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만화 이야기

그날이 오면 기뻐서 죽사오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 박시백 <35년 6권, 7권>

by 개락당 대표 2020. 9. 11.

 

 

 

그날이 오면 기뻐서 죽사오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 박시백 <35년 6권, 7권>

 

 

 

# 6권. 1936~1940 결전의 날을 준비하라

 

 

 

 

민족해방가

 

이천만의 동포야 일어나거라

일어나서 총을 잡고 칼을 잡아라

잃었던 네 자유와 너의 권리를

쑤의 손에서 도루 찾으라

온 세계 인류와 똑같이 살기를

반일의 전선에 나가 싸우라

 

- 항일연군 여성빨치산이었던 김선의 수첩에서 나온 가사로, 옌볜에서 발행한 <혁명의 노래>에 수록되었다.

 

 

 

1. 스페인 내전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파시즘이 활개를 치자 1935년 코민테른은 반파시즘 인민전선 노선을 채택했다. 물러가라 파시즘, 연대하자 노동자여. 이를 제대로 실천한 곳은 스페인이었다. 1936년 총선에서 승리한 인민전선이 토지개혁, 교회 재산 몰수 등 본격적으로 개혁을 실시하자 기득권이 교회, 지주, 자본가, 군부 세력이 반발했고, 마침내 1936년 프랑코가 이끄는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빨갱이들 다 때려잡을 거야.

 

파시즘의 독일과 이탈리아가 프랑코 반군을 지원했고, 소련은 당연히 인민전선 정부군을 지원했다. 그리고 세계 각국의 공산주의자, 자유주의자, 무정부주의자들이 동참해 인민전선 편에서 싸웠다. 헤밍헤이와 조지 오웰 등도 이 전쟁에 참여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못 본 척했다.

 

3년에 걸친 내전의 결과 프랑코 반군이 승리했고 이후 프랑코는 1975년까지 집권했다. 스페인도 그 시기엔 완전 시궁창이었네.

 

 

 

2. 장쉐량과 2차 국공합작

 

대장정의 마무리 들어선 마오저뚱은 전체 동포들에게 국민당과 합심해서 일본군을 쳐부수자는 글을 발표했다. 하지만 장제스는 콧방귀를 뀌며 항일운동 지도자들을 체포했다. 만주를 잃은 동북군의 지도자 장쉐량은 동족끼리의 싸움을 멈추고 일본군을 몰아내어 동북으로 돌아갈 생각을 했다.

 

1936년 12월 장쉐량은 자신의 생각을 마침내 실행에 옮겼다. 국민당 총통 장제스를 시안에서 납치하여 구금했다. '공산당과의 내전을 중지하고 일본의 침략에 힘을 합쳐 맞서 싸울 것'을 요구한 것이다. 장제스는 어쩔 수 없이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1924년 쑨원의 1차 국공합작에 이어 1937년 2차 국공합작이 성사되었다. 이제 힘을 합쳐 일본을 쳐부수자.

 

장쉐량은 공산당의 구세주가 되었고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반역자가 되었다.

 

 

 

3. 중일전쟁, 그리고 난징대학살

 

하지만 일본은 이런 중국의 반응을 대수롭지 않게 보았다. 1937년 7월 루거우차오(노구교) 부근에서 일본군이 훈련하고 있을 때 총성 몇 방이 울렸고, 이를 중국군 소행이라 우겨 군사행동에 들어가 루거우차오를 점령했다. 중일전쟁의 시작이었다.

 

청일 전쟁과 만주 침공을 거치면서 일본은 중국을 허당으로 봤으나 이번에는 달랐다. 국공합작으로 똘똘뭉친 중국은 강력하게 반격했고 학생 노동자들까지 합세하여 일본군과 싸웠다. 일본은 아주 고전했고 본국에서 대병력이 증원되고 나서야 겨우 상하이와 난징을 점령했다. 예상 밖의 큰 피해에 약이 바짝 오른 일본군은 6주만에 30만의 민간인을 분풀이로 죽였다. 정말 닥치는 대로 어마무시하게 죽였다. 난징대학살이다.

 

난징에서 근무할 때 여기에 갔더랬다. 당시의 처절했던 모습들을 그대로 전시했다.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무럭무럭 일어났었다.

 

 

 

4. 도산 안창호

 

1934년 윤봉길의 상하이 의거가 일어나자 체포되어 복역했다가 가석방 되어 잠시 은거했다.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다시 수감되었고 12월 병보석으로 나와 투병하였으나 이듬해 3월 세상을 떴다.

 

"실력양성론을 폈으면서도 준비론으로 흐르지 않고 평생을 비타협적 항일투쟁의 길을 걸으셨죠. 독립전쟁, 무장투쟁에도 기꺼이 동의했고요."

