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 날의 바람과 비 갠 날의 달 : 허균 <한국의 정원, 선비가 거닐던 세계>
사진 출처 : https://blog.naver.com/book-more/221230124439
중국 정원의 대부분은 석가산石假山을 쌓고 태호석太湖石으로 바위 풍경을 조성하는 등 대규모의 인위적인 공간이 주경主景을 이루고 있다. 중국의 대표적인 정원이라 할 수 있는 소주의 졸정원, 성도의 두보초당을 보면 대부분 분경식盆景式으로 꾸며져 있다. 전체 평면이 담으로 구분된 크고 작은 공간 속에서 여러가지 감상용 경물들을 진열해 놓고 있어 밀도 높은 배치 상태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정원 입구에 들어서도 정원의 경치가 잘 보이지 않게 되어 있다. 담장에 뚫린 몇 개의 문을 통과하고 나서야 비로소 태호석이나 가산, 연못이나 정자, 당 등으로 어우러진 본격적인 정원 경관이 시야에 들어오게 된다.
(중략) 이처럼 중국 정원은 다양한 조원 수법에 의해 감상의 묘미를 극대화시킨다. 결국 감상자의 시선 범위는 항상 일정한 공간 속에 머물게 마련이다. 중국의 정원을 그 주인에 의해 연출된 연국 무대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며, 수목이나 경물들은 연출가의 의도에 따라 선택되고 배치된 소도구에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은 인간의 의지에 앞서 자연 경관을 최대한 유지하는 한편, 차경借景의 원리를 이용하여 정원의 범위를 끝없이 확대해 나가려 한 우리나라의 조원 방식과는 확실히 다른 면모라 할 수 있다.
일본 정원의 구체적인 조원 수법을 보면, 연못 속에 여러 개의 작은 섬을 배치하여 소나무를 심고 못가에 소금 굽는 연기를 솟아오르게 하여 안개를 대신하며, 자연석을 활용할 때도 화폭에 경물을 배치하듯 완벽한 구도를 추구한다. 일본의 대표적인 전통 정원인 류안지龍安寺를 비롯한 대다수의 사찰 정원을 보면 왕모래와 암석을 이용하여 해상의 신선경神仙景을 연출하고 있는데, 이때 암석의 재질 크기 비례 등을 고려하여 암석간에 시각적 균형을 이루도록 배치하는 고산수枯山水(카레산스이) 기법을 쓰고 있다. 그 결과 정원의 경물들은 마치 한 폭의 그럼처럼 구성되어 있다.
(중략) 이와 달리 베르사유 궁전의 정원 등 유럽의 정원들은 영주의 위세를 떨치려는 무대로 꾸며진 것 같은 느낌이 강하다. 중국의 이화원과 피서산장, 일본 나고야성, 구마모토성 등 영주의 성의 정원도 이와 비슷한 인상을 풍긴다. 그러나 앞서 말했던 우리나라 궁원의 대표격인 창덕궁 후원을 보면 왕의 권력이나 위세를 과시하려는 부분은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실제로 창덕궁 후원의 전체적인 짜임새를 보면, 10만여 평의 정원이 온통 산지와 구릉으로 되어 있고, 그 중에서 인공으로 꾸며진 정사는 40여 동에 걸친 1천여 평에 불과하다. 정사가 점유하는 공간은 1퍼센트 정도밖에 되지 않는 셈이다. 그나마 그 규모가 작아서 주합루와 영화당을 제외한 대다수의 건물들은 우거진 숲속에 보일 듯 말 듯 묻혀 있다.
창덕궁 후원에는 권력자의 위세가 아니라 건축물과 숲이 인공과 자연의 조화 단계를 넘어 동화의 경지가 있을 뿐이다. (p.21~25)
소주(쑤조우)의 졸정원(조우젱위안)은 개인 정원이지만, 베이징의 이화원 즉, 황제의 정원과 비교될 정도의 걸작이다. 이화원과 청더의 피서산장, 그리고 유원과 더불어 중국 4대 정원이라 불린다. 떼놈들은 4대 천왕이니 이런거 무지 좋아한다. 상하이에서 가장 유명한 예원과 황제의 여름 별장인 피서산장은 가 보았으나, 그닥. 그닥인 이유는 중국답게 사람이 너무 많다. 졸정원도 그 아름다움을 느끼려면 새벽에 가야 할 듯. ㅋㅋㅋ
사진 출처 : http://www.visitchina.or.kr/theme/theme02.asp?Action=view&Title=1&idx=394
일본미의 상징 용안사의 석정이다. 유홍준 선생에 따르면 일본의 정원은 관조의 공간이다. 바라보며 아름답다고 느끼며 고요히 마음을 성찰하는 곳이다. 본디 그런 목적으로 만들었고 그렇게 쓰인다. 우리의 그것과는 근본이 다르다.
