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 박시백 <35년 1권, 2권>
<35년>이 드디어 완간(총7권 세트, 당시의 세계 정세를 그린 별권은 덤 본책보다 재밌음)이 되었습니다. 야호! 신납니다. 오래 기다렸습니다. 초판 발행일을 보니 2018년 1월에 나왔네요. 2년 7개월이 걸렸습니다. 그 기간 동안 열심히 그린 작가도, 그리고 완결이 나오기를 기다린 나도 대단합니다ㅋㅋ. 일제 35년, 이 시기엔 대한 관심이 많았는데, 요렇게 집중적으로 다뤄 주는 책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더 없이 반가웠죠.
책에 흠뻑 빠져들었습니다. 읽다 이해가 잘 안되는 부분은 자료를 찾아가며 읽었습니다. 책을 읽다 연관되는 인물이나 사건이 나오면 다시 앞 권을 뒤적였습니다. 여태 내가 알고 있는 독립운동에 대한 각론과 인물들이 이 책으로 스르르 모여서 하나의 그림이 되는 신기한 경험을 했습니다. 내가 만나는 사람에게 이 책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 아이들에게도 당연히 권했습니다. 보더니 글이 너무 많다면서 던지네요ㅋㅋ.
책은 사나흘만에 다 읽었습니다. 책을 읽고 알게 된 사실과 지식, 느낀 점 등을 적어보았습니다. 꼭 기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인물과 사건을 쓰다보니 분량이 만만치가 않네요. 하지만 글을 적으면서 이 시기의 독립운동에 대해 더 자세히 알게 되었습니다. 한 사건의 앞뒤 인과관계가 맞추어져서 공부하는 재미가 더했습니다.
# 1권. 1910~1915 무단통치와 함께 시작된 저항
"여기가 어디죠?" "삼원보라 부르는 곳이오." 우당 이회영 선생이 형제들을 모아 독립운동을 위한 집안 차원의 망명을 역설했다. 형 이건영, 이석영, 이철영과 아우 이시영, 이호영까지 6형제가 모두 동의했다.
일가 60여 명이 강제 병합된 그해 겨울 망명길에 올랐다. 삭풍이 부는 만주 벌판 삼원보에 도착했을 때의 장면이 저 그림이다.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숭고하고 위대한 집안이다.
1.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모토, 데라우치 마사타케
이 책에 나온 안중근 의사의 그림을 들이한테 보여 주며 누구냐고 물어보니 손바닥 도장 찍은 사람이라고 대답했다. 그게 누구냐고 다시 물으니 하얼빈에서 나쁜 놈 죽인 사람이라고 하며 그제서야 이름이 생각나는지 안중근이라고 답했다. 그 나쁜 놈은 누구냐고 묻자 좀 생각하더니 이토 히로부미라고 했다. 뭘 한 사람이라고 묻자 대빵 나쁜 놈이라고 말했다. 나는 총독이었던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근데 틀렸네. 이토 히로부미는 총독부 이전의 초대 통감이었다. 데라우치가 총독이고. 들아, 미안해~~)
메이지 유신 후 일본의 주도 세력은 조슈번과 사쓰마번 출신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보신 전쟁 승리의 주역이었으니. 이 전쟁은 아사다 지로의 소설 <칼에 지다>의 배경이기도 했다. 조슈번과 사쓰마번 지역 출신은 지금도 그 영향력이 막강한데 아베총리는 옛 조슈번 출신이고 고이즈미 전 총리는 옛 사쓰마번 출신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조슈번 출신으로 1885년 일본 초대 총리이며 그 후로도 세 번 더 총리를 해먹었다. 총리 전에는 초대 한국 통감(총독 이전의 대빵)을 지냈다. 일본 내에서 온건파로 분류된다. 라이벌은 같은 조슈번 출신의 야마가타 아리모토로 일본 총리를 두 번 지냈다. 일본 육군의 아버지라 불리며 일본을 군국주의로 몰고간 장본인이다. 울나라를 비롯해 중국과 동남아 여러 나라들에게는 모든 일의 원흉 중의 원흉이다.
3대 한국 통감이자 초대 조선 총독자리에 올랐고 나중에 일본 총리가 된 데라우치 마사타케도 야마가타 세력의 적자다. 조선을 헌병과 경찰로 무단 통치하여 악명이 아주 높은 넘이다. 정한론의 사이고 다카모리를 따르는 사무라이들이 메이지 정부에 반역해 일으킨 세이난전쟁에서 총상을 입어 한쪽 팔이 평생 불구가 되었다.
