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건축 이야기

건축은 사물이 아니라 사연이다 : 김소연 <경성의 건축가들>

by 개락당 대표 2018. 7. 7.

 

 

 

건축은 사물이 아니라 사연이다 : 김소연 <경성의 건축가들>

 

 

 

한국의 현대 건축가는 항상 김중업 김수근으로 시작합니다. 근데, 그 이전은 어땠을까요? 두 분 선생이 활동을 시작하는 시기가 1950년대이니 그 이전이라 함은 한국전쟁 이전, 일제강점기 시절이겠군요. 명동의 신세계 백화점 본점과 명동예술극장, 김구 선생이 살았던 집 경교장, 고대 연대 이대 등의 캠퍼스에 있는 아름다운 건축물들 등 이 시기에 지어진 건물을 아직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런 건축물을 설계한 건축가들은 누구일까요? 솔직히 하나도 안궁금합니다. ㅋ

 

 

 

궁금하진 않았지만, 요런 책이 한 권쯤은 있을 줄 알았습니다. 이 책을 만나는 순간, 나도 모르게 아~ 하는 탄식은 '역시 있었군! 그럴 줄 알았어'를 한마디로 표현한 겁니다. 전통과 현대의 사이에 있는, 특히나 우리나라는 그 시절이 일제의 치하에 있어서 더 요상해진, 근대건축물에 대한 평가는 요즘들어 달라지고 있습니다. 낡고 쓸모없는 건축이라는 생각에서 우리의 역사가 녹아있는 건축물로 보는 경향이 두드러집니다. 근대건축물에 대한 책도 여러 권 나왔구요.

 

 

 

이 책은 식민지 시대의 근대 건축을 만든 사람들 이야기입니다. 저항과 타협의 시대에 자신의 작품을 만들었던 사람들은 과연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1. 박길룡 1898~1943

 

 

 

1937년 11월, 종로 네거리에 준공된 건물은 당당하고 묵직했다. 서양 고전주의 양식을 철근콘크리트 구조로 지은 지하1층 지상6층 건물이었다. 화강석을 두른 1층 쇼윈도 앞은 구경꾼으로 북적댔다. 대리석 출입구는 모던 보이와 모던 걸이 팔랑거리며 드나들었다. 5층까지 쭉 뻗은 기둥은 그리스 기둥을 사각 틀에 넣고 납작하게 눌러놓은 듯 했다. 기둥 사이로 촘촘하게 들어간 좁고 긴 창문 때문에 건물은 더 높아 보였다. 6층은 간결한 아치와 처마장식으로 변화를 주었다. (p.27)

 

 

 

 

조선인 최초의 건축기사 박길룡이 설계한 화신백화점. 건축주는 그 유명한 반민특위가 발족하자마자 체포 대상 1호로 잡힌 친일 기업인 박흥식이다.

 

화신백화점의 수명은 딱 50년이었다. 위의 인용문처럼 1937년에 그 위용도 당당하게 탄생하였으나 1987년 수명이 다해 쓰러진다. (건축은 그림이나 문학, 음악 등의 다른 예술 작품에 비해 수명이 너무 짧다.... 고 생각한다). 그 자리에 세워진 건축물이 종로타워다. (이 건물을 첨 봤을 때 진심 마징가제트가 나오지 않을까 하고 상상했더랬다)

 

사진 출처 : http://ibooklove.dothome.co.kr/zbxe/506464

 

 

 

 

1910년부터 경복궁 전각들이 헐려 나가기 시작해서 정전인 근정전과 경회루를 비롯한 일부 건물을 제외하고는 거의 폐허 수준이 되었고, 일제는 거기에 총독부 청사를 건립했다. 조선 지배가 평생을 갈 거라고 생각한 일제가 졸라 튼튼하게 잘 지었다는 설이....   1926년 완공되었고 1995년 역사 바로 세우기의 일환으로 영삼이 아재가 철거했다. 사진은 철거 바로 직전의 모습니다.

