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보고 읽는 즐거움, 그리고 기억해야 할 것 : EBS <역사e 4권, 5권>
1. 나라의 보물
국보 제7호 천안 봉선홍경사 갈기비. 유홍준이 문화유산답사기 남한강편에 나오는 비두리의 귀두도 이렇게 돌아보며 '잘있나?' 라고 물어보던데. 이 갈기비도 그렇네.
사진 출처 : http://choisinformation.tistory.com/437
보물 : 유형문화재 중에서 중요한 것
국보 : 보물 중에서 그 가치가 매우 높고 유례가 드문 것
국보를 10개만 알아보자. 5호까지는 외울 수 있다. 10개 다는 무린가?
국보 1호 : 서울 숭례문
국보 2호 : 서울 원각사지 10층 석탑
국보 3호 :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
국보 4호 : 여주 고달사지 승탑
국보 5호 : 보은 법주사 쌍사자 석등
국보 6호 :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
국보 7호 : 천안 봉선홍경사 갈기비
국보 8호 :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국보 9호 :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국보 10호 : 남원 실상사 백장암 삼층석탑
탑과 비석이 압도적으로 많네. 국보 10호까지를 기준으로 보면 탑이 4개, 비석이 3개, 승탑과 석등이 각각 1개, 건축물이 1개. 궁금해서 찾아보니 울나라 국보는 324개가 있고 그 중에 건축물은 24개다. 한창 국보 건축물으로 보러 다닐 때가 있었는데....ㅎ 추억이다. 앞서 본 것처럼 탑과 비석이 많고 항아리나 그림, 책도 있고 불상도 있네.
그러면 어떤 것이 국보가 될까. 국보의 조건으로는 1. 역사적 학술적 예술적 가치가 크거나 제작 연대가 오래되고 (국보 3호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 2. 그 시대를 대표하는 제작 기술이 우수하거나 형태 품질 용도가 특이하고 (국보 2호, 서울 원각사지 십층석탑), 3. 저명한 인물과 관련이 깊거나 그가 제작한 것 (국보 7호 천안 봉선홍경사 갈기비, 이 비석의 비문을 그 유명한 해동공자 최충이 썼다) 이라고 한다.
책에 따르면 해외로 유출된 우리 문화재는 156000여 점이고 그 중 일본이 가져간 우리 문화재는 조선 막사발(일본 국보 제 26호), 연지사 동종(일본 국보 제 78호), 안평대군이 꾼 꿈을 안견이 그린 몽유도원도 등을 포함하여 67700여 점이 있다고 한다. 언젠가 일본이 진짜 마음을 고쳐먹고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우리 문화재를 모두 돌려주는 기적이 일어난다면, 우리와 일본의 관계가 한방에 확실하게 형님 아우할 정도가 될텐데.....
2. 잃어버린 땅
저 멀리 보이는 땅이 지금의 녹둔도다.
사진 출처 : http://blog.daum.net/sundor10/8540453
조선 초기 세종의 북방 개척 이후
500여 년간 우리 영토로 기록된 사슴이 뛰어 노닐던 땅
녹둔도鹿屯島
백두산 천지에서 시작된 두만강 1300리의 물길을 굽이굽이 흘러 동해와 만나는 지점에 섬 하나가 있었다. 이 섬에는 수 많은 노루 떼를 볼 수 있어서 녹둔도라고 불렀다. 이 녹둔도는 세종이 적극적으로 북방 지역을 개척하여 두만강 하류 부근에 6진을 설치하는 과정에서 조선의 땅이 되었다. 이순신 장군이 주둔하기도 했으며 500여 년간 우리 영토로 기록되었다.
