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만화 이야기

시대와 운명에 저항한 한 아름다운 인간의 이야기 : 김금숙 <시베리아의 딸 김알렉산드라>

by Keaton Kim 2020. 9. 14.

 

 

 

시대와 운명에 저항한 한 아름다운 인간의 이야기 : 김금숙 <시베리아의 딸 김알렉산드라>

 

 

 

 

 

 

 

조선인 최초의 볼셰비키 혁명가

 

 

 

김알렉산드라를 처음 만난 건 <조선공산당 평전>에서 였습니다. 그 뒤로 몇몇 자료에서 그 이름을 들었습니다. 그 이름 앞에는 항상 "조선인 최초의 공산주의자", "조선인 최초의 볼셰비키"라는 수식어가 붙었습니다. 울나라 최초의 공산주의자이자 볼셰비키라니요. 그녀의 삶이 궁금했습니다. 그러다 이 책을 만났습니다.

 

 

 

이 책은 정철훈 작가가 쓴 <소설 김알렉산드라>를 원작으로 하여 김금숙 화백이 창작한 작품입니다. 그림체가 좀 익숙합니다. 김금숙이라는 이름도 어디선가 들어봤습니다. 아, 생각났습니다. 제주 4.3 사건을 그린 만화 <지슬>을 지은 분입니다. 그래서 그림이 익숙했네요. 이 만화책도 한 편의 수묵화를 보는 듯 합니다. 투박하면도 강렬한 그림체가 아름답고 슬픈 이야기와 묘하게 조화를 이룹니다.  

 

 

 

사진 출처 : https://n.news.naver.com/article/047/0002270565

 

 

 

제가 자료에서 읽은 김알렉산드라는 러시아 볼셰비키의 간부로, 누명을 쓰고 러시아 감옥에 갇힌 이동휘를 석방하는데 힘썼고, 그와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공산당인 한인사회당을 만든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볼셰비키 편에서 러시아 백위군과 싸웠고, 이른 나이에 안타깝게 처형을 당했다 정도가 제가 가지고 있는 지식이었습니다. 그런 영웅적?인 활약상을 그리지 않았을까 기대를 했는데요, 기대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1906년 김알렉산드라는 블라디보스토크 철도 노동자 사무실로 찾아갑니다. 야학 교사로 취직하기 위해서요. 대화를 나누던 중 철도 노조의 대빵은 김알렉산드라가 동청철도(러시아 치타에서 중국 북만주를 가로질러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연결되는 시베리아 철도의 지선) 공사판에서 살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가 철도노조의 전설과 같은 존재였던 표도르 김(김두서)이라는 것도요. 노조 측에서 김알렉산드라에게 노동자를 위해 함께 투쟁하자고 손을 내밉니다.

 

 

 

노동자에게 국적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무산자는 모두 형제다.

 

 

 

김알렉산드라의 아버지 김두서가 항상 했던 말입니다. 동청철도 현장에서 노동자를 위해 투쟁했던 아버지를 보고 자란 그녀가 노동운동에 발을 들이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습니다. 하지만 세상을 점점 격렬해져 갔고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은 무조건 잡아가는 시절이었습니다. 김알렉산드라는 목숨을 걸고 그들을 위해 싸웁니다.

 

 

 

작가는 혁명가 뿐만아니라 한 여자와 엄마로서의 김알렉산드라도 생생하게 그려냈습니다. 그녀는 부르주아 출신인 마르크와 결혼해서 아들 드미트리를 낳았습니다. 하지만 남편은 점점 도박에 빠지고 아내를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그녀의 결혼 생활은 행복할 수 없었습니다. 노동운동에서 그녀를 도와준 와실리 신부와 사랑에 빠지고 아들 보리스를 낳았습니다. 격동기를 사는 혁명가의 사랑은 불꽃 같았습니다. "내일을 약속할 수 없는 오늘을 사는 우리. 사랑하는 지금, 나는 살아있음을 느낀다. 사랑은 혁명이다!" 그렇습니다. 사랑도 혁명입니다.