2. 서당
조선이 병합되고 일본어를 학교에서 강제로 가르치니 "신식 교육도 좋지만 니놈이 왜놈 말 배워 씨부리는 꼴 보고 싶지 않다."며 사람들이 아이들을 서당에 보냈다. 진정 위대한 부모. 1911년 16,000개의 서당이 1916년 25,000개가 되었다.
3. 장지연 <시일야방성대곡>
학교 댕길 때 국어 시간에 저걸 배운 적이 생각난다. '단군과 기자 이래 4,000년 국민 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홀연히 망하고 말 것인가? 원통하고 원통하다. 동포여! 동포여!' 이 칼럼으로 을사조약의 원통함을 토해내었다. 하지만 그 장지연이 친일 반민족 행위자라고 배운 기억은 없는 것 같다. 1916년, 그가 쓴 글의 한 부분은 다음과 같다. '일본은 세계로 웅비하는 동양의 패왕이므로 일본을 중심으로 동양인이 서로 제휴하여 장벽을 없애고......'
4. 소작인과 노동자
총독부 통치와 토지조사사업으로 인해 고을 수령이 지 맘대로 세금을 걷어가는 건 많이 사라졌다. 하지만 지주의 힘이 더 강화되어 자작농이 소작농으로 내려가고 천석지기, 만석지기는 더 늘어났다. 게다가 일본에 쌀이 많이 수출되면서 조선엔 쌀이 모자라 쌀값이 올랐고, 서민들의 삶은 더 팍팍해졌다.
지주의 횡포에 농사를 포기하는 소작농이 늘어갔고, 이들은 도시의 노동자가 되었지만, 노동시간은 하루 12시간을 넘기는 경우가 허다했고, 임금은 일본인의 절반에 불과했다. 그런 자리도 있으면 감지덕지였다. "세상은 날로 화려해지는데 우린 왜 전보다 더 많은 시간을 죽어라 일하는데도 입에 풀칠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는 걸까?"라며 그 시대의 노동자들이 한숨을 쉬었다. 100년이 지난 지금의 노동자들도 저 대사를 한다.
5. 간도
농촌에서 살 수 없게 된 이들이 도시로 갔지만 더 많은 사람들은 이민이었다. 조선인들이 가장 많이 찾은 곳이 간도였다. 간도는 훈춘, 왕칭, 연지, 허룽 일대를 일컫는다. 백두산 동북쪽 지역이었다. 나중에는 백두산 서쪽 지대의 서간도와 구분하기 위해 북간도라고 불렀다.
이 지역은 본래 청나라가 자신들의 발상지라 하여 사람이 살지 못하게 했다. 여기서 산삼 캐다나 목이 날아간 조선인들도 꽤 있었다. 하지만 청나라가 힘이 없어지고, 조선에 흉년이 들면서 처자식을 굶길 수 없어 목숨을 걸고 강을 건너 빈 땅을 개간하여 씨를 뿌리고 정착했다. 러시아 연해주의 이주도 비슷하다. 당시 러시아는 조선인이 와서 빈땅을 개간해주면 땡큐였다.
6. 삼원보
서간도의 동네 이름이다. 신민회가 독립운동 기지로 선택한 곳이다. 이회영과 그의 형제들, 임청각의 주인 이상룡, 이동녕, 김동삼, 유인식, 김대락 등 독립지사들이 이주하여 미래를 준비했다. 여기서 신흥강습소를 세웠고, 이후 합니하로 이주하여 그 이름도 빛나는 전설의 신흥무관학교를 세운다(1912).
7. 서전서숙, 명동서숙
이상설, 이동녕, 정순만, 여준 등은 1906년 룽징춘(용정촌)에 터를 잡고 민족 교육을 통해 서전서숙을 열었다. 이듬해 이상설이 고종의 밀사가 되어 헤이그로 떠나고 제정난에다 일본의 감시가 더해지면서 서전서숙은 문을 닫는다.
이 이념을 계승해 명동서숙(뒤에 명동학교)를 김약연이 세웠다(1908). 김약연은 명동촌 건설의 주역이다. 명동은 서전서숙의 용정에서 15Km 떨어진 곳이다. 1899년 김약연의 가솔 31명을 비롯해 네 가문 144명이 건너왔고 1905년에는 마을 규모가 900호에 이르렀다. 영화 <동주>의 주인공 윤동주와 송몽규도 명동촌 출신이다.
