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을 나오고 서울 바닥에 눌러 앉아 월급쟁이나 할 생각은 버리고 농촌으로 오시오. 농촌을 움직이는 사람이 결국은 조국을 움직이게 됩니다. 한 5년이나 10년, 딴 생각말고 농촌에 묻혀 농민들을 도우며 그들와 더불어 사는 사람만이 대한민국의 주인이 될 겁니다.”
1949년 여름, 연희대학교의 강당에서 강성갑 선생이 했던 말이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산업은 농업이었고, 국민들의 대다수가 농업에 종사하였기에 농촌의 문제가 곧 나라 전체의 문제였다. 일제 강점기 시절부터 소수의 지주와 다수의 소작인 사이에서 일어나는 신분상의 문제, 빈부격차, 차별 등은 해방이 되어서도 가장 심각한 사회 경제적 문제였다. 선생은 이것을 해결해야 모두가 행복한 새로운 나라가 될 것이라 믿었다.
강성갑 선생은 1912년 경상남도 의령에서 태어났다. 교육에 뜻이 깊었던 부모님의 권유로 마산에서 창신보통학교와 마산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김해의 장유금융조합에서 5년 동안 근무했다. 이 때 농촌과 농민의 참상을 직접 목격했고, 농민의 삶의 근본적인 문제를 모색하고자 했다. 1937년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였고, 조선어학회 사건에 관련자로 연루되어 정학처분을 받았다. 1941년 졸업과 동시에 일본 동지사 대학 신학과에 입학했고 행상과 노동으로 학비를 조달하여 1943년 졸업했다. 귀국과 동시에 목사가 되어 부산 초량교회에 부임하였고, 곧 해방을 맞았다. 해방 직후 경상남도 교원양성소 교사로 활동하였고, 부산대학교 한글맞춤법 담당 전임교수로 임용되기도 했으나 농촌운동에 전념하기 위해 교수직을 사임했다.
“대학을 만들고 대학교육을 할 사람은 내 아니라도 얼마든지 있지마는 농촌사회 개혁사업을 할 사람은 많지 않으니 진영으로 가야 하겠습니다.”
선생이 진영으로 와서 가장 힘써 한 일은 학교를 세우고 우리 말과 글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우리의 말과 글을 알아야 자기 정신과 자기 주체를 가질 수 있고, 이것이 농촌문제 해결의 첫걸음이라고 생각했다. 1946년 8월 진영 대흥국민학교의 가교사를 빌려 복음중등공민학교를 개교했다.
“일제로부터 해방된 우리나라가 좋은 나라가 우리들이 배워야 한다. 배워야 산다. 지금 생활이 어렵더라도 우선 자녀들을 가르쳐야 한다. 내가 무료로 가르쳐 줄 터이니 우리가 배워서 독립된 새나라의 주인공이 되자.”
선생은 앰프를 설치한 지게를 지고 이렇게 외쳤다. 선생의 애정 어린 권유는 농촌의 배우지 못한 이들에게 희망이자 구원이었다. 1947년 1학기 복음중등공민학교의 학생은 211명이었고, 20세 이상의 성인 남자학생도 많았다. 이어 선생이 생각하고 있던 개혁적인 교육을 실현하고자 정규 중학교인 한얼중학교를 설립했다. 재정과 자재가 부족하여 흙벽돌로 학교 건물을 지었다. 선생과 학생, 학부형이 힘을 합쳐 만든 학교였다.
선생의 교육 철학 중 특히 주목을 받은 것은 노작교육이었다. 지식 중심의 교육보다는 신체를 움직여 하는 교육이었다. 교사의 신축과정이 바로 노작교육의 실천이었고, 학교 안에 성냥공장, 기와공장, 목공장 등을 만들어 기술자들이 학생들을 직접 지도하도록 했다. 학생들은 실습시간을 통해 각양의 기술을 학습했고, 자기의 적성에 맞는 기술을 더욱 연마하여 일류 기술자가 되었다. 자립의 단단한 토대가 만들어진 것이다.
