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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이야기

이러매 눈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 박시백 <35년 3권, 4권, 5권>

by Keaton Kim 2020. 9. 10.

 

 

 

이러매 눈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 박시백 <35년 3권, 4권, 5권> 

 

 

 

# 3권. 1921~1925 의열투쟁, 무장투쟁 그리고 대중투쟁 

 

 

 

 

1922년 겨울 김원봉은 베이징에서 신채호를 만난다. "선생님께서 의열단의 정신을 글로 써주셨으면 합니다." "기꺼이." 그리하여 나온 것이 조선혁명선언이다.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 무기이다.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 손을 잡고 끊임없는 폭력, 암살, 파과, 폭동으로써,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고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여, 인류로서 인류를 압막치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수탈하지 못하는 이상적인 조선을 건설할지니라."

 

- 의열단의 정신이 된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 마지막 구절

 

님 웨일즈의 <아리랑>에 따르면 의열단원은 언제나 죽음을 눈 앞에 두고 있다고 생각해, 살아있는 한 자유롭게 생활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언제나 옷을 멋지게 차려입고 머리를 잘 손질하였으며,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해 언제나 이번이 죽기 전 마지막 사진이라고 생각하면서 찍었다고 한다.

 

잘생기고 멋지게 차려 입는 의열단 단원이다. 실제 저 그림의 모델이 된 사진이 있다.

 

 

 

1. 독립운동, 친일, 그리고 참회의 주인공 최린

 

최린은 3.1혁명을 사실상 기획하고 총괄한 조직가였다.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이며 손병희와 함께 천도교 측 중심 인물이었다. 3.1운동으로 옥살이를 하다 1921년 출소했다. 이듬해 천도교 교주인 손병희가 세상을 뜨자 최린의 지위는 더욱 탄탄해졌다.

 

감옥에서 나온 그를 일본넘들이 살살 꼬드겼는데 넘어가고 말았다. 출소 후 쭉 친일의 길을 걸었다.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어 재판이 열렸고 최린은 자신의 친일 행위를 시인하고 솔직하게 참회했다. 당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민족 대표의 한 사람으로 잠시 민족 독립에 몸담았던 내가 이곳에 와서 반민족 행위를 재판 받는 그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다. 광화문 네거리에서 소에 사지를 묶고 형을 집행해 달라. 그래서 민족에 본보기로 보여야 한다."

 

공판정에 같이 있던 이광수가 "나는 민족을 위해 친일한 것이다."라고 하자 옆에 서 있던 최린이 이광수를 향해 "입 닥쳐!"라고 명대사를 날렸다.

 

 

 

2. 양근환

 

독립운동가. 일본에서 친일파 민원식이 묵고 있는 호텔로 찾아가 친일 매국 행위를 질책한 뒤 품고 있던 단도로 처단했다. 당시 일본인 부인과 자식까지 있는 고학생이었다.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2년을 복역했다. 재판 과정에서 시종일관 의연하고 활달한 자세를 견지했다. 도쿄 감옥 등지에서 복역한 뒤 1933년 출옥했고, 6.25사변 때 퇴각하던 북한군에 납치돼 처형당했다.

 

 

 

3. 밀정의 탑 배정자

 

세상은 넓고 정탐할 일은 많다. 밀정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이라면 단연 배정자다. 일찍 고아가 되어 기생, 비구니를 거쳐 일본인 밀정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김옥균을 소개받고, 다시 김옥균을 통해 이토 히로부미를 알게 되었다.

 

이토는 그녀를 고습 스파이로 훈련시켰다. 승마, 수영, 사격, 변장술 등의 밀정 교육을 받고 귀국한 그녀는 고종에게 접근해 신임을 얻고는 왕실의 주요 정보를 빼내곤 했다. 이토가 죽고 끈 떨어진 그녀를 헌병 사령관 아카시가 헌병사령부 촉탁으로 고용했다. 예뻐서 뽑았다.

 

하얼빈 일본총영사관 밀정으로 활동했는데 주로 북만주 일대의 조선인과 독립운동가의 동정을 정탐, 보고했다. 아울러 만주, 몽골, 상하이 등지에서 정탐 활동을 이어갔다.

 

김해 출신이다. 크헉.

 

 

 

4. 서로군정서와 신흥무관학교

 

서로군정서는 류허현 삼원보의 독립운동가들이 만들었다. 서간도 한인들의 자치조직인 한족회에서 독판 이상룡, 참모부장 김동삼, 사령관 지청천으로 구성된 군정부를 만들었다. 임시정부의 제의로 서로군정서로 확대 개편했다.

 

서로군정서는 산하의 신흥학교를 신흥무관학교로 개편해 본격적으로 독립군 양성에 나섰다. 많은 열혈 청년들이 소문을 듣고 신흥무관학교로 찾아왔다. 독립운동의 전설들은 다 이 학교 출신이다.

 

신흥무관학교는 화려한 교관들로 유명했다. 일본 육사 출신의 김광서, 지청천, 윈난 무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이범석 등이 청년들을 가르쳤다.

 

북간도에는 당시 대원이 천 명이 넘는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가 있었다.

 

 

 

5. 여자폭탄범 안경신

 

서간도 임시정부 군사기관인 광복군 총영에 가담하여 활동하다 1920년 8월 평양경찰서에 폭탄을 던졌다. 7개월 간 도주하다 1921년 3월에 잡혔는데, 그녀의 품엔 생후 일주일 된 아기가 있었다. 그러니까 폭탄을 던졌을 때 임신 중의 몸이었다.

