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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

신여성으로 살다가 객사한 여자 : 나혜석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

by Keaton Kim 2021. 7. 20.

 

김우영과 나혜석은 부부입니다. 우영이 혜석을 보고 한 눈에 반해 죽기로 따라다녔습니다. 우영은 혜석보다 열 살이나 많고 또 결혼도 한 번 했었습니다. 아내가 일찍 죽었죠. 하지만 혜석에게는 진심으로 사랑을 느꼈습니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면 백 번을 찍습니다. 그런 우영의 열정과 끈기에 혜석은 넘어가기 시작합니다. 혜석은 세 가지의 조건을 들어주면 결혼하겠다고 합니다. 그 조건은 다음과 같습니다.

 

일생을 두고 지금과 같이 나를 사랑해 주시오.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마시오.

시어머니와 전실 딸과는 벌거케 하여 주시오. (p.161)

 

이미 혜석에게 영혼을 뺏긴 우영은 무조건하고 응낙하였습니다. 부부가 되었죠. 그런데 예상치 못한 곳에서 사건이 터집니다. 프랑스에 살다가 우영은 독일로 떠나고 혜석은 파리에 남아 그림 공부를 계속하게 됩니다. 우영은 평소 친분이 있던 최린에게 아내를 돌봐달라고 부탁합니다. 네, 3.1운동을 성사시킨 장본인인 천도교의 그 최린입니다. 근데, 아뿔사, 혜석과 최린은 사랑하는 사이가 됩니다.

 

나중에 이 사실은 안 우영은 노발대발 난리가 났습니다. 당연히 혜석에게 이혼을 요구했지요. 하지만 혜석은 남편을 떠날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우영은 간통죄로 고소하겠다고 하며 혜석을 압박합니다. 혜석은 자신의 지난일을 사과하며 자식들을 봐서라고 이혼은 안된다고 저항해보지만 우영은 단호합니다. 결국 우영과 혜석은 이혼을 하게 됩니다. 혜석은 여기까지의 세세한 과정과 자신의 심정, 또 우영에게 바라는 것을 아주 자세하게 글로 썼습니다. 이 책의 <이혼 고백장 - 청구씨에게> 편입니다.

 

 

 

 

혜석은 먼저 최린과의 관계를 솔직하게 이야기합니다. 파리에서 함께 지내며 여러 곳을 놀러다녔고 정신적으로 통하는 면이 많았다고 했습니다. 혜석은 최린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나는 공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내 남편과 이혼은 아니하렵니다." 그는 내 등을 뚝뚝 두드리며, "과연 당신의 할 말이오. 나는 그 말에 만족하오." 하였사외다. 나는 제네바에서 어느 고국의 친구에게, "다른 남자나 여자와 좋아 지내면 반면으로 자기 남편이나 아내와 더 잘 지낼 수 있지요." 하였습니다. 그는 공명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생각이 있는 것은 필경 자기가 자기를 속이고 마는 것인 줄은 모르나 나는 결코 내 남편을 속이고 다른 남자, 즉 C(최린)를 사랑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었나이다. 오히려 남편에게 정이 두터워지리라고 믿었사외다. 구미 일반 남녀 부부 사이에 이러한 공공연한 비밀이 있는 것을 보고, 또 있는 것이 당연한 일이요, 중심되는 본부나 본처를 어찌 않는 범위 내의 행동은 죄도 아니요, 실수도 아니라 가장 진보된 사람에게 마땅히 있어야 할 감정이라고 생각합니다. (p.169)

 

이 일로 우영이 변합니다. 여론도 좋지 않습니다. 모든 게 혜석의 잘못으로 몰아갑니다. 혜석은 여성에게만 엄격한 잣대를 대는 자신의 남자와 조선의 남자들에게 일침을 놓습니다.

 

조선 남성의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 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고 합니다. 서양에나 동경 사람쯤 하더라도 내가 정조 관념이 없으면 남의 정조 관념이 없는 것을 이해하고 존경합니다. (p.200)

 

우영은 이제 이혼을 요구합니다. 가족들 앞에서 대놓고 이혼을 안하면 죽겠다고 하고, 서방질하는 것과는 절대 살 수 없다고 어깃장을 놓으니 혜석은 억울합니다. 우영이 너무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니까 혜석도 이렇게 말합니다.

 

하고 싶으면 합시다. 이러니저러니 여러 말할 것도 없고, 없는 허물도 잡아낼 것도 없소. 그러나 이 집은 내가 짓고 그림 판 돈도 들었고, 돈 버는 데 혼자 벌었다고도 할 수 없으니 전 재산을 반분합시다. (p.175)

 

혜석이 이렇게 나오니 우영이 옛다 하며 논 한 마지기 문서를 줍니다만, 혜석은 그걸 받을 내가 아니다며 던져버리지요. 혜석이 말을 저렇게 했지만 애초에 잘못은 자기에게 있으니 어떻게든 가정을 지키려고 애를 씁니다. 하지만 우영은 단호합니다. 이혼을 하지 않으면 고소하겠다는 우영의 협박에 혜석은 이렇게 답합니다.