선생의 이러한 교육 철학과 노력은 곧 전국에 알려졌고, 많은 이들이 한얼중학교를 찾았다. 그 중에서는 선생의 연희전문대학 스승이었던 원한경 선생과 최현배 선생도 있었다. 전국의 청년과 학생들이 방문했고, 선생은 이들을 대상으로 강연에 나섰다. 일제의 잔재인 기계적이고 강압적 주입식 교육의 풍토 속에서 학생들의 자유로운 성장을 도와주는 선진 교육방법을 적극 실천하였다. 강성갑 선생은 시골의 작은 중학교가 한국의 민족성을 바로 세우는 중추가 되게하려는 희망을 가지고 헌신했다.
하지만 선생의 꿈과 실천은 한국전쟁 중인 1950년 8월 2일 ‘좌익’으로로 몰려 총살당하는 것으로 스러졌다. 그해 10월 열린 군사재판에서 선생을 좌익인사여서 처형했다는 가해자들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당시 주범인 진영지서장은 사형선고를 받았고, 처형되었다. 이후 한국전쟁이 끝난 1954년, 한얼중학교 교정에서 부통령과 도지사, 그리고 지역 인사와 주민 등 1만여 명이 참석하여 선생의 추모 동상이 제막되었다.
2022년 진영의 옛 시가지에 진영인 테마거리를 조성했고, 강성갑 선생의 뜻을 기리는 상록수길이 만들어졌다. 2024년 3월에는 선생의 추모 동상이 70주년을 맞아 새로이 개보수했고 제막식이 열렸다. 2024년 11월에는 강성갑 선생 기념사업회가 강성갑 기념관 건립을 위한 심포지엄을 열었으며 2028년에 완공을 목표로 한다고 밝혔다.
김해인물연구회로부터 김해 출신 인물에 대해 글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았다. 원고료를 10만원이나 준다길래 얼른 한다고 했다. 내가 배정 받은 인물은 강성갑 선생이었다. 선생은 우리 지역에서 꽤 유명 인사다. 진영의 구시가지에 가면 상록수 길에서 선생을 만날 수 있다. 한얼중학교 설립자, 목사이자 교육가로 농촌 운동을 열심히 하셨는데, 한국 전쟁 때 빨갱이로 몰려 수산 다리 아래에서 처형당했다. 여기까지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며 나도 알고 있었다.
이참에 선생에 대해 좀 더 알아볼 요량으로 이 책을 샀다. 책에 나온 선생의 활동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넓었고, 그 열정은 뜨거웠으며, 사상은 깊었다. 목회자임에도 왜 그렇게 농촌에 올인했는지, 왜 그렇게 교육에 목숨을 바쳤는지 알 수 있었다. 공산주의자로 몰려 억울하게 총살되었지만, 죽음 직후 선생의 결백이 바로 밝혀졌다. 그런데도 오랜 기간 동안 잊혀졌다.
공부를 하다 동생 강무갑 선생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강무갑 선생도 옛 서울대 공대와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당대의 엘리트였다. 한글학회, 문교부, 미대사관 통역사로 일을 했고,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에 연루되어 모진 고문과 투옥 생활 끝에 고문 후유증으로 1973년 병사했다. 형과 동생 모두 빨갱이로 몰려 죽었다. 이쯤 되면 왜 여태 강성갑 선생의 기념관이 없는지 알 만 하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시대가 아니다. 곧 기념관이 생긴다니 반갑고 응원한다.