 

도산 안창호 선생에 대한 박시백 저자의 평가다.

 

신민회 조직, 미국에서 흥사단 창립, 미국의 한인회인 대한인국민회를 조직 및 총회장, 임시정부 수립, 대한독립당 결성 등등 이 책에 나와 있는 선생의 활동은 어마무시했다. 특히나 임시정부가 여러 파벌로 분열했을 때 이를 통합했다. 더 중요한 건 결코 자리에 연연하지 않았다. 일제 강점기에 가장 빛나는 독립운동가였다. 이 책을 통해 도산 선생에 대해 다시 공부할 수 있어서 참 좋았다. 

 

 

 

5. 손기정과 남승룡

 

1936년 나치 독일이 베를린에서 개최한 올림픽에 손기정과 남승룡은 일본 대표 선수로 참가했다. 손기정은 2시간 29분 19초로 세계신기록을 세우며 2등보다 2분 이상 앞서 결승점을 통과했다. 남승룡은 3위로 들어왔다.

 

환호도 없이 탈의실로 행했던 우승자 손기정은 시상대에서도 남달랐다.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월계수 나무로 가슴에 달린 일장기를 가렸다. 사인을 요청받으면 언제나 한글로 손기정, 영움으로 KOREAN을 썼다.

 

우승 직후 친구에게 보낸 엽서엔 단 세글자. 슬프다!

 

   

 

6. 김일성과 보천보 전투, 그리고 혜산 사건

 

김일성은 동북항일연군 소속으로 활약했다. 동북항일연군은 중국 공산당이 운영하던 동북방면의 다민족 부대였다. 팔로군과는 친척관계이기도 했고. 김일성은 2군 3사를 지휘했다. 당시 2군의 절반 이상은 조선인이었고, 김일성이 이끌었던 부대는 거의 조선혁명군이었다. 당시 사장 이상을 맡은 이는 김일성을 비롯하여 김책, 최용건, 허형식, 김세창, 이학복, 안광훈, 안봉학 등이 있었다.

 

1937년 6월 김일성의 동북항일연군 90여 명과 국내의 조국광복회 소속 80여 명이 보천보를 습격했다. 보천보는 백두산 아래 혜산진 옆의 작은 읍이었다. 주재소, 면사무소 등 주요 기관을 불태우고 모여든 마을 주민들 앞에 조선 독립을 설파하는 일장 연설을 한 다음 김일성 부대는 보천보를 떴다. 이에 대응하여 일제는 혜산진 수비대를 출동시켰고 만주 군경이 합세했다. 김일성과 최현이 이끄는 항일연군은 이들과 치열하게 싸웠다.

 

사건 이후 일제는 국내 연계 세력을 색출하기 시작했고 조국광복회 회원 739명을 체포하여 188명을 기소했다. 조국광복회는 거의 망했다. 1930년 이후 가장 큰 조직사건이었다. 이걸 의도한 바는 아니었을 것이나 보천보 전투는 득보다 실이 컸다.

 

당시의 국내 상황은, 그해 4월에 국내에서 가장 활발하게 독립운동가로 활동하던 이재유가 검거되었고, 이에 일제는 "식민지 조선에서 독립운동은 완전히 사라졌다."라고 선전할 정도였다. 이런 패배감에 휩싸여 있던 조선인들에게 김일성의 이 대담한 전투는 독립군과 국내에 희망을 심어주기에 충분했고 국내 언론들은 대서특필했다. 김일성이 독립운동가로서 이름을 제대로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작가는 두 챕터에 걸쳐 이 사건을 다뤘다.

 

 

 

7. 간도특설대와 백선엽

 

동북항일연군의 주된 전술은 게릴라 작전이었다. 특히 조선인 유격대는 일제에게 골치 아픈 존재였다. 그래서 이이제이의 전략을 펴기로 했다. 그리하여 1938년 간도특설대를 만들었다. 장교는 조선인과 일본인이, 사병은 조선인으로 채웠다. 만주군 출신이 중심이 된 이 부대는 이후 독립군 토벌에 앞장섰다.

 

얼마 전 세상을 뜬 백선엽이 이 간도특설대 출신이어서 논란이 많았다.

 

 

 

8. 동북항일연군의 소멸

 

이육사의 시 <광야>에서 '초인'의 실제 모델이었던 허형식은 항일연군 3로군 총참모장이었다. 일제의 토벌에 맞서 유격활동을 계속 하다 1942년 전사했다.

 

1939년 일본의 관동군은 항일연군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에 나섰고 항일연군은 저항했지만 버티기 어려웠다. 전투에서 죽고, 얼어 죽고, 일부는 투항했으며 나머지는 소련으로 넘어갔다. 그렇게 동북항일연군은 소멸했다.

