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 그림이 있는 200억원 짜리 고려청자를 아시나요? : 이충렬 <간송 전형필>
청자 상감 운학문 매명, 고려시대(13세기 중기), 국보 제 68호, 가격 200억원
일명 '천학매병'이라고도 불린다. 청자의 가치를 대번에 알아차린 간송 선생이 속전속결로 일본인 거간꾼 마에다로부터 2만원에 구입했다. 당시 서울의 기와집 1채가 천원 정도 했다고. 그러니까 기와집 20채 값이다. 2020년 9월의 서울 평균 아파트 가격을 따져보니 10억 3천만원이다. 당시 2만원을 지금 시세로 환산하면 200억이다.
일본인 대수장가 무라카미가 간송 선생에게 산 가격의 두 배를 줄테니 다시 팔라고 했는데, 선생은 어림도 없다며 정중히 거절했다.
정선, <인곡유거>, 종이에 옅은 채색
간송 선생의 첫 수집품으로 한남서림 백두용으로부터 구득(샀다라는 표현을 수집가들은 이렇게 썼다)했다. 이후에 선생은 한남서림을 통째로 인수하여 문화재 구입의 본부로 삼았다.
위 그림은 '인왕산 골짜기 아늑한 집'이라는 뜻으로, 인왕산 아래 큰 버드나무가 있는 집에 선비가 책을 읽고 있는 그림이다. 겸재 이전의 그림에는 산도, 소도, 옷도 모두 중국풍이었는데, 겸재가 나타나서 우리나라의 산수를 제대로 그렸다. 이를 진경산수화라 부른다. 그런 의미에서 간송 선생은 겸재의 그림을 수집했다고 책에 나온다.
사진 출처 : https://blog.naver.com/goldenhill/110020400487
신윤복 <혜원전신첩> 중 <월하정인>, 종이에 채색, 신윤복의 풍속화 30점 250억원
'달빛 어두운 삼경, 두 사람의 마음은 두사람만 알리라.' 라고 적혀 있다. 삼경이면 밤 11시에서 새벽 1시인데 그 시각에 담장 옆에서 무슨 수작을 하는 걸까. 여인을 보는 남정네의 눈빛이 심상찮다. "오빠 믿지?" 뭐 이런 건가? 멀리 보이는 손톱달이 앙증맞다.
1934년 간송 선생이 오사카로 직접 건너가서 야마나카로부터 2만5천원(현재 가치로는 250억원)에 구입했다. 혜원 신윤복의 풍속화 30점이 담긴 화첩인데, 광복 후 조선시대 풍속화의 백미로 인정받아 <혜원진신첩>이라는 이름으로 국보 제135호로 지정되었다.
청자 상감 연지원앙문 정병, 12세기 후기, 국보 제66호
정병이란 물 가운데서도 가장 깨끗하고 정갈한 정수를 담아 부처님 앞에 바칠 때 사용하던 공양 의식구다. 이렇게 품격이 있는 정병은 매우 드물어, 왕실에서 부처님께 불공드릴 때 사용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영국의 개스비라는 고려청자 수집가가 저 자태에 반해 울나라까지 와서 사서 일본으로 가지고 갔다.
개스비가 영국으로 돌아갈 결심을 하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고려청자를 일괄로 매각했다. 선생은 인생 최대의 승부를 여기에 걸었다. 결국 개스비가 가지고 있던 청자 명품 20점을 현재의 돈 4천억원을 주고 샀다. 아무리 재산이 많다 하더라도 이 정도 거래를 하려면 배짱, 담력, 심미안, 신념 등이 최고 수준에 이르러야 가능했을텐데. 간송 선생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가져온 이 청자 20점 중 7점이 나중에 국보와 보물로 지정되었다.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금동 계미명 삼존불, 563년, 국보 제 72호, 가격 700억원
연꽃이 새겨진 연화대 위에 온화한 표정의 얼굴을 한 부처가 아래를 굽어보고 있다. 광배에는 하늘을 향한 구름이 가능하다. 광배 뒷편에는 돌아가신 아버지 조 귀인이 연꽃 세상으로 극락왕생하기를 바라는 자식들의 염원이 적혀 있다.