 

철거 당시 논란이 많았다. 보존해야 된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많았고. 중앙청으로 존재한 기간이 총독부 청사로 존재한 기간보다 길어서 우리의 역사가 담긴 상징성이 높은 건물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개인적인 의견은, 돈과 시간이 좀 들이더라도 다른 곳으로 이전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다. 아픈 역사도 역사다. 그 아픈 역사를 담은 실물의 건물을 보고 싶다.

 

사진 출처 : http://photo.heraldcorp.com/ptview.php?ud=20150223112710AUI2774_20150223113650_01.jpg

 

 

 

박길룡은 당시 건축 실무자를 가장 많이 배출한, 지금의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자리에 었던 '경성공업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총독부에 입사하여 당시 시공 중이던 조선총독부 청사 신축공사에 실무자로 참여했습니다. 조선인 최초로 최고기술자인 기사에 오르고 일제강점기에 건축사무소를 최초로 개업한 조선인도 그였습니다.

 

 

 

박길룡이 조선총독부 공사에 참여했다는 사실은 1996년 중앙돔을 해체했을 때 동판 상량문이 발견되었는데, 거기에 건축 기술자 53명의 명단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박길룡은 조선인으로서는 유일하게 포함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기술자로서 인정을 받았다는 얘기가 되겠죠. 그의 대표작으로 우리가 지금 볼 수 있는 건물은, 경성제국대학 본관이었고 해방 후 서울대학교 본관으로 사용되었던 대학로 '예술가의 집'이 있습니다.

 

 

 

강점기 시절 박길룡건축사무소는 언제나 조선인 건축가로 붐볐습니다. 선후배 건축가들이 함께 모여 건축책과 건축신문을 발행했습니다. 새로운 건축에 대한 토론도 활발했겠죠. 당시 박길룡건축사무소는 박길룡의 일터였을뿐만 아니라 식민지 조선 건축가들이 모여서 활동하는 근거지였습니다. 저자가 생각하는 박길룡의 최고 업적은 '최초'와 '유일'의 영향력으로 차별받던 조선인 건축가를 넉넉하게 품은 바로 이런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2. 박동진 (1899~1980)

 

 

 

젊은 건축가(박동진)와 건축주(김성수)는 의기투합했다. 두 사람은 안암동의 학교 터를 함께 물색했고, 김성수의 자택에 설계실을 차려 보성전문학교 본관 설계에 매달렸다. 그들은 건축 재료부터 정했다. 민족학교니만큼 강인하고 영구적인 외관을 원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화강석이었다. 화강석은 박동진이 비판해온 전통건축의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재료였고, 조선에서 풍부하게 산출되기에 박동진이 주장했던 풍토성과도 맞아떨어졌다. (p.53)

 

 

 

 

박동진의 대표작인 보성전문학교(지금은 고려대학교) 본관. 지금 봐도 폼난다. 고등학교 촌놈이 서울에 와서 저 건물을 보고 받았던 감동이란. 대학교 건물은 이래야지 하고 생각했더랬다. 그 당시 지어진 대학교 건물들은 대개가 고딕풍의 화강석 외양이다. 아마도 그 시절의 유행이지 싶다.

 

박동진이 생각한는 이상적인 건축은, 그 시대 대부분의 건축가가 그랬겠지만, '전통과 인습에 반항하는' 모더니즘 건축이었다. 하지만 위의 건물은 모더니즘 건축이 아니다. 적어도 외관상으로는 전근대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일제가 조선에서 사용하지 않았던 고딕 양식, 철근콘크리트라는 근대적 건축 기술, '완자 쌓기'라는 전통 요소, 화강석이라는 지역성이 결합된, 마치 제국과 식민지, 서양과 조선, 전통과 근대에 대한 건축가의 혼종적인 내면세계의 표출이라고 저자는 썼다.