 

<아리랑>의 김산이 가장 신뢰했던 동지 오성륜(김익상, 이종암과 함께 상하이에서 훗날 일본 총리가 되는 다나카 기이치 육군대장을 암살하려고 했던 그 독립운동가, 오랫동안 항일투쟁의 일선에서 싸웠다)도 이 시기에 변절했다.

 

 

 

9. 장정기의 임시정부

 

윤봉길의 홍커우공원 의거로 상하이에서 항저우로 피해야 했던 임정은 이후 중일전쟁이 전개되면서 전황에 따라 계속애서 이동을 해야 했다. 이봉창, 윤봉길 의거의 연이은 성공으로 세계의 이목을 끌긴 했으나 임정은 여전히 관내 독립운동 세력 내에서도 주도적 지위를 갖지 못했다.

 

김원봉이 주도한 민족혁명당 창당 작업엔 관내 민족주의 세력뿐만 아니라 임정의 주요 인사 상당수도 합류해버렸고 민혁당은 임정의 지도적 위치를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임정이 민혁당 밑으로 들어갈 판.

 

1938년 임정의 김구와 현익철, 유동열, 지청천이 후난성 창사의 남목청에 모여 민족주의 정당의 합당을 논의하다가 일제에 매수된 조선혁명당 당원 이운한에게 저격당했다. 이 사건으로 김구는 치명상을 입었으나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김구의 입지는 점점 탄탄해졌고 민족주의 운동세력은 김구를 중심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10. 조선의용대

 

1938년 난징 함락 이후 일본군의 공세가 계속되자 김원봉 등의 민족혁명당은 중국 당국과 협의해 조선의용대를 창설했다. 초창기 병력은 200여 명에 불과했으나, 1940년 2월에는 314명에 이르렀다. 국민당 정부는 조선의용대가 선전 공작에 주력하길 바랐고, 실질적인 무장투쟁을 요구하던 다수의 대원들은 타이항상 팔로군 지역으로 이동,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로 개편되었다. 잔류 인원들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한국광복군으로 통합되었다.

 

<의열단 민족혁명당 조선의용대의 영혼 윤세주>에서 조선의용대가 화북으로 올라가는 부분에 대해 자세히 나와 있다. 김원봉은 조직의 확대, 어쩌면 조직의 보전을 위해 의용대의 화북행에 동의했다는 해석도 있었다. 이 책에서는 최창익이 주도했으며 이 일로 김원봉의 지위에 상당한 타격이 있었다고 했다.

 

 

 

11. 한국광복군

 

통합 한국독립당의 결성으로 입지가 더욱 탄탄해진 김구이쯤에서 처음으로 김원봉을 넘어섰다는 게 내 생각는 무장 조직 창설을 구성했다. 그리고 마침내 1940년 9월 충칭의 가릉빈관에서 한국광복군 사령부를 만들었다. 총사령관에 지청천, 참모장은 이범석, 지대장은 이준식, 공진원, 나월환 등이었다.

 

초창기에는 병력 모집에 어려움을 겪었으나 1942년 김원봉과 조선의용대 잔류 인원 100여 명이 합류하면서 골격이 갖춰졌다.

 

 

 

12.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

 

스탈린이 정권을 잡고 우상화가 추진되면서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피의 숙청을 단행했다. 어마무시한 사람들을 죽였다. 1936~1939년 숙청으로 소련 전역세서 500만 명이 체포되었고 이 중 10퍼센트가 총살되었다. 스탈린은 괴물 중의 괴물, 만악의 근원이 되었다.

 

그리고 일본에 대한 경계심이 커지면서 고려인들을 의심했다. 밀정이 있다고 생각했고 1937년 3월 연해주의 고려인을 중앙아시아로 이주시켜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 해 9월 첫 열차가 출발했고 연말까지 17만 1,787명의 고려인들이 카자흐공화국과 우즈벡공화국으로 강제 이주했다.

 

많은 고려인들은 러일전쟁 시에 러시아 편에 서서 싸웠고, 러시아 혁명 과정에서는 볼셰비키 혁명을 지키기 위해 투쟁했다. 일제와의 싸움에도 누구보다 용감히 나섰지만 스탈린은 부정적인 면만 보았다.

 

스탈린의 결정에 분노했지만 그들은 이주해서 악착같이 살아남았다. 살아남은 홍범도 장군의 모습이 책에 나왔다. 안타깝고 미안했다.

 

 

 

13. 스파이란 이름으로

 

1935~1937년 2,500명의 고려인이 반혁명 혐의로 체포되고 대부분 처형되었다. 김아파나시, 박진순, 한명세, 김만겸, 오하묵, 한창걸, 조명희, 김단야, 김경천 등이 이 책에서 언급되었다.

