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이는 가장 이상적인 학교에 다니고 있어요 : 유현준 <어디서 살 것인가>
인근에 대안고등학교가 생겨서 놀러갔습니다. 아이들이 대안학교에 다니니 지들도 당연히 관심이 가는가 봅니다. 같이 갈래? 라고 던졌더니 덥석 뭅니다. 시내에서 한참의 벗어난 외진 시골 마을에 학교가 있습니다. 원래는 초등학교가 있었는데 폐교가 되고, 거기에 다시 학교를 지었습니다. 올해 신입생을 받는 깡깡 새학교입니다. 지인인 교장선생님께서 직접 구석구석 안내해 주셨습니다.
전교생이 45명인 작은 학교입니다. 하지만 넓은 도서관을 비롯하여 식당과 실습실, 전산실, 강당, 과학실 같은 각종 유틸리티 룸들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2층에서 보이는 시골 마을과 논의 풍경이 제 맘에 쏙 들었습니다. 게다가 기숙사는 압권이었습니다. 4인실의 넓은 공간에 이층침대도 아닌 넓은 단층침대가 있고, 방마다 샤워시설과 화장실, 그리고 에어컨도 구비되어 있었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입을 다물지 못합니다. 자기 학교보다 월등히 잘 갖춰진 걸 보고는 "솔직히 배 아프네" 라고 합니다.
단아하게 잘 지어졌다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좀 아쉽습니다. 사각운동장과 한 동짜리 학교 건물(기숙사 제외), 살짝 비틀긴 했지만 기존 학교와 크게 다르지 않은 획일적인 동선은 그대로였기 때문입니다. 대안학교라 살짝 기대도 했는데. 교장 선생님도 아이들이 멍때리거나 상상하거나 도란도란 이야기할 만한 장소가 부족하다고 아쉬워하시며, 그런 공간들을 아이들과 함께 만들어갈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네, 딱 맞는 말씀입니다. 전문용어로 짱박힐 공간이 없었습니다. 그게 아이들한테는 진짜 필요한데 말이죠.
19세기 교실에서 20세기 선생님이 21세기 학생들을 가르친다.
판옵티콘(Panopticon, 파놉티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영국의 제레미 벤담(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말을 했던 공리주의 그 냥반)이 제안한 원형 감옥입니다. 가운데에는 감시탑이 있고 여기서 바깥쪽 감옥의 모든 수감자를 감시하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수감자는 감시자가 어디를 보고 있는지 알 수 없어서 감시의 효과가 증폭됩니다. 최소의 인원으로 최대한 많은 인원을 통제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어로 모두를 뜻하는 Pan과 '보다'를 뜻하는 Opticon이 합쳐진 말입니다.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내는 이 구조는 아주 효율적이서 대번에 인기를 끕니다. 감옥뿐만 아니라 학교, 군대, 정신병원, 심지어는 도서관도 저런 형태로 지어졌습니다. 물론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죠. (물론 지금은 상당히 많이 바뀌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정기용 선생님이 지으신 기적의 도서관이 판옵티콘 구조를 완전히 깨버린 도서관이죠). 특히 학교 건물은 별로 변하지 않았습니다. 덩그런 사각 운동장에 옆으로 길쭉한 한 동짜리 교실. 서두에 얘기한 대안고등학교조차도 그 큰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낮은 건축비, 짧은 설계 기간, 교육청의 획일적인 지침과 고착된 설계 기준 등 현재 제도권에서는 아직 제약이 많습니다.
학교에는 다양한 공간이 필요합니다. 교장선생님이 말씀하신 그런 공간 말이죠. 다양한 공간이 있으면 아무래도 다양하게 사고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획일화된 공간에서는 획일화된 사고를 낳습니다. 닭장같은 공간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 학생들한테 창의적인 사고를 기대하기는 어렵고, 또한 나와 다르게 생각하는 많은 다양한 이들을 인정하기도 쉽지 않을 겁니다.
우리나라 학교 건축은 교도소 혹은 연병장과 막사의 구성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공간에서 12년 동안 생활한 아이들은 전체주의적 사고방식을 가질 수 밖에 없다. 남들과 똑같은 교복을 입고 똑같은 교실에서 자라난 사람은 똑같은 아파트에 사는 것을 편하게 생각할 것이다. 이런 곳에서 자라난 아이들은 대기업과 공무원과 대형 쇼핑몰을 더 편안하게 생각한다. 지금의 학교 건축은 다양성을 두려워하는 어른을 양산해 낼 수 밖에 없다. (p.26)
판옵티콘의 개념도.
근데 지금 보니, 저 눈은 구글이고 방에 갖힌 이들은 스마트폰을 열심히 하고 있는 우리들이다. 싸늘하다. 가슴에 비수가 날아와 꽂힌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손은 눈보다 빠르니까.
그럼 학교 건물은 어떻게 변해야 할까요? 유현준 교수는 이 책에서 해답을 제시합니다. 아이들이 밖으로 쉽게 나갈 수 있는 나즈막한 건물이 여러 동 있고 그 앞에는 다양한 모양의 마당이 있는 공간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요렇게 말이죠.
