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 셋 모두 집을 떠나 산다. 강이는 회사 사장님의 집 한 칸을 빌려 살고, 산이는 회사에서 제공하는 기숙사에 살며, 들이는 자취방을 월세로 구해 살고 있다. 언젠가 들이와 서울 데이트 때 "아빤 뭐했어요? 대기업을 20년이나 다니면서 서울에 집도 하나 없고." 이렇게 물었다. "그러게, 뭘 했을까. 심지어 집 짓는 회사를 다녔는데."
사실 좀 쪽팔렸다. 특히 딸내미 집은 좀 좋은 걸 구해주고 싶었는데, 그렇지 못했다. 막내가 사는 화곡동, 딸이 사는 보광동은 좁은 골목길을 따라 올라간 언덕배기에 조그만 집들이 꽉꽉 들어찬 모양새다. 근사한 거리에 깔끔하고 모던한 집들이 그렇게 많은데.... 이런 아빠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들은 자기들이 사는 집에 만족한다.
서촌이나 삼청동 어디쯤에 마당이 딸린 4층 건물을 짓는다. 1층은 공용 주방과 소규모 공연이나 회의가 가능한 다목적 공간을 넣는다. 2,3,4층은 스튜디오 같은 주거 공간과 작업 공간을 넣어 우리 아이들을 비롯하여 갈 곳 없는 간디 졸업생들을 쓰게 한다. 마당에는 함께 사는 이들이 텃밭을 일구어 반찬 거리를 직접 재배한다. 여기서 다양한 창작 활동이 일어나고, 그게 생계로도 이어지고, 주거도 해결되는 그런 공동체 공간을 만들면 참 좋겠다는 허무맹랑한 상상을 해본 적이 있다.
나의 이런 상상은,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럴 줄 알았다.
여기 한 건축가가 있다. 그는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1가구 1주택은, 실은 임금노동자를 위해 국가가 만든, 가족이 살기 위해서만 개발된 특별한 구조의 주택이라고 주장한다. 출생과 양육에 적합한, 그래서 개인의 프라이버시가 핵심이 된 모델이 1가구 1주택이라는 거다.
고도성장기, 즉 누구나 자녀를 낳고 기르는 것이 당연한 시대에 이 모델은 일정한 국가적 역할을 담당해왔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면서 그 역할을 끝났다. 1인 가구는 전체 가구의 절반을 향해 달려가고 있으며, 이웃을 만날 기회는 거의 없다. 옆집은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고, 그래서 프라이버시는 더욱 강해지고 집은 폐쇄적이 된다. 밀실화된 집에서 홀로 살아가는 사람들, 이제 집은 어두운 터널이 되었다. 이제 프라이버시를 보장하는 독립적 주거 방식은 오히려 사람을 더욱 고립시키고 있다.
건축가는 이런 문제의 해법으로 공동체가 형성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지금의 1가구 1주택에서는 커뮤니티가 탄생하지 못하며 실제로도 탄생하지 않았다. 따라서 커뮤니티가 탄생할 공간, 즉 커먼 스페이스 Common Space를 만들어내는 것이 건축가의 할 일이라고 했다. 실제로 그가 설계한 주택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커먼 스페이스를 만들었다.
책에 그의 해법이 담긴 건축물을 많이 소개했는데, 우리나라에 지은 건축물도 있다. 판교 월드힐스 타운하우스 2단지와 서울 세곡동 보금자리아파트 3단지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 해답 중 하나가 시키이閾(이쪽과 저쪽의 경계를 표현하는 문지방 같다는 뜻 - 옮긴이)라는 공간의 가능성이다. 여기에서 시키이는 안과 밖을 구분하는 하나의 선이 아니라 공간적인 넓이다. 시키이는 외부로부터 사람을 맞아히는 공간이며 외부의 공간과 교류하기 위한 공간이다. 주의해야 할 점은 외부의 공간(공적인 영역)과 내부의 공간(사적인 영역) 중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중간적 공간오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사적 공간의 일부라는 것이다. 사적인 공간 안에 있는 공적인 공간이 시키이다. 응접실일 수도 있고 툇마루일 수도 있는 등 모양과 형태는 다양하지만 모두 외부로부터 사람을 맞이하기 위한 공간이다. (35쪽)
이 건축가는 야마모토 리켄이다. 1945년 생이니 할배다. 2024년에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받았다. 이 상은 1979년부터 시작되었는데, 일본이 8회로 최다수상이다. 2000년대 초반까지 프리츠커상은 새로운 형태의 건축물, 혹은 예술적인 건축물을 만든 유명 건축가들 위주로 받았다. 그러다 2010년대에 들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는데, 지역에서 행동하며 사회 공동체에 기여하는 건축가들이 받기 시작했다.
프리츠커상 이야기만 나오면 일본은 저렇게 많이 받는데 우리는 왜 한 명도 없냐고 말한다. 심지어 국가가 나서서 그 상을 받을 만한 건축가를 육성한다는 뻘짓을 하기도 했다. 상의 경향이 저렇게 바뀌기 시작했다면 우리는 더 받기 어렵지 않을까. 정기용 선생이 살아계셨다면 딱인데, 안타깝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건축가에 대한 시선이 낮다. 을이다. 갑인 발주처가 하라는 대로 해야 된다. 심지어 설계비도 그렇다. 건축가를 제대로 대우하지 않으면 프리츠커상은 요원하다.
재미있는 건, 저자인 야마모토 리켄이 한국의 건축환경을 칭찬하는 대목이 책에 나온다. 위의 판교하우징과 강남하우징은 모두 LH에서 국제 공모전을 낸 프로젝트였다. 거기에 리켄이 응모를 했고 당선이 되어 설계를 했다. 관에서 주관하는 설계가 자신의 파격적인 제안을 받아들여줬다며, 일본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며 일본 정부를 비난했다. 우리는 일본 좀 봐라면서 우리를 비난하는데.....
당연하다고 생각한 1가구 1주택이 이제 그 역할을 다 했으며 이젠 바뀌어야 한다는 작가의 주장은 놀랍지만 고개가 끄떡여진다. 공동체가 만들어질 수 있는 공간을 늘여야된다는 할배의 말에 지극히 공감한다. 할배는 그걸 건축으로 구현했고 보여주었다. 우리의 아파트도 커뮤니티 시설을 만들지만, 공동체 공간이라기보단 주민들의 편의시설에 가깝다. 약간의 고민과 용기가 있으면 바꿀 수 있다.
온통 좋지 않은 뉴스뿐이다. 인간은 멸망을 향해 달려간다고 생각했는데, 또 한편으로는 이렇게 세상을 구하고자 하는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어쩌면 그런 노력은 곳곳에 있는데 드러나지 않아 내가 미처 보지 못한 것뿐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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