 

<세 여자>에서 김단야가 말한 게 생간난다. "나는 레닌이 살던 그런 나라이 그리웁다. 레닌의 죽은 그 땅이 그리웁다. 아! 언제나 과연 나의 앞에도 평탄한 길이 열릴 것인가."

 

조선 혁명가들이 그토록 믿고 의지했던 레닌의 나라 소련이었는데, 스탈린의 소련은 혁명가들의 희망이기를 거부하고 배반했다. 스탈린진짜나쁜노무시키

 

 

 

# 7권. 1940~1945 밤이 길더니... 먼동이 튼다

 

 

 

 

1945년 8월 9일, 히로시마에 폭탄이 떨어졌다. 터지는 순간은 너무 밝아 보이는 건 흰색이 전부였다. 폭탄의 반경 1.6킬로미터 내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그 악마의 무기를 사용하는 게 정말 옳았을까. 이미 기울어진 전쟁이었는데. 미국은 결정적인 방식으로 전쟁을 끝내고 싶었겠지. 그 덕에 서둘러 종전이 되었고.

 

하지만 무고한 시민 수십만이 희생당했다. 일본이 조금만 더 일찍 백기를 들었더라면 이 같은 희생을 피할 수 있었다. 일본이 자초한 일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미국이 저 무기를 사용한 것은 결코 옳다고 할 수 없다. 나의 생각이다.

 

 

 

1. 일본, 미국과 맞장뜨다

 

일본은 진작부터 동남아 쪽의 자원이 눈독을 들였다.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가 그 동안 이 일대를 식민지로 지배해 왔는데 2차 세계대전으로 독일과 전쟁하느라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이 틈을 타서 야금야금 다 먹었다.

 

이제 간덩이가 부을 대로 일본은 미국과 한판 뜰까말까 하고 있었는데, 도조 히데키가 총리가 되자 1941년 12월 미국과 전쟁을 선언했다. 개전을 책임지게 된 이는 야마모토 이소쿠로 해군 제독이었다. 그는 하버드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이로 미국의 힘을 제대로 알고 있었다. 제대로 붙으면 100% 진다고 생각했다. 해서 그의 전략은 선빵을 날리고 평화 협상으로 이끌고 나가는 것이었다. 하와이 진주만의 미국 태평양함대에 대한 폭격을 가했다. 동시에 필리핀, 싱가폴, 인도네시아, 미얀마를 공격했고 승리했다.

 

이제 미국이 "그래, 그만하면 됐다. 동남아시아 너거 먹어라." 뭐 이렇게 나올 줄 알았는데, 웬걸, "협상 따윈 없다. 너거뜰이 항복할 때까지 제대로 붙어주마!" 하고 나왔다. 일본은 이제 세계 최강대국을 상대로 진짜 전쟁에 돌입했다.

 

 

 

2. 리틀보이와 팻맨

 

일본은 미국과의 전쟁 초기엔 제법 승리를 거두었으나 전쟁이 길어질수록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 미국의 무기와 보급품에서 상대가 되지 않았다. 곳곳에서 연전연패했다. 정신력을 강조하며 버텼다. 사이판, 필리핀, 이오섬에서 패한 일본은 자기 땅인 오키나와에서도 대패했다. 1945년 7월, 처칠, 스탈린, 트루만이 독일의 포츠담에 모여 포츠담선언을 발표했다. "일본, 무조건 항복해!" 그래도 일본은 "1억 총옥쇄! 끝까지 싸운다!"며 항복을 거부했다.  

 

1945년 8월 6일, 미국은 히로시마 상공에 '리틀보이'를 떨어뜨렸다. 폭탄이 떨어진 반경 1.6킬로미터 이내 모든 것이 파괴되었고 히로시마 인구 24만 명 중에서 당일에만 10만이 죽었다. 이어 8월 9일 나가사키에 '팻맨'이 투하되었고 2개의 원자폭탄으로 희생된 사람은 21만 명에 이르렀다. 이때 희생된 조선인도 4~5만 명 정도였다.

 

 

 

3. 강제징병, 강제징용, 위안부

 

1939년부터 강제 징용이 시작되었고 태평양전쟁 이후 본격화됐다. 징용된 이들은 일본으로 가 석탄광산, 군수공장 등에 배치되었고 사할린, 태평양의 점령지역 등으로 가서 죽도록 일했고 또 일하다 죽었다. 징용된 조선인 조선인 수는 100만 명이 넘었다.

 

1942년 5월부터는 강제로 징집하여 군대에 보냈다. 19만 명이 군대에 끌려갔다. 더 많은 군인이 필요하자 학생들을 학도병이라는 이름으로 모집했고 지원이 저조하자 강제로 입대시켰다.