 

남남끼리 합하는 것도 당연한 이치요, 떠나는 것도 당연한 이치나 우리는 서로 떠나지 못할 조건이 네 가지가 있소. 1은 팔십 노모가 계시니 불효요. 2는 자식 4남매요, 학령 아동인 만큼 보호해야 할 것이오. 3은 일 가정은 부부의 공동생활인 만치 생산도 공동으로 되었을 뿐 아니라 분리케 되는 동시는 마땅히 일가一家가 이가二 되는 생계가 있어야 할 것이오. 이것을 마련해 주는 것이 사람으로서의 의무가 아닐까 하오. 4는 우리 연령이 경험으로 보든지 시기로 보든지 순정, 즉 사랑으로만 산다는 것보다 이해와 의로 살아야 할 것이요, 내가 이미 사과하였고 내 동기가 전혀 악으로 된 것이 아니요, 또 씨의 요구대로 현처양모가 되리라. (p.179)

 

혜석의 사과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이혼을 하게 됩니다. 혜석은 결혼한지 10년이란 세월이 지나면 서로의 장단점을 잘 알고 그래서 서로 도와가며 살기를 희망한다고 적고, 일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걸 유감으로 생각하며 아래와 같이 글을 마무리합니다.

 

하여간 이상 몇 가지 주의로 이혼은 내 본의가 아니요, 씨의 강청이었나이다. 나는 무저항적으로 양보한 것이니 천만 번 생각해도 우리 처지로 우리 인격을 통일치 못하고 우리 생활이 통일치 못한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아울러 바라는 바는 여든 노모의 여생을 편하게 하고, 네 아이의 양육을 충분히 주의해 주시고 나머지는 씨의 건강을 바라나이다. (p.203)

 

 

나혜석과 남편 김우영. 사진 출처 : https://blog.naver.com/silver3700/20118256025

 

 

나혜석이란 이름이 가진 타이틀은 참 많습니다. 서양 유화를 그린 한국 최초의 여성 화가이자, 근대문학 최초의 여성 작가입니다. 100년 전에 만주와 유럽, 미주를 여행했고 거기서 공부도 했습니다. 신여성의 대명사입니다. 하지만 이혼 이후 몰락하여 객사한 여자로 기억되기도 합니다.

 

나혜석의 글을 읽고 생각을 읽었습니다. 권말에 추천의 글에서 이민경 작가가 말했듯이, 나혜석을 다른 사람의 글이 아닌 나혜석의 글을 통해서 알 수 있으니 참 행운입니다.<이혼 청구서>라는 글에서 이 부부의 속을 들여다봤습니다. 김우영의 입장을 들어본 건 아니지만, 김우영이 참 못났습니다. 어떻게든 다시 살아가려는 혜석을 뿌리쳤습니다. 이혼 이후 혜석의 활동에 대한 기록은 없다는 군요. 김우영이 나혜석을 거두어들였다면 더 많은 혜석의 글과 그림을 볼 수 있을텐데요.

 

정조는 도덕도 법률도 아무것도 아니요, 오직 취미다. 밥 먹고 싶을 때 밥 먹고, 떡 먹고 싶을 때 떡 먹는 거와 같이 임의 용지로 할 것이요, 결코 마음의 구속을 받을 것이 아니다. (p.210)

 

정조는 취미라니요, 지금도 논란의 대상이 될 만한 문장입니다. 책을 통해 근대 여성 지식인으로서 어떤 생각을 했고 어떤 활동을 했는지 잘 알 수 있었습니다. 당시 유럽을 경험하고 온 혜석의 눈에 보이는 조선 여성들의 낮은 의식과 지위는 딱해 보였을 겁니다. 여성들의 삶이 바뀌기 위해서는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여성 야학을 엽니다. 야학을 운영하면서 독립운동가 후원에도 힘을 기울입니다. 황옥 폭탄 사건에도 개입하고 의열단을 지원합니다. 제대로 독립운동을 했습니다. 책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된 사실입니다. 

 

나혜석은 객사했습니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곳에서 죽었으니 그의 말년이 불행했으리라 추측하는 건 당연합니다. 이민경 작가는 단호하게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혜석은 자신의 말에 공명할 이가 나타날 것이라고 했고, 이민경 작가가, 내가, 그리고 이 책을 읽는 이 모두가 혜석의 말을 알아들었습니다. 자신의 말에 공명할 존재에 대한 믿음만으로 혜석은 불행하지 않았습니다.

 

저도 그렇게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