우리는 아이들을 좀 더 다양성을 받아들일 줄 아는 도전의식 있는 인간으로 키워야 한다. 그러려면 학교 건물은 더 작은 규모로 분동되어야 하고, 그 앞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놀 수 있는 갖가지 모양의 작은 마당과 외부 공간이 있어야 한다. 지금은 축구하는 아이들 외에는 외부 공간을 사용하지도 못한다. 여건이 안되면 테라스도 만들어야 한다. 다양한 형태와 높이의 천장과 다양한 모양의 교실 평면도 필요하다. 우리 아이들의 학교는 대형 건물보다는 스머프 마을 같은 느낌이 나야 한다. (p.51)
스머프 마을 같은 학교 (p.40)
그림 출처 : https://m.blog.naver.com/designpress2016/221312615778
최근에 새로운 학교 건축에 대한 여러가지 움직임이 있습니다. 서울시가 초등학교 1, 2학년 교실을 리모델링 하는 '꿈을 담은 교실'을 진행하기도 하고, 혁신적인 학교 건축물 마스터 플랜을 제시한 지자체도 있었습니다. 특이한 형태의 학교 건물이 여기저기서 많이 생기고 있습니다. 좋은 현상입니다.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동화고 삼각학교. 일단 건물이 삼각형이다. 특이하다. 낡은 건물 한 동을 허물고 그 자리에 지었다고. 설계자는 공용공간에 특히나 신경을 썼다고 한다. 수업이 이루어지는 교실도 중요하지만, 서로 부딪히고 놀며 사회적 경험을 하는 공용공간이 잘 만들어져야 된다고 강조했다. 훌륭한 공용공간은 또다른 배움의 장소가 될 수 있다고.
사진 출처 및 더 많은 정보 : https://blog.naver.com/designpress2016/221298242855
강남으로 이사간 풍문고등학교다. 예전에 안국동에 있을 땐 회사가 바로 거기라 학교와 학생들을 자주 봤다. 건물의 파사드(입면)은 옛 풍문여고의 감고당길 돌담길의 모티브를 반영했다고 한다. 쫌 머찌다. 찌그러진 원형 중정이 인상적이다. 고등학교가 이 정도면 다닐 맛 나겠는걸.
사진 출처 및 더 많은 정보 : https://blog.naver.com/designpress2016/221298242855
유현준 교수는 학교의 인테리어를 바꾸고 현대적인 건축물을 짓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한 차원 높은 목표를 제시합니다. 그 예로 테즈카 설계사무소가 지은 후지 유치원을 들었습니다. 최근에 본 가장 인상적인 학교 건축물이라고 하네요.
중정을 품고 있는 동그란 도넛 모양으로 순환형 옥상에서 무한하게 뛰어놀 수 있고, 교실에 햇빛과 바람을 영리하게 끌어들였다고 평가했다. 애플 사옥도 꼭 이런 모양이더마. 이런 학교 건물이라면 한 차원 높다고 인정.
사진 출처 : https://m.blog.naver.com/designpress2016/221312615778
나즈막한 건물이 여러 동 있고 건물 사이에 다양한 마당이 존재하는 학교. 저자가 말한 이상적인 학교입니다. 저 문장을 보는 순간 딱 떠오르는 학교가 있습니다. 혹시나 해서 딸에게 저 위의 컨셉을 보여주니 "어! 우리 학교네!" 라고 바로 나옵니다. 저런 학교가 가장 좋은 학교라고 설명을 해주니 "우리학교는 돈이 없어서 한 동, 한 동 짓다보니 저렇게 된건데....." 하고 웃습니다. 네, 저 이상적인 학교에 아들과 딸이 다니고 있습니다.
간디고등학교의 소식지인 <소풍가자> 표지에 그려진 학교 그림이다. 저자가 그린 이상적인 학교 컨셉 그림과 똑같다. 운동장을 중심으로 각각의 건물들이 나즈막히 배치되어 있다. 자그마한 마당은 물론이고 쉼터도 다양하다. 건물의 생김새도 다 제각각이다. 학교가 이러니 아이들의 생각도 다양해질 수 밖에 없다.
건물과 건물을 이어주는 오솔길. 나는 아이들의 학교에 자주 간다. 짧은 거리가 아님에도 어디 껀수 없나 하고 기다리고 하나 걸리면 총알같이 튀어간다. 학교를 거닐면 어느새 마음이 편안해지고 기분이 좋아진다. 산책으로도 더없이 훌륭하다. 내 아이들의 친구들을 만나는 즐거움은 덤이다.
우리집 막내는 중2인데 아내가 다녔던 중학교에 다닙니다. 학교는 거의 변한게 없습니다. 한 세대가 지났는데 말이죠. 학교 건축이 시대에 가장 뒤처졌다는 사실은 이제 누구나 공감합니다. 그래서 여러 새로운 시도도 나오고 있구요. 설계에 시간을 투자하고 공사비를 더 투입하면 됩니다. 절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돈 들일 가치가 충분히 있습니다. 울나라의 경쟁력을 높일 가장 효율적인 투자입니다.
다양한 공간에서는 다양한 생각을 하게 되고, 다양한 생각을 하는 다른 이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간디학교에 다니는 우리 아이들을 보니 그렇습디다. 쓰고 보니 자식 자랑만 했네요. 팔불출 맞습니다. 그래도 기분은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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