 

세상은 그녀를 여자폭탄범이라 불렀고, 1심에서 사형, 항소심에서 10년 형을 받아 7년간 옥살이한 뒤 가출옥으로 나왔는데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6. 청산리전투와 경신참변

 

독립투쟁사에서 가장 빛나는 전투. 1920년 10월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과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등이 연합하여 일본군을 개박살냈다. 전쟁에 참가한 독립군 대원은 2,000~4,000명, 일본군 전사자 1,200~2,000명, 독립군 전사자 100~300명이었다.

 

이에 일본군은 복수전을 하려고 대규모 부대를 동원했다. 하지만 독립군은 이 사실을 알고 러시아 이만으로 들어가버렸다.

 

복수의 대상이 없어진 일본군은 무자비하게 양민을 학살했다. 특히나 청산리전투가 일어났던 지역에서는 남자들은 모두 집에 가두고 불태웠다. 몇 개월 사이에 3,000채가 넘는 가옥, 41개의 학교가 불탔고 3,000명이 넘는 조선인이 살해되었다. 후에 중국 난징에서도. 비겁하고 악랄한 시키들.

 

 

 

7. 자유시의 비극

 

극동공화국은 러시아 이만으로 들어간 독립군을 반겼다. 그리고 무장해제 후 엘렉세엡스크(자유시, 지금은 스보드니)로 이동할 것을 제안했다. 거기가 안전하며 더 나은 무장을 후원하겠다고. 무장해제 요구에 서일, 김좌진, 이범석의 북로군정서는 다시 만주로 돌아갔고, 홍범도를 비롯한 다른 독립군들은 이를 받아들여 자유시로 들어가 미리 와 있던 독립군과 통합하고 대한의용군이라 명명했다. 김좌진은 소비에트러시아를 믿지 못했고 홍범도는 소련이 독립군을 도와줄 것이라 여겼다(홍범도는 <시베리아의 딸 김알렉산드라>에도 나온다).

 

한편 이르쿠츠크에서도 통합 한인 부대를 조직했다. 총사령관에 갈린다시월린, 사령관은 오하묵이었다. 그리고 이 부대원 600명을 이끌고 자유시로 들어와 고려공산군 임시군정의회를 만들었다. 때를 같이 해 러시아 한인 부대에 대한 지위권이 극동공화국에서 코민테른으로 이관되었고, 코민테른과 러시아 군을 등에 업은 임시군정회의는 러시아 한인 부대의 지휘부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대한의용군은 군정의회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한의용군 측은 그들에게 적대적으로 행동해운 군정회의의 최고려, 김하석, 오하묵을 해임하면 통합에 협력하고 지휘를 받아들이겠다고 요구하였으나 묵살되었다. 협상이 되지 않자 군정회의 측은 무장해제를 요구했고 이에 응하지 않는 대한의용군을 공격했다.

 

이로 인해 대한의용군 40~100명 전후가 사살되었고 1,000여 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100여 명은 탈출했다. 진압군 측은 고려혁명군과 러시아군 각각 1명 사망한 것이 피해의 전부였다. 그러니까 대한의용군이 적극적으로 응전하지 않은 것이다. 같은 동포에게 총질하려고 독립군이 된 게 아니었으니. 포로의 절반은 고려혁명군에 편입되었고 절반은 강제노동형을 받았다.

 

상하이파 공산당에게 계속 발린 이르쿠츠크 공산당이 자신들의 세력을 키우기 위해 러시아 군과 함께 독립군을 죽인 사건으로 동족 상잔의 비극이다. 스보드니에 있는 자유시사건 표지석에는 '다시는 우리 우리끼리 싸우는 일이 없기를' 이라고 적혀있다.

 

 

 

8. 의열 투쟁의 서막

 

 

1) 황상규, 박재기, 윤세주, 이성우, 신철휴 등 핵심 단원 - 1920년 3월 국내에 잠입하여 조선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 경성일보사를 폭파하려고 하였으나 마지막 실행단계에서 비밀이 누설되어 실패했다. 20명이 검거되었고 12명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윤세주는 이 일로 7년을 복역했다.

 

 

2) 박세혁 - 1920년 9월 부산경찰서를 폭파했다. 자신도 무릎에 중상을 입고 투옥되었는데 단식으로 자결했다.

 

 

3) 최수봉 -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던졌다. 사형당했다.

 

 

4) 김익상 - 의열단 최정예. 1921년 9월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던졌다. 그리고 유유히 빠져나왔다. 이듬해 이종암, 오성륜과 함께 상하이에서 다나카 기이치 일본대장 암살 작전에 참가했다. 오성륜이 총을 쐈고, 이어 김익상이 총을 쐈고 폭탄을 던졌고, 이종암이 다시 폭탄을 던졌으나 결국 죽이지 못했다. 김익상과 오성륜은 체포되었고 심문 과정에서 총독부 사건의 주인공임이 드러났다. 사형 선고를 받고 21년 간 옥살이했다.

 

 

5) 오성륜 - 님 웨일즈의 <아리랑>에서 김산이 최고의 동지이자 혁명가라 했던 오성륜은 다나카 암살 사건으로 잡혔으나 탈출에 성공했다. 소련으로 가서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공부했고, 이후 중국공산당에서 활동을 이어갔다.

 

 

6) 김상옥 - 사백대 일 전설의 주인공. 1923년 1월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아비규환 수라장으로 만들었다. (박시백의 이 책에서는 김상옥이 던진 것은 아니라고 나오는데, 종로경찰서에 투척된 폭탄은 위력이 대단했고 당시 그 정도의 폭탄을 제조할 능력은 의열단 밖에 없었다. 따라서 김상옥의 의거로 보는 게 맞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이후 은신처가 발각되어 무장경찰대 400명을 상대로 시가전을 벌였다. 일본 경찰 16명을 죽이고 자결했다. 영화 <밀정>에서 박희순이 열연한 김장옥이 바로 김상옥이다.