 

사진 출처 : https://www.flickr.com/photos/cc_photoshare/10753642995

 

 

 

박동진 역시 경성공업전문학교 출신이었습니다. 하지만 재학 중 3.1 운동에 연루되어 투옥이 되었다가 풀려나 만주와 시베리아를 떠돌았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박동진의 고향은 평안북도 정주, 민족교육으로 유명한 오산학교 출신입니다. 부친은 오산학교 교장을 지낸 분이었습니다. 조선으로 돌아와 재입학하게 되고 졸업 후에는 총독부에 취직해서 실력을 닦았습니다.

 

 

 

그의 대표작은 현 고려대학교의 여러 건물입니다. 미국의 듀크대학교 도서관을 참고하여 지은 도서관, 그리고 서관 및 대강당 등이 있습니다. 건축주인 김성수는 격동의 시대에 박동진의 안정적인 후원자였다고 하네요. 그의 작품들은 지금 봐도 여전히 멋집니다. 가장 아름다운 대학 캠퍼스 중의 하나입니다.

 

 

 

3. 강윤 (1899~1975)

 

 

 

강윤이 귀국한 해는 1933년이다. 10월의 찬바람을 맞으며 처음 부관연락선을 탄 지 13년이 흐른 뒤였다. 그동안 강윤은 간사이공학전수학교(현재 오사카공업대학) 건축과를 졸업했고, 보리스건축사무소의 핵심 멤버로 성장했다. 귀국 당시 강윤이 맡은 일은 이화여전 캠퍼스사업의 현장감독이었다. 정동에서 신촌으로 옮긴 이화여전의 새 캠퍼스 조성 계획은 대규모였고, 자연스럽게 선교 관계자들의 관심거리가 되었다. (p. 68)

 

 

 

 

1935년 완공된 이화여대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 본관(파이퍼홀). 설계는 보리스건축사무소에서 맡았고 이 회사의 한국인 건축가 강윤이 감독했다. 건물의 이름은 기부자인 파이퍼 여사를 기념하기 위해 붙여진 것이다.

 

건물은 중세 교회를 연상시키기도 하는데, 석재 외관이 역시나 품위가 있다. 서양의 전통적인 석조 기법인 '애슐라 쌓기'가 사용되었다고 하는데 자세히 봐도 잘 모르겠다. 보리스건축사무소의 작품은 꽤 많다. 대구에 가면 계성고등학교라고 역사가 오래된 명문학교가 있는데, 이 학교의 아주 기품있는 본관도 윌리엄 보리스가 설계한 건물이다.

 

사진 출처 :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3o7g&articleno=15855701&categoryId=217302&regdt=20090321151220

 

 

 

 

강윤이 가장 애착을 가졌던 건물이라고 책에 소개된 태화사회관. 이 건물의 터에는 원래 순화궁이 있었다. 순화궁은 이완용이 물려 받아 한때 자기 집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그러다 이름을 태화관으로 바꾸고 요리집으로 사용했다. 민족대표들이 모여 3.1 운동 독립선언문서를 낭독하고 잡혀간 장소가 여기다.

 

자신도 3.1 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경험이 있는 이 자리에 새로운 건물을 자신의 손으로 짓는다는 것이 강윤에게는 꽤 남달랐을 것이다. 그는 여기에 한옥과 서양식을 절충하여 태화사회관을 지었다. 한때 총독부에서 이 건물을 종로경찰서로 사용해 개조 및 보수를 강윤에게 요구하였으나 강윤을 거부했다고 한다.

 

이 건물도 이젠 사진으로만 볼 수 있다. 1980년 헐렸고 그 자리엔 태화빌딩이 서 있다. 빌딩 주위에 순화궁 터라는 자그마한 표지가 있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자리라는 기념비가 서 있다. 그걸로 이전의 이 파란만장한 내력을 다 읽기엔 역시나 무리다.