하지만 두만강의 본류가 좀 더 남쪽으로 흘러 녹둔도는 러시아 측으로 붙게 되었고, 이에 대해서 대한 제국 시절 고종도 실제 조사도 하고 국경을 명확히 하라는 지시를 내렸으나 나라가 망해가는 판국에 그깟 섬 하나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녹둔도는 러시아 땅으로 바뀌고 아름다운 한인마을이라는 뜻의 '크라스노예 셀로'라는 이름의 한인 정착촌이 된다. 이후 이 마을은 점점 켜져 1929년에 이르면 322농가 1883명의 대촌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1929년 중국의 만주 군벌과 소련 적군 사이에 동중철도를 둘러싸고 무력충돌이 발생하면서 소련이 중소 국경지역의 한인 마을들을 패쇄했고, 녹둔도의 한인들은 유랑에 나섰으며 1939년 스탈린 정권은 극동지역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다. 그 과정에서 연해주의 한인 정착촌들은 페허가 되었고 '크라스노예 셀로' 아름다운 한인 마을들도 역사 속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현재 녹둔도는 몇몇 고지대를 제외하고는 해수면이 조금만 불어나면 물이 차는 저지대로 사람이 거주하기는 어렵고, 러시아 군사기지 건설로 접근도 금지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면 녹둔도를 돌려받을 수 있을까? 간도와 더불어 장차 통일 한국이 되찾아야 할 미수복 영토라고 분연히 책에 써 있지만, 현실은 녹록해 보이지 않는다. 100년 이상 러시아의 영토였고, 무엇보다 우리나라의 힘이 녹둔도를 다시 가져올 만큼 강력하지 못하다. 영유권 분쟁의 결말은 항상 양육강식이다.
3. 몽골의 신의
울란바토르에 있는 이태준 선생 기념 공원
사진 출처 :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01087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
2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한 군인들을 추모하는 자이승 승전 기념탑
기념탑 앞에 특별한 공원이 있다.
울란바트로에서 가장 먼저 가야할 곳은 도심에서 3킬로미터 남쪽에 위치한 자이산 언덕이다. 이곳 꼭대기에 자리를 잡은 승전기념탑은 관광 명소일 뿐만 아니라 전망이 좋기로도 유명하다. 승전기념탑에 오르면 몽골 고원의 고도 1350미터에 자리를 잡은 '울란바토르(붉은 영웅)'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이곳에서 바로 아래를 내려다보면 몽골기와 함께 태극기가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바로 '이태준 기념 공원'이다. 몽골 정부가 공원 조성을 위한 땅 약 2000평을 내 놓았고 연세의료원, 몽골연세친선병원, 주 몽골 한국대사관이 중심이 되어 2001년 공원을 조성했다.
이태준은 1883년 경남 함안에서 태어나 세브란스병원의학교를 1911년(제2회) 졸업했다. 졸업과 동시에 독립운동에 뜻을 품고 중국으로 건너간다. 남경에서 개업하면서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을 모색하던 이태준은 1914년 울란바토르로 근거지를 옮겨 '동의의국'을 개원한다. 몽골에서 자금을 모으며 독립운동을 지원하던 이태준은 당시 몽공에 만연해 있던 성병 치료를 위해 근대식 의술을 펼쳐나가고 극락세계에서 강림한 여래불의 명성을 얻어 몽골의 마지막 황제의 주치의로도 활약한다.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에 저항하여 몽골까지 쫓겨온 러시아 백군이 1921년 울란바토르를 점령하고 갖은 살육과 약탈을 자행했다. 이태준은 몽골 주재 중국군 사령관 가오시린으로부터 몸을 피하라는 권유를 받지만 그는 남기로 결정한다. 그가 목숨을 걸고 울란바토르에 남은 이유를 반병률 교수의 논문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이태준은 자기에게 부과된 임무, 즉 모스크바에서 온 자금 중 일부인 4만 루블의 운송 책임과 의열단 단장 김원봉에게 폭탄 제조 기술을 가진 헝가리 사람을 소개하기로 한 약속을 완수하고자 가오시린의 동행 요구를 거부하명서까지 울란바토르에 남았다."
하지만 이태준은 끝내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고 백군에게 잡혀 결국 살해당했다. 그의 나이 불과 서른여덟이었다. 몽골의 대초원에 잠든 조선의 청년. 그는 이제 한국과 몽골 친선의 상징적 인물로 부활하고 있다.