 

 

7) 김지섭 - 1924년 1월 일본 황궁에다가 폭탄을 던졌다. 모두 불발되었다.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928년 옥사했다.

 

 

8) 나석주 - 1926년 12월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졌다. 거사 후 경찰들과 대치하여 총격전을 벌이다 "나는 조국의 자유를 위해 분투했다. 이천만 민중아! 분투하여라!"고 군중을 향해 외친 뒤 자결했다.

 

 

 

9. 임시정부 초기 주요 인사

 

이승만은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에 없었지만 대통령이란 지위와 기호파의 지지를 배경으로 영향력이 막강했다. 이동휘는 사회주의자였지만 민족의 독립을 우선 과제로 삼았기에 임정에 참여했고 국무총리를 맡았다. 안창호는 출범 과정의 여러 갈등을 조정해가며 사실상 임시정부 수립의 산파 역할을 담당했다.

 

그리고 베이징엔 임시정부를 반대하는 신채호, 박용만, 이회영 등이 있었다. 신채호는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추대하는 것을 보고 손을 뗐으며, 박용만도 하와이에서 이승만에게 숱하게 당해서 이승만의 그 욕심을 잘 알고 있었다. 이회영은 처음부터 정부 형태의 조직을 반대했다. 내부 권력 투쟁으로 흐를 게 뻔하다고 생각했다.

 

김좌진을 비롯한 만주 무장세력은 임시정부를 지지하긴 했지만, 이즈음 봉오동전투, 청산리전투, 경신참변 등이 숨가쁘게 이어지던 때라 임시정부에 관심을 쏟을 여력이 없었다. 임정의 처사에 분개하여 통합을 거부하고 떠난 대한국민회의는 사회주의로 노선을 전환했다.

 

 

 

10. 이승만의 탄핵

 

임시정부 분열의 진앙지는 외부가 아니라 바로 임정 대통령 이승만이었다. 대통령이 되고도 상하이에 오지 않았고 위임 통치를 청원하였으며 구미위원회를 내세워 동포들이 내는 성금을 자기 주머니에 넣었다. 이승만은 불신임안이 계속 나오자 1920년 12월 상하이로 왔다.   

 

이승만은 계속 고압적인 태도로 일관했고, 이동휘는 그 꼬라지를 보고 더러워서 총리직을 사임하고 임정을 떠나버렸다. 안창호를 비롯한 임정의 주요 인물들은 국민대표회의를 열어 새로운 지도 조직을 만들자고 했다. 임정은 창조파, 개조파, 임정고수파로 분열했고 내분이 격화되었다.

 

이 모든 원인이 이승만 때문이었다. 1923년 4월 탄핵안이 나왔고 1925년 3월 탄핵심판위원회는 이승만의 면직을 결정했다. 그러니까 이승만은 탄핵 당한 최초의 대통령이다.

 

이승만에 이어 박은식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사임했다. 대통령에서 물러나고 3개월 뒤 세상을 떴다. 박은식의 추천으로 서로군정서 총재였던 이상룡이 국무령이 되었으나 상하이 독립운동 진영의 여전한 갈등 상황에 베이징으로 거처를 옮겨버렸다. 임시정부는 규모도 위신도 크게 쪼그라들었다. 이어 1926년에 홍진이 취임하면서 임시정부를 다시 정비했다. 홍진 다음에 국무령에 오른 이가 김구였다.

 

김구는 이 시기 내내 이승만을 지지했다. 그는 친 이승만파였다. 왜 그랬을까. 임시정부를 지키기 위해서였을까? 굳이 이승만을 지지하지 않고서라도 임정을 지키고 유지하는 방법은 많았을텐데.

 

 

 

11. 나혜석

 

조선 남성의 심사는 참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 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 합니다.....

 

남편의 아내가 되기 전에, 내 자식의 어미이기 전에, 첫째로 나는 사람인 것이오.....

 

조선의 남성들아. 그대들은 인형을 원하는가? 늙지도 화내지도 않고 당신이 원할 때 방긋방긋 웃기만 하는 인형 말이오. 나는 그대들의 노리개를 거부하오.

 

- 나혜석의 <이혼 고백서> 중에서

 

 

 

12. 아나키스트 신채호와 이회영, 그리고 흑도회

 

의열단의 정신인 <조선혁명선언>을 작성한 신채호. 그의 생각은 이랬다. "사회주의에도 관심을 가져봤지만 역시 아나키즘이 조선독립과 미래를 위한 최선의 선택이다." 

 

이회영도 아나키스트였다. 그리고 무장투쟁의 적극 지지자였다. 새로운 무장 투쟁 조직을 만들려고 66살에 북간도로 떠났다. (그리고 대련에서 잡혀 뤼순 감옥에서 돌아가셨다.)

 

일본에는 1921년 11월 결성된 흑도회이름부터 어마무시하다가 있었다. 김약수, 박열, 김사국, 조봉암, 정태신 등이 망라된 조직으로 사회주의 인사들과 무정부주의 인사들의 연합체였다. 후에 사회주의 계열의 북성회와 아나키즘 계열의 흑우회로 갈라졌다.

 

흑우휘의 리더는 박열이었다. 영화 <박열>의 그 박열이다. 그의 시 <개새끼>에 매료되어 천생연분이 된 가네코 후미코. 감옥에서 찍은 두 사람의 다정한 사진은 정말 멋졌다.

 

 

 

# 4권. 1926~1930 학생 대중아 궐기하자

 

 

 

 

학생 대중아 궐기하자!

조선 민중아 궐기하자!