 

사진 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219698&CMPT_CD=P0001

 

 

 

강윤은 공주의 영명학교 출신인데 그 역시 3.1 운동이 발발하자 독립만세를 외칩니다. 옥고를 치르고 나오자 당시 윌리엄스 교장이 윌리엄 보리스에게 소개합니다. 보리스는 당시 일본 시가현의 오미하지만(벚꽃이 아름다운 일본스러운 한적한 소도시다)에서 건축사무소를 운영하고 있었고 강윤은 거기서 망명 아닌 망명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귀국하여 보리스건축사무소 경성출장소 일원으로 교회, 학교, 병원 등 선교 관련 건축을 많이 진행했습니다. 사후 27년 뒤인 2002년에 독립운동 공훈으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고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고 합니다. 이화여대의 멋드러진 캠퍼스를 보고 강윤을 떠올리는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그래도 건축가는 행복한 직업인 듯 합니다. 그의 작품이 남아 있으니까요.

 

 

 

4. 박인준 (1892~1974)

 

 

 

박인준은 1910년대 방식으로 미국으로 들어가 1920년대식 유학 생활을 했다. 조선에서 가져온 인삼을 팔아 생활비를 마련했고 만년필 장사를 하며 공부했다. 1923년에는 서른한 살 나이에 북미대한인유학생 총회 총무를 맡았고, 루이스 공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했다. 그의 사진이 실린 <한인학생회보>는 북미대한인유학생총회 영문 기관지였다. 박인준은 다시 미네소타주립대학 건축학과에 들어가 1927년 졸업했다. 그 뒤 시카고로 돌아와 건축 실무을 익혔다.

 

 

 

 

1933년 귀국하여 공평동에 개업한 '박인준건축사무소'가 있었던 건물이다. 지금은 동헌필방이 있다. 울 사무실 바로 옆이라 저기 2층 '재미사랑'에서 자주 술도 마셨다. 예사롭지 않다고 여겼는데 역시나 그런 내력이 있는 건물이다.

 

그의 현존하는 작품으로는 가회동의 윤치왕 주택, 박흥식 주택 등이 있다.

 

사진 출처 : http://www.hankookilbo.com/v/f44d73208bde4cefae00486bd8be34dd

 

 

 

엉? 미네소타주립대학에서 건축을 공부했고 시카고에서 실무를 했다구요? 엄청난 스펙입니다. 당시 시카고가 어떤 댑니까?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고 했던 모더니즘 건축의 거장 루이스 설리반이 활동한 '시카고파'로 유명한 곳 아닙니까? 지금은 대세인 커튼월 건축의 원조도 시카고입니다. 그런 곳에서 제대로 된 실력을 가진 사람이 돌아왔다면 가난하고 헐벗은 조국에서 건축의 날개를 활짝 폈다! 가 정답인데, 실제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오랜 미국 유학 생활로 인맥도 별로 없고, 당시엔 거의 모든 건축주들이 일본인이었을테고, 박인준은 일본어를 할 줄 모르고, 같은 조선인 건축가의 시기?도 당연히 있었을테고.... 뭐 그런 이해 가능한 사유로 그의 실력은 발휘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저자는 '돌아온 조국에서 박인준은 고요한 섬이 되었고 디아스포라의 경험은 다양성의 촉매제가 되지 못하고 한 사람의 조용한 개인사로 끝났다'고 평했습니다. 저 역시 안타깝습니다.

 

 

 

5. 나카무라 요시헤이 (1880~1963)

 

 

 

그랬던 손병희가 드디어 경성 한복판에 교당을 세웠다. 교인들의 십시일반 성금으로 지은 천도교중앙대교당은 정작 민족종교의 느낌도, 교인들의 지난한 역사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명동성당, 조선총독부와 함께 경성의 3대 건축물로 꼽힐 만큼 이색적인 서양식 건물로 자리매김했다. 서학이 아닌 동학이라는 민족종교, 보국안민과 척왜척양을 내세웠던 동학농민혁명을 생각하면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p.178)

 

 

 

 

이건 성당 아닌가베? 나도 궁금했더랬다. 천도교 교당인데 왜 성당처럼 생겼지? 하고. 저자가 말하는 해답은 이렇다. 손병희는 일본 체류 후에 근대 문명으로 새로운 출발을 원했다. 해서 서양식으로 건축물을 지으려고 했고, 그 기준은 그가 일본에서 본 건축물이었다고. 저 건물은 성당같이 생겼지만 그 시대엔 새로운 서양식 건축물이었을게다.

