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경험했던 비극과 실패는 나를 강하게 만들어주었어요 : 박건웅 <아리랑>
류링 : 똑똑
김산 : (앗, 그녀다.)
김산 : 아이고, 기어코 찾아내고야 말았군.
류링 : 후후. 왜, 안 돼요?
류링 : 당신의 부치지 않은 편지를 받은걸요.
김산 : 당신은 마술사군. 쿨럭~
류링 : 우리에 갇힌 짐승처럼 왔다갔다 하지 마세요.
김산 : (안절부절)
류링 : 나는 보기보다 그다지 무섭지 않아요.
김산 : 어찌하면 좋겠소?
류링 :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당신도 알고 있어요.
김산 : .....
류링 : 안 그런 체 해봐야 아무 소용없어요. 나는 나 자신 만큼이나 당신에 대해서 알고 있어요.
김산 : 아아아.
베이징의 공산당 사무실에서 만난 류링이란 아가씨가 김산을 좋아합니다. 대놓고 고백도 합니다. 김산은 애써 뿌리칩니다. 연애가 혁명 활동에 방해가 된다면서요. 류링은 이런 김산의 모습에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가까이 다가갑니다. 그러던 중 김산이 숨어 있는 아지트에 류링이 찾아갑니다. "부치지 않은 당신의 편지를 받았어요." 하아! 이런 대사를 던지며 대시하는 여인 앞에서 넘어가지 않을 남자가 있을까요. 결국 김산은 류링과 사랑에 빠집니다. 어둡고 힘든 김산의 일대기 중 가장 밝은 한 때가 여깁니다.
저의 큰 녀석 이름이 김산입니다. 대학 시절 님 웨일즈의 <아리랑>을 읽었습니다. 완전 무결한 혁명가의 모습에 반했습니다. 그래서 만약 아들이 생긴다면 이름을 '김산'으로 짓겠다는 순진한 생각을 했더랬습니다. 근데 아들이 생겼고 이름을 김산으로 지었습니다. 고3인 아들 녀석은 자기 이름에 만족스러워 합니다.
<아리랑>은 산이가 태어나고 다시 읽었고, 최근에 한번 더 읽었습니다. 사실 앞에 읽은 건 다 까먹어서 읽을 때마다 새롭습니다. 최근에 읽은 김산은 더욱 매력적이었습니다. 매번 생각하는 거지만 '님 웨일즈'가 참 고맙습니다. 김산이 님 웨일즈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김산의 일대기는 아마도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겁니다. 그랬다면 큰넘은 다른 이름이 되었겠죠. 님 웨일즈는 김산의 구술을 최대한 살려서 책으로 만들어 내었고, 수많은 김산의 후예들이 그의 책을 읽고 있습니다. 저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의 본보기가 될 만한 혁명가를 님 웨일즈가 살려낸 겁니다.
이번에 박건우 화백이 만화책으로 <아리랑>을 펴냈습니다. 물론 원작은 님 웨일즈의 책입니다. 박건우 화백의 책은 믿고 봅니다. 빨치산 이야기인 <꽃>, 노근리 양민 학살을 그린 <노근리 이야기>, 김근태 의장을 다룬 <짐승의 시간> 등 그의 전작을 보면 박화백의 내공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동네 책방에서 우연히 이 책을 만났고, 얼른 가져왔습니다.
위의 사진은 1930년 베이징에서 잡혀 일본 측에 넘겨질 때 찍은 사진입니다. 김산이 스물다섯 살 때입니다. 진짜 잘 생겼지요. 저 눈매 한번 봐 보세요. 체포되어 한 치 앞 날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어찌 저리 초연하게 사진을 찍었을까요? 살짝 미소도 머금었습니다. 사진관에서 자신의 절정기를 찍은 사진 같습니다. 아마도 나중에 이 사진이 널리 퍼질 줄 알았던 게 아닐까요? 류링은 틀림없이 김산의 이 모습에 홀딱 반했겠지요. 이런 김산을 박건웅 화백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이 정도면 싱크로율 거의 백퍼 아닌가요. 박건웅 화백의 표현력에 놀랐습니다. 책의 첫 장을 넘기면 아래 그림이 나옵니다. 김산이 생의 마지막 시절을 보낸 옌안의 밤 하늘입니다.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선이 굵은 판화 작품을 보는 듯 합니다. 원작과는 달리 이 책은 요런 표현의 맛이 있습니다.
열다섯의 나이에 혼자 압록강을 건너 만주의 신흥무관학교로 찾아가는 장면도 자세히 묘사되어 있었습니다. 나이가 너무 어려 입학이 안된다는 걸 울면서 땡깡을 부려 겨우 입학하게 되고, 그렇게 신흥무관학교 최소 입학생, 졸업생이 되었습니다. 중국 공산당이 국민당의 탄압에 발끈해서 광저우에서 봉기를 일으켜 자치지구를 만들려 했던 광둥코뮌과 거기서 패한 이들이 하이펑, 루펑으로 가서 죽을 고비를 넘기는 장면도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었습니다.
김산이 옌안의 군정학교에 있을 때, 그의 가장 절친이자 동지인 오성륜이 김산에게 만주로 와서 함께 일본군과 싸우자는 편지를 몇 차례 보냈습니다. 역사에 만약이라는 말은 없지만, 김산이 좀 더 이르게 준비를 해서 오성륜 쪽으로 합류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강하게 남았습니다. 그랬다면 밀정의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처형되지는 않았을텐데요.
김산의 행적이 일목요연하게 나와 있고, 사건의 디테일이 살아 있습니다. 류링, 김충창, 오성륜을 비롯한 그의 주변 인물들의 캐릭터도 선명하게 드러나 있어서 읽는 맛이 났습니다. 박건웅 화백 특유의 그림체가 주는 강렬함과 서정성이 김산의 격렬하고 슬픈 스토리와 잘 어울려 보는 맛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김산이 믿는 이념이 조금씩 바뀌어 가는 계기와 그 과정, 중국 혁명이 가지는 의미, 그의 내면이 점점 단단해지고 성숙해 가는 과정 등은 아무래도 그림으로 표현하는 게 한계가 있어서 원작이 좀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내 전 생애는 실패의 연속이었어요. 우리나라의 역사도 실패의 역사였지요. 나는 단 하나에 대해서만, 내 자신에 대하여 승리했을 뿐이오. 그렇지만 계속 전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는 데는 이 작은 승리만으로도 충분해요. 다행스럽게도 내가 경험했던 비극과 실패는 나를 파멸시킨 것이 아니라 강하게 만들어주었어요. (p.506)
김산은 투쟁을 하다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깁니다. 목숨을 건 투쟁의 과정도 대단하지만, 그런 시련의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을 내면을 단단하게 다집니다. 실패와 비극을 통해 성숙한 인간으로 변모합니다. 자신을 벼리고 벼려 완전 무결한 혁명가가 됩니다. 제가 혁명가 김산에게 반한 이유입니다. 제가 되고자 하는 이상형의 인간입니다.
만화로 된 김산을 만나니 즐겁습니다. 이런 인물들을 만나는 건 언제나 설레는 일입니다. 원작을 이렇게 읽을 맛이 나는 만화로 만드신 박건웅 화백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참고로, 아래 링크는 예전에 썼던 이 책의 원작, 님 웨일즈의 <아리랑> 독후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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