 

소녀들도 대상이 되었다. 군복공장, 신발공장에서 일하게 된다고, 돈을 벌 수 있다고 속여 데리고 갔다. 이 소녀들은 죽음의 세월을 살았다. 위안부 생활 중 많은 이들이 폭격으로 죽었고, 퇴각하는 일본군에 죽었다. 살아서 돌아왔어도 혹여 과거가 드러날세라 숨죽이며 삶 아닌 삶을 살아야 했다.

 

 

 

4. 친일파

 

 

1) 친일파들의 정세 인식

 

"유럽에선 독일과 이탈리아가 중심이 되는 유럽 권역과 소련이 중심이 되는 소련 권역이 성립될 것이고 미주에선 남북미를 통일한 미주 권역이, 아시아에선 일본제국이 주도하는 동아의 신질서가 확립될 것이다. 일본을 중심으로 아시아의 부흥을 완성해야 한다."

 

조선의 많은 사람들은 일본의 만주 침공과 중일전쟁의 승승장구에 경탄했고 많은 이들이 전향했다. 조선의 식자들이 저마다의 식견을 뽐내고 있었지만 만주사변을 일으킨 이시와라 간지 주장의 작은 변형들이었다.

 

 

2) 귀족들

 

민영휘, 민규식, 윤덕영, 을사오적 박제순의 아들 박부양, 김석기, 백작 송병준의 장남 송종헌, 이완용의 차남 이항구, 이해승 등.

 

이 시기엔 조선귀족회라는 것도 있었다. 모두 아주 부자였고 공부도 많이 한 사람들이었다. 이런 넘들은 거의 다 친일파였다. 부끄러운 줄 알아랏!

  

 

3) 관리들

 

도지사 박중양, 손영목, 김시권, 이성근, 순천군수 박상준, 의열단을 밀고한 판사 백운화, 김준평, 노용호, 검사 최대교, 이병용, 경찰 계광순, 노덕술, 혜산사건의 주도자 최령도, 최석현, 김태석 등. 나쁜 시키들이 한 나쁜 짓이 무지 많지만 쓸 가치도 없어 안 쓴다.

 

 

4) 일본 육사 출신들

 

지청천과 일본 육사 동기인 홍사익(전범으로 사형당함), 김석원, 김일성 최현 부대와 간삼봉 전투를 벌였던 김인욱, 해방 이후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이종찬(자신의 친일 행적에 대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했다), 신태응 신응균 부자, 김준원 김정렬 부자, 김기원, 유승렬 유재홍 부자 등.

 

이들은 일본군에 소속되어 많은 전쟁을 치뤘고, 이들 중 일부는 광복 이후 대한민국에서도 군대의 지휘관을 맡았고, 어떤 이는 국방부 장관 등에 올랐다.

 

 

5) 만주군관학교 출신

 

만주국 장교였던 정일권은 해방 후 육군참모총장, 국무총리에 올랐다(총리 시절에 분뇨를 직격탄으로 맞았다). 김석범은 간도특설대 정보반 책임자였는데 1953년 해병대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김찬규, 신봉균, 송석하는 간도특설대 창설 멤버였고 해방 후 계속 대한민국 군대를 지휘했다. 백선엽은 간도특설대에서 근무했고 육군참모총장, 대한민국 최초 대장으로 진급했다.

 

박정희는 신징군관학교 2기 출신으로 이후 일본 육사 본과에 편입돼 졸업했다. 1944년 12월 일본군 소위에서 만주군 보병 소위로 편입해 팔로군을 상대하는 부대에서 근무했다.

 

 

6) 명망가

 

대표적인 변절자인 춘원 이광수, 이광수 홍명희와 더불어 동경삼재라 불리웠던 육당 최남선, 조선의 대표 명망가 윤치호, 최린 등이 친일의 주도적 역할을 했다.

 

이들이 일제를 찬양하는 대표적인 글과 강연 등이 책에 실려 있다. 아마도 일본은 영원할 줄 알았나보다. 

 

 

7) 문인들

 

<국경의 밤>의 김동환, <감자> <배따라기>의 김동인, 이광수 문단의 제자 모윤숙(1967년 여류문인협회 회장, 1970년 국회의원), 모윤숙의 친구인 <사슴>의 노천명, 고려대 총장과 국회위원, 신민당 총재를 지낸 유진오, 카프의 박영희, 역시 카프의 멤버이자 평론가인 김기진, <국화 옆에서>의 시인 서정주, 소설가 정비석, <탁류>의 채만식(작가로서 최초로 친일 행위를 고백하고 반성했다), 시인 김억 등이 친일파였다.

