 세워 독립 운동의 의지를 불러일으키려 했던 박은식과 신채호, 백남운, 이젠 전설이 된 책 <역사란 무엇인가>의 저자 에드워드 H. 카, 그리고 토인비와 헌팅턴, 아주 최근의 제레드 다이아몬드와 유발 하라리....
이 위대한 역사가가 쓴 역사책에서 역사가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고 유시민 작가는 말하는데..... 그 실마리를 찾기 힘든 나같은 사람들을 위해 에드워드 H. 카가 정의한 말을 인용한다.
역사가와 역사의 사실은 서로에게 필수적이다. 사실을 가지지 못하면 역사가는 뿌리가 없는 존재가 된다. 역사가를 만나지 못하면 사실은 생명도 의미도 없다.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나의 첫 번째 대답은,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의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것이다. (p.235)
사실이라는 건 과거의 것이고 역사를 쓰는 사람은 현재의 사람이다. 그는 사실을 가져와 지금의 시대에 맞게 해석한다. 그것도 자신의 상황과 경험과 이념을 곁들여서 말이다. 그래서 바른 역사, 객관적인 역사 같은 건 없다. 사실을 보는 역사가의 시선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여기서 역사가라는 말을 '나'로 바꾸어도 된다. 아니 오히려 '나'로 바꿔야 한다. 역사란 과거의 사실과 나와의 끊임없는 대화이며 그것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다. 캬~
농업 혁명을 '인류 최대의 사기'라고 시원하게 사이다를 날려 주는 유발 하라리의 시선. 이쯤되면 만렙의 내공을 가졌다. 과학 혁명도 인류 최고의 구라다.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연개소문이 고구려 멸망의 원흉인지 민족의 영웅인지, 박정희가 위대한 영도자인지 무자비한 독재자인지 정도는 읽을 수 있는 시선을 가지고 싶다. 그 내공을 쌓기 위해 역사책을 읽는다. 아, 물론 재미있어서 읽는 거다.
'역사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학 그림이 있는 200억원 짜리 고려청자를 아시나요? 이충렬 <간송 전형필> (3) | 2020.10.01 |
---|---|
그는 왜 조선의용대의 영혼이라 불리는가 : 김영범 <의열단, 민족혁명당, 조선의용대의 영혼 윤세주> (0) | 2020.08.05 |
과거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하면 우리 시대 자체를 이해할 수 없다 : 이안 부루마 <0년> (0) | 2018.08.18 |
역사를 보고 읽는 즐거움, 그리고 기억해야 할 것 : EBS <역사e 4권, 5권> (0) | 2018.06.26 |
성큼 다가선 '한반도의 봄'을 위하여 : 강진웅 <주체의 나라 북한> (2) | 2018.04.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