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향한 안도 다다오의 건축 여행기 : 안도 다다오 <건축을 꿈꾸다>
지난 여름 3개월간의 유럽 여행은 건축을 전공한 저에게 선물과도 같은 일이었습니다. (참 잘 다녀왔다. 작년에 가지 않았으면 코로나 때문에 상당히 미뤄질 뻔 했다.) 여행의 목적이 건축 기행이라 루트도 보고 싶은 건축물 위주로 짰더랬습니다. 건축의 본향이라 할 수 있는 유럽 건축을 질리도록 보고 왔습니다. 생각치 않았던 뜻밖의 아름다운 건축물을 만나 예상 밖의 기쁨을 누리기도 했으며, 잔뜩 기대를 하였지만 기대와는 달라 실망을 하기도 했습니다.
여하튼 그 경험은 이 책처럼 건축에 대한 설명과 견해가 주된 내용인 책을 읽을 땐 더욱 빛납니다. 책을 읽으며 막연히 상상했던 것과는 예전과는 달리 지금은 저자가 쓴 감상과 내가 느낀 바를 비교하는 맛이 쏠쏠합니다. 건축물에 대한 저자의 글을 더 쉽게 이해하는 건 덤이구요.
책 도입부터 강렬합니다. 건축의 원점이 살림집이라는 글부터 시작합니다. 인간의 가장 근원적 욕구에서 생겨난 살림집은 그곳에 사는 사는 사람들의 생활상은 물론이고 기후와 풍토를 고스란히 드러낸다고 하며, 세계 곳곳에 그런 마을을 만날 때면 마음이 강렬하게 흔들린다고 말합니다. 그랬던 살림집이 '근대'라는 시대와 만나면서 보편성을 강조하는 '기계'가 되어버립니다. 이전의 살림집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편리하고 쾌적한 것이 되었지만, 그만큼 지역에 따른 차이가 없는 획일화된 주거 환경이 되었다고 아쉬워합니다.
획일화된 주거 환경 하면 바로 우리나라죠. 전국민의 60%가 아파트라는 세계에서도 그 유례를 보기 어려운 희한한 집에 살고 있습니다. 집을 '기계'에 비유한 르꼬르뷔제가 살던 시기는 집 없는 사람이 하도 많아서 그들에게 안락한 보금자리를 주는 것이 최대의 과제였습니다. 그 과제를 가장 합리적으로 수행한 것이 아파트였습니다. 집의 시대적 과제가 아주 많이 달라졌는데도 불구하고 울나라에서는 이 아파트라는 넘이 여전히 왕성한 식욕을 뽐내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저 넘의 수명은 오래 갈 것 같지는 않습니다. 칠팔십 년대에 지어진 아파트들은 낮고 동간격이 넓어 재건축을 해서 높고 빡빡하게 지으면 충분히 본전을 뽑았습니다. 하지만 높고 빡빡하게 지은 아파트가 수명을 다했을 때는 이제 더 이상 경제적 가치가 없습니다. 그때가 되면 사람이 살 수도 없고 그렇다고 허물지도 못하는 유령이 될 겁니다. 아, 책 이야기 하다 옆으로 샜습니다^^.
그런데 편리가 곧 풍요일까. 근대에 생겨난 이른바 근대 건축의 이상이라는 것이 요즘처럼 개성 없고 경제성만 따져서 생산하는 상품과 다름없는 살림집이었을까. 내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다. 영혼의 쉼터가 되어야 할 살림집이 상품이 되어서 좋을 리 없다. 금세기에 지어진 현대 주택의 명작들이 결코 교과서대로 무비판적으로 지어진 것은 아니다. 미래를 향한 꿈을 의뢰받은 장인이 정신적으로 숱한 갈등을 겪은 끝에 만들어낸 것이다. (p.15)
일본은 그래도 상황이 괜찮은데 저자는 이렇게 썼군요. 지역이 만들어낸 개성이 없는 살림집은 집살이에 대한 생각도 꿈도 느낄 수 없습니다. 똑같은 얼굴의 상품으로서의 집이 없어지고 개성 넘치는 집들이 많아지는 날이 울나라에도 오겠지요.
베네치아에는 산마르코 광장처럼 따뜻한 햇빛이 넘치는 얼굴이 있는가 하면 미궁 같은 골목 공간도 펼쳐져 있다. 광장이 '빛'이라면, 작은 운하, 다리, 터널, 작은 광장 같은 다채로운 요소가 자아내는 공간은 '그림자'라고 할 수 있다. 좁은 골목을 빠져나가면 빛이 넘치는 광장이 홀연히 나타나는 극적이 공간 체험을 할 수 있는 것도 이 도시만의 특별한 매력이다. (p.69)
유럽의 응접실이라 불리는 산마르코 광장을 보러 베네치아에 갔습니다. 광장도 물론 좋았지만 기억에 더 남는 건 이름 모를 골목길이었습니다. 삶의 흔적이 켜켜이 배여 있고 지금도 빨래가 날리는 그 골목길 말이에요. 배짱 좋게 지도도 없이 그 골목길에 들어갔다가 미아가 되는 줄 알았습니다ㅎㅎ.
