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왜 조선의용대의 영혼이라 불리는가 : 김영범 <의열단, 민족혁명당, 조선의용대의 영혼 윤세주>
윤세주는 민족사의 가장 어둡고 괴로웠던 시대에 그 질곡을 걷어내는 독립운동과 민족혁명의 의열정신을 온몸에 담아내며 헌신한 인물이다. 중국 태항산 항일전장에서 전사 순국했다시피, 신념과 실천의 합일을 끝까지 추구하는 진정성의 인간이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그를 의열단, 민족혁명당, 조선의용대를 표상하는 불멸의 영혼으로 기억함이 마땅하다. (책 표지 글)
독립운동과 관련된 여러 책에서 윤세주라는 인물을 자주 만났습니다. 만나긴 했는데 인물의 모습이 단편적이었습니다. 윤태옥 선생의 <중국에서 만나는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윤세주의 무덤을 만났고, 조선희 선생의 <세 여자>에서 태항산 전투로 목숨을 잃는 윤세주를 만났습니다. 여기저기서 조금씩 언급되는 윤세주의 전체 모습이 궁금해졌습니다. 동네 책방을 어슬렁거리다 이 책을 맞닥뜨렸습니다. 얼른 가지고 왔습니다.
김원봉의 동네 후배, 의열단의 2인자, 태항산 화북전선에서 장렬히 전사한 항일 열사 정도가 여태 피상적으로 알고 있던 윤세주의 모습이었습니다. 만약 그 정도였다면 '조선의용대의 영혼'이라 불리지 않았겠죠. 어떤 인물이었기에 조선의용대의 영혼이라고까지 불리웠을까 궁금했습니다. 책을 다 읽고 난 윤세주의 모습은 독립운동가, 혁명가의 모델이었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고결한 혁명가 말이에요. 심지어 외롭고 안타까운 죽음까지도 그러했습니다.
1932년 김원봉이 남경에 조선혁명 간부학교를 만듭니다. 윤봉길 의사의 성공이 중국을 움직였습니다. 중국 정부가 한국의 독립운동을 도와주려고 나섰지요. 여기서 3년 동안 3기에 걸쳐 125명의 항일투사가 나왔습니다. 윤세주는 교관이 되어달라는 약산의 강권도 뿌리치고 1기 생도로 입교했습니다. 입교생들과 함께 호흡하겠다는 겸손과 헌신이 돋보입니다. 시인 이육사도 같은 기수의 학생이었습니다.
이육사와 윤세주는 영혼의 친구였던 것 같습니다. 이육사의 수필 <연인기>에서 자신의 사랑하는 물품(비취 인장)을 에스에게 주고 왔다고 썼는데, 그 에스가 윤세주였다고 합니다. '내가 바라던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이육사의 시 <청포도>의 한 구절입니다. 도진순 교수는 이 '손님'을 윤세주라고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아름다운 청년 윤세주와 이육사 모두 독립운동의 최전선에서 젊은 날에 생을 마감했으니 정녕 불꽃같은 삶이었습니다.
1941년 윤세주는 박효삼과 함께 조선의용대 주력를 이끌고 화북지역으로 북상하여 중국 혁명군 즉, 팔로군과 합세합니다. 국민당 지구에서의 활동에 회의가 들기도 했고, 혁명군과 합세하여 강력한 항일 운동을 전개할 목표도 있었습니다. 소규모 전투도 벌였습니다. 1942년 5월 일본은 4만여 병력을 동원하여 태항산에 있던 팔로군을 쓸어버리려고 했습니다. 이 공세에 맞서 싸우다 석정은 총탄을 맞고 전사합니다. 이 전투에서 중국 공산당의 핵심 간부였던 팽덕회와 등소평이 살아남은 건 조선의용대의 희생 덕분이었습니다. 중국 공산당도 그걸 잘 알기에, 이 전투에서 숨진 조선의용대의 장례식에 팔로군 총사령관 주덕이 추도사를 했습니다.
윤세주의 죽음 후에 화북의 조선의용대는 김원봉과의 연결 고리가 사실상 단절됩니다. 최창익과 김무정의 조선의용군이 됩니다. 윤세주가 살아있을 때의 조선의용대와는 성격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리고 해방 후 조선의용군은 북으로 가서 북한의 주력부대이자 한국전쟁의 선봉장이 되어버립니다. 아픈 역사의 슬픈 이야깁니다. 김원봉과 함께 남아있던 조선의용대도 약산의 뜻과는 무관하게 김구 측의 일방적인 결정에 의해 광복군으로 편입되었습니다. 김원봉의 활약은 이때부터 좀 무디어집니다. 약산은 석정을 잃음으로서 자신의 의지도 함께 날아가버렸다고 느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북성 한단시의 <진기로예 열사능원>에 있는 윤세주의 묘다. 석문촌에 돌로 만든 묘소도 있는데 그것도 멋지다. 중국에서 근무할 때, 안양이라는 곳에 중국 친구가 있어 놀러간 적이 있다. 은허 박물관을 비롯해 태항산 곳곳을 둘러보았다. 친구가 지역 명물이라며 토끼 고기를 사줬더랬다. 근데 이 안양이 윤세주의 묘가 있는 한단과 거의 붙어 있다. 그 때 윤세주에 대해 제대로 알았더라면 그의 묘소에도 가 볼 생각을 했을텐데. 내가 하는 일이 거의 이렇다.ㅠㅠ
사진 출처 : 윤태옥의 왕초일기 블로그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kimyto&logNo=220626131060&parentCategoryNo=&categoryNo=&viewDate=&isShowPopularPosts=false&from=postView
예전에 다녀왔던 밀양의 의열기념관. 그땐 김원봉과 박차정은 열심히 봤더랬다. 이젠 윤세주도 보인다. 김원봉과 함께 엮은 윤세주가 아니라 완전무결한 혁명가이자 독립운동가 윤세주가 눈에 들어온다.
의열기념관에 갔을 때 박차정의 무덤도 찾았다. 그리 멀지 않은 야산에 있었다. 친절하게 안내해 주는 표지판이 반가웠다. 저런 표지판도 좋지만 좀 더 간지나는 표지판을 나라에서 만들어야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도 들고. 누가 다녀갔던 흔적들에 안도했다. 수고하셨다고, 부디 잘 계시라고 말씀드렸다.
독립운동을 한 여러 인물들을 만나면 머리 속으로 그려지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이번에 만난 윤세주는 고결한 혁명가의 완벽한 모습이었습니다. 독립을 향한 의지, 의지를 실천하는 실행력, 정세를 정확하게 꿰뚫는 판단, 아래에서 헌신하는 자세, 고결한 죽음이 모두 아우러진 결정체입니다. 이제 독립운동가의 가장 이상적인 모습을 떠올리자면 바로 윤세주가 될 것 같습니다. 왜 조선의용대의 영혼이라 불리는 지 이제 잘 알겠습니다.
책을 덮으니 그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보고 싶네요. 밀양에 한번 더 다녀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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