8. 상동청년회와 신민회
항일을 위한 망명을 조직적으로 준비하고 결행한 주체는 신민회다. 1907년 미국에서 활동하던 안창호가 귀국하여 양기탁 등 <대한매일신보> 쪽 인사들과 옛 독립협회 동지, 그리고 상동교회의 상동청년회 멤버들과 그 수장 전덕기와 함께 만들었다. 항일을 위한 비밀 결사 단체다. 근데 독립운동가는 다 아는 비밀 결사 단체다.
전덕기 목사가 주도한 상동청년회는 대중집회와 을사조약의 반대 상소, 오적암살단, 한글 강습회 등의 사업을 벌였다. 정순만, 박용만, 이회영, 이상설, 이준, 이갑, 이승훈 등 그 면면이 쟁쟁했다. 고종에게 헤이그 특사 파견을 건의한 것도 이회영과 전덕기였다.
신민회의 총감독은 양기탁, 총서기 이동녕, 재무 전덕기, 집행위원 안창호, 그외 이동휘, 노백린, 유동열, 신채호, 박은식, 윤치호 등이 합류했다. 정주의 오산학교, 강화의 보창학교, 평양의 대성학교 등을 설립했고, 삼원보에 경학사, 신흥강습소를 만들었다.
1911년 105인 사건으로 해산되었다.
9. 우당 이회영과 그의 형제
이회영 일가는 조선 말 10대 부자에 들어갈 정도였다. 삼한갑족이었다. 망명을 위해 급히 집안 재산을 처분했는데, 오늘 시세로 치면 소값 기준으로 600억원, 땅값 기준으로 2000억원 정도였다고 한다. 서간도의 한인 단체는 사실상 우당 선생 일가의 재력으로 유지되었다. 그런 집안이었는데 독립운동으로 재산이 바닥 나서 형인 이석영 선생은 1934년에 굶어죽었다. 울나라의 노블리스 오블리제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집안이다.
단재 신채호와 더불어 아나키스트의 대빵이셨다. 역시 자유로운 영혼이시다. 3의사 중의 한 분인 구파 백정기 선생도 이분들과 가깝게 지내다 물들어서 아나키스트가 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잠깐 발을 담그나 그런 임시정부에 회의적이었다. 그런 조직이 있으면 지위를 놓고 독립운동가들이 감투 싸움을 할 것이라고 봤다. 근데 그게 결국 사실이 되어버렸다.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훈했다고 책에 나온다. 근데 어떤 분은 대통령장, 어떤 분은 애국장을 받으셨다. 찾아보니 등급이 있다. 대한민국장이 제일 높고, 그 다음이 대통령장, 그리고 독립장, 애국장, 애족장으로 나뉜다. 응? 근데 우당 선생이 독립장이라고? 대한민국장이 아니라? 이승만도 대한민국장인데? 이건 말이 안된다. 우당 선생에긴 건국훈장 종류별도 다줘도 모자라다. 이만한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또 보았더냐!. 독립운동에 등급을 매긴다는 거 자체가 말도 안되고.
10. 대종교
단군을 믿는 울나라 고유의 종교. 나철 선생이 만드셨다. 김교헌 선생이 2대 교주, 윤세복 선생이 3대 교주였다. 주요 대종교인은 신규식, 박은식, 신채호, 이시영, 여준, 이동녕, 이회영, 김동삼, 서상일, 김좌진, 이범석, 김두봉, 정인보, 주시경 등이 있다. 이건 뭐 모두 독립운동의 빛나는 별들 아닌가.
북로군정서가 대종교가 양성한 조직이다. 청산리 대첩의 그 북로군정서다. 그 후 북로군정서는 연해주로 들어가 대한독립군단으로 재편성되고, 결국 자유시 참변으로 해체된다. 서일은 북로군정서의 주요 인물이었고, 자유시 참변에 책임감을 느껴 자결한다.
책에서 대종교는 출발에서 포교까지 종교 활동 자체가 곧 독립운동이었다고 했다.
11. 안명근과 안악사건, 105인 사건
안명근은 안중근의 사촌 동생이다. 무관 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할 목적으로 부자들에게 협박?하여 돈을 모금하던 중 신천의 부호 민씨가 고발하면서 1910년 12월 평양에서 체포된다. 황해도 안악을 중심으로 안명근과 함께 활동하던 계몽운동가들을 무차별 잡아들였다(안악사건). 이 때 김구도 잡혀 15년 형을 받는다.