이 삼존불을 간송 선생은 김찬영에게서 7만원에 구입했다. 선생이 구입하지 않았다면 일본으로 넘어갔을 것이다. 현재 도쿄 박물관에 삼국시대와 고려시대 불상 48점이 있고, 일본 전체에서 공개된 불상은 200점이 넘는다. 비공개 개인 수장 및 사찰 수장까지 합하면 우리나라에 있는 불상보다 많을지 모른다고 한다.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금동 삼존 불감, 전체 높이 17.8cm, 불상 높이 9.7cm, 11세기, 국보 제73호, 가격 1200억원
불감佛龕은 불상을 모셔두는 방이나 집을 말한다. 한뼘 정도의 불감과 손가락보다 조금 더 큰 불상이다. 이렇게 작은 불감은 스님이 가지고 다니는 호신불이나, 개인이 모시던 작은 불상의 용도로 만들었다고 한다.
간송 선생은 이 작품을 이희섭에게서 구입했다. 이희섭은 국내의 문화재를 대량으로 일본인에게 파는 중개인이었다. 간송 선생과 함께 일하는 일본인 신보가 이 작품의 가치를 알아보고 구입할 것을 선생에게 권유하였으며, 선생은 신보를 믿고 이 일을 맡겼다. 신보는 일본인이었지만 문화재를 보는 안목이 탁월했고 간송 선생을 도와 우리 문화재를 지키는 노릇을 톡톡히 했다. 두 분 다 고맙다.
사진 출처 : https://blog.naver.com/ontheroads1/221422078291
훈민정음, 목판본, 국보 제70호, 유네스코 세계 기록유산, 가격은 매길 수 없음
간송 선생이 구입한 <훈민정음>은 한글을 만든 원리와 문자 상용에 대한 설명과 용례를 상세하게 밝힌 해례본이다. 그러니까 세종대왕이 새로 만든 글자 '훈민정음'을 반포하면서 이 글자는 요렇게 만들었고, 저렇게 사용하라고 하는 해설집이다.
선생이 이 책을 구입하는데는 김태준의 도움이 결정적이었다. 김태준은 한 시대를 풍미한 국문학자이자 사회주의자로, 경성콤그룹에서 활동했고 해방 이후에는 남로당 핵심 간부로 활동하다 검거되어 사형당했다.
간송 선생은 <훈민정음>을 자신이 수장하고 있던 수집품 중 최고의 보물로 여겼다. 한국전쟁 당시 피난을 갈 때도 품속에 품었고, 잘 때는 배개속에 넣고 지켰다.
사진 출처 : http://blog.daum.net/auddks/1293
보화각, 1942년 완공, 박길룡 설계
'빛나는 보배를 모아두는 집'이라는 의미의 보화각이다. 오세창이 이름을 지었다. 현재 간송미술관 건물이다. 1938년 상량식을 했고, 이후 4년에 걸친 공사 끝에 완성했다. 보화각 건물 자체도 보물이다.
적어도 100년은 갈 수 있는 튼튼하고 좋은 박물관을 지으려고 구상했고, 1933년 그의 나이 28살에 땅을 구입했다. 박물관을 지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문화재를 수장하려고 계획했던 것이 서른도 안된 청년의 머리에서 나왔다. 이 분 스케일 자체가 다르시다.
설계는 박길룡이 했다. 그는 최초의 조선인 건축가로, 조선총독부를 신축할 때 실무로 참여하였고 화신백화점 설계도 했다. 박길룡 건축사무소는 식민지 아래의 조선 건축가들의 활동 근거지였다. 박길룡은 보화각을 설계하면서 외부장식을 최대한 배제하고, 세련되고 우아한 형태의 설계를 추구했는데, 그래서 간송미술관도 외부 장식이 거의 없다. 딱 봐도 모더니즘 건축의 극치다.