(상기 글 인용 : 프레시안 기사. 위의 사진 출처 주소)
4. 학문의 놀이터
20세기 초입 외국 기자가 찍은 서당의 모습
책을 통해 지식뿐 아니라
예의범절과 도리를 가르쳤던 서당
서당에 입학하는 학동의 나이는 7~8살. 스무살 이상의 성인도 다닐 수 있었다. 좀 쪽팔렸겠지만 배우겠다는데야 뭐. 여자아이들은 공부를 한다고 해서 관직에 나간다거나 할 수가 있는 시절이 아니어서 여자에게 문자 교육을 시킬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여 그 수가 매우 적었다.
공부는 크게 강독과 습자, 제술로 이루어졌다. 글을 읽고 뜻을 밝히는 강독은 <천자문>으로 한자를 깨치고 <동몽선습>으로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사를 배웠다. <아희원람>은 김매기, 관혼상제, 민담 등의 서민 풍속을, <소학>으로 사람이 자켜야 할 기본 덕목과 예의범절을 배웠다. 습자는 한자를 쓰는 연습이고 제술은 시와 글을 짓는 것이다. 수학이고 영어고 그런 거 안배워도 되었다.
그러나 지금처럼 모든 아동들이 서당에 다니는 것은 아니었다. 서당의 주된 목적은 주로 양반 가문의 자제들이 향교나 4부학당에 진학하여 과거시험을 준비할 수 있도록 기초적인 학습을 받게 하고 향촌의 신분 질서를 유지시키는 일이었다. 가난한 평민과 노비의 자녀들은 서당에서 교육조차 받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17~18세기 농업과 상업이 발달하여 부유한 농민과 중인 계층이 직접 서당을 설립하여 신분을 가리지 않고 향촌의 자식들이면 누구나 비교적 자유롭게 초등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서당을 다니는 아이와 지금 학교를 다니는 아이와의 행복도를 비교해보면 어떨까? 일단 이전에 비해 지금은 배우는 과목이 압도적으로 많다. 성적에 대한 스트레스도 서당에 다니는 아이와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서당에서는 회초릴 맞았지만 학교에서는 빳다를 맞는다. 아, 요즘 빳다는 없어졌다. 단순하게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아무래도 요즘 아이들이 좀 더 힘들지 않을까. 적어도 그 시절엔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아이들이 있다는 얘기는 못들었다.
5. 어머니의 선물
장계향 유물전시관에 있는 장계향 두상
사진 출처 http://blog.daum.net/ddmzddmz/2440
아들아, 너희가 비록 글 잘한다는 소리가 들린다 해도
나는 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착한 행동 하나를 했다는 소리가 들리면
아주 즐거워하며 잊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1960년 한 종가집 서가에서 우연히 발견된 책 한 권. 이건 엄청난 보물이었다. 340여 년 전 한 여성이 남긴 양반가 주방의 비밀이 그 속에 있었다. 손님 접대용 146가지 요리법인 담긴 한글 최초의 요리서 <음식디미방>. 음식의 맛을 아는 방법이라는 뜻의 요리서인 '음식디미방'은 역사적 가치가 뛰어남은 물론 요리법을 현재도 따라할 수 있을 정도로 자세하고 과학적이다.
남녀의 역할이 엄격하게 구분되고 학문은 남자들만 하는 것이라 여겼던 17세기 조선,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올바른 길을 찾고, 진정한 교육을 실천한 여성이 있었으니, 바로 '음식디미방'의 저자 장계향이다. 조선사 500년을 통틀어 사대부 양반들이 최고의 호칭으로 여기는 '군자'로 불린 유일한 여성이다.
기근에 처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늘 곳간 문을 열어 굶주린 이웃을 돕고, 어려운 집에 양식꾸러미를 한밤중에 몰래 두고 오는 선행. 여중군자라 불리는 장계향은 많이 아는 것이 중요한게 아니라 선하게 살아야 함을 음식에 담아 실천했다. 자식에게도 참되고 올바른 교육을 실천한 장계향. 그녀가 자식에게 물려준 것은 바르고 착한 마음이었다.
