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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

김해의 인물을 도심 한복판에서 만나다 : 박용규 <우리말 우리역사 보급의 거목 이윤재>

by 개락당 대표 2025. 1. 7.

 

 

 

<김해인물열전>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2015년에 김해뉴스에서 발행한 것으로 우리 고장 출신 인물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조선시대 인물로는 임진왜란 김해를 지킨 사충신, 조선 사기장의 대모 백파선, 김해 부사 성재 허전, 조선말 문인화의 대가 차산 배전, 차산의 여인이자 시인 지재당 강담운 등이 있습니다. 근대에 와서는 독립운동가 배치문, 배동석 의사, 소눌 노상직 선생과 대눌 노상익 선생, 교육자인 강성갑 선생, 그리고 한글학자인 눈뫼 허웅, 한뫼 이윤재 선생 등이 나와있습니다.

 

현대까지 넓히면 노무현 대통령이 우리 고장 출신입니다. 생가와 묘소, 그리고 기념관은 김해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 되었습니다. 우리 지역 출신의 인물은 많지만 그들을 기념하는 공간은 봉화마을을 제외하고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사충단과 산해정, 그리고 여러 비석과 동상, 인물의 이름을 딴 거리나 광장 정도입니다. 김해의 여러 지역과 단체에서 기념하는 공간을 만들고자 지금도 부단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김해한글박물관은 그래서 더 반갑습니다. 박물관은 우리 고장 출신 한글학자인 한뫼 이윤재 선생과 눈뫼 허웅 선생의 업적을 기리고 한글에 관한 여러 전시가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위치가 김해 시내의 한중심이라 지나가다 잠깐 들러기도 좋습니다.

 

박영규 선생이 지은 이 책을 인문책방 생의 한가운데에서 독서회 사람들과 함께 읽었습니다. 일제 강점기 우리 말글을 가장 많이 보급한 한글운동가였고, 동시에 역사학자였으며, 그래서 당연하게 독립운동였습니다. 김해에서 나고 자랐고 김해 합성초등학교에서 우리 말과 역사를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3.1운동 주모자로 투옥되었고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또 투옥되었습니다. 조선어학회에서 <우리말 큰사전>을 만들다 일제에 검거되어 결국 해방 2년을 남기고 감옥에서 돌아가셨습니다. 허웅 선생 역시 한글학자이자 독립운동가였습니다. 해방과 동시에 김해에 한글강습소를 열었고 오랜 기간 동안 한글학회를 이끌면서 한글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렸습니다. 생전에 늘 고향 자랑을 하셨다고 합니다.

 

박물관은 아담합니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아기자기하게 꾸며놓고 볼거리도 풍부합니다. 근처의 나비정원에 한뫼 선생의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동상시장 뒤쪽에 이윤재 선생의 생가터가 있고 조금만 더 올라가면 이윤재 선생과 허웅선생의 모교인 동광초등학교가 있습니다. 한글박물관과 나비공원을 둘러보고 생가터를 거쳐 동광초등학교까지 산책을 해도 좋을 듯 싶습니다.

 

김해한글박물관은 이름이 박물관이긴 하지만 한뫼 선생과 눈뫼 선생의 기념관 역할이 더 강하게 느껴집니다. 사실 서울에 국립중앙박물관 옆에 아주 멋드러진 형태의 국립한글박물관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름을 한뫼 눈뫼 기념관으로 지었으면 이윤재 선생과 허웅 선생의 이름이 더 잘 알려지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이 듭니다.

 

김해한글박물관을 기점으로 우리 고장의 인물을 기리는 장소들이 더 많아졌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상동 백파선 기념관, 차산 배전 문학관, 지재당 문학관, 한림 배치문 기념관, 배동석 거리, 진영 강성갑 기념관 등이 김해의 여러 지역에 생겨서, 발걸음 닿는 곳마다 우리 지역의 훌륭한 분들을 만날 수 있는 날을 기다립니다.

 

 

1937년 서대문 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 출처 : 나무위키

 

 

한글 학자이자 훌륭한 독립운동가 한뫼 선생님. 당시에 한글 운동이 곧 항일 운동이었다.

 

 

김해 한글박물 외부 전경. 도심 한가운데에 있어 접근성이 매우 좋다.

 

 

박물과 내부 자음 의자가 참 인상적이다.

 

 

일생을 통하여 조선말과 조선글을 연구 보급하기에 일생을 마치신 분이다. 서울 시내만 하더라도 칠팔학교의 교직에 계시는 한편 신문사 각 출판사와도 간접으로 인연을 맺고 우리글의 통일과 보급을 위하여 갖은 애를 쓰시었다. 만일 조선어학자 가운데 문자의 통일과 보급을 위한 실제 운동에 있어서는 이윤재 선생이 으뜸이요 이 선생의 공로는 후세에 길이 빛날 것이다. - 이극로 <이미 세상을 떠난 조선어학자들> 경향신문, 1946년 10월 9일 (161쪽)

 

<신미혁명과 신미양란>(동광, 1931년 1월)이라는 글에서 그는 홍경래의 난을 신미혁명으로 규정하였다. 이윤재는 사화와 당론으로 3백 년간 대참극을 연출한 조선왕조가 순조대 들어와 외척 김조순 일파가 권력을 농단한 결과 매관매직이 횡행하여 국정이 문란해져 백성이 도탄에 빠져들었기에, 홍경래가 조정의 간당을 제거하고 백성을 구제하려고 자유 평등주의를 내세워 절규하면서 혁명을 하고자 혁명군을 조직하여 거병해 관군과 싸웠기에 신미혁명으로 봐야 한다고 이 사건을 새롭게 해석하였다. 이윤재는 홍경래는 '우리 혁명대장'으로 기술하여 그를 높게 평가하였다. (139쪽)

 

우리가 정치적 견지에서 보면 이씨혁명의 성공이 민족적으로 실패다. 만일 당시 공요군攻遼軍으로 하여금 한 번 압록강을 건넜던들 큰 힘이 들지 않고 대번에 요동 심양을 빼앗아 우리 한배의 구강을 회수하고 다시 정예한 장창철기로 장구직진하여 산해관을 넘어 중원대륙을 짓밟아 주원장으로 하여금 머리를 숙이게 하기는 용이하였을 것이어늘 그 유약비겁한 핑계로 돌아서서 자가의 터전을 정하기에 열리 났었다. 아아 애석하도다. 천수대왕 이래의 대고구려주의가 이에서 아주 멸절되고 말았으니 이것이 한갓 왕씨고려 일세의 죄가 아니라 조선민족 이래 만세의 대죄인져! - <사상의 임신> 동아일보 1932년 1월 10일 (141쪽)

 

 

1929년 김해 한글강좌 기념사진. 이윤재 선생이 강사를 맡았다. 맨 뒷줄 가운데 흰색 두루마기를 입은 사람이 배종철 동아일보 지국장이고 바로 왼쪽에 양복차림으로 안경을 낀 이가 이윤재 선생이다. 사진 및 글 출처 : 이광희 전의원 https://www.ido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543124

 

 

한글 보급을 위해 어떻게든, 누구에게든 '무명바지 저고리에 해진 두루마기를 입고 떨어진 고무신을 신고서(97쪽)' 다닌다고 했습니다. 선생의 모습이 상상이 됩니다. 가슴 한켠이 뭉클해지며 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