사진 출처 : https://news.v.daum.net/v/20190314181030234
간송 전형필 (1906~1962)
사람들은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더러는 바보라고 여겼다. 고서화며 도자기를 사들이는 데 10만 석 재산을 쏟아부었으니 그럴 만했다. 사재를 털어 문화재 해외 유출을 막아낸 그는 국가와 후손에게 막대한 경제적 문화적 가치를 남겼다. (글 출처 : 다음백과)
책을 읽으며 선생이 수집한 보물들의 가치를 현재 시세로 따져보니 적어도 조 단위는 쉽게 뛰어넘을 것 같다. 요즘 회자되고 있는 훈민정음 해례본 책 하나만으로도 1조원이라고 하지 않나. 말년에 자신이 운영하던 보성학교에 재정 사고가 발생해서 그걸 갚느라 극심한 쪼들림에 시달렸는데, 자신이 가지고 있던 그림이나 도자기 몇 점만 팔아도 충분히 해결하고 남았을텐데 그러지 않고 끝까지 문화재를 지켜냈다고 한다. 존경스럽고 또 존경스럽다.
서울에서 혼자 직장 생활을 할 때였습니다. 시간을 내어 성북동에 가서 길상사도 둘러보고, 만해 선생의 심우장도 들러고, 상허 이태준 선생의 수연산방도 기웃거렸습니다. 볼 거리가 많았습니다. 근처에 있는 간송미술관에도 들렀으나 문이 닫겨 아쉬운 마음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당시에는 간송미술관에 이런 어마어마한 이야기가 담겨 있는지 몰랐습니다.
이 책은 작가의 상상력이 가미된 간송 선생의 평전입니다. 책을 읽을수록 간송 전형필 선생이 우러러 보였습니다. 일제강점기 시대라 독립운동을 하신 분만 공부했는데, 간송 선생은 다른 의미로 아주 훌륭한 독립운동가입니다. 존경스럽습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다른 방식으로 실천하셨습니다.
책은 식민치하에서 울나라 보물들을 수집하는 과정을 스릴 넘치게 보여줍니다. 일본인 수장가와의 거액 협상은 칼날 위를 걷는 듯 아슬아슬하고 위태롭습니다. 하지만 선생은 슬기롭게 위기를 넘깁니다. 마치 엄청난 무림 고수가 잘 드는 검을 휘두르는 장면 같습니다. 보물들이 혹시 일본인 손에 넘어가면 어떡하나 하고 가슴 졸이며 책을 읽었습니다.
간송 선생이 수장하고 있는 여러 보물들의 내력을 알게 되었습니다. 보물들이 좀 더 친숙하게 다가왔습니다. 천학매병 청자를 만나면 이제 간송 선생이 생각날 것 같습니다. 월탄 박종화, 위창 오세창, 한남서림의 백두용, 천태산인 김태준 등 선생의 곁에서 물심 양면으로 도움을 준 여러 인물들도 만날 수 있어 더 재미있었습니다. 박길룡이 정성을 들여 설계한 모더니즘 건축 보화각도 알게 되었습니다.
언젠가는 간송미술관에 가볼 날이 오겠지요. 훨씬 풍부해진 감성으로 선생의 혼이 담긴 보물들과 보화각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늦었지만 간송 전형필 선생을 알게 되어 반가웠고, 선생께 정중하게 고맙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네요.
'역사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가 방황할 때마다 역사책을 읽는 이유 : 최재성 <역사의 쓸모> (0) | 2021.06.30 |
---|---|
우리는 왜 헤이그 특사 3인을 기억해야할까? : 김태웅, 김대호 <한국 근대사를 꿰뚫는 질문 29> (0) | 2021.06.28 |
그는 왜 조선의용대의 영혼이라 불리는가 : 김영범 <의열단, 민족혁명당, 조선의용대의 영혼 윤세주> (0) | 2020.08.05 |
과거의 사실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 곧 역사다 : 유시민 <역사의 역사> (0) | 2018.08.25 |
과거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하면 우리 시대 자체를 이해할 수 없다 : 이안 부루마 <0년> (0) | 2018.08.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