 

학교 다닐 때 배운 수많은 시와 소설의 저자가 다 친일파였다니. 쓰벌!

 

 

8) 예술계

 

연극계 유치진, <깃발>을 지은 시인 유치환과 헷갈리지 말자. 나는 헷갈렸다. 무용가 최승희(말년에 숙청됐다), 무용가 조택원, <우리의 소원>의 작사가 안석영, 화가 김은호, 김기창, 장우성(이들은 세종대황, 이순신, 유관순, 논개 등 역사 인물 표준 영정 등을 많이 그렸다), 남산기념관의 김구 동상을 만든 조각가 김경승(친일파가 김구 동상을....), <봉선화>의 홍난파, <선구자>의 조두남, <애국가>의 안익태, <불효자는 웁니다>의 반야월 등이 친일파였다.

 

아, 홍난파, 안익태도 친일파였다니. 쓰으벌!!

 

 

9) 기타

 

해방 후 이화여대 총장을 지낸 김활란, 1955년 숙명여대 총장 임숙재, 1961년 서울여대 총장 고황경, 1952년 덕성여대 총장 송금선, 1965년 상명여대 사범대학 초대 학장을 지낸 배상명, 고려대 초대 총장 백낙준, 1933년 조선일보 사장 방응모, 보성전문학교 교장이었고 1951년 부통령을 지낸 김성수, 불교계 대승사 주지였고 해방 후 동국대 초대 총장이 된 권상로 등이 친일파였다.

 

지금의 조계사도 일본이 중앙집권체제 강화를 위해 1938년에 지은 절이다. 그리고 위에 열거한 명망있는 분들은 다 친일을 열심히 했고, 해방 후 대학 총장이 되셨다. 저런 분들이 학교 총장이시니 무슨 민족의 정기 같은 게 서겠는가. 또 만악의 근원 이승만. 해방 후 교육계도 시궁창이었네.

 

김성수의 동생이자 경성방직 사장 김연수, 화신백화점의 박흥식, 태창직물의 백낙승, 광산왕 최창학, 정치 깡패 박춘금, 일본 헌병 소속으로 항일 조직 적발에 공을 세운 김창룡 등이 이 책에 얼굴을 내민 부자 친일파들이다.

 

여태 모르고 있었던 친일파들이 진짜 많았다. 친일파의 재발견

 

 

 

5. 장준하와 김준엽

 

학병으로 끌려간 많은 이들이 탈출하여 독립군에 합류했다. 이게 말이 쉽지 목숨을 몇 개 걸어야 가능했던 일이다. 대표적인 인물로 장준하와 김준엽이 있다. 장준하의 <돌베개>에 그 역경이 잘 나타나 있다. 김준엽도 광복군의 일원으로 활약했고 해방 이후 중국사와 공산주의 연구에 평생을 바쳤다. 영원한 고대 총장이자 우리 시대의 큰 스승으로 불린다.

 

 

 

6. 조선의용군

 

1939년 가을 최창익은 조선의용대 30여 명과 함께 화북지역으로 떠났다. 1941년 초 윤세주를 비롯한 주력 인원이 다시 북상했다. 당시 많은 의용대원은 조선인이 많은 지역에서 조직을 확대하고자 생각했다. 조선의용대가 중국 팔로군에 합류하자 장제스는 화가 났다. 김원봉에게 광복군에게 합류할 것을 종용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독립운동가들은 챤~스라고 생각했고, 세력을 한 곳으로 모아야 한다고 공감대를 모았다. 김구도 김원봉을 압박했다. 김원봉은 어쩔 수 없이 남은 의용대원들과 함께 임정의 광복군으로 들어갔다.

 

화북지역으로 이동한 조선의용대는 이미 와 있던 세력과 함께 1941년 7월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를 결성했다. 1942년 5월 일본군은 3만 명을 동원해 팔로군 소탕작전을 벌였다. 의용대는 팔로군의 활로를 뚫기 위해 싸웠고 이 전투에서 진광화와 윤세주가 전사했다. 조선의용대의 영혼이라 불리던 윤세주였다.

 

이듬해 7월 조성의용대는 조선의용군 화북지대로 개칭되었다. 화북지대는 중국 팔로군의 지도와 지원 아래 활동했다. 조선의용군 사령관은 김무정. 중국 팔로군 포병 사령관 출신으로 대장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완주했던 몇 안되는 조선인이었다. (어마무시한 경력에 중국공산당의 적통. 이쯤 되면 소련군 소위 출신인 김일성이 비벼 볼 수준이 아니다.) 조선의용군은 그 규모가 8,000여 명에 이르렀으며 일제 강점기 동안 명멸했던 어떤 무장부대보다 크고 강했다.

