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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이야기

옛 건축 툇마루에서 가을 정취를 맛보고 싶어라 : 류경수 <우리 옛 건축에 담긴 표정들>

by Keaton Kim 2020. 9. 30.

 

 

 

옛 건축 툇마루에서 가을 정취를 맛보고 싶어라 : 류경수 <우리 옛 건축에 담긴 표정들> 

 

 

 

밀양에 가면 밀양강과 단강천이 합류하는 언덕배기에 월연정이라는 정자가 있습니다. 이 정자에서 조망하는 경치가 일품입니다. 자연을 보는 탁월한 안목이라는 말이 딱 어울립니다. 월연정 자체도 아름답지만 그 자리에서 조망하는 자연은 훨씬 더 매력적입니다. 옛 건축가들은 이런 자리를 결코 놓치는 법이 없습니다.

 

 

 

영화 <똥개>의 촬영지로 유명해진 용평터널, 일명 똥개터널에서 강을 따라 조금만 걸어 들어가면 월연정이 나온다. 밀양 팔경 중의 하나라고 소개되었다. 원래는 월연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조선 중종 때 조광조가 기묘사화로 죽음을 당하자 같은 편이었던 이태 선생이 아이고 더러버라, 하면서 낙향해 여기에 별장을 지었다. 월연정을 알기 전엔 이태 선생을 들어보지도 못했지만, 월연정의 앉음새와 모양새를 보니 아주 훌륭한 건축가이시다. 위 사진은 별장으로 들어가는 좁은 문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면 '제헌'이라 적힌 건물이 나온다. 월연정은 조그만 계곡을 두고 정자와 별장 공간으로 나뉜다. 별장 공간은 '제헌'과 '쌍경당'이 있는데 '쌍경당'에는 실제 사람이 거주하고 있어 거의 문이 닫겨 있다. 후손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조용하고 운치있는 옛 건물 툇마루에 앉아 늦가을 햇볕을 쬐는 일, 최고의 즐거움이다. 하지만 피가 펄펄 끓는 10대 후반의 아이들은 자꾸만 가자고 보챈다. 이태 선생이 만드신 별장 툇마루에서 한가함을 즐긴다.

 

 

 

계곡을 가로지르는 자그만 다리를 건너면 늠름한 기품의 정자 '월연대'가 나온다. 나는 보자마자 영화 <광해>의 장면이 떠올랐다. 류승룡이 병든 이병헌을 찾아 가는 곳. 혹시나 하고 검색해보니 맞다. 크하, 이 눈썰미. 식구들한테 막 자랑했다.

 

 

 

월연대 입구의 좁은 문. 옛 건물의 문은 대부분 이렇게 고개를 숙여야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작게 만들었다. 항상 고개를 숙이고 겸손하라고 이렇게 만들었다는데, 좀 불편한 감이 있지만 그 뜻을 헤아리면 충분히 감내할 만 하다. 그리고 문은 큰 거보다 작은 쪽이 보기가 예쁘다.

 

 

 

 

 

정자의 현판이다. 누가 썼는지 모르지만 힘이 느껴진다. 언덕에 축대를 쌓아 만든 정자라 기품이 있고, 담장으로 둘러쌓여 편안한 느낌을 준다.

 

 

 

 

 

 

 

 

 

월연대에서 본 풍경이다. 공간이 담장으로 분리되어 있어 탁 트인 조망감은 없지만, 나무와 담장 사이로 보이는 자연은 탁월하다. 옛 조상 건축가들은 집을 지을 때 무엇보다 자리앉음새를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대목을 여실히 보여준다. 담양의 소쇄원에 견줄만 하다더니, 실제로 그렇다.

 

 

 

이 책 <우리 옛 건축에 담긴 표정들>에 수록되어 있는 건축물 사진을 찾다가 옛날 폴더에서 발견한 밀양 월연정 사진을 올렸습니다. 날짜를 보니 2018년 11월 초입니다. 늦가을의 정취를 만끽하기엔 그만이었습니다. 올 여름에 다시 갔더랬는데, 태풍으로 무너진 담장을 보수 중이라 들어가보지 못했습니다. 가을이 좀 더 깊어지면 또 찾아볼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윤증 고택의 사랑채와 대문간. 특이하게 행랑채가 없고 사랑채와 안채로 통하는 대문간이 한몸으로 되어 있다. 사랑채 측면과 대문간의 입면이 견실해 앞마당에 섰을 때 느낌이 가장 좋다. 사랑채는 입면이 견실해 대학자인 윤증 선생의 인품이 느껴진다. 건축은 건축가가 만들지만 결국에는 건축주를 닮는다. 설계 과정에서 건축주의 의사가 반영되고 건축주 스스로도 자신이 원하는 품격을 반영할 건축가를 찾아 '집'을 의뢰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건축물은 건축주를 닮을 수밖에 없다. (p.309)

 

 

 

 

 

 

윤증 고택에 대한 설명을 위의 사진으로 저렇게 설명을 했습니다. 사랑채의 옆면을 대문간의 정면과 함께 찍어서 저 살림집의 특징을 아주 알기 쉽게 설명했습니다. 저자의 내공을 단박에 알아차렸습니다. 저 글을 보자 갑자기 윤증 고택에 가보고 싶어졌습니다. 위치를 찾아보니 충남 논산에 있군요. 책에 나와 있는 추사 고택도 충남 예산에 있네요. 충남 답사를 꼭 가야 될 이유가 생겼습니다. 

 

 

 

이 책에 나온 옛 건물로 창경궁, 창덕궁, 낙선재, 연경당, 남한산성을 비롯한 궁궐과 성곽, 부석사, 송광사, 병산서원을 비롯한 사찰과 서원, 그리고 향단, 양진당, 북촌댁, 김동수 가옥 등의 살림집을 소개했습니다. 총 29곳의 옛 건축을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흑백 사진이 운치가 있습니다. 세부 설명도 꽤 꼼꼼하고 독창적입니다. 아직 못가본 곳이 윤증 고택, 추사 고택, 정병호 가옥, 그리고 선교장, 이렇게 네 곳이네요. 가봐야 하는 곳 목록에 올립니다.

 

 

 

아무리 글로 읽고, 사진으로 보고, 이야기를 많이 들어도 건축물은 실제로 가서 보지 않으면 별 의미가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건축 감상을 할라 치면 개체와 전체를 다 같이 보아야 한다고 합니다. 작가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개체가 우수하나 전체적인 짜임새는 허술한 경우가 있고, 개체는 빈약해도 전체적인 짜임새가 우수한 경우도 있습니다. 개별적인 건물, 부분, 장식과 전체적인 아우름을 함께 보는 눈을 가진다면 참 좋겠습니다.

 

 

 

예전엔 참 열심히 다녔더랬습니다. 지금보다 더 바쁘고, 아이도 훨씬 더 어렸고, 차도 더 낡았고, 여유도 없었습니다. 지금은 그 시절 만큼 다니지 못하고 있습니다. 옛 건축을 답사하는 즐거움보다 더 재미있는 놀이를 요즘 즐기는 것도 아닌데 말이죠. 쪼금 반성합니다. 그 시절보다 나이를 조금 더 먹었고 건축을 보는 제 눈도 조금 깊어졌으니 옛 건축을 만끽하는 재미는 더할 겁니다.

 

 

 

날이 추워지기 전에 얼른 계획을 잡아야겠습니다. 조금만 부지런해지면 됩니다. 식구들과 함께 옛 건축의 툇마루에 앉아 오후 햇살을 쬐는 즐거움을 누릴 생각을 하니 벌써 설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