청년 대중아 죽음을 초월해 투쟁하자!

 

1929년 11월 9일 광주고보와 광주농업학교에서 학생들이 교문 밖으로 나오며 가두시위가 시작되었다. 학생들은 구호를 외치며 거리를 행진했다. 그리고 전국의 학생들이 동참했다. 광주학생운동은 3.1운동 이후 가장 큰 규모로 벌어진 항일 운동이다.

 

 

 

1. 광저우 코뮌

 

1910년 쑨원이 신해혁명으로 청조를 무너뜨리고 중화민국을 세웠으나 여전히 군벌의 힘은 막강했다. 1924년 국민당 제1회 전국대회에서 삼민주의를 건국이념으로 삼고 주요 강령들을 채택했다. 그 중 하나가 국공합작이었다. 북벌을 위해서 공산당과 손잡았다. 당시 베이징에선 돤치루이와 장쭤린이 실권을 잡고 있었다. 쑨원이 북벌의 기치를 높이자 그들은 쫄아서 쑨원에게 대화로 풀자고 했고 쑨원도 그런마 했다. 그렇게 북벌은 마무리되는 듯 했으나 쑨원은 1925년 역사의 장난처럼 숨을 거둔다.

 

그 뒤를 이은 장제스. 1928년에 북벌을 완수했지만 그 와중에 국공합작을 깨고 상하이에서부터 공산당을 잡아들이고 저항하는 자들을 학살했다(1927년 4월). 이에 분개한 공산주의자들이 "국민당 이 나쁜 시키들아, 제대로 한판 뜨자!" 한 것이 광저우 봉기였다. 성공해서 광저우 코뮌을 세웠다. 1927년 12월 11일에서 13일까지 딱 사흘 동안. 이후 국민당은 무자비하게 피의 복수를 했다. 죽은 공산주의자만 칠천 명에 달했다.

 

이 사건은 김산의 <아리랑>에 자세히 나와 있다. 김산은 광저우 봉기에 참여했고, 그가 국민당의 대학살에 분개하는 모습이 아주 사실적으로 나온다.

 

마오쩌둥은 잔여 병력을 이끌고 징강산으로 들어가 근거지를 구축하고 군대를 정비한다.

 

 

 

2. 국내 독립운동을 주도했던 조선공산당

 

 

1) 조선공산당 창당 (1925년 4월 15일)

 

조선공산당 창당은 박헌영, 김단야, 조봉암, 임원근 등의 화요회가 주도했다. 북풍회의 김약수, 상하이파의 유종건 등이 합류했다. 책임비서는 김재봉이 맡았다. 당시 조직 기반이 가장 튼튼했던 김사국의 서울파는 참여하지 않았다. 산하에 고려공산청년회가 결성되었고 박헌영이 책임비서가 되었다. 박헌영의 아내인 주세죽은 공청의 유일한 여성이었다.

 

조동호와 조봉암을 코민테른에 파견하여 승인을 요청하였으나 유보되었다. 모스크바 공산대학에 21명의 유학생을 파견했다. 하지만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너무 빨리 무너졌기 때문이다. 그해 11월 신의주에서 기밀문서가 발각되어 줄줄이 다 잡혀 들어갔다.

 

 

2) 2차 조선공산당

 

김재봉은 체포되기 전 화요파 강달영을 2대 책임비서로 지목했다. 강달영은 중앙집행위원으로 상하이파 김철수, 이봉수를 선정했다. 고려공청은 김단야의 요청으로 권오설이 책임비서를 맡았다.

 

하지만 창당 멤버 중 모스크바에 파견갔던 화요파 멤버들이 돌아오고, 최대 조직인 서울파도 발을 들여 2차 조선공산당 지도부와 서로 지지고 볶고 싸웠다.

 

그러던 와중에도 코민테른을 계속 졸라 1926년 3월 마침내 조선공산당이 코민테른 지부로 인정받는 쾌거를 이룬다. 1국 1당의 원칙에 따라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은 조선공산당 아래로 모이게 되었다.

 

이에 힘을 받아 책임비서 강달영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양 운동 세력를 통합하려고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이때 순종이 서거하자 장례일로 정해진 6월 10일을 기해 대규모 시위운동을 전개하기로 하고 권오설이 중책을 맡았다. 6.10 만세 운동은 성공적으로 전개되었지만 권오설을 비롯하여 강달영 책임비서 등 당원 수십 명이 검거되었고 조직 대부분이 붕괴되었다.

 

 

3) 3차 조선공산당

 

이동휘가 이끈 상하이파 고려공산당 중앙위원에 뽑혔던 김철수가 주도했다. 여러 군소 모임을 통합하여 엠엘파(레닌주의 동맹)을 만들었다. 최대 조직이자 계속 곁돌던 서울파와도 통합했다. 김철수에 이어 안광천이 책임비서를 이어받아 신간회 창립에도 힘을 보탰다.

 

서울파, 화요파, 엠엘파, 상하이파 등 모두 통합되어 제대로 굴러가는 듯 싶더니 또 자기네들끼리 싸웠다. 그러다 또 일망타진 당했다.

 

일본은 조선공산당이라면 눈에 불을 켜고 잡아들였다. 당원들은 혹독한 고문으로 감옥에서 죽든가 아니면 반병신이 되어 나왔다. 일본넘들은 왜 그랬을까? 무장투쟁과 게릴라 작전이 활발했던 해외와는 달리 국내의 독립운동은 바로 이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했기 때문이다.