 

무정은 해방 후 한국전쟁에 북한군 주력부대를 이끌고 참전했고, 패전의 책임을 물어 김일성에 의해 숙청당했다.

 

여담으로 1945년 초 김원봉은 조선의용군을 광복군 산하로 끌어들이려고 김두봉에게 이렇게 편지했다. "조선독립동맹을 조선혁명당 화북지구로 개편함이 어떻겠소?"

 

이에 대한 무정의 답은 이랬다. "당신이 혁명을 영도하려 한다면 좋소! 연안으로 오시오. 오지 않는다면 누구의 영도도 접수할 수 없소."

 

 

 

7. 광복군의 활동

 

조선의용대가 합류하고 학병들이 들어오면서 규모를 갖추게 된 광복군은 연합군의 전투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버마 전선에 인원을 파견했고 국내 상륙 작전을 위해 미국 OSS와 합작하여 작전 수행을 위한 훈련도 했다. 임정이 미군 측과 협의하여 세부적인 계획까지 다 짰으나 일본의 항복으로 무위에 그쳤다. 아, 이렇게 허무할 수가.

 

 

 

8. 김일성 그룹

 

소련으로 들어간 동북항일연군은 소련군의 지휘 아래 함께 훈련했다. 그리고 1942년 9월 항일연군을 주축으로 하는 88독립보병여단을 창설했다. 4개의 교도영은로 구성되었고 전체 600명, 조선인 150명의 규모였다. 여단장은 저우바오중, 참모부장 사마르첸코, 1교도영 영장은 김일성, 부영장은 안길이 맡았다. 이때 대위 계급을 단 조선인은 김일성 외에도 안길, 최용건, 김책이 있다.

 

1945년 7월 소련군의 대일전 참전이 분명해지자 김일성, 최용건 등은 조선에 투입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9. 건국동맹

 

1944년 8월 여운형은 국내에서 건국동맹을 결성했다. 여운형, 조동호 등 좌익계 노장층이 중심이었고, 일부 민족주의자들도 함께 했다. 이름에 걸맞게 건국을 위한 준비를 했다. 이때의 준비가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의 구성과 활동의 밑천이 되었다.

 

 

 

10. 드디어 해방. 그러나.....

 

1945년 8월 15일 정오, 일본 천황의 목소리가 라디오방송을 통해 중계되었다. 일제가 패망하고 독립이 되었다는 사실은 이튿날이 되어서야 실감할 수 있었다. 독립운동가, 정치범들이 석방되고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졌다.

 

참전한 이래 신속히 만주를 장악해가던 소련군은 조선에 대한 진공도 시작해 8월 12일 웅기와 나전을 점령했고 8월 13일에는 청진에 상륙했다. 막연히 다자에 의한 신탁통치 방침을 세웠던 미국은 소련이 관동군을 제압하며 파죽지세로 남하하자 쫄았다.

 

"이러다 한반도는 모두 소련의 손에 들어가는 거 아냐?" 다급한 미국은 8월 14일 한번 찔러본다는 심정으로 한반도의 분할 점령을 제안했는데 소련이 의외로 "콜~!"을 외쳤다. 전범국 일본을 대신해서 우리가 분단되는 순간이었다. 일본을 갈기갈기 찢었어야.

 

미국은 9월 8일에 들어와서 다음 날 총독부로부터 모든 권한을 넘겨받았고 9월 19일 미 육군 사령부 군정청이 수립되었다. 미국은 일본에서의 군정을 위해 일본 전문가는 많이 양성했으나 한국에 대해서는 준비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총독부의 일본인 관리들을 그대로 이용하기로 결정했다. 사람들에게 맞아 죽을 줄 알았던 일본인 경찰, 조선인 경찰 등과 친일 부역자들은 그대로 자신의 위치를 보존했다.

 

 

 

11. 해방 이후

 

8월 14일 다급한 총독부는 여운형을 만났다. 행정권을 이양한다고 했다(하지만 미국이 채갔다). 여운형은 8월 15일 밤 건국동맹에 기반해 건국준비위원회를 발족시켰고, 다음날 휘문중학교에서 독립을 맞는 연설을 했다.

 

광주에 있던 박헌영은 서울로 올라와 경성콤그룹을 중심으로 세를 확보하고,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해 주도권을 확보해가는 한편 9월 3일 조선공산당을 창당하고 책임비서가 되었다.

 

김일성과 그의 부대는 소련 군함을 타고 9월 19일 원산에 들어왔다. 평양으로 들어와 물밑에서 조직사업을 하다가 10월 14일 평양시 군중대회에서 대중들 앞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이승만은 10월 12일 도쿄로 가서 맥아더를 만났고, 맥아더가 제공한 전용 비행기를 타고 10월 16일 입국했다. 미국은 반소, 반공의 분위기가 급격히 확산되었고 여기에 딱 맞는 인물이 이승만이었다. 미국은 이승만을 밀기로 결정했다.