파리의 재미난 점은 고급 부티크나 유명 레스토랑이 늘어선 호사스런 대로에서 한 블록 벗어나 뒷골목으로 들어가면, 대로와는 완전히 대조적인 농밀한 생활 공간이 펼쳐져 있다는 점이다. 지역별로 다른 맛을 풍기는 작은 마을의 집합체라고 평가되기도 하는 파리이지만, 말 그래도 참으로 세심한 도시 공간이 형성되어 있었다. (p.106)
알랭드 보통이 자주 갔다던, 파리 뒷골목의 온갖 계층의 사람들이 오는 까페 '셰 안투안'은 가보지 못했지만, 검은 형님들이 무섭게 계시는 파리의 뒷골목을 낮에도 밤에도 걸었습니다. 파리는 에펠탑과 빌라 사보아, 미테랑 도서관 등, 근대 건축으로 빛났지만, 자갈치 골목과 비슷한 파리의 뒷모습도 꽤 인상적이었다.
내가 롱샹을 처음 방문한 것은 1965년 스물세 살 되던 해였다. 버스에서 내려 울창한 숲을 곁눈으로 보며 산길을 올라갔는데, 시야가 차차 열리면서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만곡한 하얀 벽이 나타났다. 건물로 가는 접근 공간의 빼어남에 감탄하며 기대감에 부푼 채 예배당 문을 통과했다. 그리고 그떄까지 상상하던 모습을 배반하는, 거의 폭력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격력함을 감춘 공간에 깊은 충격을 받고 잠시 아연질색했다.
수평 수직이 일체 배제되고 스타코의 소재감을 드러낸 조잡하고 조소적인 조형, 불규칙한 평면 형상을 가진 내부 공간을 홍수처럼 채우는 빛. 모든 것이 당시 내가 가지고 있던 건축의 상식들을 완전히 뒤엎는 것이었다. (p.193)
내가 롱샹을 가던 길도 무지 더웠습니다. 역에 내려 무거운 배낭을 메고 뙤약볕을 한 시간 넘게 걸었습니다. 그리고 만난 롱샹. 여태 책으로만 보다 처음 만난 롱샹은 내가 상상하던 것 이상이었습니다. 헉 하고 숨이 멎었습니다. 다다오는 스물세 살에 처음 만났다는데, 젊은 저자가 느낀 감흥의 크기는 상상이 안됩니다. 저도 좀 빨리 만났으면 인생이 바뀌었을까요?
파리 롱샹에 있는 롱샹성당. 저자는 폭력적인 외부와 홍수처럼 쏟아지는 빛이라고 내부를 묘사했는데 너무 적절하다. 빛이 만드는 공간의 황홀함은 사진으로 도저히 표현할 길이 없다. 왜 사람들이 롱샹 롱샹 하는지 가보고서야 알았다. 죽기 전에 저 인류의 걸작을 봐서 다행이다.
파리 루브르의 유리 피라미드. 실제 가서 보니 루브르는 보이지 않고 피라미드만 보였다. 박물관 건물과 이 피라미드는 재료에서 생김새까지 아주 이질적이지만, 이질적인 것이 조화를 이룰 때 이렇게 훌륭한 작품이 되는구나 하고 느꼈다. 파리가, 그리고 파리 사람들이 위대한 점은 저 생뚱맞은 걸 인정하고 수용했다는 점이다. 에펠탑도 그렇고.
베네치아의 골목길과 산마르코 광장. 광장을 '빛'이라 표현했고, 골목을 '그림자'라 표현했다. 그림자를 헤메다보면 정말 빛이 홀연히 나타났다. 그렇기에 광장에서 느끼는 경이로움은 더했다. 둘은 서로 당기고 밀어내며 서로의 장점을 빛내주었다.
'건축을 통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건축을 시작한 이래 나는 늘 이렇게 자문했다. 무엇인가를 만든다는 것은 새로운 가치를 쌓아 올린다는 것이다. 나는 건물을 지을 때도 의뢰받은 기능만을 충족시키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들의 예상을 뛰어넘는 어떤 가능성을 보여 주는 장을 만들고 싶었다. 사람이 자라고 건물도 함께 성장할 수 잇는 그런 생명이 있는 장소. 건축을 통해 새로운 '무엇'이 생겨나는 것을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고 싶었다. (p.210)
안도 다다오가 생각하는 건축의 가치를 보여주는 글입니다. 사람의 예상을 뛰어넘는 가능성을 보여 주는 건축이라니요. 나는 의뢰받은 기능을 충족시키기도 버거운데ㅋㅋ. 저자는 대학에 가지 않고 세계 각지의 건축물을 답사하면서 독학으로 자신만의 건축 세계를 만든 것으로 유명합니다. 20대의 청년 저자가 건축이라는 바다에서 헤메고 고민하며 해답을 찾아나가는 악전고투의 자취가 책에 녹아 있습니다. 그걸 보는 쏠쏠한 재미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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