 

 

4) 4차 조선공산당

 

책임비서는 차금봉. 그는 조공의 책임비서는 물론, 공산당 중앙간부들 중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노동자 출신이었다. 3.1운동 때는 수천 명의 노동자 시위를 지도하며 두각을 드러냈다. 이후 노동운동을 했다. 하지만 차금봉의 조선공산당도 오래가지 못하고 다 잡혔다. 1928년 무려 152명이 검찰에 송치되었다. 그렇게 조선공산당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차금봉은 고문에도 모르쇠로 일관했고 8개월 만에 고문 후유증으로 옥사했다.

 

그들이 이루고자 했던 것은 계급 혁명을 통한 조선의 독립이었다. 그토록 엄중한 일본의 압박 속에서도 시위와 만세 운동, 그리고 민중의 계몽을 기획하고 주도했다. 그들의 활동 자체가 독립운동이었고, 당원은 모두 독립운동가였다. 우리가 그들을 기억해야 할 이유다.

 

 

 

3. 12월 테제

 

1928년 코민테른이 한국 공산주의 운동에 내린 지침서다. 대략 이런 내용이다.

 

'조선 공산주의 운동의 위기는 적들의 탄압 뿐만 아니라 내부 파쟁에 의해 초래되었다. 지식인과 학생 위주로 이루어진 당은 건강한 볼셰비키당이 될 수 없다. 노동자와 농민 대중 속으로 들어가라. 민족주의자와 기회주의자들의 우유부단성의 폭로하라.'

 

아, 예리하구나 코민테른! 이제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은 각성하고 대중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이 지침은 신간회 해소 논쟁에 기름을 부었다.

 

 

 

4. 신간회

 

강달영이 이끈 2차 조공은 민족주의자들과 협동전선을 중시했고 그 과정에서 천도교 측과 접속하면서 나온 결실이 6.10만세운동이었다. 이에 김성수, 송진우, 이광수, 최린 등의 친일파들이 모임을 만들려고 하자 이에 격분한 홍명희가 안재홍, 신석우, 허헌 등과 함께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를 통합한 단체를 만들었다. 총독부의 허가도 받았다. 바로 신간회(1927~1931)다.

 

농민과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원했고, 학생들의 동맹휴학을 후원했다. 해외의 독립운동 단체를 지원했고 야학, 강연, 생활개선운동에도 앞장섰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을 지원했고, 이를 확산하기 위한 민중대회를 준비하다 허헌, 권동진, 조병옥, 홍명희, 김병로 등 44명이 잡혀들어갔다.

 

일제의 탄압이 계속되었으나 그럼에도 웬만한 일에 다 개입하여 지원하는 등 제 몫을 다 해냈다. 1931년 신간회의 활동을 보다 못한 일제가 강제 해산시켰다.

 

 

 

5. 6.10만세운동과 학생운동

 

1926년 4월 25일 순종이 세상이 떴다. 조선공산당은 천도교와 연대하여 만세운동을 준비했다. 격문이 노출되면서 조공 간부들이 다 체포되었고 검문이 삼엄했으나 이런 경계를 뚫고 학생들은 포기하지 않고 실행했다. 6월 10일 장례식 행진 때 수백 명의 학생들이 태극기를 들고 격문을 뿌리며 만세를 불렀다. 다 잡혀갈 걸 알고도 학생들은 진짜 용감했다. 210명의 학생이 체포되었다. 삼엄한 경계로 일반 시민들은 합세하지 못했다.

 

이후 전국의 학생들은 거리로 나갔다. 조선어 수업, 조선역사 교육, 군사교육 반대 등을 주장하며 동맹휴학으로 투쟁했다. 일제는 주도자들을 체포했고, 고문이 얼마나 혹독했던지 그 열혈 청년들이 옥사하거나 병신이 되었다. 이때 유명했던 고문 경찰이 노덕술이었다. 이런 넘이 제 명을 다하고 죽었다. 수치다. 

 

이 학생들의 운동은 곧 광주학생운동으로 전개된다.

 

 

 

6. 광주학생운동

 

발단은 광주중학교 일본 학생과 광주보통고등학교 조선 학생의 시비였다. 일대일로 싸움이 붙었고 곧 패싸움으로 번졌다. 1929년 11월 조선 학생들은 분노했고 마침내 거리로 나섰다. 학생들은 구속되었으며 구속 학생 석방 시위가 이어졌다.

 

광주 학생들의 시위는 연일 대서특필되어 전국적 관심사로 떠올랐다. 12월에 서울의 학생들이 연합하여 궐기했고 이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하루에 검거된 학생 수만 1,200명이었다. 신간회는 대규모 민중대회를 열기로 하고 준비하다가 중앙 간부들이 대거 검거되기도 했다.

 

 이제 학생들은 비밀결사나 외부 단체의 도움 없이 스스로의 역량으로 투쟁을 전개해나갔다.

 

 

 

7. 노동자들의 운동

 

1920년대가 되면서 노동자들은 크게 늘었다. 하지만 죽을 동 살 동 일해도 먹고 살기 힘들었다. 일본 자본가들이 다 가져가서 그렇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자연히 노동운동에 참여했다. 노동조합은 강연회, 토론회, 회보와 벽신문 등을 통해 노동자들에게 계급의식과 민족의식을 불어넣었다. 지휘부는 역시 조선공산당과 연계했다.

 

노동자들은 처우 개선을 요구했고 파업으로 맞섰다. 목포제유공장 파업 투쟁, 함경도 영흥의 흑연광산 파업 투쟁, 1929년 원산 노동자들의 연대 총파업, 1930년 부산 조선방직 노동자 파업 투쟁 등등. 역시 다 잡혀 들어갔다. 감옥은 괜찮나 몰라. 그렇게 다 잡아가면.