이 사건을 계기로 신민회에 대한 막연한 심증을 굳히고 일망타진하기 위해 양기탁 등도 잡아들이고 데라우치 총독 암살 미수 사건이라 조작하여 서북 지방의 계몽운동가 60여 명을 검거했다.
재판 중에 주모자 격인 안태국이 자신의 혐의에 대해 말도 안되는 조작된 증거라는 결정적인 증거를 내놓는다. 하지만 재판부는 잡힌 105명 모두에게 유죄를 선고한다(그 후 내외의 여론이 들끓어 2심에서는 99명에게 무죄가 선고되었다).
상동교회 목사로 신민회 핵심 간부였던 전덕기는 고문 후유증으로 죽고, 양기탁, 안태국은 5년 복역 후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이승훈은 5년 복역 후 교회 장로로 활동하다 3.1혁명에 기독교 측 대표로 참여했다. 안악사건의 중심에 있던 안명근은 종신형을 받아 10년 복역 후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12. 채응언
전설적인 의병장. 별명은 백년산 호랑이. 국내에서 활동한 사실상 마지막 의병이다. 대한제국 육군 보병으로 근무하다 1907년 군대가 강제해산되자 의병이 되어 일제에 대한 무력 항쟁을 이어갔다. 강제 병합 후에도 부하 300~400명을 거느리고 헌병파견소를 습격하는 등 여러 차례 일본 헌병과 교전했다. 체포되었을 때 일본 지휘관에게 "애썼다."며 대범함의 극치를 보였고, 재판정에서도 "강도상해죄가 뭐냐? 나를 의적의 이름으로 사형에 처해주기 바란다."며 당당했다. 1915년 평양 감옥에서 사형당했다.
13. 박상진과 대한광복회
왕산 허위는 1907년 13도 창의군의 군사장으로 선봉대에 서서 동대문으로 진격했다. 총대장인 이인영이 부친상을 이유로 사임하자 후임 총대장이 되어 서울 진공 작전을 펼쳤다.
박상진은 허위의 직계 제자였다. 1915년 의병계 조직인 풍기광복단 채기중과 손잡고 대한광복회를 조직했다. 첫번째 강령은 '부호의 의연금 및 일인이 불법 징수하는 세금을 압수하여 무장을 준비한다.'이고 두번째 강령은 '남,북만주에 군관학교를 세워 독립 전사를 양성한다.'였다.
강령에서 보듯 부자들을 협박하고 돈을 받았다. 협조하지 않는 악질 부자는 본보기로 처단했다. 그 중에는 대표적인 탐관오리 장승원(해방 후 총리를 지낸 장택상의 아버지)도 있었다.
14. 박용만과 이승만
박용만의 독립 운동에 대한 생각은 이랬다. "독립은 결국 무장투쟁을 통해서만 가능할 터. 따라서 우선 필요한 것은 훈련된 장교의 준비다. 땅을 얻어 농사를 지으면서 자급자족하고 저녁 시간이나 농사일이 한가할 때 군사훈련과 학습을 하는 사관학교를 세우자."
그리고 1909년 마침내 미국의 네브래스카 주에 한인소년병학교를 만들었다. 그 후 하와이로 가서 1914년 대조선국민군단과 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를 설립했다. 단원들은 낮에는 농장에 나가 일하고 저녁이나 쉬는 날이면 훈련을 받았는데 그 수가 많을 땐 300명에 달했다.
이를 한심하게 바라보는 이가 있었는데 이승만이다. 이승만은 철저하게 외교적 수완으로 독립하는 것이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하와이에서는 먼저 터를 잡은 박용만의 세력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대조선국민군단의 항일운동을 비난했고, 하와이 한인회를 개인 소유로 해나갔다.
1권 인명사전의 이승만 편을 보면 이런 글이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49년 반민특위 활동으로 일본 및 총독부에 협력했던 인사들을 처벌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을 밝혔다."
이승만이 잘못한 거는 수도 없이 많지만 제일 나쁜 게 바로 저거다. 친일 인사들을 제대로 처단하지 못하고 그들이 권력을 계속 유지하게 한 것. 이게 바로 역사에서 가장 큰 죄며 만악의 근원이다. 친일 반민족 행위자는 해방 이후에도 계속 떵떵거리며 잘 살고 심지어 부끄러워하지도 않았다. 독립운동의 후손들은 굶어 죽거나 이름 없이 사라졌다. 이 책을 읽으며 가장 아팠던 부분이었다.