영화 '언어의 정원' 배경 장소였기도 했던 신쥬쿠교엔은, 내가 만난 일본 정원 중에서 가장 멋들어진 곳이다. 신혼 시절의 데이트 장소라 추억이 많기도 하지만, 신쥬쿠 도심 한 가운데 그토록 넓고 관리된 정원이라니. 잔디밭에 누워 높은 건물 꼭대기에 걸린 구름을 보며 놀던 그 시절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사진 출처 : http://emilymaclaurin.blogspot.kr/2011/03/ryoanji-temple-kyoto.html
그리고 베르사유 궁전의 정원이다. 유사 이래 가장 화려한 궁전과 가장 화려한 정원이라 불린다. 그래도 별루 안 궁금함. 시드니의 로얄 보태닉 가든에 가본 적이 있는데 그 정도 수준보다 더 할래나? 태양왕 루이 14세가 지었고 1682년에 왕궁이 파리에서 이리로 이사왔다. 귀족들과 맨날 파티만 열고(언제 반기를 들지 모를 넘들을 옆에 두어 감시하고 나약하게 하려고) 하다가 결국 1789년 프랑스 혁명의 불씨가 된다.
정원의 아름답기로 따지면야 세계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들어갈 창덕궁 후원 주합루와 그 앞의 정경이다. 봄이면 봄이라서, 여름은 여름이라, 가을은 가을이기 때문에, 겨울은 겨울이라서 더 멋진 풍경을 자아내는 곳이다. 우리네 정원은 다른 나라 정원과는 달리 사시사철 시시각가 변하면서 다른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창덕궁 후원은 이 책에서 소개하는 정원 중에서 단연코 아름다운 정원이다. 뭐, 임금님의 정원이니, 쩝.
정원이라 함은 한정된 부지에 미관이나 실용을 위해 풀, 꽃, 나무, 돌 등을 인공적으로 꾸민 장소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게 볼 게 없는 나라에서 이렇게 인공적으로 만들지, 우리나라는 좀 다른 것 같습니다. 물론 대궐같은 양반네 집 혹은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내려와서 맘 편히 공부나 할까 하고 지은 집에서는 이런 정원이 보이기는 합니다만, 소쇄원이나 우리네 정자를 보면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놓고 그것을 바라보며 자신의 정원이라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경치 좋은 곳에 자그마한 정자를 지어놓으면 그 앞의 풍경이 나의 정원이 되는 거지요.
낙향한 선비들이 자연을 벗삼아 공부나 할까 하고 지은 조그만 집을 별서라고 합니다. 조선 시대 벼슬하는 사람이 목숨과 같이 여겼던 것은 성리학이었습니다. "거친 밥을 먹고 물을 마시며 팔베개를 하고 누워 있어도 즐거움이 그 속에 있으며, 의롭지 않은 부와 귀는 나에게 하나의 뜬구름과 같다." 라고 논어 술이편에 공자가 말했는데요, 우리네 선비님들 또한 그러했습니다. 출처지의出處之義를 선비가 된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지은 별서는 아주 검소하게 구차함 없이 지었습니다. 우리네 선비들은 그곳에서 정신적 행복감을 느꼈습니다.
