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이가 서울에서 미처 가지고 오지 못한 짐이 있어 차를 몰고 서울에 다녀오기로 했습니다. 하루에 갔다오기는 부실한 허리가 버티지 못할 것 같아 오후쯤 출발해서 하루 자고 다음날 짐을 찾아 오기로 했습니다. 모처럼의 서울 나들이에, 딸과 함께 하는 일정이라 신났습니다. 반나절 정도의 데이트 코스를 알아보았습니다.
먼저 떠오른 건 이회영 기념관입니다. 몇 달 전 새로 개관했다는 소식을 얼핏 보았는데, 갑자기 떠올랐습니다. 그래, 우당 선생이면 당연히 가서 뵈어야지. 지도를 찾아보니 경희궁 뒷쪽입니다. 근처에 딜쿠샤가 있습니다. 복원하기 전의 황량한 딜쿠샤를 간 적이 있었는데, 이젠 깨끗이 단장한 딜쿠샤도 만날 수 있겠군요. 주차는 서울역사박물관에 하기로 했습니다. 그리하여 서울역사박물관 - 경희궁 - 홍난파 가옥 - 딜쿠샤 - 이회영 기념관 코스가 완성되었습니다.
밤 늦게 서울에 도착하여 용석이네 집에서 묵었습니다. 다음날 석이가 차려놓은 토스트로 아침을 해결하고 집을 나섰습니다. 막히고 시끄러운 길을 지나 서울역사박물관 뒤뜰에 도착했습니다. 공기는 시원했고, 인적은 없었으며, 사방이 고요했습니다. 정신이 맑아졌습니다. 딸과 팔짱을 끼고 걸으니 이보다 더 좋은 수는 없습니다. 천천히 산책을 했습니다.
예전에 적었던 글을 보니 2017년에 방문했었네요. 그때는 수명을 다한 낡고 쓸쓸한 딜쿠샤였는데, 이렇게 싹 단장을 하니 반가왔습니다. 처음 이 인왕산 자락에 지었을 때는 서울 시내가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경희궁에서 이 집이 보였으니 말이죠. 하지만 지금은 앞에 빌라들이 들어서서 그렇지 못한 게 아쉬웠습니다. 이 블로그 건축이야기에 <굿바이 마이 딜쿠샤>라는 제목으로 낡은 딜쿠샤의 모습과 감상을 적은 글이 있습니다.
딜쿠샤에서 오른쪽 언덕배기로 올라가면 이회영 기념관이 나옵니다. 아니 설마 이런 곳에? 네, 그렇습니다. 서울에 아직 이런 곳이 남아 있다는 것도 놀라운데, 그게 기념관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건 더 놀라왔습니다. 시내가 훤히 보이는 널찍한 언덕에 돌집으로 된 두 개의 건축물이 있습니다. 옛 선교사들의 주택으로 묵은 집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이렇게 넓은 터에 이런 건물이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입니다.
집에 와서 이 책을 바로 구입하였습니다. 우당 선생의 아내 이은숙 선생의 회고록으로 이번에 세 번째로 나왔다고 합니다. 위의 사진이 첫 번째 판본(1975년)과 두 번째 판본(1981년)입니다. 오래 전에 나왔습니다. 내가 모르고 지냈던 세계가 참 많습니다. 이회영 선생의 발차취와 그 주변인들의 행적들, 그리고 가족이 느끼는 소회 등이 상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저는 이런 책을 참 좋아합니다.
내용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1.
27일에 국경을 넘어 도착하시니 상하 없이 반갑게 맞아 과세도 경사롭게 지냈으나, 부모지국을 버린 망명객들이 무슨 흥분이 있으리오. 그러나 상하 없이 애국심이 맹렬하고, 왜놈의 학대에서 벗어난 것만 상쾌하고, 장차 앞길을 희망하고 환희만만으로 지내 가니 차호라. (67쪽)
1910년 겨울, 우당 선생의 식솔들이 국경을 넘어 만주에 도착한 심경을 썼다. '과세'는 설을 쇠었다는 말이다. 국경을 무사히 넘은 기쁨과 안도감을 이렇게 표현했다. 설 지나고 안동현 횡도촌으로 향했고, 1911년 정월 28일에 유하현 삼원보로 출발했다. 삼원보에서 경학사, 신흥강습소를 설립했다.
2.
계축년 10월 20일 오전 4시쯤 되어 마적떼 5,60명이 총을 들고 들어오는 것을 마침 내가 용변을 보러 갔다가 그 총에 좌편 어깨를 맞아 쓰러지고 둘째 댁 영감은 마적에게 납치당하였으니, 이같이 답답하고 흉한 일이 또 어디 있으리오. (93쪽)
마적떼에게 습격을 당해 총상을 입은 장면이다. 이 일로 목숨을 잃을 뻔 하였고, 통화병원에 40일을 입원하였다. 마적은 자신들이 공격한 것이 누군지 몰랐다가, 이회영 일가인 줄 알고 다시 와서 사과했다. 우당 선생의 명성은 당시 마적떼한테까지 이르렀다.
