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에 불암도시재생현장지원센터라는 곳이 있습니다. 여기 센터장이 음, 재미납니다. 출신부터 남다릅니다. 밀라노 공대 출신입니다. 그것도 건축학과. 밀라노 공대는 이탈리아 최대 규모이자 최고의 공과대학이며 세계적으로도 그 명성이 자자합니다. 특히 디자인과 건축 분야에서는 탑오브탑을 달립니다. 건축계의 노벨상인 프리츠커상을 받은 알도 로시와 렌조 피아노가 밀라노 공대 출신입니다. 이런 학교를 나와서 도시재생 센터장을 하고 있습니다. 핥핥핥. 하지만 도시재생에는 진심입니다. 도시재생에 걸림돌이 되는 행정이나 제도에 대해 가끔 쓴 소리도 합니다. 그 만큼 열정이 있습니다.
도시재생이란 쇠락한 지역을 다시 활동적인 지역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낙후 지역을 바꾸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만, 가장 보편적인 것이 싹 밀어버리고 다시 짓는 겁니다. 재개발 혹은 재건축으로 불리죠. 낡고 허름한 지역을 번듯하고 화려하게 바꾸는 가장 빠르고 효율적인 방법입니다. 부동산 가치도 올라가고 주거 환경도 좋아집니다. 하지만 원래 살던 주민들은 새 집의 가격을 감당하기 힘듭니다. 대부분 떠나갑니다. 그렇기에 그 동안 원주민들 사이에 형성되었던 지역 공동체는 해체됩니다. 낡았지만 오래된 삶의 흔적들도 모두 사라집니다. 도시재생은 삶의 터전을 조금씩 바꾸어 나가면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합니다. 집 수리, 골목길 포장, 문화센터 건립 등의 하드웨어 뿐만 아니라 함께 사는 사람들이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소프트웨어도 병행합니다.
그래서 낙후된 지역을 바꾸는 방법은, 시대에 따라, 그 나라의 환경에 따라 다릅니다. 대개 개발도상국은 재개발이 효율적이고 선진국은 도시재생이 더 나은 방법입니다. 천재 건축가 고르비지에 형님이 1920년대에 인구가 너무 많이 몰려 엉망진창인 파리를 대규모로 재개발하자는 안을 정부에 들이댑니다. 하지만 파리의 대답은 '노'였습니다. 기존의 환경을 보존하면서 바꾸겠다고 했습니다. 그런 과정이 있어 지금의 파리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도 한창 발전하는 시기엔 거의가 재개발이었습니다. 하지만 조금씩 도시재생으로 바뀌어갔고, 박원순 시장이 들어서자 대세가 되었습니다. 바람직한 방향입니다. 오세훈으로 시장이 바뀌고 얼마 뒤, 서울에서 도시 재생 관련 일을 하는 한주가 이제 더 이상 그 업을 이어나가기 힘들겠다고 하소연을 했습니다. 예산이 전부 없어졌다고, 다시 재개발로 싹 돌아가간다고요. 도시 재생이 맞는 방향인데 박원순 시장의 흔적들을 지운다고 제대로 된 정책도 바꿔버렸습니다. 오세훈 욕을 한바가지 했더랬습니다.
내가 살고 있는 김해는 그래도 도시재생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성과도 꽤 있었구요. 그런데 올 여름, 각 동네의 센터장을 모두 물러나게 하고 김해도시개발공사에서 직접 관장을 한다더군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닐텐데요. 서울에서 처음 불기 시작한 '재생' 없애기의 바람은 여기까지 왔습니다. 제가 발 담그고 있는 사회적기업, 마을교육공동체, 도시재생 등 풀뿌리 민주주의의 가장 선봉장에 있는 것들이 이권 카르텔이라는 이름으로 마녀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불암의 센터장도 자리에서 내려왔습니다.
이렇게 도시의 방치된 공간과 저이용 되는 시설을 통칭 '유휴공간'이라 부른다. 이들 장소에는 시대의 흔적과 함께 사회문화적인 의미가 축적되어 있다. 이러한 도시의 여백과 닫힌 공간을 발굴하여 새롭게 도시에 열어주는 것, 새로운 시대적 가치를 삽입하는 것이 새로운 도시 재생의 중요한 열쇠이다. (168쪽)
과거 우리의 개발 시대에는 광범위한 재개발이 이뤄졌다. 철거는 선이었다. 낡고 지저분한 옛것은 보존이 아닌 파괴의 대상이었다. 산업화와 도시화라는 미명 아래 끊임없이 허물어지고 다시 들어서는 과정을 반복하며 서울은 역사성과 다양성을 잃었다. 수만은 사람이 일상을 영위하는 낙원상가는 비록 아름답거나 편하지 않을지 몰라도 도시적으로는 매우 중요한 공간이다. 최소한의 개입을 통해 제약을 해결하고 다시 도시와 우리 삶에 열리도록 하는 것이 건축이 가진 힘이다. (194쪽)
센터장은 이제 백수가 되었습니다. 가끔 저랑 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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