** 출처지의란 선비가 대부로서 세상에 나아가 관인에 있을 때는 나라와 백성을 위해 힘쓰지만, 세상이 자신의 이상을 받아주지 않으면 관직에서 물러나 처사의 입장에서 대의와 명분을 지키는 것을 말한다. (p.29)
우리나라의 이름난 별서정원을 꼽으라면 보통 영양의 서석지, 완도의 부용동, 그리고 담양의 소쇄원을 꼽는다. 서석지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아름드리 은행나무다. 공자의 학문을 배우는 곳을 행단杏壇이라 부르는데 은행나무 밑에서 강의를 많이 하셨나 보다. 정원의 은행나무는 공자를 기리는 뜻이다. 서석지는 돌연못인데 돌 하나하나에 다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그 돌에서 갓도 씻고(탁영) 발도 씻고(탁족) 그러면서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를 생각하며 은둔의 무료함을 즐기셨다.
사진 출처 : http://www.yysudal.kr/bbs/board.php?bo_table=02_1&wr_id=321&sca=&page=5
봉림대군의 과외 선생님이 되어 핵심 벼슬까지 한 윤선도가 이래저래 모함을 받아 고향으로 내려가던 중에 보길도의 부용동에 터를 잡아 자신의 정원을 만들었다. 사진에 보이는 세연지와 세연정 주변이 주요 정원이지만, 사실 정원의 끝이 분간이 잘 안된다. 어디까지가 만든 정원이고 어디까지가 자연 그대로의 정원인지. 우리 선비들은 정원을 만들어도 최대한 자연의 그것과 비슷하게 만들었다. 어느날 아내에게 세연정이나 함 다녀 올까? 했더니 갈비 먹으러?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 여편네가 진짜..... 동네 갈비집 이름도 세연정이다.
사진 출처 : https://www.youtube.com/watch?v=qUl7VOy7wOo
소쇄원의 두 건물 이름은 광풍각과 제월당이다. 광풍光風과 제월霽月은 "마음이 넓어 자질구레한 것에 거리끼지 아니하고 성격이 쾌할하고 맑고 깨끗하기가 맑은 날의 바람과 비 갠 날의 달과 같다."는 말(송사의 주돈이전)에서 나왔다. 소쇄도 '기운이 맑고 깨끗하고 시원하다'는 말이니 건축주 양산보가 구차함이 없게 산다는 것에 얼마나 매달렸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계절마다 가보았으나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다. 이런 글도 광풍각에 앉아 시원한 바람을 쐬면서 쓴다면 얼마나 충만된 글이 나올까.
사진 출처 : http://www.doopedia.co.kr/mo/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2&MAS_IDX=101013000834689
우리네 정원에는 네모낳게 연못을 파서 그 안에 동그란 섬을 두었다. 그 섬에는 소나무도 심고 목백일홍(배롱나무)도 심었다. 예로부터 내려오는 우주관 혹은 자연관인 '천원지방天圓地方(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을 보여준다. 궁궐의 기둥이 둥글고 백성의 집은 기둥이 사각인 이유도 이런 맥락이다. 함안군 칠원에 있는 무기연당舞沂蓮塘도 이런 정원의 대표격이다. 공자가 제자에게 머 할래? 라고 물었을 때 다른 제자들은 벼슬길에 나아간다고 대답했으나 오직 증점만이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 쐰다"고 대답한 고사에서 이름을 땄다. 건축주 주재성의 유유자적하며 살고자 하는 의중이 돋보인다.
사진 출처 : http://www.walkview.co.kr/3442
울나라에서 경치가 빼어나다 하는 곳에 가보면 어김없이 정자가 있습니다. 풍류를 제대로 아는 우리 선비들이 가만 있을 수 없었겠죠. 건축가의 기질을 마음껏 발휘합니다. 그러나 결코 화려하거나 우뚝 서 있지 않습니다. 그저 자연에 살포시 내려앉아 그도 자연이라 우길 정도의 검박한 건축물입니다. 그리고 그 정자에서 보는 주변의 풍광은 그대로 보는 이의 정원이 되는 겁니다. 자연 경관이 홀연이 정원으로 변화하는 것이죠. 이런 정원을 산수정원 혹은 임천정원이라 한댑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뒤통수를 제대로 맞았습니다. 이런 날로 먹는 우리 조상들의 슬기로움이란!! 역시나 선비들은 고수십니다.