3.
서울역에 당도하니 규룡이와 규학이가 역에 나와 반기고 바로 소격동에 있는 가군의 친구 방주사 댁으로 데리고 갔다. 모든 것이 미안한 일이나 하는 수 없이 절에 간 새색시같이 가군 오시기만 기다리고 있었더니, 늦게야 우당장 오셨다고 하면서 안으로 들어오셨다. 딸 규숙은 저의 부친 뵙고 반겨 좋아하고, 규창은 난 지 5세에 부친을 승안하니 천생지친이라 천륜이 지중한지 저의 부친께 안기며 좋아하건마는 나는 5년 만에 만나니 처음 시집온 것처럼 부끄럽고 새삼스러이 조심스러워지는데 생각하면 부부지정이 근중하지만 남이라 이같이 냉정함을 느낌이로다. (113쪽)
서간도로 떠난 선생은 1913년에 귀국했고, 1917년에 아내 이은숙도 아이들을 데리고 귀국했다. 5년 만에 남편을 만나 부끄럽고 조심스럽다고 썼다. 이 때 가족들이 다시 모여 잠시 살게 된다. 1919년에 우당 선생과 은숙 선생은 북경으로 떠난다.
4.
김달하는 의주 사람으로 처음엔 애국지사라, 여러 형제가 북경으로 와서 지냈다. 여러 해를 지내니 생활이 곤란한 중에 자연히 애국에 인연이 없는 게라. 곤란은 우리 지사의 근본인 걸, 그렇다고 마음까지 변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철저하지 못한 게 사실이리라. 마음이 탐욕에 동하여 독립군을 귀화시켜서 왜놈에게 금전을 받고 하더니 차차 마음이 커진 게라. 어느 때 우리에게 오랫동안 있던 박용만을 귀화시켜 조선총독에게서 돈을 먹었다는 소문이 있더라. (147쪽)
김달하는 박학다식한 조선의 독립투사로 알려졌으나 일제는 일본의 밀정이다. 이대 총장을 지낸 대표적인 민족 반역자 김활란의 형부이기도 하다. 중국에서 활동하던 김창숙 등에 접근하여 귀국을 종용하는 등 귀순 공작을 펼쳤다. 박용만의 귀순 공작도 시도하였다. 의열단의 이종희와 이가환, 다물단의 최주영과 이규준이 함께 하여 김달하를 처단했다. 이은숙 선생은 곤란이 지사의 근본이라 했다. 핵심을 정확하게 꽤뚫고 있다.
5.
너희 눈으로 우리 영감이 김달하 집에 조상간 걸 보았느냐? 잘못 보는 눈 두었다가는 우리 동포 다 죽이겠다. 우리 집인이 어떤 집안인 줄 알며, 말이면 다 하는가? 우리 영감의 굳세고 송죽 같은 애국지심을 망애 놓으려고 하는 놈들, 김달하와 처음부터 상종한 놈들이 저희가 마음이 졸여서 누구를 물고 들어가려고 하는가? 정말 바로 말 아니 하면 이 칼로 너희 두 놈을 죽이고 가겠다. (157쪽)
우당장 내외가 김달하 장례식에 갔으니 앞으로는 절교하겠다는 심산 김창숙의 편지를 받고 그의 집으로 바로 가서 단재와 심산의 앞에서 칼을 들고 하는 말이다. 이은숙 선생의 기개가 잘 드러난다. 이 책의 하이라이트다. 그 서슬 퍼른 김창숙과 신채호 앞에서 칼을 들고 저렇게 말할 수 있다니. 결국 단재와 심산은 이은숙 선생에게 머리 숙여 사죄했다.
6.
그날부터 일감을 얻어 빨래를 해서 잘 만져 옷을 지어 주면 여자 저고리 하나에 30전, 치마는 10전씩 하고, 두루마기 하나에는 양단이나 합비단은 3,4원 하니, 두루마기나 많이 있으면 입양이 넉넉하겠지만 두루마기가 어찌 그리 있으리오. 매일 빨래하고 만져서 주야로 옷을 지어도 한 달 수입이란 겨우 20원 가량 되니, 그도 받으면 그 시로 부쳤다. 매달 한 번씩은 무슨 돈이라는 건 말 아니 하고 보내드리는데, 우당장께서는 무슨 돈일 줄도 모르시면서 받아 쓰시니, 우리 시누님하고 웃으며 지냈으나 이렇게 해서라도 보내 드리게 되는 것만 나로서는 다행일 뿐이다. (193쪽)
삼한갑족의 며느리로 시집을 가서 바느질, 고무공장 등 갖은 궂은 일을 다한다. 삯바느질로 작은 돈을 모아 우당 선생에게 부치고 만족하며 기뻐하는 모습이다. 심성이 참 곱다. 아기같다. 하지만 그 고생은 어디 말로 다 할 수 있으랴.
7.