글을 다 써고 인물연구회에 보냈더니, 인물이 잘못되었댄다. 엥? 강성갑 선생 아닌가요? 강영갑입니다. 첨 들어보는 인물인뎁쇼? 김해의 독립운동가입니다. 그러곤 다시 리스트를 보니 강영갑이 맞다. 처음부터 강영갑으로 되어 있었으나 당연히 강성갑 인줄 알고 그렇게 쓴 거다. 하, 책도 읽고 자료도 찾아보고,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였는데. 결국 "다시 쓰겠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강영갑 선생에 대해 공부하고 쓴 게 아래 글이다.
독립운동가 강영갑 선생은 1910년 4월 김해의 북내동(현 서상동 일대)에서 태어났다. 강대갑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다. 학창 시절 이후에는 김해 동상동에 거주했다. 김해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김해공립농업학교(현 김해생명과학고등학교)에 입학했다.
1929년 11월 광주 학생 항일운동이 일어났고, 전국의 학생들이 이 일을 알게 되어 학생들의 항일운동이 확산되었다. 1930년 3월까지 전국 320여 학교 학생들이 항일 시위에 참여했다. 김해공립농업학교에도 ‘불온격문’이 제작 살포되었고 학생들이 김해경찰서에서 항일 시위를 하였다. 3학년에 재학하던 1930년 2월 4일, 선생은 아침 조회 시간에 강단으로 뛰어올라 ‘경찰에 구류된 학생의 석방’, 그리고 ‘약소민족 해방 만세’ 등을 외치며 구류 상태였던 친구들의 석방을 요구했다. 이 일로 체포되어 1주일간의 구류 처분을 받았고 출옥하였지만 결국 퇴학 처분을 받았다.
이후 김해청년동맹과 김해농민조합 청년부에 가입하면서 본격적으로 농민운동과 사회운동을 시작했다. 특히 김해농민조합 청년부에서 고교 동창 노재갑, 허성도, 박덕윤 등과 사회과학연구회라는 독서회를 조직하여 활동했다. 이 조직은 구성원 간에 사회과학을 연구하는 한편, 농민조합의 확대와 농민 계몽을 목표로 했다. 이러한 활동으로 1932년 7월 초 김해농민조합 간부와 함께 검거되었고 징역 1년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1934년 3월 18일 출옥했다.
출옥 뒤에는 함께 검거되어 몇 달의 차이를 두고 비슷한 시기에 만기 출옥한 노재갑, 허성도 등과 함께 다시 김해농민조합 재건 활동에 매진했다. 1934년 5월 경에는 일본 유학 후 돌아온 고교 동창 송세준을 만나 이전 김해농민조합 활동의 실패 이유에 대해 논의했다. 아울러 앞으로의 실천운동은 간부 운동가를 양성하고 견실한 운동 기반을 구축한 후 해야 할 것을 피력했다. 1934년 말에 접어들어서는 동료들과 함께 더욱 활발한 논의와 활동을 이어갔다. 김해군 내 대저, 가락, 진영 등 각 방면의 집단농장 농민들의 생활 상태를 조사하였고, 1935년 6월에는 김권태와 함께 김해 읍내에 50여 명의 젊은 여성으로 조직된 김해 여자친목회와 교류하면서 진보적 인물들을 발굴하고 적극적 실천가로 양성할 것을 기획했다. 김해 명지의 노재갑 집에 농민교양기관을 설치하고 동지들과 함께 농민들의 계몽에 힘썼다. 또한 당시 중앙일보 김해지국이 주최한 아마추어 연극 공연을 맡아 진행했다. 이 경험을 통해 농민들을 계몽하고 혁명운동에 참여시킬 수 있다고 보고 좌익연극연구단을 조직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이렇게 1934년 출옥 후 약 2년간 김해농민조합의 재건과 농민운동의 기반을 다지는 활동을 했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이 일제 경찰에 발각되어 1936년 9월 동료들과 함께 다시 검거되었다. 이때 함께 검거된 동료는 모두 16명이고, 구속된 사람은 노재갑, 김권태, 허성도, 송세준, 그리고 강영갑 선생 등 5명이었다. 1938년 3월의 최종 판결에서 치안유지법의 위반으로 징역 2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겪었다.