# 2권. 1916~1920 3.1혁명과 대한민국임시정부
3.1만세운동의 진정한 주역들은 어쩌면 현장의 지도자들로 이름 없는 수많은 유관순들이다. 초기에는 기독교나 천도교 인사들과 학생, 교사들이 시위를 주도했고 이후 유생, 노동자, 농민, 상인, 승려, 기생 등으로 다양했다.
사람들은 그 동안 말을 안했지만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 확인했고, 단결된 힘에 스스로 놀라워했고, 이런 날이 다시 오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목숨을 바쳐서라도 이 기회에 기어코 독립을 이루어야 한다고 여겼다.
이렇게 비폭력 대중운동으로 시작된 3.1만세운동은 일제의 강경한 탄압과 만나면서 전 민족적인 항쟁으로. 3.1혁명으로 진화해 나갔다.
1. 1차 세계대전
1914년 6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왕위 계승자가 사라예보를 방문했다가 세르비아 청년에게 암살당한다. 이를 빌미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 니는 인제 죽었어."하며 선전포고를 했다. 그러자 같은 슬라브계 나라인 러시아가 세르비아 편에 섰고 독일은 같은 게르만 민족인 오스트리아 편에 서서 전쟁에 뛰어들었다. 이렇게 시작해서 1918년 종전될 때까지 전 유럽을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고 갔다.
뜯어 먹을 식민지가 없어지자 유럽 열강들은 발칸 반도로 눈을 돌렸고,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발칸제국의 강국으로 떠오르는 세르비아를 밟으려 했다. 오스만 제국도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동맹국 진영에 합류했다. 미국은 꽁무니를 빼고 있다가 독일의 잠수함 유보트에 미국 선박이 피해를 입자 1917년에 연합국에 합류했다. 미국의 참전으로 인해 대전은 급속하게 연합국 측 우세로 바뀌었다.
하지만 연합국 측에도 손실이 있었다. 러시아 혁명을 일으킨 레닌의 최우선 과제는 전쟁에서 발을 빼는 것이었다. 제국주의 전쟁에 자국민이 피 흘리는 걸 더 이상 좌시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과감하게 연합국 측에서 탈퇴하고 전쟁에서 발을 뺐다. 하지만 사회주의 혁명으로 피해를 입은 지주, 귀족, 자본가 등의 구세력이 각지에서 백군을 조직하여 혁명정부와 맞섰다. 러시아 내전이 시작되었다. 곰을 피하니 호랑이가.... 혁명의 길은 멀구나!
일본도 이 전쟁에 참여하는데, 연합국 측이었다. 그러니까 1차 세계대전의 승리국이다. 전쟁 후 중국의 산둥반도와 지금의 팔라우 섬이 있는 남양군도를 먹었다. 일본은 점점 강해져갔다.
2. 이동휘
일찍이 한성무관학교를 나온 대한제국 장교였다. 신민회에도 적극 참여하였으며 북간도와 연해주로 망명하여 무관학교를 세워 독립 전쟁을 이끌 간부를 길러내고자 힘썼다. 북간도, 연해주 일대에서는 이상설에 버금갈 정도로 명성이 자자했다.
1917년 감옥에서 사회주의를 제대로 접하고 이어 들려온 10월 혁명과 볼셰비키 정권 소식을 듣고 "조선이 가야할 길은 사회주의에 있다. 볼셰비키 정부와 손잡고 일본제국주의와 싸워 민족을 해방하고 사회주의 혁명도 이룩하자."고 결심했다.
1918년 러사아 하바롭스크에서 한인 최초이자 아시아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 한인사회당을 만들었다. 오바실리, 유동열, 김립, 김알렉산드라 등이 간부진을 구성했다.
하지만 러시아의 전로한족회는 소비에트 붉은 정부를 지지도 반대도 하지 않았다. 이때는 볼셰비키 정부(적군)와 그에 반대하는 백위군(백군)의 싸움인 러시아 내전이 한창이었기 때문이다.
이동휘는 임시정부에도 참여했고 국무총리를 지냈다. 당시의 명망으로 보자면 임시정부의 수장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1919년 고려공산당을 창당했다. 1922년 국제공산당 자금사건이 터지자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이 책 인명사전에는 이동휘에 대해 이렇게 나와있다.
"공산주의 운동의 선구적 활동을 하였으나, 이동휘의 근본적인 사상에는 무엇보다 반일 민족 독립이 최우선에 놓여 있었다. 이동휘 자신도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아무것도 모르는 인물이었다'고 스스로 고백한 바 있다. 이동휘는 오직 반일 민족 독립운동의 숙원을 이루기 위한 한 방편으로서 소련 정부와 제휴한 민족주의적 혁명운동가라고 할 수 있다."