(일부 글 인용 :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ebsstory&logNo=50194193589)
좀 찾아보니 경북 영양군 두들마을에 장계향 유물전시관이 있다. 그렇지. 책에서 이 정도로 칭송하는 인물인데 없을 리가. 사진으로 둘러보니 아주 잘 만들어 놓았다. 책에도 써 있지만 이런 분들이 주목받아야 하는 건 실천하는 삶을 사셨다는데 있다. 많이 배우고도 그걸 실제의 삶에서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이 당시에도 지금도 많다. 좀 멀긴 하지만, 시간을 내어 가 보리.
6. 승정원일기
승정원일기. 쓰고 지운 자국도 보이고 글도 무지 날려 썼다.
작성 기간 288년
3245책 2억 4300만 자
단일 서종으로는 시계에서 가장 방대한 책
지금의 속도라면 완역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약 1백 년이 될 것이다.
영조 : 세자는 글 읽는 것이 좋으냐? 싫으냐?
세자 : 사실 싫을 때가 많사옵니다.
영조 : (뭬~야! 그걸 말이라고 하고 있는 게야? 라고 호통을 치고 싶으나) 그러하냐? 네 말이 진실되니 내 마음이 기쁘구나.
영조와 아들인 장헌세자가 주고 받은 말인데 영화 <사도>에도 나오는 대사다. 승정원일기에도 이 비슷한 대사가 나온다. 승정원일기는 국왕이 무슨 말을 했는지, 신하들과 어떤 논의를 했는지, 그리고 상소와 같은 문건을 합쳐 그 날의 일기로 만들었다. 지금으로 치면 대통령 비서실인 창경궁 인정전 동쪽의 승정원에서 만들었으며 이 기록은 글을 날래쓰는 정7품 주서들이 작성했다. 오늘날로 치면 6급 주무관들이다.
요즘 같으면 노트북으로 재빨리 기록하겠지만 그 시절에는 그걸 다 붓으로 썼다. 미처 다 받아 적기 어려울 경우에는 메모를 했다가 기억을 살려 추가하기도 했다. 이렇게 하여 조선왕조실록의 다섯 배 분량이 되는 치밀하게 기록된 한 나라의 일기가 완성되었고, 나라의 문헌 중 이보다 나은 것이 없었다. 이렇게 기록된 승정원일기는 실록과는 달리 임금이 필요할 때면 언제든지 꺼내볼 수 있는 국정의 참고서 역할을 했다. (글 일부 인용 : 문화유산채널)
승정원일기를 번역하는 일은 1994년이 되어서야 시작되어 20여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번역된 분량은 전체 분량의 17퍼센트에 불과하다. 40여 명의 번역사가 매달려 이 일을 하고 있는데 전문을 완전하게 번역하는데 예상되는 기간은 약 100년이라고. 조금씩 예산이 늘고 있지만 승정원일기 외에도 번역의 손길을 기다리는 고전이 여전히 많다고 한다. 모든 번역이 끝나면 조선 왕들에 대한 우리가 몰랐던 새로운 이야기도 더욱 많이 나올 것이다.
7. 콩나물 팔던 여인의 죽음
사진 출처 : http://m.blog.daum.net/pis1117/5928
여자라서 천대받았던 조선 최고의 엘리트
그녀는 5개 국어에 능통한 한국 최초의 여성 경제학자였다.
1905년 경기도 여주 출생으로 당시 학교에 다니기도 힘들었던 여자의 신분으로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중국으로 유학까지 떠난 한국의 여인 최영숙. 그녀의 도전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공부를 위해 스웨덴으로 또다시 유학을 떠난다. 그리고 마침내 동양인 최초로 스톡홀름대학에서 정치경제학사 학위를 받은 한국 최초의 여성 경제학사가 된다.
유학을 마친 최영숙은 고국으로 돌아오며 당시엔 꿈도 꿀 수 없었던 세계여행까지 감행했고, 간디를 비롯한 저명한 지도자들과 교류하는 경험을 쌓는다. 5개 국어에 능통하며 국제 감각과 앤맥까지 갖춘 정통 엘리트였던 그녀는 가난한 고국을 위해 몸과 마음을 다 바치리라는 포부와 사명감으로 금의환향하였는데....