 

11월 23일 김구, 김규식, 이시영 등 임시정부 1진이 서울에 도착했다. 12월에는 김원봉, 조소앙, 김성숙, 최동오 등의 2진이 들어왔다. 중국과 미국의 승인, 그리고 교통편을 제공받느라 늦었다. 후딱 들어오시지. 

 

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은 해방이 되었지만 바로 북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중국은 아직 국민당과의 싸움이 한창이었다. 1945년 말 무정, 김두봉, 최창익 등은 평양으로 들어갔고 박일우, 박효삼 등은 남아서 반국민당 전투를 벌이며 강력한 전투 부대로 성장했다. 그리고 이들은 한국전쟁에서 북한군의 주력 부대로 활약했다. 비극 중의 비극

 

분단된 남과 북에서 강력한 라이벌들을 물리치고 남에서는 이승만이, 북에서는 김일성이 대통령이 되었다. 개인의 수완도 뛰어났고, 거기에 더해 북에서는 소련이, 남에서는 미국이 밀어주는 사람이 정권을 잡기에 훨씬 유리한 점도 있었다.  

 

 

 

12. 해방을 보지 못하고.....

 

책의 맨 마지막 장은 해방을 보지 못하고 안타깝게 세상을 뜬 독립운동가들에 대해 간략히 소개했다. <아리랑>의 김산, 신흥학교 초대 교장이자 김구의 후견 역할을 한 김동삼, 만주벌 최후의 파르티잔 허형식, 시인이자 승려인 <님의 침묵>의 한용운, 여성 독립운동가의 대표이자 김원봉의 아내 박차정, 의열단 단원이자 시인인 이육사, 그리고 윤동주와 송몽규가 소개되었다.

 

 

 

 

 

 

시대의 요구 앞에 고개를 돌리지 않고 응답했던 사람들, 그들의 정신, 그들의 투쟁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것이 모든 것을 내던지고 나라를 위해 싸웠던 선열들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이리라. 마찬가지로 우리는 나라를 팔고 민족을 배반한 이들도 기억해야 한다. 일제에 협력한 대가로 그들은 일신의 부귀와 영화를 누렸고 집안을 일으켰다. 나아가 해방 후에도 단죄되지 않고 살아남아 우리 사회의 주류를 이루었다. 그뿐인가, 민족교육인이니 민족언론인이니 현대문학의 거장이니 하는 명예까지 차지했다. 이건 좀 아니지 않나? 독립운동가는 독립운동가로, 친일부역자는 친일부역자로 제 위치에 자리 잡게 해야 한다. (작가의 말 중에서)

 

 

 

작가는 책의 첫머리에 선조 이야기를 합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다 팽개치고 도망갔던 그 선조입니다. 이순신을 비롯한 여러 의병들의 대활약으로 일본군을 물리치니 다시 돌아온 선조가 한다는 말이 명나라 덕택으로 이겼다고 우깁니다. 그래야 자신이 덜 쪽팔리니까요.

 

 

 

이런 역사는 현대에 와서도 되풀이되고 있습니다. 한번 잘못 채워진 단추처럼 말이죠. 언젠가는 싹 풀어서 처음부터 다시 맞춰 채워야 되는데, 그게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바로 잡는 노력은 계속 해야겠지요. 그 노력은 어렵지 않습니다. 이 책을 읽어보면 됩니다ㅎㅎ. 위에 인용한 작가의 의도를 한번씩 되세기며 말이죠. 그리고 이런 거 저런 거 다 떠나서 책이 진짜 재미있습니다.

 

 

 

오랜만에 역사 공부를 신나게 했습니다. 우리나라 역사 뿐만 아니라 그 시기의 중국과 유럽, 일본에 대해서도 공부했습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책 속의 인물들에게 빠져서 살았습니다. 이제 어느 정도 정리가 되니 다른 사람에게 말을 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합니다. 

 

 

 

옆에 있던 막내 강이에게 슬쩍 책을 던져봅니다. 쓰으윽 한번 보더니 "아니 무슨, 이게 만화예요? 먼나라 이웃나라도 아니고." 하며 절래절래 고개를 흔듭니다. 내 그럴 줄 알았지. 강아 봐봐, 신흥무관학교라고 들어봤나? 이름 멋지지. 독립운동계의 서울대라고..... 주저리주저리....." 이렇게 말을 하니 제법 흥미를 보입니다. 막내랑 이야깃거리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이렇게 좋은 책을 만들어주신 박시백 작가님께 깊은 존경과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