3. 김알렉산드라
조선이 최초의 볼셰비키 당원이자 최초의 사회주의자. 두번째가 이동휘라는 말도 있다. 이동휘가 사회주의를 배우기도 전에 김알렉산드라는 이미 러시아 볼셰비키 극동방면 지도자였다. 레닌의 오른팔이 인정할 정도였다. 독일 스파이로 오해받은 이동휘를 구명운동으로 석방시켰다.
1918년 김동휘, 김립 등과 한인사회당을 만들었는데 실세는 김알렉산드라였다. 1918년 한인사회당 세력은 볼셰비키와 연대하여 하바롭스크에서 백위군과 싸웠는데 패퇴했다. 김알렉산드라는 이때 잡혀서 처형당했다.
김알렉산드라가 사망한 뒤에 러시아 한인 공산당 세력은 둘로 분열되었고 자유시 참변 등의 나락으로 빠졌다. 그녀가 살아있었더라면 공산주의 세력과 역할이 전혀 달라졌을 거라는 평가다.
김금숙 작가의 <시베리아의 딸 김알렉산드라>를 샀다. 아껴서 읽으려고 아직 책장을 펴지 않고 있다. 읽고 나면 여기에 추가로 적을 거리가 생기겠지.
4. 김규식과 파리강화회의
독립운동가 중 그 누구보다 현실을 냉정히 통찰했던 당대의 엘리트. 책에서도 아주 미남으로 그렸다. 1918년 상하이에서 여운형은 신한청년당을 조직했다. 그리고 전후 처리를 위해 열리는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대표로 파견했다.
출발하기 전에 이런 중대한 제안을 했다. "파리에 파견되더라도 서구인들이 내가 누군지 어찌 알겠습니까? 일제의 학정을 폭로하고 선전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국내에서 독립을 선언해야 하고 무슨 사건이 발행해야 맡은 바 사명을 잘 수행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3.1운동의 시발점이다.
여러 단체에서 이 파리에 사람을 보냈는데, 미주 대표인 이승만과 정한경은 비자조차 받지 못했고, 러시아 한인회인 대한국민회의 대표로 파견된 윤해와 고창일은 러시아 내전으로 고생고생하며 파리에 도착했으나 이미 3개월 전에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되었다. 유림에서는 김창숙을 대표로 하여 유림들의 서명을 받은 장서를 함께 보냈으나 상하이에서 더 이상 가지 못했다. 오직 김규식만이 3.1혁명이 한창 진행중이던 3월 13일 파리에 도착했다.
파리에서 각국 대표를 만나 한국 상황을 전하고 지지를 호소했으나 일본측의 방해와 열강의 비협조로 한국 문제는 강화회의 의제로 상정조차 될 수 없었다.
5. 3.1 운동을 계획하고 주도한 천도교와 손병희
천도교는 민족적 성향이 강했고 당시 100만이 넘는 신도를 확보하고 있었다. 독립운동을 모색하던 중 상하이 신한청년당에서 보낸 밀사를 만났고 일본 유학생 송계백이 2.8 독립선언서 초안을 들고 찾아왔다. 때마침 1919년 1월 고종이 세상을 떴다. 손병희는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명망있는 사람들을 규합했다. 신민회 출신 기독교의 이승훈도 대대적인 민족운동을 꾀하던 차에 천도교 측의 제안을 받고 함께 하기로 했다. 불교계의 한용운은 "마땅히" 라고 한 마디로 응했다. 종교계 연합이 이루어지자 학생들과 함께 하자고 했고 시위 행진을 맡아달라고 했다.
송진우, 한상윤, 김성수, 최남선은 민족대표 서명을 사양했다. 명망은 있으나 의식은 없는 사람들이었다. 다만 최남선은 독립선언서 작성을 자처했다. 민족대표 33인은 모두 종교계 사람들이었다.
6. 기생 김향화와 한금화
이 책에서는 3.1운동을 3.1혁명이라 썼다. 그래, 혁명이지. 3.1혁명은 전국 각지에서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한마음이 되었다. 기생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오히려 앞장섰다. 수원에서는 김향화의 주도로 만세운동을 벌렸다. 진주에서는 기생독립단의 이름으로 시위행진이 일어났고 주모사의 한 사람인 한금화는 명주 자락에 "기쁘다. 삼천리 강산에 무궁화 다시 피누나"라는 혈서를 썼다. 해주의 기생들은 피로 그린 태극기를 앞세우고 만세운동 대열의 선두에 섰다.