그러나 고국의 현실은 시궁창. 식민지 한국 사회 그 어디에도 인텔리 여성이 설 수 있는 자리는 없었다. 일자리를 찾지 못한 최영숙은 급기야 작은 점포를 빌려 콩나물, 배추 감자를 쌓아 놓고 팔기 시작했다. 하지만 가난은 나아지지 않았고 급기야 영양실조, 소화불량, 각기병으로 27년의 짧은 생을 마감한다.
요즘으로 치자면 도쿄대학을 나오고 와튼 스쿨에서 MBA를 땄는데 한국에서 일자를 구하지 못해 굶어 죽었다는 이야기다. 굳이 돌아오지 않아도 되었었는데.... 1920년대 말 식민지 조선의 상황이 조올라 어려웠다지만, 이게 말이 되냐구! 그럴수록 이런 인재는 더욱 중용해야지. 이건 한 개인의 손실뿐만 아니라 국가적으로도 아주 큰 소실이다. 90년이 지난 지금은 나아졌는가? 그 시기보다야 많이 나아졌지만, 아직도 OECD 국가 중에서 남녀임금격차 분야는 압도적 1위랜다. 갈 길이 아직 멀다.
8. 다시 돌아온 비운의 천재
세종대왕에 이어 우리 농업을 과학적이고
자주, 자립적인 단계로 도약시킨 이가 우장춘이다.
내 아버지는 조선말 개화파 무신 우범선입니다. 조선의 신분제에 불만을 품고 개화된 일본을 동경해 을미사변 때 급진개화파의 일원으로 활동하면서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적극적으로 가담했지요. 당시 훈련대 제 2대 대장으로 군인 동원의 총책임자였으며 황후의 소각된 시신 처리에도 가담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다가 아관파천 때 정세가 역전되자, 일본으로 도망쳐 일본 여인 사카이 나카와 결혼해 내가 태어났지요.
아버지는 내가 다섯 살 때 옛 동료의 칼에 죽임을 당해 기억도 희미합니다. 그 사실을 알고, 충격이 말할 수 없이 컸지만 내 아버지가 고국에 진 빚을 내가 대신 갚겠다는 결심을 굳혔습니다.
내가 귀국했을 때 한국은 전쟁 중이었고, 사람들은 헐벗고 굶주린 상황이었어요. 배추도, 감자도, 무도 제대로 된 게 없었어요. 농사를 지으려면 우선 종자가 필요한데, 식민치하에서 일본 종자만 수입해 쓰다가 해방 이후 여러 어려운 여건상 계속 수입에 의존할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나를 필요로 했겠지만, 우선 식량의 자급자족이 절실했지요. 그래서 나는 우리 토질에 맞고 잘 자랄 수 있는 우량종자를 개발하는 연구에 골몰했습니다. 그 결과 최단시간 내에 배추, 무, 고추, 오이, 양파, 토마토 등 20여 품종에서 우수 종자를 얻었습니다. 지금의 우리 식탁에 오르는 거의 모든 신토불이 채소들이 내가 개발한 것들입니다.
또 벼 이모장의 기틀도 마련했습니다. 병석에서 십이지궤양으로 죽어가면서도 좋은 벼를 얻고자 두 눈을 부릅뜨고 이삭을 관찰했습니다. 이모작 벼 품종 개발을 완성시키기 전에는 눈조차 감을 수 없었어요. 어디 그 뿐인가요? 세계에서 가장 맛 좋다는 제주도 감귤, 강원도 특산품인 감도도 내가 개발한 우량종자에서 태어난 녀석들이지요.