그날은 임신년(1932년) 10월 20일에 전보를 받고, 21일은 당주동 시외가에서 신체도 없는 초종을 치르게 되었다. 그날부터 여러 동지, 이득년 씨, 유진태 씨, 이정규 씨, 김현국 씨, 곽종무 씨, 소완규 씨, 이기환 씨, 홍증식 씨, 박돈서 씨, 유창환 씨, 신석우 씨, 서승효 씨, 여운형 씨, 여운일 씨 등 여러 동지와 옛날 죽마고우로 같이 예궐하시던 친구들도 여러 분이 날마다 오셔서 종일 의논들은 하시고는 낙루도 하셨다. (219쪽)
우당 선생이 돌아가셨다는 딸 규숙의 전보를 받고 황망하여 어쩔 줄을 모르고, 겨우 정신을 차려 주변에 알리고, 결국 이렇게 선생의 장례를 치른다. 장례에 오신 분들을 이렇게 일일이 기록했다.
8.
1주일 후의 언도에서 규창은 징역 13년으로 되고 엄 군은 구형과 같이 사형으로 되니, 애달파 복심에 상고를 하나 일반이라. 언도를 받고 내려오는 피고 둘은 기운이 씩씩했다. 엄 군은 허허 웃으며 "세 살에 죽으나 지금 죽으나 죽기는 일반이라" 하며 어찌나 쾌활한지. 그러나 기걸 씩씩한 열사를 누가 알아 주리오. (267쪽)
우당 선생이 대련에서 순국한 뒤 아들 이규창은 우당 선생의 만주행을 일제에게 밀고한 자를 색출하여 처단하려 했다. 조사 끝에 밀고자가 연충렬과 이규서라는 사실을 알아낸다. 연충렬은 독립운동가 엄항섭의 처남이고, 이규서는 이석영의 둘째 아들이다. 이들은 백정기에게 체포되어 처단된다. 이후 이규창은 엄순봉과 함께 친일파 이영로를 사살한다. 위에 인용한 것은 이영로를 사살하고 붙잡혀 재판을 받은 후의 장면을 쓴 글이다. 엄군은 엄순봉을 말한다.
9.
면회날이면 열 일 제쳐 놓고 가는데, 한번은 면회하러 갔더니 간수의 말이, "인쇄 공장에서 불온 격문을 박은 사단이 일어나서 당신 아들 규창이도 공모하였다. 얼마 전에 일본 황자를 낳았다고 특사가 내려 몇 해 감형되었던 것인데, 다시 공판을 받게 되어 서대문형무소로 갔습니다." 한다. 내 듣고 그 얼마나 놀랍고도 기가 막히리오. (277쪽)
요 앞 글이 이규창이 형무소 인쇄 공장에서 열심히 일 잘하고 말 잘듣는 모범수였다고 했는데, 이규창은 이렇게 사고?를 쳤다. 좀 찾아보니 일제의 중국침략을 규탄하는 격문을 지어 감옥에 배포했다고 한다. 역시 다르시다. 서대문형무소의 사진을 보니 고문으로 인해 상한 얼굴이다. 해방 후에도 독립운동가들에게 고문을 했던 일제의 경찰을 죽이기도 했다. 다행히 93세까지 사셨다. 우리가 빚을 진 분들이 참 많다.
10.
이영구의 과거지사는 말할 수도 없는 파란 중, 부지한 게 모두가 몽환이로다. 남은 여생은 손아들과 함게 시일을 환희로 지내며, 아들과 손아들 무병장수하기를 일일이 축수하고 만수무강하시기를 서원하며, 우리 조국 국태민안하기를 축원한다. (383쪽)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이다. 첫문장도 "이영구의 과거나 현재는 모두가 몽환이라."다. 영구는 이회영이 이은숙에게 지어준 이름이다. 그래 맞다. 그 파란만장한 인생이 어찌 몽환이 아니리오.
이 책으로 새로운 사실들을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이 책을 지어신 이은숙 선생, 선생의 아들 이규창 선생, 그 외에 책에 나오는 생소한 독립운동가들, 모르는 인물이 나오면 찾아가며 읽었습니다. 여태 이 책을 모르고 있었을까요? 진짜 내가 아직 모르는 세상이 많습니다. 이회영 선생의 기념관에 가길 잘했습니다.
근래에 읽은 책 중 최고입니다.
'역사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식민지 조선을 사랑한 일본의 아니키스트 : 야마다 쇼지 <가네코 후미코> (0) | 2025.01.23 |
---|---|
윤씨가 독방에 갔다 내 그럴 줄 알았다 : 강만길 <20세기 우리 역사> (0) | 2025.01.16 |
위대한 교육실천가 강성갑 : 홍성표 <한얼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0) | 2025.01.08 |
김해의 인물을 도심 한복판에서 만나다 : 박용규 <우리말 우리역사 보급의 거목 이윤재> (0) | 2025.01.07 |
간디고등학교 학생들의 시국선언 : 김준철 <역사의 하늘에 뜬 별 김오랑> (0) | 2024.12.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