기개와 지조의 기생들이었다.
7. 제암리 학살사건
수원 제암리 주민 천여 명이 만세운동을 벌였다. 강경 진압에 분노한 사람들은 더욱 격렬해졌고 사상자가 나왔다. 시위대는 일본 순사를 처단했다. 여기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 헌병들은 제암리 주민을 예배당 안에 가두고 총탄 세계를 퍼부은 다음 불을 질렀다. 총탄과 불길 속에서도 죽지 않고 뛰쳐나온 이들에겐 재차 총탄이 날아들었다. 23명이 희생당했다. 고주리에서도 일가족 6명이 생화장을 당했다.
이를 세상에 알린 건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수로 들어와 의사이자 선교사로 활동했던 스코필드 박사였다. 그는 이 일로 조선에서 추방되었으나 한국 전쟁이 끝나고 다시 한국에 돌아왔고 교수로 일하며 전쟁 고아들을 돌보았다. 서울 현충원에 묻혔다.
8. 해외로 번진 혁명
독립운동가들이 득실거리는 중국 상하이와 간도에서는 엄청난 인파가 모여 만세운동을 벌였고 거리 행진에 나섰다. 중국 당국의 억압이 계속되자 만세운동은 점차 무력투쟁으로 바뀌었다.
연해주에서는 문창범의 대한국민회의가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미국에서는 안창호(1910년 미국의 한인 단체이자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인국민회를 만들었다. 당시 회장이었다)가, 하와이에서는 박용만이, 필라델피아에서는 서재필이 주도하여 한인대회를 열고 시가행진을 벌였다.
9. 3.1운동과 임시정부의 설계자 여운형
여운형은 상하이에서 조소앙 등과 신한청년당을 조직하여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했다. 국내의 대표들에게 대중운동을 제안했고 3.1혁명으로 꽃을 피웠다. 상하이 독립운동 세력은 임시정부의 수립을 당연한 수순으로 생각했다. 3.1혁명의 전개와 함께 각지의 독립운동가들이 상하이로 몰려들었다.
임시정부 수립이 즉각 논의되었다. 그 중심에는 신한청년당이 있었다. 여운형은 사실상 3.1운동과 임시정부의 설계자였다. 역시 여운형 선생이시다. 이 정도로도 안창호, 김구, 김원봉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하시다(해방 전후의 활동도 대단하시지만).
10.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4월 9일 임시의정원이 구성되었고, 초대 의장은 이동녕 선생이었다. 신석우의 제안으로 국호가 대한민국으로 결정되었다. 국무총리에 이승만, 이동녕, 안창호 등이 추천되었고 투표로 이승만이 뽑혔다.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출범했다.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재무총장 최재형
법무총장 이시영
군무총장 이동휘
교통총장 문창범
11. 안창호와 통합 임시정부
위의 조직으로 임시정부를 구성했지만 저 인물들 중 상하이에 들어와 있던 이는 이시영 선생밖에 없었다. 그래서 차장을 두어 총장의 역할을 대신키로 했다. 또한 이 시기에 국내에서 만들어진 한성정부, 연해주에서 조직된 대한국민회의가 임시정부를 표방했다. 따라서 통합을 이루어야만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라 할 수 있었고, 전체 독립군을 통일적으로 지휘할 수 있었다. 이 통합을 이루어낸 인물이 안창호였다.
안창호는 모든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다시 조직하기로 했다. 통합에 동의하였으나 대한국민회의는 임시정부를 러시아에 두자고 했다. 대한국민회의는 간도와 연해주 일대에 뿌리내린 한인들을 기반으로 다름 제대로 만든 임시정부였고 재외 한인의 대표 기관이라 자임할 정도였다. 그러니 임시정부를 러시아에 두자고 한 것도 당연했다.
이 때 이승만의 행보도 문제였다. 임시정부의 국무총리였는데 미국에서 프레지던트, 즉 대통령 명함을 파고 대통령 행세를 했다. 임시정부의 승인도 없이 마음대로 구미위원회를 만들어 교민들의 성금을 자기가 챙겼다. 진짜 욕심 많은 시키다.
대한국민회의와의 협상은 결렬되어 의장인 문창범은 블라디보스톡으로 돌아갔으나 이동휘가 상하이에 남았다. 그리고 안창호는 통합 정부 조직을 진행했다. 1920년 1월 3일 통합 임시정부가 출범했다.