(상기 글 인용 : https://brunch.co.kr/@ljazz72/8)
부산에 가면 우장춘로라고 있다. 예전에 부산에서 일할 때 이 길을 통해 출퇴근 했더랬다. 다니면서 매일 우장춘 박사를 상기했으나, '씨 없는 수박'을 만든 사람, 그리고 우리 농업을 발전시킨 사람 정도의 인식이었다. 책에서 우장춘 박사의 아프고도 슬픈 가족사가 나왔다. 숨을 거두는 날까지 친일매국노라는 아버지의 그림자가 따라다녔다고 했다. 그리고 사망하기 직전 '대한민국 문화포장'을 받는다. 그는 "마침내 조국이 나를 인정했다"고 오열했다.
9. 2만 6천 5백 장
우리말 큰사전의 초고
사진 출처 : http://m.blog.daum.net/rhgid6483/8960723
만약 원고를 찾지 못했다면
최초의 <우리말 큰사전>은 또다시
수십 년이 흘러서야 발간되었을 것이다.
일제가 조선말이 아닌 일본어만을 국어로 쓰도록 강요했던 1942년 여름, 함흥의 한 여고생이 조선어로 대화하다 경찰에 체포되고, 이를 취조하다 조선어학회 소속 한글학자이자 우리말 사전을 편찬하고 있던 정태진이 그녀에게 민족정신을 수호해야 한다고 교육한 것이 발각되었다.
이를 계기로 일제는 1943년 4월까지 총 33인의 한글학자들을 체포했다. 조선어학회의 사전 편찬은 민족정신을 고취시킬 목적으로 한 독립운동으로 보고 '내란죄'를 적용한 것이다. 이른바 '조선어학회 사건'이다. 이극로, 최현배, 이희승, 이병기, 이인, 김법린, 정태진 등 16명은 감옥에 갇혔고 이 중 이윤재, 한징은 형무소 수감 중 옥사했다. 김두봉(연안파의 두목이자 북한의 부수상을 역임했던 그 김두봉 맞다)은 당시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어 체포를 면했다.
해방이 되어 풀려난 그들은 망연자실했다. 조선어학회를 재건하고 사전 출간을 재개했지만 1929년부터 1942년까지 오직 우리말글을 지키기 위해 14년간 전국을 돌며 손으로 써 모은 초고가 사라져 그 동안의 노력이 물거품이 될 상황이었다. 하지만 조선어학회로 걸려온 한 통의 전화. "여기 경성역 운송부 창곤데여, 함 와보셔여. 조선말을 풀이한 원고가 한 뭉테기 있어여"
이를 기초로 내용을 추가하고 수정한 끝에 1947년 한글날에 <조선말 큰사전 1권>을 을유문화사에서 출판하였고 1957년 총 6권으로 완간되었다. 꼭 28년이 걸렸다.
아주 우연히 <행복한 사전 The Great Passage>이라는 영화를 봤다. 일본은 원제는 <배를 엮다>였을 것이다. 어리버리한 남자 주인공이 나와서 사전 만드는 과정을 보여주는 영환데 (오다기리 조가 싸가지 없이 나온다), 무지 지루할 것 같은 이야기임에도 아주 아주 재미있게 봤다. 영화에서 사전 한 권을 만드는데 무려 15년이 걸렸다. <조선말 큰사전> 편을 읽으면서 그 영화 생각이 자꾸 났다. 그 시기엔 오죽 했으랴. 자료 검색하면서 우리말 큰사전 머리말을 읽게 되었다. 온갖 어려움을 뚫어내고 첫 권을 세상에 내놓았을 때의 그 가슴 벅참이 절절하게 표현되어 있었다.
10. 그 많던 술들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신윤복의 주거사배
일제강점기 전통 가양주(집에서 담근 술) 제조장 수의 변화
1916년 : 30만 개소
1929년 : 264 개소
1932년 : 1 개소
문 : 우리나라 술 가운데 유명한 것은 무엇이 있습니까?