1930년대는 일제가 조선의 농민들을 착취하며 식량과 자원을 전쟁 물자로 전용하던 시기였다. 농민들은 소작료와 고리대금 등으로 고통받으며 극심한 빈곤에 시달렸다. 이에 농민조합을 주축으로 소작료 인하와 노동 환경 개선, 자치권 확립 등을 요구했다. 또한 농민의 계급 의식을 고취하며 계몽했고 사회주의 운동 활성화에 힘썼다. 일본 경찰은 농민조합을 ‘적색’으로 규정하고 불법조직으로 탄압했다. 이를 적색 농민조합 사건이라 부른다. 김해에서도 활발히 일어났으며 1930년대 일제에 저항하는 대표적인 농민운동이었다. 강영갑 선생은 김해 농민운동의 최일선에 있었으며 지역 농민의 권익 보호와 계몽을 목표로 했고, 이를 통해 민족 독립의 기반을 강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1945년 광복 이후에는 주로 부산에서 좌익 진영의 사회운동에 진력했다. 1945년 12월에 열린 인민당 부산지부 전형 위원회에 선정된 전형 위원 75명 중 한 명으로 이름을 올렸으며, 조선공산당 부산시당의 주요 인물이기도 했다. 노동조합 운동에도 투신하여 1945년 12월 발기한 전국노동조합 부산지방평의회 주요 간부로 활동하였다. 그 활동의 일환으로 조선노동조합 전국평의회 결성대회에 부산 지역 대표 중 한 명으로 참석했다. 1947년 조선노동조합 전국평의회 경남도평의회의 발족을 위해 조직선전부의 일원으로 활동하였으며 집행위원으로 서기국장을 맡았다. 1947년 7월 민주주의민족전선 경남도위원회에서 미소공동위원회 축하 시민대회를 계획할 때 준비위원으로 활동했다. 이후의 행적 및 사망에 관한 기록은 없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강영갑 선생의 이러한 공훈을 기려 지난 2018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2019년 양주시에서 독립유공자 후손 가정에 명패 달아드리기 사업을 추진했다. 이에 양주시는 관내에 거주하는 강영갑 선생의 자녀 강순자(당시 77세) 씨의 자택을 방문해 깊은 감사와 경의를 표하며 독립유공자 명패를 직접 달아드렸다.
강성갑의 시대와 오늘 우리 시대는 여러 면에서 비슷하다. 해방공간의 과제가 일제로부터 해방된 새로운 나라를 어떻게 세울 것인가? 하는 것이었면, 오늘 우리의 과제는 분단을 넘어서 평화와 통일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또 해방공간에서의 경제문제가 당시 산업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농업에서의 자본집중, 즉 소수의 지주들에게 경제력이 집중되어 나타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하는 것이었다면, 오늘의 경제문제 역시 소수에게 집중된 자본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강성갑이 끝내 이우지 못했던 그의 '꿈'을 되살리는 것이다. (299쪽 나가는 글 중에서)
요 며칠 공부 참 열심히 잘했다. 많이 배웠다. 당시 지식인들이 왜 그렇게 농촌에 목매달았는지, 또 당시의 지식인들은 왜 모조리 사회주의자였는지, 어떻게 그렇게 열정적으로 삶을 살았는지 알 수 있었다. 강성갑 선생 뿐만 아니라 강영갑 선생도 알게 되어 즐거웠다.
위에 굵은 글씨로 홍성표 작가의 마무리 글을 올렸다. 선생이 살았을 때나 지금이나 세상은 문제 투성이다. 나아지긴 했으나 근본적인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 나보다 앞서간 위대한 선생들을 공부하는 건, 단지 그들의 삶을 알고자 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들의 삶을 이해하고 나면 내가 할 일이 명확해지고, 그 할 일을 실천할 용기를 얻기 때문이다.
열심히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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