무릇 정자라 함은 술 한 상 차려놓고 자연을 음미하면서 이쁜 언니들과 음양 조화의 기쁨을 나누는 곳이다. 그들도 사람일진대, 아마 그러려고 지었을 거다. 그런데 경북 예천에 있는 이 초간정은 그 목적이 사뭇 다르다. 초간 권문해 라는 냥반이 오로지 공부하기 위해 지은 정자다. 책 읽고 글 쓰려고 만들었다. 계류든 수목이든 돌이든 아무것도 손 대지 않고 다만 소박한 건물이 수줍게 앉은 느낌이다. 자연과 동화된 그 아름다움이란! 그럼에도 찾는 사람이 별로 없어 아주 한적하다. 정말 한 번 초간정에서 책 읽고 글 쓸란다. 안 될 것도 없다.
음풍농월吟風弄月이란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지. 바람을 음미하고 달을 희롱한다는 의미인데, 아름다운 자연의 경치를 노래하고 시를 지으며 즐긴다는 말이다. 요즘 같이 각박하고 바쁜 시간을 보내는 현대인들에게는 다가갈 수 없는 단어이기도 하다. 풍기의 금선계곡에 끝자락에 있는 금선대는 이 음풍농월에 딱 맞는 정자다. 음풍농월 잘 하라고 사방이 시원하게 뚫려 있다. 정조 시절에 풍기군수가, 이곳 출신이며 단양군수를 지낸 금계 황준량을 기려 만들었다. 퇴계의 제자였던 황준량은 이곳의 아름다움에 빠져 자신의 호를 금계로 지을 정도였다고. 음풍농월이 절실한 분들은 꼭 이곳에 가보시길.
사진 출처 : http://www.kyongbuk.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992468
무이구곡은 중국 복건성 무이산의 아홉 구비의 빼어난 경치를 일컫는 말인데, 충북 괴산의 화양동 계곡도 그 못지 않다고 해서 화양구곡이라 불린다. 조선 후기 서인 노론의 영수 우암 송시열이 이곳의 아름다움에 빠져 은거했는데 바로 암서재이다. 우암의 서재이자 사랑방이고 교실이며 도피처이다. 이 화양구곡에는 암서재 뿐 아니라 화양서원 터, 만동묘 터 등 우암과 관련된 곳이 많다. 암서재에서 보는 아름다운 화양동 계곡의 풍광이 바로 정원이 된다. 우암의 정원이자 우리 모두의 정원이다.
사진 출처 : http://blog.daum.net/sannasdas/13389896
정원에 유독 많이 보이는 나무와 꽃은 나름의 상징이 있다. 연꽃은 흙탕물에 꽃피는 군자의 꿋꿋함을 상징하며 세한삼우라 불리는 대나무 소나무 매화도 역시 그렇다. 담양에 있는 명옥헌 정원의 장관은 정자에서 바라보는 연못 일대의 경치인데, 명옥헌 주위는 목백일홍이라 불리는 배롱나무 천지다. 이 나무의 본디 이름은 자미목인데, 도교에서 말하는 선계의 자미탄과 관련이 있어 신선계의 나무로 여겨진다. 명옥헌 정자에서 활짝핀 배롱나무의 백일홍을 보자면 여기가 신선이 사는 곳이라 여길 정도로 그 풍광에 취한다.
사진 출처 : http://m.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9259044&memberNo=33804250
자연스럽다는 말은 거의 모든 우리 문화를 관통하는 말입니다. 우리의 전통 건축은 더욱 그러합니다. 그 전통 건축 안에 있는 정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원을 만들어도 최대한 안 만든 것처럼 보이게 하기, 혹은 자연 그대로를 나의 정원으로 가져오기 등의 수법은 우리네 정원만의 특징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정원을 만든 우리 선비들이 가지고 있는 철학과 사상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책에서 소개하는 우리네 전통 정원은 책만 읽어서는 결코 그 진가를 느낄 수 없습니다. 가서 직접 느껴야 합니다. 초간정에서는 계류에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책 읽고 글 써야 하고 창덕궁 후원에서는 임금이 된 듯한 기분으로 거닐어야 하고 소쇄원에서는 탁 트인 마루에 앉아 시원한 바람을 쐬야 합니다. 세연정에서는 갈비를 뜯으리.
봄바람이 불면 우리 딸 손 잡고 떠나 볼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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