답 : 가장 널리 퍼진 것은 평양의 감흥로니 소주에 단맛이 나는 재료를 넣고 홍곡으로 발그레한 빛을 낸 것입니다. 그 다음은 전주의 이강고니 뱃물과 생강즙과 꿀을 빚은 소주입니다. 그다음은 정읍의 죽력고니 푸른 대를 숯불 위에 얹어 뽑아낸 즙을 섞어서 고은 소주입니다. 이 세 가지가 전날에 전국적으로 유명한 것입니다. 이 밖에 금천의 두견주, 경성의 과하주처럼 부분적으로 또 시기적으로 좋게 치는 종류도 여기저기 꽤 많았으며 어느 집 무슨 술이라고 비전하는 법도 퍽 많았습니다마는 근래 시세에 밀려 대개 없어지는 것이 매우 안타깝습니다. (최남선의 <조선상식문답> 중에서, 5권 p.228)
북경에 가면 만리장성에 오르고 북경오리를 먹으며 이과두주를 마셔야 된다고 중국 친구가 그랬다. 북경에서 최고의 술은 이과두주다. 우리가 즐겨 마시는 고량주는 연길에 나는 게 특히 유명하고, 산서성에는 분주가 예로부터 알아주는 술이다. 강소성에 가면 몽지람, 천지람, 해지람이라는 술을 마신다. 남경법인에서 근무할 때 마눌이 놀러와서 이 술을 대접했더랬다.
울나라도 위에 인용한 글처럼 동네마다 자랑할 만한 술이 있었다고 한다. 그게 일제강점기 시절에 세금을 많이 거둬들일 목적으로 다 없애고 일본의 '주정'이라는 에탄올을 들여와 술을 만들게 했다. 일본넘들, 여러가지로 나쁘네. 다행히 최근들어 전통주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고 나라에서도 적극 장려한다. 지금은 전주의 이강주도 정읍의 죽력고도 모두 복원되어 조선 3대 명주를 지금 맛 볼 수 있다. 술을 좋아라 하는 울 마눌님이 들으면 당장 가자고 하실 것 같다.
'역사를 모르고서 우리의 미래를 말할 수 있는가' 라고 이 책 4권 프롤로그에서 정병설 교수가 강한 어조로 말하긴 했지만, 역사를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이 내 생활에 어떤 차이를 줄까? 라고 누가 물어보면 그에 대한 대답에 별로 자신이 없습니다. 역사를 모르는 이도 잘 살아가는 듯 합니다. 그럼에도 내가 역사책을 즐겨 읽는 이유는 재미있기 때문입니다. 소설이나 에세이보다 재미있습니다. 우리 선조들이 어떻게 살았나, 그들은 우리보다 행복했을까? 그 어려운 시절을 어떻게 버티며 보냈을까? 하는 생각으로 그들을 짚어보면 어느듯 역사속 인물과 사건이 내 곁에 와 있습니다.
갈기비의 귀두를 보며 슬며시 웃음짓기도 하고, 서당에서 글을 읽는 아이들과 우리 아이들을 비교해 보기도 하고, 이태준의 결기에 나도 모르게 주먹을 쥐고, 최영숙의 안타까운 죽음에 서글퍼집니다. 우장춘 박사의 슬픈 가족사를 알고 나니 박사가 더욱 빛나 보였으며, 옥살이를 하면서도 끝내 우리말 사전을 만들어낸 한글 학자들에게는 마음 속에서 박수를 보냈습니다. 시간을 내어 영양에 장계향을 만나러 가고 싶고 몽골에 가게 된다면 이태준의 묘소는 당연히 제일 먼저 갈 곳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옛 선조들을 생생하게 소환한다는 점에서 이 책은 더할 나위 없습니다. <역사채널e>의 영상에서 그들은 빛났으며, 그 영상의 보충자료로서의 이 책을 읽으면 역사에 대한 지적 호기심이 절로 충족이 됩니다. 보고 읽다 보면 '아, 이런 거는 꼭 기억해야겠다' 라고 하는 부분이 꼭 나옵니다. 그 대목을 옮겨보았습니다. 책에 나와 있는 내용을 굳이 많은 시간을 들여 블로그에 따로 정리한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잊어서는 안되는, 잊기에는 미안한 사실들을 기억 속에 좀 더 오래 붙잡아보려고 하는 제 나름의 안간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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