대통령 이승만
국무총리 이동휘
내무총장 이동녕
법무총장 신규식
재무총장 이시영
안창호는 통합 임시정부가 출범하자 자신은 물러나 앉았다.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오직 임시정부의 성공을 위해 일했다.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던 임시정부의 수장 후보는 손병휘, 이승만, 이동휘, 안창호 등이었다. 이승만이 활동하던 미주 지역에서도 운동 전체로 보면 지위나 성과에서 안창호에 한참 밀렸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이승만을 추대한 이유는 당시 최강국이던 미국과 얘기가 통할 인물이라고 생각했고, 출신이 기호파였다(안창호는 서북파). 기호파의 대표적인 인물은 이상설이었고, 그가 죽자 이승만이 부상했다. 기호파는 서북파보다 다수였고 힘이 셌다.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의 최정점에 계신 지도자를 꼽으라면 안창호, 김구, 김원봉, 여운형이다. 이 책을 다 읽고 난 후의 내 생각은 그렇다. 저자 박시백의 생각도 그럴 것 같다.
12. 국제공산당 자금사건
이동휘의 한인사회당은 1919년 코민테른 가입을 결정하고 박진순, 이한영, 박애를 모스크바에 보내 교섭하게 했다. 그리고 400만 루블을 선전비로 받았다. 박진순은 모스크바에 남아 활동을 계속 했고 26명의 코민테른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레닌과 사진도 함께 찍고.
이한영과 박애는 이르쿠츠크에 머물던 중 이르쿠츠크 전러한인공산당에게 200만 루블을 빼앗겼다. 북경에서도 극동공화국 전권위원에게 100만 루블을 빼앗기고. 결국 100만 루블만 상하이로 전달했다.
이어 임시정부가 만들어지고 국무총리 이동휘는 "우리의 독립을 지지하고 도움을 줄 수 있는 열강은 볼셰비키 러시아밖에 없다."며 임시정부를 설득해서 한인사회당 당원이었던 한형권을 임시정부 특사로 모스크바로 보냈다. 모스크바에 남아 있던 박진순과 함께 레닌을 만났고, 레닌은 금화 200만 루블을 혁명자금으로 지원했다.
60만 루블을 먼저 지원받았고, 이 중 40만 루블을 가지고 왔다. 박진순과 한형권은 오던 중에 러시아 아무르주의 중심도시 블라고베셴스크에서 당원인 김립과 계봉우를 만나 이렇게 논의했다. "어쨌든 이 돈은 우리 한인 사회당의 외교적 노력으로 얻어낸 것이므로 사용권도 당연히 한인사회당에 있다." 1920년 12월 박진순과 김립이 이 돈을 가지고 상해로 와 한인사회당에게 인계했다. 이 돈으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활동했다.
참고로 이때 받은 금화 루블은 일반 루블에 비해 140배의 가치가 있었다. 그러니까 금화 40만 루블은 전에 받았던 400만 루블의 열네 배에 해당했다.
그 전에 한인사회당의 주도로 상하이 사회주의 세력을 규합하여 한국공산당을 만들었다. 한국공산당의 여운형과 안병찬은 한인사회당은 이제 한국공산당이 되었으므로 그 돈은 당연히 한국공산당에게 귀속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임시정부 측에서도 그 돈을 내놓으라고 했고, 급기야 김구는 1922년 2월 독립운동가이자 사회주의 혁명가였던 김립을 처단했다.
힘들게 얻어 온 돈 때문에 우리끼리 싸웠다. 독립운동의 노선 차이가 싸움의 가장 큰 이유였다. 만악의 근원, 돈.
13. 상하이파와 이르쿠츠크파
상하이와 이르쿠츠크에서 같은 이름의 다른 고려공산당 창립대회가 열렸다. 사람들은 이를 상하이파 공산당, 이르쿠츠크파 공산당이라 불렀다. 상하이파는 이동휘가 이끌었던 한인사회당 계열이었고, 이르쿠츠크파는 한인사회당 안티 연합이었다.
이르쿠츠크파의 당면 목표는 당연히 사회주의 혁명이었고, 임시정부는 자본가들의 조직이므로 참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반면에 상하이파는 궁극적인 목표는 사회주의 혁명이지만 그보다는 우선 민족해방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일제에 대항하는 종교인들과 자본가들과도 손잡아야 하고 임시정부와도 협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노선상의 차이도 있었지만 더 문제는 과정상에 쌓인 해묵은 감정이었다. 이는 자유시 참변이라는 민족의 비극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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