 

 

 

8. 강주룡의 고공농성

 

"나의 고향은 평북 강계입니다. 열 네 살까지는 집안이 걱정 없이 지냈으나 아버지의 실패로 가산을 탕진하여 내 나이 열 네 살에 서간도로 갔습니다. 거기서 농사하면서 7년 동안 살았는데 스무살 나든 해에 통화현에 있는 최전빈이라는 이에게 시집갔습니다. 남편은 그때 15살의 귀여운 도련님이었습니다. 나는 남편의 사랑을 받았다기 보다 남편을 사랑하였습니다. 첫눈에 아주 귀여운 사람, 사랑스런 사람이라는 인상을 얻었습니다. 부부의 의도 퍽 좋았습니다. 동리가 다 부러워하였답니다."

 

-1931년 강주룡의 인터뷰 기사

 

강주룡은 평양의 고무신 공장에 다녔는데, 1929년 경제 대공황으로 고무신 공장이 타격을 입자 공장측에서는 월급을 무지 깍아버렸다. 이에 여공들은 단식동맹을 맺고 농성을 벌였다. 강주룡은 을밀대 지붕위로 올라가 고공농성을 하며 연설했고 투쟁했다. 공장의 여공 2,300명을 대신하여 싸웠다.

 

체포되어 감옥에 갔고 감옥에서도 단식 투쟁으로 맞섰다. 감옥 생활과 잦은 단식 투쟁으로 쇠약해진 강주룡은 1932년 평양의 빈민굴에서 생을 마감했다. 인터뷰 기사를 보면 참 사랑스러운 여인인 것 같은데.

 

 

 

9. 이수흥, 유택수, 장진홍, 조명하

 

이수흥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했다. 국내로 들어와 군자금을 모집하려고 유택수와 함께 부호들과 전당포, 면사무소, 관공서 등을 털었다. 매번 이수흥을 놓친 경찰은 쪽팔려서 2,000여 명을 동원하여 검거에 나섰고 결국 붙잡았다. 사형 선고를 받았고 공소하지 않았다. 마치 사형당하기를 바란 사람처럼. 헌정 사상 사형 받고 공소하지 않은 이는 이수흥 외에 강우규, 허위가 있다. 유택수와 함께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당했다.

 

장진홍은 조선은행 대구지점, 식산은행, 경찰서에 폭탄을 배달시켰다. 일본으로 도피했으나 잡혔다. 재판 과정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재판장에게 의자를 던졌다. 대구 형무소에서 자결로 생을 마감했다. 향년 33세.

 

조명하는 황해도 출신으로 대만에 이주하여 살았다. 육군 대장 구니노미야가 대만에 오자 단도로 찔렀다. 이 일로 대만 총통은 사직해야 했고 구니노미야는 독이 퍼져 몇 달 위 죽었다. 조명하는 24살의 나이로 대만의 형무소에서 사형에 처해졌다.

 

 

 

10. 박용만과 김좌진의 죽음

 

박용만은 안창호, 이승만과 더불어 미국 내 한인 독립운동을 대표하던 인물로 무장투쟁을 주장했고 외교론을 앞세운 이승만과 대립했다. 1924년 비밀리에 입국해 총독을 만났고 반공주의자가 되었다.  

 

박용만은 1928년 10월 베이징에서 총에 맞아 죽었다. 총을 쏜 사람은 이해명, 신흥무관학교를 나온 의열단원이었다. 변절자를 처단한 것이다. 중국의 대다수 독립운동가들은 이해명을 지지했으나 미국의 안창호, 서재필 등은 박용만을 옹호했다. 변절 여부는 아직 논란거리다.

 

김좌진은 1930년 북만주에서 공산주의자 박상실의 총탄에 맞아 쓰러졌다. 향년 쉰 둘이었다. 김좌진은 자유시 참변으로 반공주의자가 되었고 주변에 많은 적을 만들었다. 무엇보다 휘하 무장대원들의 활동이 거칠었다. 군자금 모집은 강압적이었고 공산주의자들을 향한 테러 활동도 자주 일으켰다. 

 

어떤 이들에겐 여전히 영웅이었디만 또 다른 이들에겐 타도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11. 김사국과 박원희

 

김사국은 1920년대 조선 공산주의 운동의 최대 세력인 서울파의 리더였다. 해외파를 뺀 공산당 건설을 주장했다. 폐결핵으로 뜻을 제대로 펼치지도 못하고 1926년 세상을 떴다. 그의 동생 김사민도 노동운동을 하다 체포되어 반병신이 되어 풀려났다.

 

김사국의 아내 박원희도 여성 운동을 주도했다. 이 책에서는 여성운동가 원탑이라고 했다. 조선희의 소설 <세 여자>에서는 주로 화요파 인물들인 고명자, 주세죽, 허정숙, 그리고 조봉암의 아내인 김조이에 대해서 다뤘는데 이 책을 읽고 박원희에 대해 처음 알았다. 신간회의 자매단체로 당시 여성운동가들이 총 망라된 근우회를 조직하는데 힘썼다.

 

너무 많은 일을 하다 병을 얻어 31세를 일기로 1928년 남편 곁으로 갔다. 

 

 

# 5권. 1931~1935 만주침공과 새로운 무장투쟁

 

 

 

 

강보에 쌓인 두 병정에게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잔 술을 부어놓으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마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어머니의 교양으로 성공한 자로는

동서양 역사를 보건대 동양으로 문학자 맹자가 있고,

미국에 발명가 에디슨이 있다.