 

 

 

1914년 김알렉산드라는 우랄 지역의 페름이라는 도시로 자진해서 갑니다. 거기는 온갖 국적의 사람들이 노동자로 일하는 벌목 현장이었습니다. 일터이지만 철조망이 쳐져 있고 밥은 개판이고 잠자리는 시궁창이었습니다. 일터는 감옥이었고 일꾼들은 죄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노동자들과 함께 했고 그들이 스스로 깨어나게 도왔습니다.

 

 

 

김알렉산드라는 애벌레가 나비가 되듯 그렇게 자연스럽게 노동운동을 하고 볼셰비키가 되었습니다. 페름의 그 활동으로 레닌의 오른팔이 인정하는 인재가 된 것이죠. 극동인민위원회의 중책을 맡았고, 한인들과 함께 <공산당 선언>을 조선말로 낭독했으며, 하바롭스크에서 최초의 한인 사회주의 정당을 이동휘 등과 함께 만들었습니다. 홍범도 장군도 잠깐 등장합니다. 짧게 자른 머리가 인상적이었습니다.

 

 

 

"너희가 살 세상은 지금 엄마가 사는 세상보다 좋은 세상이길. 엄마이기 때문에 이 길을 포기할 수가 없다."

 

김알렉산드라는 한 개인으로서도, 혁명가로서도 아주 매력적이다. 주근깨마저 매력적이다.

 

 

 

"이제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얼굴도 다르고 피부색과 국적도 다르지만 일하는 자로서 하나입니다. 노동과 계급의 형제, 언제 어디서나 서로를 도울 동지입니다."

 

김알렉산드라는 지금 시대에 태어났어도 훌륭한 사회 지도자가 되었을 것이다.

 

 

 

내 눈을 천으로 가리지 마라. 나는 죽음을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싶다.

 

 

 

김알렉산드라가 노동운동에 뛰어들고 볼셰비기가 되고 혁명가가 된 건 무슨 거창한 목표가 있어서가 아니었습니다. 단지 그녀는 계급과 지위를 떠나, 남녀 구분없이 인간으로서 모두가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런 사회가 더 나은 사회라 믿었고, 자기 자식들을 위해 더 좋은 세상을 만들려고 행동했습니다. 그녀가, 그녀의 삶이 아름답게 보이는 이유입니다.

 

 

 

러시아 백위군과 일본 연합군에 잡히는 과정, 그리고 재판 받는 과정이 비교적 상세하게 나옵니다. 여성으로서 자신의 범죄를 뉘우친다고 호소한다면 자유의 몸이 될 거라고 재판장은 말합니다. 하지만 김알렉산드라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만약 내가 당신의 말대로 여성으로서 자신의 범죄를 뉘우친다면, 나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배신하고 전 세계 여성 앞에 죄를 범하는 게 될 것이다."

 

 

 

그녀가 이른 나이에 죽지 않고 좀 더 살아서 활동했더라면 독립운동사에서 공산주의 세력의 역할과 행보가 아주 달라졌을 거라는 글을 읽었습니다. 그녀를 중심으로 공산주의자들이 결집했을테고, 그랬다면 자유시참변이나 국제공산당 자금사건과 같은 동족의 비극도 일아나지 않았겠지요. 노동자로 시작해 자연스레 볼셰비키의 간부가 된 그녀의 역할이 참 크고 많았을텐데,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도 할 일들이 너무나 많은 시대였는데, 서른셋 한창 전성기에 세상을 뜬 그녀가 참 안타깝습니다.

 

 

 

100년 전 격동의 시대를 살았던 아름다운 여인의 삶을 읽었습니다. 책을 덮었지만 가슴 먹먹한 여운과 울림에 책에서 빠져나오기가 힘들었습니다. 창 밖에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오래 서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