 

1918년 이 건물의 설계자를 찾을 당시 조선인은 마땅한 사람이 없었다. 해서 당시 가장 잘 나가던 나카무라에게 의뢰했다. 1921년에 준공했다.

 

천도교중앙대교당은 역사의 아이러니로 이어진 건물이다. 일본군은 동학군을 살육했고, 동학의 후신 천도교의 교당은 일본제국대학 출신의 일본인이 설계했으며, 그 설계는 제국주의 본고장인 유럽에서 전통을 거부하던 건축 사조를 따랐다. 그렇게 일본인이 설계한 반전통의 건축은 식민지 조선에서 민족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p.190)

 

이 건물 옆에 간판없는 김치찌게집에 자주 갔었다. 조그마한 가게인데도 항상 붐비는 나름 유명한 식당이었다. 그 식당을 가려면 교당 옆 골목길을 지나가게 된다. 그렇게 자주 지나치면서도 그저 그러려니 했다. 누가 어떻게 지었는지를 알면 건물이 달라보인다. 건축물은 역시 사물이 아닌 사연이다.

 

건물이 100년 가까이 생존해서 지금 내가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다.

 

사진 출처 : http://www.chondos.net/file/index.html?main=boardView.html&category=&board=b_bbs11&section=&boardNo=33&PHPSESSID=cf1b45ac9a58a911e58b7030164b8c4d

 

 

 

나카무라 요시헤이가 남긴 건축물이 꽤 있습니다. 지금 봐도 기품이 있고 당당한 조선은행 본점(현 한국은행 화폐박물관), 덕수궁 석조전 바로 옆의 현대미술관이 그의 작품입니다. 윌리엄 보리스와 함께 일제강점기의 조선에서 가장 왕성한 활동한 외국 건축가라고 책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대략 책에 나온 주요 건축가들을 한 번 옮겨보았습니다. 위에 나온 분들 외에 대학 때 배운 <건축시공학>의 저자 장기인 교수와 미쯔코시 백화점의 구조 설계를 담당한 김세연, 총독부 건축 기사로 일하면서 시를 쓴 이상(오감도의 그 이상이 맞다), 남만주철도회사(만철)에 입사할 만큼 수재였으나 출세에만 매달린 천재 건축가 이천승, 지금은 인기 관광명소로 변한 북촌 한옥(당시는 대규모로 지어진 보급형 한옥)을 지었던 이름 없던 목수들까지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책은 "뭐 볼 게 있다고?" 라는 질문으로 시작해서 "뭐 볼 게 있다!" 라는 답변으로 끝납니다. 정독도서관을 보고 "군더더기가 없어 참 좋죠?"라는 후배의 질문에 저자는 "뭐 별로!" 라고 대꾸합니다. 그랬는데 어느날 문득 혼자 그곳에 갔다가 그 군더더기 없음을 절실하게 느낍니다. 후배의 질문이 그제서야 맘 속으로 들어옵니다. 나는 저자의 이 후기에 너무나 공감합니다. 건축이란 본디 그런 것입니다.

 

 

 

건축물에 담긴 사연을 읽었습니다. 그 건축물을 만든 이들의 삶도 함께 읽었습니다. 별로 궁금하진 않았지만, 그 사연을 알고난 나의 시선은 이전과 다를 겁니다. '뭐 볼 게 있다고?' 에서 '뭐 볼 게 있다'로 말입니다. 이제 그 건축물 주위를 어슬렁거리면 됩니다. 아마도 건축물은 나에게 말을 걸겠지요. 자신의 사연 한보따리쯤은 내놓을 겁니다. 그러면 나는 가만히 귀를 갖다대기만 하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