바라건데 너희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

너희들은 그 사람이 되어라

 

- 윤봉길 의사가 두 자녀에게 남긴 유서

 

 

 

1. 이시와라 간지와 일본의 만주 침공

 

이시와라 간지는 세계최종전쟁론을 주창하고 있었다. 유럽, 소련, 미국 그리고 일본이 준결승을 거쳐 최종적으로 일본이 미국과의 결승전에서 승리해 지구를 하나로 통일하고 진정한 세계평화를 이룩한다는 개미친, 하지만 일본은 열광한 이론이다. 미국과 전쟁을 하려면 자원이 풍부한 만주가 꼭 필요했다. 그래서 1931년 9월 펑톈(봉천) 인근의 류타오후의 만철선을 폭파하고 중국이 그랬다고 우겨 만주를 침공했고 만주국을 세웠다.

 

중국은 무저항으로 일관했다. 그 동네 대빵인 장쉐량은 자신의 군대가 약화되는 걸 우려해서, 장제스는 공산당 토벌이 먼저라고 생각해서 일본군의 침략에 대해 심각하게 반응하지 않았다.

 

 

 

2. 대장정

 

1931년 봄 장제스가 직접 군을 이끌고 공산당 섬멸에 나섰다. 일명 초공작전. 100만의 병력에 비행기, 전차까지 동원했다. 공산당은 저항했으나 도저히 적수가 되지 않았다. 1934년 10월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판단한 홍군 지휘부는 근거지인 장시성 루이진을 포기하고 장정에 나섰고, 1여년 만에 마침내 산시성에 도착해서 대장정이 끝났음을 선포했다.

 

하루 평균 1회의 전투, 368일간 12,500Km(하루 평균 34Km), 11개의 성을 지나면서 숱한 산과 물을 건넜고, 루딩교전투 등의 수많은 전설을 만들어냈다. 10만명이 출발해서 산시성 옌안에 도착했을 때는 6000명이 살아남았고 이들은 최정예 부대로 거듭났다.

 

대장정의 과정에서 마오쩌둥의 지도력은 공고해졌고, 지나온 곳마다 홍군과 공산당에 대한 지지가 뿌리를 내렸다.

 

 

 

3. 심훈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은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 칠 그날이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 끊기기 전에 와 주기만 할 양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위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메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 심훈의 <그날이 오면 중에서>

 

그 <상록수>의 심훈이다. 중학교 때 읽고 운 기억이 선명하다. 영신은 얼마나 매력적이던지. 위의 시도 교과서에 실렸단다. 시와 소설이 모두 교과서에 실린 이는 심훈과 이상 단 둘이라고.

 

박헌영과 절친이었다. 감옥에서 막 출소한 박헌영을 보고 <박군의 얼굴>이라는 시도 지었다. 1936년 서른여섯의 나이로 요절했다.

 

 

 

4. 김단야

 

1차 공산당 사건 때 검거를 피해 상하이로 망명했고 그 후 모스크바에서 3년 유학 후 코민테른에 의해 1929년 조선에 파견되어 공산당 재건 활동을 했다. 수사망이 좁혀오자 조직은 코민테른과 선이 닿는 김단야를 다시 해외로 피신시켰다. 상하이에서 코민테른의 지원 아래 다시 당재건에 나섰다.

 

모스크바로 돌아오라는 지시를 받은 김단야는 박헌영의 부인 주세죽을 설득해 함께 모스크바로 갔고 부부의 연을 맺었다. 소련에서 1938년 2월 일제의 밀정이라는 누명으로 총살당했다.

 

조선희의 소설 <세 여자>에서 아주 매력적인 인물로 나온다. 나는 단야에게 반했다.

 

 

 

5. 이재유

 

이재유는 4차 조공 탄압 사건 시 검거되어 3년 6개월 간 징역을 살았다. 감옥에서 김삼룡, 이성출, 이현상 등을 만나 깊이 교유했다. 1932년에 출옥하자 곧장 당재건운동에 뛰어들었다. 노동자, 농민, 학생들과 연대하여 파업과 동맹휴업을 주도했다. 잡히고 탈옥하고 숨고 변장하고를 반복했다. 경성제대 미야케 교수의 관사 다다미 아래에 토굴을 만들어 숨어 지낸 이야기는 전설이 되었다.

 

1936년 12월에 잡혀 1944년 10월 40세의 일기로 옥사했다. 1930년대 중반 이재유는 조선공산당 재건운동과 국내 독립운동의 마지막 희망 같은 존재였다.

 

 

 

6. 제주해녀투쟁

 

1920년 전후 시기에 제주 해녀의 수는 1만여 명에 달했다. 해녀들은 열심히 전복을 잡아 팔았지만 조합측에서 농간을 부려 제값을 쳐주지 않았다. 숱하게 이런 일을 당하자 1932년 1월, 해녀 300명이 하도리에서 시위행진을 벌였다.

 

이 시기엔 해녀들도 투쟁을 했다. 멋지시다. 80년이 지난 지금 우리가 이 분들보다 더 깨어있다고 장담할 수 없다.

 

 

 

7. 대전자령전투

 

1933년 7월 한국독립군 지청천 부대가 중국군 부대와 연합하여 북만주 대전자령에서 일본군을 대파한 전투다. 한국독립군 2,500명, 중국군 3,000명이 협곡 옆에 잠복했다가 철수하는 일본군을 전멸시키고 장갑차, 박격포, 기관총, 수류탄, 각종 지도와 비밀 서류, 1개 대대 1년치 식량 등 어마어마한 전리품을 획득했다. 봉오동전투, 청산리전투와 더불어 3대 대첩으로 평가받는다.

 

 

 

8. 남북 국립묘지에 묻힌 유일한 독립투사 양세봉

 

양세봉은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군 부대로 가장 오래, 가장 완강하게 싸워온 남만주의 조선혁명군 총사령이었다. 일관된 무장투쟁 노선을 견치했고 영릉가전투, 홍경현전투 등 빛나는 대일항전을 펼쳤다. 당시 남만주 독립군 사이에선 군신으로 불렸다.

 

1934년 밀정에 의해 아쉽게 생을 마감하고 조선혁명군도 자기 소명을 다했다.

 

사후 김일성은 그의 가족들을 평양헤서 살게 했다고 한다. 국립현충원에 양세봉의 허묘가 있고 평양 애국열사릉에도 그의 묘비가 있다.

 

 

 

9. 반민생단 투쟁과 김일성

 

1932년 11부터 1936년 2월까지 , 3년 4개월 동안 중국 간도 일부 지역에서 중국 공산당이 친일 단체인 민생단과 관련된 혐의로 조선인 공산당원을 숙청하는 과정에서 무고한 조선인들을 체포, 살해했다. 민생단 사건으로 희생된 간도의 조선인은 2,000명에 달했다. 1920년대 독립운동사의 최대 비극이 자유시참변이라면 1930년대에는 반민생단 투쟁이다.

 

동북항일연구 제2군 제3사장을 맡은 김일성은 민생단 혐의자 100여 명에게 무죄를 선언하고 전원 자신의 부대로 받아들였다. 그가 반민생단 투쟁에서 살아남은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으며, 죽음을 피할 수 없던 민생단의 올가미를 번번히 피해나갈 수 있었던 원인은 기존의 파벌과 무관한 전력, 그리고 유창한 중국어와 특유의 친화력 덕이었다.

 

김일성의 독립운동 활동에 대해 이 책에서는 비교적 자세하게 다루었다. 김일성은 독립투쟁사에서 나름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독립운동가 김일성은 이렇게 높이 평가받아야 마땅하다고 작가는 주장하는 것 같다. 나도 동감이다.

 

 

 

10. 김구와 한인애국단, 그리고 이봉창과 윤봉길

 

내가 생각하는 김구 선생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임시정부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냈다는 점이다. 임시정부가 없어지려고 할 때마다 그는 임정을 품에 안고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독립운동의 방향에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김구는 오직 임시정부가 주도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수립부터 환국까지 임시정부의 법통을 지켰다. 1926년에서 27년까지 임시정부 국무령에 올랐고, 1940년에서 47년까지 임시정부 주석을 지냈다.

 

1931년 김구는 한인애국단이라는 비밀특무대를 만들었다. 최초 가입자는 이봉창이었다. 그 뒤를 이어 윤봉길이 가입했다. 1932년 1월 이봉창은 일본 천황이 타고 있는 마차에 폭탄을 던졌고, 4월에는 윤봉길이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일본의 아주 높은 넘들에게 물통 폭탄을 던졌다.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로 김구는 독립운동 진영 내에 비로소 자신의 이름을 묵직하게 알렸다고 저자는 썼다. 내 생각도 그렇다. 이제서야 김원봉, 안창호와 어깨를 나란히....

 

 

 

11. 민족혁명당과 김원봉, 그리고 김구

 

1932년 김원봉은 난징에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세웠다. 한중합작으로 반일 투쟁을 제대로 해보자고 장세스에게 제안했고 윤봉길 의거에 감명을 받은 장제스는 이를 수락했다. 1933년부터 125명이 이 학교를 나왔다. 이들은 김원봉과 의열단의 든든한 기반이 되어주었다.

 

여기에 자극을 받은 김구는 역시 장제스의 도움으로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뤄양 분교에 한인특별반을 마련하고 지청천이 합류해 총교도관을 맡았다. 하지만 모든 권한을 김구가 틀어쥐고 있는데 불만을 가진 지청천이 따로 한국군인회를 조직해서 나가버렸다.

 

한편 여러 독립운동가들은 강력한 단일 동맹체의 필요성을 느꼈고, 임정을 포한 모든 단체를 해소하고 하나의 조직으로 묶고자 했다. 여기에 가장 적극적인 사람은 역시 김원봉이었다. 김원봉은 직접 김구를 만나 설득했다. 하지만 김구는 임시정부의 강력한 지킴이였다.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모든 조직이 통합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당시 김구는 이미 반공주의자였다. 붉은 색채가 가득한 김원봉을 믿지 못했고, 대통합단체인 민족혁명당이 만들어지면과 김원봉의 뜻대로 굴러갈테고 임시정부가 그 밑으로 들어가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결국 김구의 임시정부를 제외한 나머지 세력인 한국독립당, 신한독립당, 의열단 등 9개 단체 38명이 모여 민족혁명당을 창당했다(1935년 7월). 서기장은 김원봉이 맡았고 김두봉, 최동오, 지청천, 김규식, 윤기섭 등이 주요 직책을 맡았다. 요전에 읽었던 김영범의 <의열단 민족혁명당 조선의용대의 영혼 윤세주>에서 윤세주가 민족혁명당의 창당 과정에서 핵심 역할을 했더랬다.

 

민족혁명당 창당을 주도하고 서기장에 선출된 김원봉은 명망에서나 영향력에서 이 시기 중국 내 독립운동가들 중 가장 우뚝한 위상을 차지하게 되었다.

 

 

 

12. 윤희순과 남자현

 

정용연 작가의 <의병장 희순>이라는 책에서 윤희순을 처음 알았다. 이런 독립운동가를 모르고 있었다는 부끄러움과 이제 알게 되어 다행이라는 안도감, 그리고 새로운 인물의 일생을 보는 즐거움을 주는 책이었다.

 

박시백 작가도 윤희순과 남자현에 대해 언급했다. 남자현은 서로군정서에서 활동했고, 국제연맹에 혈서를 보냈으며, 일본전권대사를 암살하려 했다. 영화 <암살>에 등장하는 안윤옥의 실제 모델이 바로 남자현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